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3화 (33/145)

33화

케이든은 디아나의 손을 한번 꾹 쥐었다가 놓은 후, 그녀를 관중석으로 보내고 본인은 연무장 중앙으로 향했다.

그러자 먼저 도착해 몸을 풀고 있던 레베카와 페란트, 카를롯타가 그를 돌아보았다.

금장식을 더한 화려한 경갑 차림의 페란트가 인사를 건네기보다 입매를 뒤틀었다.

“길거리의 용병도 그보다는 나은 걸 입을 거다. 기껏 서즈필드의 딸과 결혼한 게 무색할 정도로 초라한 차림이로군.”

저급하기 짝이 없는 모욕이었다.

케이든은 페란트가 일부러 자신을 도발하는 것을 알았기에 묵묵히 몸을 푸는 데 집중했다.

괜히 경기 전에 소란을 일으켜 봤자 힘만 빠질 테고, 좋을 건 없었으니까.

뒤이어 페란트가 덧붙인 말만 아니었다면 분명 그랬을 것이다.

“뭐, 사생아라니 당연하겠지만.”

그 말을 들은 케이든이 우뚝 움직임을 멈췄다. 그가 소리 없이 이를 갈았다.

저를 모욕하는 것은 괜찮았다.

저 정도는 지난 이십오 년 동안 일상적으로 견뎌 온 조롱에 불과했다.

하지만, 디아나는 아니다.

디아나는 감히 저들이 입에 올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케이든은 결국 페란트의 말을 무시하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매번 저택 한 채 값을 몸에 걸치고도 순위권에 들지 못하는 놈이 말만 많군.”

“뭐?”

케이든의 예상대로 페란트는 대번에 이를 드러냈다.

이조차도 조금 전 페란트가 입 밖에 내뱉은 모욕에 비하면 새 발의 피일진대.

고작 이 정도 도발을 흘려 넘기지 못하다니, 어지간히 멍청한 것이 아니었다.

케이든이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틀린 말은 아니지 않습니까, 형님. 작년에도 기합만 우렁찼지, 출전한 지 1분 만에 탈락하셨으면서.”

“이 새끼가…….”

대놓은 비아냥거림에 이성을 잃은 페란트가 그에게 달려들려는 찰나.

카를롯타가 기겁하며 페란트의 뒤통수를 세게 내리쳤다.

퍽!

“윽……! 너 미쳤냐?”

“오빠야말로 미쳤어? 언니가 도발하랬지 언제 도발에 넘어가라고 했냐고!”

“헙.”

페란트는 뒤통수를 얻어맞자 대번에 눈을 부라리며 카를롯타에게 으르렁댔다.

하지만 그녀의 다급한 속삭임에 뒤늦게나마 이성을 차리곤 제 입을 틀어막았다.

페란트가 불안하게 눈을 굴려 등 뒤의 레베카를 살폈다.

레베카는 웃고 있었다. 그녀가 상냥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러니, 란트?”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레베카가 단단히 화났음을 눈치챈 페란트가 어깨를 떨었다.

‘……등신 같은 놈.’

케이든은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혀를 쯧쯧 찼다.

그러다가 레베카와 시선이 마주치자 보란 듯 웃어 보였다.

‘다음부터는 조금 더 똑똑한 자를 이용하는 게 어떠십니까, 누님.’

그러한 뜻을 담은 웃음에 레베카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찔했다.

그때 타이밍 좋게 연무장 전체에 커다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곧 경기를 시작하겠습니다! 대진표를 짜야 하니 참가자들께서는 이쪽으로 모여 주십시오.”

케이든은 마도구를 타고 울려 퍼지는 안내를 듣는 즉시, 미련 없이 레베카 무리를 등지고 제비뽑기를 하는 쪽으로 향했다.

페란트는 그의 모습이 멀어지자마자 재빨리 양손을 모아 쥐고 웃었다.

“저, 누님.”

“…….”

“그게…… 많이 화나셨습니까? 죄송합니다, 저놈이 누님께서 주신 선물을 두고 비아냥대길래…….”

“페란트.”

차가운 목소리가 비굴한 변명을 잘라 냈다.

페란트는 제 목덜미에 칼날이 닿아 오는 듯한 느낌에 황급히 숨을 멈췄다.

레베카가 발을 떼어 페란트의 앞으로 다가섰다. 그녀가 페란트의 관자놀이를 검지로 툭툭 두드렸다.

“스스로 나를 도울 만큼의 머리가 되지 않는다면.”

“…….”

“시키는 일이라도 제대로 해야 할 것 아니니.”

“윽……!”

다음 순간. 레베카가 페란트의 볼을 손으로 지그시 짓눌렀다.

페란트의 볼이 엉망으로 짓눌리며 그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연한 살에 손톱이 파고들자 아릿한 통증이 일었다.

레베카는 지독하게 무감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며 나직이 읊조렸다.

“2황비께서는 매일같이 통곡하시겠군. 한 명은 멍청하게 근신을 명받지 않나, 또 한 명은 눈에 빤히 보이는 도발도 구분하지 못하질 않나.”

“…….”

“기껏 있는 자식들이라는 게 하나같이 이렇게 멍청해서야.”

“윽……!”

레베카가 정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페란트의 머리를 홱 밀쳐 냈다.

그 바람에 중심을 잡지 못한 페란트가 휘청거리다가 쿵, 소리를 내며 엉덩방아를 찧었다.

레베카는 그런 페란트에게 시선조차 주지 않으며 그의 곁을 냉랭히 스쳐 지나갔다.

카를롯타는 페란트와 레베카를 번갈아 바라보며 눈치를 보다가, 제 오라비를 내버려 두고 황급히 레베카를 따라갔다.

“저, 언니!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한편, 홀로 남겨진 페란트는 분노와 수치심에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실수 한번 한 것으로 이렇게까지 내게 모욕을 주셔야 했나?’

애초에 페란트와 카를롯타의 존재는 레베카를 위해 준비된 것이었다.

그들의 어머니, 2황비가 오직 레베카에게 도움이 되고자 술에 취한 황제를 유혹해 낳은 아이들.

하여 처음부터 그들의 삶은 그들의 것이 아니었다. 레베카를 위한 것이었다.

그 사실에 달리 불만을 품어 본 적은 없었다.

태양이 동쪽에서 뜨고 서쪽으로 진다고 배우듯, 태어났을 때부터 레베카가 그들의 주인이라고 가르침을 받았으니.

하지만 이렇듯 레베카가 그들을 경멸하는 마음을 드러낼 때마다 심히 모욕감이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페란트는 바닥을 짚고 있던 두 손을 핏줄이 도드라질 정도로 세게 말아 쥐었다.

“…….”

관람석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디아나의 입가에 조용한 미소가 떠올랐다.

* * *

“그럼 지금부터 개인전을 시작하겠습니다!”

개인전의 규칙은 단순했다.

무기나 방어구의 제한도, 싸움 방식의 제한도 없는 오직 순수한 일대일 대결.

상대가 어떤 수를 쓰든 이기는 것이 진정한 승리라는 초대 황제의 말 때문이었다.

물론 개인전보다는 이 뒤에 있을 방어전이 모의 전투의 핵심이었기에, 개인전에서까지 전력을 다하는 기사는 많지 않았다.

케이든과 레베카, 두 사람을 제외한다면.

“역시 이번에도 케이든 전하와 1황녀 전하께서 결승에 오르시려나……?”

“아무래도 그렇겠죠.”

디아나 곁의 관람석에 앉은 플뢰르와 엘리엇이 조용히 말을 주고받았다.

디아나는 마도구로 하늘에 띄워진 대진표를 바라보았다.

다행히 케이든과 레베카는 각각 1조와 4조에 속해 있었다.

안타르는 방어전을 위해 아껴 둔 비장의 한 수였기에 개인전에는 출전하지 않았다.

‘결승전에서 만나겠네.’

대진표에 사용되는 제비는 마도구였기 때문에, 달리 조작할 방도가 없었다.

하지만 다행히 케이든과 레베카가 각기 다른 조로 흩어진 덕에 그들은 큰 무리 없이 결승에서 만날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케이든이 이길 테고.’

케이든이 모의 전투에 참가하기 시작한 이후로, 개인전의 1위는 언제나 그였다.

케이든은 빛 속성의 상급 정령사, 레베카는 불 속성의 상급 정령사.

하지만 같은 상급 정령사라 할지라도 지닌 마력에 따라 그 위력이 달라진다.

케이든은 정령왕과의 계약을 넘볼 수 있다고 평가받을 정도로 압도적인 양의 마력을 타고난 데다가, 어릴 때부터 암살의 위협을 겪으며 무수히 많은 실전을 치렀기에 전투 감각도 발달해 있었다.

그래서 레베카는 개인전에서 언제나 케이든에게 패배하곤 했다.

어찌 보면 케이든을 죽이려던 시도가 외려 그를 더욱 강하게 만들어 주었으니 업보라고 볼 수도 있었다.

케이든이 개인전에서 우승하는 것은 거의 기정사실이 되다시피 했으나, 레베카와 결승전에서 만나 극적으로 승리하는 것이 사람들의 기억에 남기는 더 좋았다.

개인전에서의 승리로 사람들의 머릿속에 파고들 틈을 만들어 낸 뒤, 방어전에서의 승리로 쐐기를 박는 거다.

케이든 세이릭 블루벨은 끈 떨어진 연이 아니라, 레베카 듄 블루벨에 버금가는 황재(皇才)라고.

‘페란트와 카를롯타는 또 1회 만에 탈락하겠지.’

디아나는 조금 따분한 기분으로 턱을 괴고 경기를 지켜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페란트와 카를롯타를 상대한 기사들은 그들이 황족이라는 사실 탓에 소극적으로 공격에 임했으나, 남매는 그조차 버티지 못하고 순식간에 탈락했다.

“시작!”

다른 이들의 경기와 달리 케이든과 레베카의 경기는 1분 이내로 결판이 났다.

그들이 워낙 압도적인 실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덕분이라고 해야 할지 기다림은 짧았다. 개인전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결승전을 치를 차례가 되었다.

“선수, 앞으로!”

엄중한 목소리가 케이든과 레베카에게 경기장에 올라설 것을 종용했다.

그들은 연무장 가운데 설치된 경기장 위에 발을 디뎠다.

그리고 무표정한 얼굴로 짧게 손을 맞잡아 흔들었다.

“우리의 신 틸리아의 이름 아래에, 부디 공정하고 명예로운 경기가 되기를.”

케이든과 레베카는 심판의 말이 끝나자마자 서로의 손을 놓고 뒤로 물러났다.

두 사람의 손 안에 각각 황금빛, 흰빛의 검이 피어났다.

그들이 정령의 힘으로 만들어 낸 검을 잡아채는 순간.

“시작!”

경기의 시작을 알리는 음성이 울려 퍼짐과 동시에, 두 사람이 땅을 박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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