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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화 (21/145)

21화

레베카는 분노가 스민 미소를 지어 보였다.

“추잡스럽게 남의 것이나 탐하는 꼴이라니.”

“어차피 결과는 뒤집히지 않을 겁니다. 서즈필드 자작으로부터 받은 지참금을 들이붓는다고 해도 제4연대는 투자 대비 효과를 낼 만한 기사도 없으니까요.”

루드비히가 냉정히 케이든 휘하의 기사들을 평했다.

레베카는 그의 말에 다시금 안 좋은 기억이 떠올라 미간을 팍 구겼다.

“나라고 마음을 놓고 싶지 않은 줄 아니. 조셉 그 망할 것이 또 사고라도 치면…….”

‘조셉’이라는 이름을 발음하는 것만으로도 절로 이가 갈렸다.

조셉 핀들레이.

그는 레베카의 외조부인 핀들레이 공작이 늘그막에 들인 후처에게서 본 아들이었다.

공작이 어렸을 적부터 오냐오냐하며 기른 탓에 그는 페란트를 넘어서는 망나니로 자라났다.

차라리 페란트처럼 여인들에게 집적거리고 다니는 정도라면 모를까.

조셉은 성정이 지독하게 폭력적이었다.

레베카가 밀라드 서즈필드와 약혼하게 된 것도, 사실은 조셉이 ‘제 심기를 거슬렀다’라는 이유만으로 공작저의 사용인을 폭행해 죽인 일을 급하게 덮기 위해서였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핀들레이 공작가를 외가로 두고 있는 레베카의 평판이 곤두박질칠 것이 뻔했다.

민심을 잃은 황제는 황제라고 부를 수 없으므로.

레베카는 짜증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결과적으로 서즈필드 자작을 이쪽으로 끌어오게 된 건 나쁘지 않아. 그런데 그 아들이란 놈은 사람을 어지간히 귀찮게 하더군. 차라리 딸 쪽이 더 기꺼울 지경이야.”

그녀는 자신이 무의식중에 내뱉은 끝말에 뒤늦게 멈칫했으나 곧 신경을 껐다.

‘눈앞에서 얼쩡거리며 귀찮게 하는 것보다야, 사랑에 정신 팔려 3황자의 앞길을 막아 주는 쪽이 더 기꺼울 수밖에 없겠지.’

물론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도 없는 노릇이지만 말이다.

의자에 느른히 기대어 앉은 레베카가 따사롭게 웃었다.

“무릇 윗사람의 자비는 공평해야 하는 법이지. 3황자비가 섭섭하지 않게 조만간 선물이라도 보내야겠구나.”

“현명하십니다, 전하.”

그 곁에서 루드비히가 깊이 고개를 숙였다.

* * *

한편, 케이든은 저녁 늦게 3황자 궁으로 돌아오자마자 디아나를 찾았다.

“디아나.”

“오셨어요?”

디아나가 반갑게 그를 맞이했다.

그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마주 웃으며 그녀를 샅샅이 살폈다.

“1황비 전하께서 시녀를 보내 주셨다고 들었는데. 낮에는 별일 없었고?”

“그럼요. 다들 좋은 사람이었는걸요.”

사실 타니아를 비롯해 시녀들의 태도는 무례하기 짝이 없었지만, 디아나는 순하게 웃으며 답했다.

하지만 케이든은 3황자 궁으로 돌아오기 직전, 파트라슈를 통해 시녀들의 건방진 태도를 이미 전해 들은 상태였다.

‘……내가 걱정할까 봐 그러는 건가.’

그는 잠시간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며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토닥였다.

“이렇게 순해서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려고.”

“……?”

디아나는 그 말에 어리둥절하게 눈을 깜박였다.

어째서 저런 오해가……?

‘어차피 얼마 지나지 않아 버려질 패로 보여서 굳이 대거리하지 않은 건데.’

레베카를 보필했던 자의 시각으로 봤을 때, 그녀가 타니아 해밀턴과 같은 인물을 오래 가까이 둘 리가 없었다.

아마 감시 역과 일회성 악역을 겸하게 할 생각으로 저들을 이곳에 보낸 것이겠지.

‘으음.’

디아나는 차마 그런 속내를 꺼내 놓지 못하고 애매하게 웃었다.

그것이 케이든의 눈에는 또 아련하게 비친 모양이었다.

한동안 디아나를 열심히 쓰다듬던 그가 돌연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아, 참. 먼저 잠들지 말고 기다려. 씻고 올 테니까.”

“……네?”

방금 이상한 말을 들은 것 같은데?

벌써 환청을 들을 나이가 되었나 싶어 당황해 케이든을 올려다보자 그가 짓궂게 웃었다.

“뭘 그렇게 봐? 어차피 우리 계약서에도 잠자리는 하지 않기로 적혀 있잖아.”

“아.”

“설마 기대하신 겁니까, 부인? 지금이라도 계약서를 수정하시겠다면야…….”

“그런 거 아니니까 빨리 가세요. 씻으러 가신다면서요.”

민망함에 미약하게 얼굴을 붉힌 디아나가 케이든의 등을 꾹꾹 떠밀었다.

그래 봤자 고양이의 발길질만큼 약한 힘이었던지라 케이든은 너털웃음을 터트리고는 선선히 밀려나 주었다.

‘저렇게 변태 같은 사람이었다니.’

디아나는 케이든을 쫓아내고는 속으로 툴툴거리며 마찬가지로 몸을 씻었다.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그녀가 잠옷으로 갈아입는 것을 도와준 하녀가 물러가며 촛불 하나를 남기고 불을 껐다.

방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주홍빛 촛불이 이따금 아롱거리며 흔들렸다.

디아나는 조금 어색하게 목에 달린 리본을 만지작거리며 케이든을 기다렸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잠옷 위에 가운을 걸친 차림으로 방에 들어왔다.

“오래 기다렸어?”

“아뇨. 저도 방금 나왔어요.”

“다행이네.”

“그보다 왜 기다리라고 하신 거예요?”

케이든이 그 말에 씩 미소 지었다.

물기 어린 머리카락이 차분하게 이마 위로 내려앉아 있는 탓인지, 그는 유달리 소년 같았다.

“명색이 초야인데 잠으로 보내는 건 아쉬우니까. 몸이라도 열심히 움직여야지.”

그 말을 들은 디아나는 조금 울고 싶었다. 저 사람 정말 말을 이상하게 하는 재주가 있네…….

* * *

겨우 눈물을 추스른 디아나는 케이든을 따라 옷을 갈아입고 커다란 클로크를 뒤집어쓴 채 황궁을 벗어났다.

케이든의 명을 받고 담벼락 구석진 곳에서 말과 함께 대기하던 파트라슈가 말고삐를 건네주었다.

“호위는 데려가지 않으십니까?”

“이 시간에는 데려가는 게 오히려 눈에 띌 거다. 그리고 결혼식 날 그 난장을 피웠으니 새 암살자들을 수급할 때까지는 조금 더 시간이 걸리겠지.”

“알겠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는 디아나에게 들리지 않도록 낮고 빠르게 이루어졌다.

대화를 마무리한 파트라슈는 디아나에게 정중히 인사하고 물러났다.

“실례.”

케이든은 짧게 양해를 구한 후 디아나를 훌쩍 들어 말 위에 올려 주고 그 뒤에 올라탔다.

디아나는 자신의 후드를 고쳐 쓰며 케이든의 후드 또한 제대로 매만져 주었다.

“어디로 가실 건데요?”

“내가 가끔 들르는 곳이 있어. 꽉 잡아.”

그 말을 끝으로 케이든이 말을 몰기 시작했다. 디아나는 그의 품에 파묻히듯 안긴 채 함께 밤거리를 내달렸다.

얼마나 달렸을까. 케이든이 말을 멈춘 곳은 밤에도 불을 환히 밝힌 주점 거리였다.

술에 취한 남녀가 거리 곳곳에서 진한 입맞춤을 하고 있었다.

디아나는 케이든의 도움을 받아 말에서 내리며 수상한 눈빛을 보냈다.

“……가끔 들르는 곳이라고요?”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겠는데, 오해야.”

케이든은 가볍게 웃고는 그녀를 이끌고 한 가게로 향했다.

디아나는 처음 보는 것들이 가득한 가게의 모습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감탄했다.

“와…….”

가게 안은 분위기만 보자면 불법 도박장처럼 화려하고 찬란했다.

하지만 사람들이 하는 것을 보아하니, 그들이 사용하는 것은 전부 운동 도구인 듯했다.

나무 방망이로 공을 쳐 내거나, 구멍이 뚫린 공을 굴려 말뚝을 쓰러트리는 소리와 사람들의 목소리가 왁자지껄했다.

디아나는 신기함에 장난감 가게에 온 아이처럼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그 모습을 본 케이든이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며 설명했다.

“라비크 왕국의 전통 스포츠에 아를라스 왕국의 마도구를 접목해 만든 가게라더군. 형님이 가게 주인과 아는 사이라고 하셔서 알게 됐지. 입은 무거우니까 걱정하지 말고.”

“아이고, 이게 누구십니까! 어서 오십시오!”

때마침 가게 주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활짝 웃으며 그들에게 다가왔다.

익숙한 듯 케이든에게 고개를 숙이던 그가 디아나를 보고 멈칫했다.

“……설마 부인과 함께 오신 겁니까?”

“어.”

“세상에. 저렇게 약해 보이는 분을. 심지어 신혼이시잖습니까!”

“그래도 내 부인이 형님보다는 튼튼할걸. ……아닌가?”

말을 잇던 케이든은 바닥에 끌리는 디아나의 클로크 자락을 발견하고 돌연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그에 오기가 생긴 디아나가 주인에게 말했다.

“저쪽에서 하는 거, 저도 해 볼 수 있을까요?”

“아, ‘볼링’ 말씀이십니까?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주인은 디아나의 체력을 걱정했지만, 그것과 별개로 그녀의 의지까지 무시할 생각은 없었다.

그가 더없이 정중한 태도로 케이든과 디아나를 안쪽으로 안내했다.

주인은 실내용 슬리퍼를 꺼내고 가벼운 술상을 차린 후 주위에 칸막이를 쳐 주었다.

“이쪽은 칸막이가 있어서 편하게 계셔도 될 겁니다. 뭔가 필요하시면 저쪽의 줄을 당기시고요.”

“고마워.”

“감사해요.”

케이든과 디아나가 나란히 인사했다. 주인은 사람 좋은 미소를 남기고 사라졌다.

케이든은 능숙하게 마도구를 작동시키며 디아나에게 규칙을 설명했다.

“이 공을 굴려서 저기 세워져 있는 말뚝을 많이 넘어트리면 돼. 공은 이렇게 잡으면 되고.”

케이든은 먼저 공을 잡는 시범을 보인 후 디아나에게 가장 가벼운 공을 건네주었다.

디아나가 양손으로 그 공을 건네받는 순간, 그녀의 몸이 아래로 훅 꺼졌다가 가까스로 멈추었다.

케이든이 땅으로 추락하듯 무너지는 그녀의 몸을 붙잡은 까닭이었다.

잠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혹시 무거워?”

“……잠깐 놀라서 그런 거지, 괜찮아요. 놔주셔도 돼요.”

디아나는 애써 입꼬리를 끌어 올리며 케이든의 도움을 거절했다.

케이든이 천천히 손을 거두자 또다시 공을 든 손이 땅으로 훅 꺼졌지만, 이번에는 미리 대비하고 있었기에 몸까지 끌려가진 않았다.

디아나는 공에 오른 손가락을 끼워 넣고 왼손으로 공을 받쳤다.

그 상태로 바들바들 떨던 그녀가 케이든의 시범에 따라 겨우 공을 굴렸다.

데구루루…… 툭.

“…….”

“…….”

디아나가 굴린 공은 힘이 부족해서인지 얼마 지나지 않아 길 한가운데 멈춰 버렸다.

케이든은 말없이 서 있다가 조용히 마도구를 작동시켜 길 위에 놓인 공을 치웠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상큼하게 입을 열었다.

“우리 다른 거 할까?”

“네!”

그러자 디아나 또한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활짝 웃으며 냉큼 대답했다.

그들은 꽤 죽이 잘 맞는 부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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