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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화 (45/145)

45화

[연지곤지]

“설마 또 따로 드시게요?”

“……어.”

“아니, 언제는 삼일 밤을 내리 새우고도 비 전하와 식사해야겠다며 기어서 3황자궁으로 돌아오시더니. 이제는 나서서 피해 다니십니까? 대체 왜요?”

“…….”

“제 평화롭고 완벽한 식사에 주군이라는 오점이 끼어드는 일을 더는 참을 수 없습니다. 하다못해 이유라도 말씀을 해 주셔야 해결책을 강구…….”

똑똑.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전하, 안에 계세요?”

“늑대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패트, 잠깐…….”

파트라슈가 헛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케이든이 다급하게 그를 말리려 했으나 그는 바람처럼 움직여 집무실의 문을 활짝 열었다.

“어서 오십시오, 비 전하.”

“아, 레밋 경.”

디아나가 문 너머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문 앞에 서 있는 파트라슈를 발견하고는 반가이 미소 지었다.

“이제는 그냥 패트라고 편하게 불러 주셔도 됩니다. 주군과 식사하러 오신 겁니까?”

“네. 혹시 오늘도 속이 안 좋거나 하신 건 아니죠?”

“아주 멀쩡하십니다.”

디아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묻자 파트라슈가 단호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에 디아나가 밝아진 낯으로 케이든에게 말을 걸었다.

“다행이네요. 그럼 식사를 같이…….”

그러나 디아나가 입을 여는 것과 동시에, 다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난 케이든이 파트라슈의 어깨를 한 팔로 휘감고 눈을 굴렸다.

“아, 그게. 미안. 오늘 점심은 투도크 백작과 함께하기로 해서. 패트도 함께 갈 거야.”

“캑, 예? 그게 무슨, 그 작자와 식사했다가는 귀가 헐겠다고 하셨던 분이……! 커헉!”

“요즘 약속이 너무 많아서 그런가, 패트가 헷갈린 모양이야. 식사 잘 챙기고, 나중에 봐.”

케이든은 황당하게 목소리를 높이며 버둥대는 파트라슈를 질질 끌다시피 하여 집무실을 벗어났다.

그 바람에 순식간에 홀로 남겨진 디아나는 잠시 당혹감에 눈을 깜박였다가, 곧 미간을 설핏 찌푸렸다.

‘또.’

축하연이 끝난 이후. 케이든은 기묘하게 디아나를 피해 다녔다.

물론 최근 들어 케이든을 찾는 귀족들이 많아진 것은 사실이었다.

그는 레베카 다음으로 유력한 황위 계승 후보가 되었고, 차기 황제가 될지도 모르는 황자와 연줄을 쌓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널리고 널렸으므로.

그에 맞추어 디아나 또한 의욕을 불태웠다.

‘혹시 내가 곁에 없을 때, 누군가를 만나다가 발작이 일어나면 곤란할 테니까.’

케이든의 마력이 불안하게 일렁일 때 그와 접촉하면 그의 마력이 잠잠해진다는 것은 진작 확인을 마쳤다.

그 증거로 케이든은 결혼식 첫날을 제외하면 아직 한 번도 발작을 일으킨 적이 없었다.

하지만 디아나가 언제나 케이든의 옆에 붙어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1년 후 이혼을 약속한 상태였다.

그래서 디아나는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케이든과의 접촉을 늘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접촉이 늘어날수록 케이든의 마력이 빠르게 안정될 가능성도 커질 테니, 되도록 1년이 되기 전까지 그의 마력 발작을 완전히 낫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디아나는 전보다 적극적으로 케이든을 찾았다.

하지만…….

[그대가 할 말이 있다고 했으면 늦게라도 돌아갔을 거야.]

케이든은 그렇게 말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축하연 전에는 반드시 함께했던 식사조차 거르기 일쑤였다.

[아, 오늘은 훈련이 늦게 끝날 것 같은데.]

[약속이 있어.]

[전부터 패트와 대련하기로 약속했던 것이 있어서, 오늘은…….]

케이든은 누가 보아도 어색한 태도로 변명을 늘어놓으며 황급히 사라지곤 했다.

처음에는 그저 기우인가 싶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반드시 얼굴을 맞대야 하는 일이 있는 날의 케이든은 평소와 다름없이 다정하고, 잘 웃었다.

하지만 ‘꼭 필요한’ 일이 없을 때면 그는 어김없이 그녀를 피했다.

이런 일이 벌써 일주일 넘게 반복되니 디아나도 모를 수가 없었다.

‘대체 왜 저러시는 거지?’

디아나는 조금 초조한 심정이었다.

하루라도 빨리 케이든의 몸 상태를 안정시켜야 하는데, 행여 그가 자신이 없는 사이 발작을 일으킬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디아나는 손에 든 바구니를 잠자코 응시하며 한숨을 삼켰다.

최근 케이든이 속이 불편하며 자리를 피하기에 혹시 싶어 부드러운 요깃거리를 좀 챙겨 왔는데, 헛수고였다.

그녀는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몸을 돌려 집무실을 나섰다.

“오늘 식사도 황후궁에 신세를 져야 하나. 최근에 너무 자주 찾아뵌 것 같아서 죄송한데…….”

시무룩한 중얼거림이 허공에 울려 퍼졌다. 디아나는 쓸쓸하게 바구니를 챙겨 들고 3황자궁을 나섰다.

“……하아.”

한편, 모퉁이 너머에 몸을 숨기고 그 모습을 바라보던 케이든의 입에서도 뒤늦게 무거운 한숨이 터져 나왔다.

격렬하게 발버둥 친 끝에 케이든의 악력에서 벗어난 파트라슈가 경멸하는 눈빛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그렇게 한숨이나 푹푹 쉬실 거면서 대체! 왜! 비 전하를 피하시는 겁니까! 졸지에 두 분 사이에 끼어서 고통받는 제가 불쌍하지도 않으십니까!”

파트라슈가 길길이 날뛰었다.

하지만 케이든은 그런 그를 익숙하게 무시하며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보기 드물게 수려한 얼굴에 심란한 기색이 드러났다.

‘디아나도 슬슬 내가 일부러 자리를 피한다는 걸 눈치챘겠지. 이렇게 막무가내로 피해 다니는 것도 한계가 있는데…….’

케이든은 또다시 땅이 꺼져라 한숨을 뱉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어떻게든 디아나에 대한 마음을 접어 보려 그녀를 최대한 피해 다니고 있는데.

그러자 외려 디아나가 상처받지는 않았을까 걱정하고 죄책감에 시달리느라 온종일 머릿속에서 디아나에 관한 생각을 지우지 못했다.

그렇다고 전처럼 꼬박꼬박 디아나와 식사를 하고 얼굴을 맞대자니, 도저히 그녀에 대한 마음을 갈무리할 자신이 없었다.

케이든은 스스로가 한심해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파트라슈가 움찔하며 뒷걸음질 쳤다.

“저, 저는 혼자 식사하러 갈 겁니다. 주군께서는 비 전하와 드시든지, 혼자 드시든지 알아서 하십시오! 저는 갈 겁니다!”

파트라슈는 빠르게 말을 쏟아 낸 후 재빨리 줄행랑쳤다.

그가 정령의 힘까지 동원하여 도망치는 모습을 본 케이든이 황당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저러라고 가르쳐 놓은 활용법이 아닐 텐데. 자꾸 도망가는 실력만 늘고 있으니, 이거 원.”

……하긴, 그 역시 남 말할 처지가 아니긴 했다.

케이든은 파트라슈가 돌아올 때까지 어디서 시간을 보내야 하나 고민에 잠겼다.

홀로 식사를 하러 가자니, 최근 속이 불편하다는 말이 완전히 거짓은 아니었기에 염려스러웠다.

연무장은…… 이미 새벽부터 몇 시간 동안 땀을 흘린 뒤 몸을 씻은 터라 아직 내키지 않았고.

난감해하던 케이든은 퍼뜩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고 보니, 디아나가 황궁에 온 이후로 한 번이라도 옷을 사들인 적이 있던가?’

봄이 절정에 다다르는 5월.

발하나스 제국의 수도에서는 어린 영식과 영애들이 사교계에 첫발을 내딛는 데뷔탕트를 시작으로, 약 두 달간 사교 행사를 눈에 띄게 활발히 진행하는데, 이때를 ‘사교 시즌’이라고 불렀다.

사교 시즌을 주로 이끄는 것은 황족, 혹은 사교계에서 대단한 명성을 지닌 귀족들이었다.

디아나 역시 최근 사람들 사이에서 케이든의 입지가 확실해진 만큼 주목받는 황족 중 하나였다.

그 말은 곧 디아나 또한 나서서 모임을 이끌어야 하는 위치가 되었다는 뜻이었다.

사교계에서의 입지는 그 사람의 차림새와 행동거지, 화법 등으로 결정된다.

개중에서도 가장 기본적으로 여겨지는 것이 차림새였다.

하지만 그녀는 케이든과 혼담이 오가기 전에는 가문 내에서 천대받던 사생아였으며, 그와 결혼해 황궁으로 들어올 때도 서즈필드 자작의 지참금을 제외하면 이렇다 할 짐을 들고 오지 않았다.

기억을 더 뒤져 보니 그녀의 옷은 늘 보석 하나 없이 수수했던 것만 같아 마음이 좋지 않았다.

‘물론 그때는 서즈필드 자작이 나를 지원하고 있다는 티를 내면 안 되니까 그랬다지만. 최근에는 여유도 생겼으니까, 재단사를 황궁으로 부르거나 해도 되긴 할 텐데…… 디아나는 왠지 내키지 않아 할 것 같단 말이지.’

한번 생각이 디아나의 옷 쪽으로 쏠리니 다른 것을 생각해 내기가 어려웠다.

결국 케이든은 디아나에게 미안한 마음을 전할 겸, 그녀에게 선물할 옷을 사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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