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그녀는 호흡을 가다듬고 억울한 어조로 물었다.
“제가 언제 전하 몸을 더듬댔다고 그러세요?”
“저번에 연무장에서도 만졌잖아?”
“아니, 그건…… 볼이었고…….”
“볼이어도 만진 건 만진 거지.”
“그때는 괜찮다고 하셨으면서.”
“괜찮은 거 맞아. 하지만 그거랑 별개로 그대가 내 몸을 좋아하는 건 맞잖아.”
“…….”
디아나는 억울함에 입술을 앙다물었다.
케이든의 마력 발작을 막기 위해서 실컷 고군분투했더니, 돌아오는 결과는 변태 취급이라니…….
케이든은 디아나가 어둠 속성의 정령사라는 것을 모르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긴 했지만.
조금 울컥한 디아나가 생긋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맞아요, 저 전하 몸이 취향이에요.”
“쿨럭.”
이번에는 케이든이 물을 넘기다가 말고 급하게 잔을 내리며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가 기침을 하며 당황한 눈으로 디아나를 보았다.
“뭐?”
“전하 몸이 취향이라고요.”
“어, 어…….”
케이든은 먼저 장난을 건 사람답지 않게 크게 당황했다.
디아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쐐기를 박았다.
“그러니까 자꾸 부추기지 마세요. 그러다가 제가 이혼 안 하겠다고 하면 어쩌시려고 그래요.”
“…….”
그 말에 케이든은 순간적으로 멍해졌다.
그의 반응을 기다리던 디아나는 그가 한참을 그대로 굳어 있자 웃으며 말을 철회했다.
“농담이었어요. 그러니까 긴장 푸세요.”
“……아.”
“걱정하지 마세요. 전하께서 황태자 자리에 오르고 나시면 꼭 이혼해 드릴 테니까요.”
디아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고기를 오물거리며 식사에 집중했다.
짧은 시간 사이에 심장이 여러 번 오르내리는 것을 경험한 케이든은 뒤늦게 심란해졌다.
‘……또 이러네.’
그는 손을 들어 심장께를 꾹 눌렀다.
어차피 그들의 이혼은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었고, 디아나의 말에는 틀린 부분이 없는데.
대체 왜 그녀의 ‘반드시 이혼해 드리겠다’라는 말에 심장 한구석이 서늘해지고 섭섭한 기분이 드는지.
케이든은 그저 자신이 호의를 가지고 있는 상대가 제게 선을 그을 때 드는 당연한 감정이라 치부하며 애써 마음을 다스렸다.
그는 오묘해진 분위기를 풀기 위해 재차 농담을 던졌다.
“그래도 취향이라는 말까지 농담은 아니었지?”
“……아니요?”
“방금 대답이 한 박자 늦었어, 그대. 앞의 침묵이 곧 대답이로군.”
“아니라니까요.”
“그래, 그래. 밥 먹자. 나도 그대 취향의 몸매를 유지하려면 많이 먹을게.”
“…….”
* * *
다사다난했던 식사가 끝난 후.
케이든과 디아나는 3황자궁의 정원을 산책하며 파트라슈가 안타르를 데려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아, 저기 오는군.”
케이든이 먼저 파트라슈를 발견하고 걸음을 멈췄다.
디아나 역시 제자리에 멈춰 옆을 돌아보았다.
“주군, 저 왔습니다. 비 전하께서도 함께 계셨군요.”
파트라슈가 인사를 건네며 그들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의 등 뒤에서 안타르가 시선을 아래로 둔 채 걸어 나왔다.
케이든 역시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비타스에서 보았던 이후로는 처음인가? 상처 치료는 잘했는지 모르겠군.”
“염려해 주신 덕에 거의 다 회복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안타르가 깊이 고개를 숙였다.
비타스에서 나온 이후, 파트라슈의 도움을 받아 상처를 치료하고 매무새를 정돈한 그는 상당한 미남이었다.
눈을 반쯤 덮고 있던 머리카락을 조금 더 짧게 잘라 정리한 덕분에 오묘한 푸른색의 눈이 더 잘 보였다.
케이든은 잘했다는 의미로 파트라슈의 어깨도 한번 두드려 준 후 디아나에게 안타르를 소개했다.
“디아나, 이쪽은 안타르. 이번에 제4연대에 합류하게 된 신입 정령사야. 안타르, 이쪽은 내 부인이다.”
“3황자비 전하를 뵙습니다. 빛의 영광이 가득하시길.”
안타르가 먼저 디아나의 앞에 정중하게 한쪽 무릎을 꿇었다.
궁에 들어온 이후, 낯선 화려함에 질식할 것 같아 내내 시선을 내린 채 걸어왔더니 지금도 시야에 담기는 것은 여인의 드레스 자락뿐이었다.
안타르는 파트라슈에게 배운 대로 3황자비의 손등에 예를 표하기 위해 한 손을 앞으로 내밀고 기다렸다.
디아나는 잠시간 그런 안타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나직이 입을 열었다.
“디아나 블루벨이네, 안타르 경.”
“……!”
순간 어깨를 크게 떤 안타르가 고개를 홱 들어 올렸다.
살랑―
햇빛을 등진 여인의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살랑였다.
안타르가 멍하니 디아나를 바라보고만 있자, 그녀가 제 손을 내밀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경?”
안타르는 그 목소리에 담긴 경고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황급히 시선을 내린 그가 제 코앞에 있는 흰 손을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마물을 상대할 때조차 잠잠하던 심장이 소란스럽게 뛰었다.
‘설마 D. 옵스큐르가…….’
안타르는 혼란한 와중에도 어쩔 수 없는 희열을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뮈젤을 통해 계약한 후로 D. 옵스큐르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뮈젤에게 옵스큐르의 행방을 묻고 싶어도 계약의 내용 때문에 그럴 수 없었다.
그런 와중에 3황자의 휘하에 있는 제4연대로 들어가게 되었다니, 앞으로 더욱 만날 일이 요원하리라 여겼다.
그런데 정작 그가 찾던 사람은 황궁에, 그가 모셔야 할 사람의 곁에 있었다.
‘아.’
거기까지 생각하자 찬물을 맞은 듯 갑자기 정신이 확 돌아왔다.
케이든의 말이 한발 늦게 머릿속에 떠올랐다.
[안타르, 이쪽은 내 부인이다.]
‘……부인.’
순간 속이 저며지는 듯 아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하지만 안타르는 필사적으로 제 감정을 추슬렀다.
제 감정이 디아나의 뜻보다 우선시되어서는 안 되니까.
안타르는 조심스럽게 디아나의 손등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가 곧장 떼어 냈다.
눈밭처럼 흰 손에 제 입술을 가져다 대는 것조차 황송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케이든은 자신이 안타르를 디아나에게 소개시켜 주었음에도, 안타르가 그녀의 손등에 입 맞추는 광경을 보자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나도 참 속 좁은 놈이로군.’
그는 속으로 혀를 차고는 안타르가 인사를 마치고 손을 물리자마자 자연스럽게 디아나의 손을 찾아 쥐며 달콤하게 웃었다.
“그럼 마저 산책할까?”
디아나는 녹아내릴 듯 휘어진 케이든의 눈매를 보고 찰나 움찔 떨었다.
‘아, 하긴. 지금은 안타르가 보고 있으니까.’
그녀는 그런 생각을 하며 반사적으로 수런거리는 심장을 애써 다스렸다.
이윽고 평정을 되찾은 디아나 또한 수줍게 미소 지으며 케이든의 손을 마주 쥐었다.
“좋아요, 전하.”
케이든은 디아나와 단단히 손을 맞잡은 채 파트라슈에게 명했다.
“패트, 너는 안타르에게 연무장을 안내해 주고 다른 기사들과 합을 맞추게 해 봐. 단체전은 합이 가장 중요하니까.”
“알겠습니다. 가자, 안타르.”
안타르는 순순히 파트라슈의 뒤를 따라갔다.
하지만 그는 정원을 벗어날 즈음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
저 멀리, 케이든과 무어라 손장난을 치며 웃고 있는 디아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케이든을 보는 그녀의 눈에는 분명한 ‘온기’가 배어 있었다.
저를 볼 때와는 다르게.
“안타르, 뭐 해?”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결국 안타르는 디아나의 뜻을 거스를 수 없었다.
그녀가 제게 원하는 것이 3황자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심장이 만 갈래로 찢기는 고통이 있더라도 기꺼이 해내리라.
* * *
그리고 마침내, 모의 전투 당일이었다.
황궁은 이른 아침부터 긴장감과 기대로 소리 없이 들썩였다.
모의 전투는 총 두 단계로 진행되었다.
첫 번째는 개인전 토너먼트.
그리고 두 번째는 모의 전투의 핵심이라고 볼 수 있는 점령전.
사실상 개인전 토너먼트는 점령전이 있기 전 간단하게 상대의 전력을 확인하는 것과 동시에 몸풀기에 가까웠으므로 결과에 큰 영향은 없었다.
게다가…….
‘몇 년 전부터는 1, 2위가 항상 고정이었으니까.’
디아나는 케이든과 함께 개인전 토너먼트가 열리는 중앙궁 연무장으로 향하며 그를 힐긋 돌아보았다.
케이든은 개인전 토너먼트를 위해 경갑을 갖춰 입고 있었는데, 용병 같은 차림도 상당히 잘 어울렸다.
다만 경갑의 특성상 평소보다 흉통이라든가, 가슴 부분을 적나라하게 부각한다는 것이 문제랄까…….
디아나는 경갑이 햇빛에 반짝일 때마다 신경이 쓰여 케이든을 힐끔힐끔 돌아보았다.
그 시선을 눈치챈 케이든이 픽 웃음을 흘리고는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왜. 다른 사람들이 볼까 봐 신경 쓰이면 입지 말까?”
“그러다 다치기라도 하시면 어쩌려고 그런 말을…….”
“신경이 안 쓰인다는 말은 안 하네?”
“…….”
“알았어, 장난 안 칠게. 그러니까 노려보지 마.”
케이든이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디아나의 머리를 토닥였다.
그러는 사이 두 사람은 중앙궁 연무장에 다다랐다.
연무장 입구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케이든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오늘의 모의 전투는 케이든이 레베카를 제칠 마지막 기회나 다름없었으니, 긴장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때 디아나가 말없이 손을 뻗어 그의 손을 붙잡았다.
케이든은 디아나와 닿자마자 긴장으로 꽉 조였던 심장이 풀어지는 듯한 느낌에 긴 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전해 준 온기로 조금이나마 여유를 되찾은 케이든이 작은 미소를 보였다.
“……고마워, 그대.”
“다녀오세요.”
“응.”
케이든은 디아나의 손을 한번 꾹 쥐었다가 놓은 후, 그녀를 관중석으로 보내고 본인은 연무장 중앙으로 향했다.
그러자 먼저 도착해 몸을 풀고 있던 레베카와 페란트, 카를롯타가 그를 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