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시작!”
경기의 시작을 알리는 음성이 울려 퍼짐과 동시에, 두 사람이 땅을 박찼다.
금빛 검과 흰빛 검이 쾅! 소리를 내며 맞부딪쳤다.
먼저 맞닿은 검을 밀쳐 낸 레베카가 날카롭게 외쳤다.
“이그니스!”
삐이이익!
레베카의 부름에, 불꽃 같은 깃털을 드리운 흰 매가 긴 울음소리를 토해 내며 허공에 모습을 드러냈다.
케이든은 그에 적잖이 놀랐다.
본래 레베카는 타고난 마력의 양이 썩 많지는 않았기에 정령을 직접 불러내는 일을 꺼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곧 레베카가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행동을 한 이유를 알게 되었다.
레베카의 귀걸이, 갑옷의 장식들.
이런 사소한 것 하나하나가 전부 오페라 다이아몬드였다.
‘많이도 줬군.’
서즈필드 자작이 지원한 것이 분명해 보이는 모습에 케이든이 속으로 혀를 쯧 찼다.
그도 그럴 것이 오페라 다이아몬드가 손톱만 한 것일지라도 무척이나 비싼 이유가 따로 있었기 때문이다.
오페라 다이아몬드는 마력 운용과 회복을 도와주었다.
지금 레베카가 몸에 지니고 있는 오페라 다이아몬드를 합치면 어른의 주먹 크기 정도는 될 듯했다.
그러나 케이든은 위축되지 않았다.
그는 오페라 다이아몬드 같은 것이 없어도 발작을 일으킬 만큼 타고난 마력의 양이 많았으므로.
케이든 역시 화답하듯 나직한 목소리로 제 정령을 불러냈다.
“엘판드.”
크아아!
흰 표범의 형상을 한 엘판드가 거세게 포효하며 모습을 드러냈다.
케이든과 레베카가 재차 검을 휘둘렀다.
레베카가 휘두른 검을 피한 케이든이 그녀의 발목을 걷어찼다.
미처 그를 막지 못한 레베카가 이를 악물며 검을 휘둘렀다. 서슬 퍼런 칼날에 케이든의 머리카락 몇 가닥이 잘려 나갔다.
이그니스는 케이든이 레베카의 검에 붙들려 있는 사이 그에게 발톱을 세우고 달려들었지만, 엘판드가 이그니스의 발을 물어뜯으려 하는 탓에 급하게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챙!
또다시 검이 맞부딪쳤다. 케이든은 무표정하게 말을 건넸다.
“검 끝이 흔들리는군요.”
“……!”
“확실히 오페라 다이아몬드가 있어도 아직 이그니스까지 불러 두기에는 무리이신가 봅니다.”
“닥쳐.”
레베카가 이를 으득 갈며 케이든을 떨쳐 냈다.
안 그래도 레베카는 케이든과 같이 검을 주 무기로 사용하기에 그와의 비교를 피할 수 없었다.
검술 면에서도, 정령술 면에서도.
무력에서만큼은 케이든이 압도적이라는 사람들의 말이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레베카의 검이 그의 급소를 노렸다.
하지만 이그니스를 소환해 둔 탓에 마력과 체력이 급격히 바닥나고 있는 것이 눈에 훤히 보였다.
케이든은 바닥을 한 바퀴 굴러 그녀의 공격을 피했다. 그와 동시에 검을 손에서 놓아 버렸다.
그에 놀란 레베카가 찰나나마 멈칫했다.
그사이, 그가 손에서 놓은 검이 길게 늘어나며 봉으로 변했다.
무기의 형상을 바꾸는 것은 상당한 마력을 소모하는 일이었지만 그는 망설임이 없었다.
봉을 잡아챈 케이든이 빠르게 손을 휘둘렀다.
“윽!”
긴 봉에 발목이 걸린 레베카가 휘청거리자 이그니스가 급히 날아와 붙잡았다.
그러나 입을 크게 벌린 엘판드가 뛰어올라 이그니스의 날개를 물어뜯었다.
삐이이…….
이그니스가 기다란 비명을 내지르고는 스르륵 흩어졌다.
그간 이그니스를 소환해 두는 일이 거의 없었기에, 레베카는 역소환의 여파를 처음으로 느끼는 것이었다.
역소환의 여파는 오페라 다이아몬드나 마력으로 메꿀 수 없다.
오히려 평소라면 역소환에 대해서까지 대비해 두었을 레베카는 오페라 다이아몬드라는 강수 때문에 이를 신경 쓰지 않았을 가능성이 컸다.
케이든은 그 부분을 노리고 일부러 이그니스의 주의를 이쪽으로 끌어왔다.
이그니스가 레베카에게 정신을 팔고 있는 사이, 엘판드로 하여금 이그니스를 처리하게 하고.
그 여파로 당황하는 레베카를 자신이 처리한다.
봉을 다시 검으로 바꾼 케이든이 레베카를 향해 달려들었다.
레베카는 다급하게 검을 들어 그의 공격을 막았으나 역소환의 여파로 흰빛의 검이 위태롭게 흔들렸다.
쨍―!
결국 레베카의 검이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산산조각 났다.
그녀가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는 순간.
“그만!”
커다란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귓전을 울렸다. 그에 케이든의 움직임이 움찔 멎었다.
“우승자는 케이든 세이릭 블루벨 전하이십니다. 이로써 개인전 시합을 마칩니다!”
사회자가 승부를 결론지었다.
그에 관람석에 앉아 있던 1황자 부부, 디아나를 비롯한 황족과 모의 전투에 참가하는 기사들이 박수를 보냈다.
레베카는 그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녀는 자신이 한순간이나마 평정을 잃었다는 것이 분한지 케이든을 팍 밀치고 몸을 돌렸다.
‘오늘이야 역소환이 처음이라 그랬던 거겠지. 애초에 중급 정령 정도만 되었어도 틈을 보였을 리가 없으니까. 다음부터 이 방법은 안 통하겠군.’
케이든은 속으로 그리 생각했다.
그가 어슬렁거리며 제 곁으로 다가온 흰 표범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수고했다, 엘판드.”
<몸조심해라. 언제 또 발작이 일어날지 모르니.>
“알았어.”
케이든은 피식 웃음을 흘리고 엘판드의 소환을 해제했다.
케이든은 엘판드를 소환 해제하고 나서야 올해도 무사히 우승했다는 것이 실감 나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의 시선이 처음으로 향한 곳은 당연하게도 디아나였다.
박수를 치던 디아나는 케이든과 시선이 마주치자 빙긋 웃어 보였다.
그에 마주 웃은 케이든이 발을 떼었다. 디아나가 앉아 있는 관람석 아래까지 다가간 그가 불시에 땅을 박찼다.
“헉……!”
사람들이 놀라 숨을 들이켰다.
하지만 케이든은 관람석 난간을 한 손으로 붙잡고, 팔에 힘을 주어 다시 난간 위로 뛰어올랐다.
그러자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얼굴이 코앞에 있었다.
“디아나.”
케이든은 자연스럽게 미소를 띠며 난간에서 관람석 안쪽으로 내려섰다.
묘기 같은 행동을 본 디아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나 직후 그녀가 기겁하며 그의 소매를 잡아챘다.
“계단으로 오시지……! 이러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 그래요!”
“계단까지 돌아가려면 너무 멀잖아.”
“아예 황자궁에도 문을 없애고 창문으로 다니겠다고 하세요.”
“보고 싶었어, 그대.”
“…….”
케이든이 불쑥 내뱉은 말에 디아나의 잔소리가 뚝 그쳤다.
그녀는 잠시 얼음처럼 굳었다가, 주변에서 은근하게 휘파람을 부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아, 사람들이 보고 있지.’
디아나는 케이든이 사람들에게 보여 주기 위해 저런 말을 했다고 생각하며 급하게 표정을 가다듬었다.
그러나 디아나가 화답의 말을 내뱉기 전에 케이든이 먼저 고개를 기울였다.
디아나의 귓가에 입술을 가까이한 그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빈말이 아니라 진심이야.”
“……네?”
“그럼 이제 이동할까? 형님께서도 함께 식사하실 거죠?”
디아나가 순간 당황해 되물었다.
하지만 케이든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연한 얼굴로 난간에서 내려가 엘리엇에게 말을 걸었다.
뒤늦게 그의 말을 인지한 디아나가 볼을 약간 붉혔다.
‘하여간…….’
사람이 지나치게 다정해도 문제구나. 자꾸 이상한 오해가 들려 하네.
디아나는 속으로 그리 탄식하고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몸을 일으켰다.
만약 케이든이 알았다면 통곡했을 반응이었다.
* * *
방어전을 준비하며 모두가 점심 식사를 하는 사이.
레베카는 홀로 개인 연무장에서 목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따악, 딱!
목검이 둔탁한 소음을 내며 허수아비에 부딪힐 때마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이 흘러내렸으나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레베카는 결국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목검을 백번 휘두르고 나서야 움직임을 멈췄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몸을 움직이자 케이든에 대한 괘씸함, 살의 등이 조금이나마 옅어졌다.
‘평정을 잃어서는 안 돼.’
레베카는 심호흡을 하며 냉정을 되찾으려 애썼다.
감정이 이성을 잡아먹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는 황제가 될 수 없다.
어머니인 1황비가 어릴 적부터 세뇌에 가까울 정도로 자주 되뇌던 말이었다.
이윽고 레베카의 호흡이 차츰 고르게 변했다. 그녀는 땀범벅이 된 얼굴을 수건으로 닦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나저나…… 그 애의 말을 대체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지.’
레베카가 미간을 설핏 찌푸렸다.
그녀는 개인전이 시작되기 직전, 페란트를 내버려 두고 자신을 따라왔던 카를롯타의 말을 상기했다.
[3황자비의 눈이 순간적으로…… 보라색처럼 보였어요.]
[뭐?]
레베카는 당시 헛소리라고 생각하며 미간을 찡그렸다.
그도 그럴 것이, 카를롯타가 디아나의 눈 색이 변하는 것을 보았다는 당시에는 모두가 마물들로 인해 정신이 없던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 어느 정도 떨어진 곳에 있던 디아나의 눈 색이 변하는 것을 보았다니. 착각이 분명했다.
레베카는 카를롯타가 제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 헛소리를 한다고 단정하고 귀찮은 듯 손을 내저었다.
[잘못 본 것이겠지. 할 말이 그것뿐이라면…….]
[저, 정말 아니에요! 눈이 마주치는 순간 섬뜩했다고요……!]
하지만 카를롯타는 진심으로 억울해 보였다. 그녀는 레베카가 멈칫한 사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게다가 분명 변종 마물이 1황자비와 3황자비를 덮치려고 했고, 두 사람 다 정령사도 아닌데.]
[…….]
[갑자기 허공에서 마물들이 갈기갈기 찢기다니. 이상하지 않아요?]
레베카는 그제야 카를롯타의 말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3황자비가 정령사일 가능성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