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수장님.”
“……어?”
놀란 디아나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낯선 호칭과 더불어 하녀의 목소리와 표정,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가 아까와는 판이해져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다른 사람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뮈젤?”
디아나는 무의식중에 떠올린 이름을 중얼거렸다.
그러자 하녀가 긍정하듯 입꼬리를 끌어 올리고는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수장님도 놀라긴 하시는 분이군요. 어떤 상황에서든 웃고 계실 것 같았는데.”
“정말 뮈젤이에요? 얼굴도…… 바꾼 거고?”
“네. 그나저나, 명하신 대로 길드의 정비도 끝내고 찾아왔으니 이제 슬슬 말씀도 편하게 해 주시면 좋을 텐데요.”
디아나가 뮈젤을 알아보지 못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그녀는 말 그대로 다른 사람 같았다. 머리카락과 눈의 색, 심지어 얼굴의 골격까지 달리 보였다.
정작 뮈젤은 별것 아니라는 듯 콧잔등을 찡긋하고는 디아나의 잔에 차를 채워 주었다. 그 동작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뭘 그렇게 놀라세요. 제가 나름 현장직이었을 때는 수배도 붙었는걸요. 이 정도야 식은 스튜 먹기죠.”
“그건…… 그렇네요. 아니, 그렇네.”
디아나는 침착함을 되찾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 밖의 장소에서 뜻밖의 인물을 만났던 놀라움이 가시자 흐뭇함이 찾아들었다.
‘역시 사람을 잘 봤어.’
참 유능한 수장이라니까.
‘아, 이젠 내가 수장이지.’
디아나는 생각을 정정하며 찻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머금었다. 어째 차 우리는 솜씨도 예사롭지 않은 것 같다.
“그나저나 생각보다도 훨씬 빨리 찾아왔네. 사실 도망가도 할 말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디아나가 본인의 이름을 밝혔을 때 세상을 잃은 얼굴로 계약서에 서명하던 뮈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만큼 디아나는 위태로운 자리에 올라앉은 사람이었다.
가진 무력과 별개로, 언제든지 1황녀라는 폭풍에 쓸려 갈지 모르는 나무와도 같은 처지.
뮈젤이 허탈한 숨을 내쉬었다.
“제가 아무리 그래도 계약서에 서명까지 해 놓고 도망가는 성격은 아닙니다. 애초에 서명을 안 하고 말지.”
그 말은 진심이었다.
분명 처음에는 제 발로 정쟁의 소용돌이에 들어왔다며 좌절했지만.
어차피 돌이킬 수 없게 됐다면, 차라리 최선을 다해서 디아나를 돕는 쪽이 현명할 것이다.
그런 마음가짐으로 뮈젤은 윙즈의 썩은 부분을 싹 도려냈고, 지금의 길드는 전보다 활기를 띠게 되었다.
“도망가지 않아서 고마워.”
“도망간다고 해서 순순히 놓아주실 분도 아니시잖습니까.”
“아하하.”
디아나가 낭랑하게 웃음을 터트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뮈젤은 자신이 도망갔을 때의 상황을 가정한 것인지 창백한 얼굴로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마침 잘 왔어. 슬슬 내 쪽에서 연락을 해 봐야 하나 하던 참이었거든.”
아무튼, 잡담은 이쯤 하고 본론으로 들어갈 시간이었다.
여차하면 필요한 것이 있어 하녀를 불렀다고 둘러대면 될 테지만, 1황비의 시녀들이 있으니 뮈젤은 최대한 얼굴을 드러내지 않아야 안전했다.
디아나가 양손에 찻잔을 쥔 채 비스듬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해 줘야 할 일이 있어.”
“말씀하십시오.”
“우선 첫 번째. 위장 신분을 만들어 줘. 이름은 데인 옵스큐르, 덤으로 얼굴을 가릴…… 부엉이 가면까지.”
이것은 디아나가 윙즈를 방문했던 본래의 목적이었다.
‘3황자비 디아나 서즈필드’가 아닌, 레베카를 공격할 가상의 인물.
뮈젤은 어렵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이건 급하지는 않은 일인데…….”
디아나는 전보다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기록을 찾아 줘. 기왕이면 발하나스의 시조인 다섯 속성 정령사에 관한 기록들 위주로. 오래될수록 좋아.”
뮈젤이 의아하다는 듯 미간을 찡그리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런 기록이라면 황궁의 서고에 더 많이 남아 있지 않겠습니까.”
“내가 찾는 건 ‘지워진’ 역사에 대해서니까. 황궁 서고에는 아마 유의미한 기록이 없을 거야.”
회귀 전. 레베카는 디아나를 위해서 어둠 속성 정령사의 정보를 알아내려 했다.
하지만 ‘그’ 레베카조차 황궁의 서고를 뒤집어엎다시피 했는데도 별다른 자료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가능성은 두 가지였다. 자료가 소실되었거나, 혹은 특정 부분만 지워졌거나.
레베카가 마물 토벌을 위해 여러 지역을 떠돌던 중, 토착민들의 입을 통해 어둠 속성의 정령사가 존재했다는 말을 들었다 했으니 후자일 가능성이 컸다.
‘혹시나 같은 일이 반복될 수도 있으니까. 어둠 속성 정령의 존재를 증명할 만한 자료를 손에 쥐고 있는 편이 낫겠지.’
디아나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차를 한 모금 더 들이켰다.
버림받았을 때의 기억과 감정을 의식적으로 지워 낸 그녀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수도에서 ‘안타르’라는 소년을 찾아 줘. 아마…… 빈민가 쪽을 찾다 보면 발견할 수 있을 거야.”
“빈민가의 소년이요? 혹시 그 소년이 어느 유력 귀족의 사생아라든가 그런 겁니까?”
정보 길드원답게 뮈젤의 눈이 흥미로 빛났다.
하지만 디아나는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아니, 그건 아니고. 곧 도움이 필요할 일이 있어서 말이지.”
케이든이 자리를 비운 이유, ‘기사단 모의 전투’가 곧이었다.
* * *
야심한 밤.
오늘 새로이 3황자비의 시녀로 발탁된 타니아 해밀턴은 검은색 후드를 푹 눌러쓴 채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녀가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다다른 곳은 백염궁이었다.
안쪽에 자리한 방에 들어온 후에야 후드를 벗은 그녀가 깍듯이 허리를 숙였다.
“타니아 해밀턴이 고귀하신 1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어서 오렴, 타니아.”
달콤한 목소리가 그녀를 반겼다.
편안한 실내복 차림의 레베카가 반가운 미소를 띤 채 파티션을 돌아 나왔다.
그것만으로도 굉장한 환대였기에 타니아가 황송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지 말고 고개를 들려무나. 나는 네 눈을 보고 대화하고 싶단다.”
그 속삭임에 타니아는 홀린 듯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녀는 이미 오랜 시간 보았음에도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 레베카의 미모에 탄식 같은 숨을 내쉬었다.
한편, 원하던 반응을 얻어 낸 레베카는 요요히 웃으며 물었다.
“그래. 3황자비는 좀 어떻던가?”
“수상한 점은 없었습니다. 전해 들은 대로 사랑에 푹 빠진 철부지 소녀 같던데요. 조금 전 3황자가 궁으로 돌아왔기에 저도 퇴근한 참입니다.”
“흠, 그래?”
“네. 오히려 바보 같을 지경이었어요.”
타니아는 상전보다 먼저 자리를 비우겠다고 말했는데도 순진하게 그러라고 하던 디아나를 떠올리며 코웃음 쳤다.
‘그런 것도 꼴에 황자비라고.’
역시 가문에서 내놓은 것이나 다름없다던 사생아답게 멍청하기 짝이 없었다.
레베카는 입꼬리를 끌어 올린 채 잠시간 생각에 잠긴 얼굴을 하더니, 이내 손짓으로 제 시녀를 불렀다.
“고맙다. 이건 상으로 주는 것이니 거절하지 말고.”
“이, 이렇게 귀한 것을…….”
레베카가 시녀를 통해 내민 것은 값비싼 사파이어 귀걸이였다.
타니아는 턱을 떨어트리고 사양하다가, 결국 귀걸이를 소맷자락에 챙겨 넣고 꾸벅 인사한 뒤 사라졌다.
방문이 닫히자마자 레베카의 얼굴에 걸려 있던 미소도 씻은 듯 사라졌다.
“바보 같다, 라…….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루비?”
그녀는 기지개를 켜더니 맞은편에 세워져 있던 파티션을 걷어 냈다.
그 너머에는 루드비히 카드몬드가 그림 같은 자태로 앉아 있었다.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루비?”
레베카의 물음에 루드비히가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요.”
연푸른 눈이 기억을 더듬듯 가늘어졌다.
[……그런가요?]
하루 전, 연회장 복도에서 망나니 2황자를 제지했을 때.
분명 한순간이었지만, 루드비히는 디아나의 눈에 스쳐 지나갔던 동요의 기색을 분명히 엿보았다.
그는 눈을 비스듬히 내리깐 채 찻잔 안에서 찰랑이는 찻물을 응시했다.
“어쩐지 3황자비가 저를 알고 있는 것 같던데.”
“공적으로? 아니면, 사적으로?”
“사적으로요.”
“따로 만난 적이라도 있어?”
“아뇨. 아마 제가 잘못 본 모양입니다.”
루드비히는 이내 착각이겠거니 의심을 거두며 차를 한 모금 넘겼다.
레베카는 한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루드비히의 맞은편에 털썩 주저앉았다.
“별일이군. 네가 뭔가 잘못 봤다니, 흔한 일은 아닌데.”
“저도 사람인데 실수는 할 수 있는 법 아니겠습니까.”
“그건 그렇지. 그나저나 샐티스 후작이 3황자에게 다녀갔다지.”
“예. 아마 곧 있을 모의 전투 때문이겠지요.”
루드비히가 매끄럽게 답하며 찻잔을 내려놓았다.
매년 3월에는 황실 근위대의 훈련을 겸한 모의 전투가 이루어졌다.
단순히 무예만을 겨루는 것이 아니라, 공격과 방어를 적절히 수행하며 각 진영의 깃발을 지키고 빼앗는 전략 싸움.
다섯 개의 연대로 이루어진 황실 근위대 중 모의 전투에서 우승한 연대가 건국제 행진을 도맡게 된다.
명예뿐인 보상처럼 보일지라도 실상은 달랐다.
하나의 연대를 지휘하는 것은 대개 황제에게 능력을 인정받은 황족이었다.
이는 곧 어느 황족이 건국제 행진에 참여하느냐에 따라 제국민이 차기 황제로 생각하게 되는 인물 또한 달라진다는 것이다.
레베카가 제1연대를 지휘하게 된 이후로, 건국제 행진은 늘 그녀의 몫이었다.
그러니 샐티스 후작이 전술 회의와 훈련에 그리도 열을 올리는 것이다.
케이든이 한 번이라도 건국제 행진을 맡게 되는 순간, 제국민을 비롯해 귀족들 또한 크게 술렁일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