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다음 날, 늦은 아침.
“아야…….”
디아나는 전신을 사로잡은 근육통에 끙끙대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잠결에 케이든이 훈련을 위해 자리를 비운다고 하는 말을 들은 것도 같은데, 꿈이 아니었는지 옆자리가 비어 있었다.
디아나는 상체를 세우려다 말고 허리를 관통하는 통증에 결국 다시 침대에 엎어졌다.
그녀는 밤새 케이든과 함께 이런저런 스포츠를 즐기다가 동이 틀 때쯤 돌아와 기절하듯 잠들었다.
그간 이렇게까지 몸을 움직일 일이 없어서 그런지 온몸이 얻어맞은 듯 아팠다.
디아나는 특히나 가장 아픈 허리를 주먹으로 통통 두드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고작 그거 좀 했다고 허리가 이렇게 아플 일인가.”
툭.
그때 작은 기척이 들렸다.
디아나가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자 양손으로 입을 가린 하녀의 발치에 먼지떨이가 굴러다녔다.
한발 늦게 자신이 한 말을 인지한 디아나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내가 조금 전에 뭐라고 중얼거렸더라?
‘아.’
허리가 아프다는, 갓 결혼한 3황자비.
그 말을 듣고 얼굴이 붉어진 침실 청소 담당 하녀.
어디선가 ‘오해’라는 이름의 눈덩이가 설산을 구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저기…….”
“죄, 죄송합니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하녀는 디아나가 제대로 말을 꺼내기도 전에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허리를 꾸벅 굽히더니 바람처럼 사라져 버렸다.
졸지에 홀로 남겨진 디아나는 “그래, 신혼부부가 밤을 안 보냈다는 게 오히려 이상하게 보이겠지…….” 하며 민망함을 추슬러야 했다.
케이든과 함께하려면 이런 일에 익숙해지고, 또 태연해져야 한다고 마음먹긴 했으나 아직 익숙하지 않은 탓인지 영 쉽지 않았다.
디아나가 어색함을 다스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시녀들이 도착했다.
타니아는 전날보다 이상하리만치 살가워진 태도로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좋은 아침입니다, 비 전하. 목욕부터 도와 드릴까요?”
“……그러지.”
디아나는 갑작스럽게 친절해진 타니아의 모습에 의아하게 미간을 좁혔다.
그녀는 하녀들에게 목욕 시중에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라 이르는 타니아를 빤히 관찰했다.
직후 타니아의 귓가에서 달랑거리는 사파이어 귀걸이를 발견한 그녀가 눈을 크게 떴다.
‘저건…… 레베카가 가지고 있던 귀걸이일 텐데.’
착각인가 싶어 목욕 시중을 받으며 자세히 들여다보았지만 확실했다.
회귀 전, 이름 있는 보석상이 오직 레베카만을 위해 만들어 바쳤기에 세상에 하나뿐인 귀걸이.
그제야 상대의 태도 변화를 이해한 디아나가 자그맣게 웃었다.
‘저런 식으로 사람을 다루는 거, 달라지지 않았네.’
귀걸이 정도야, 강력한 권력을 쥔 레베카에게는 작고 하찮은 것일 뿐이다.
하지만 타니아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는 권력보다 당장 몸에 지닐 수 있는 보석이 더욱 값지게 느껴졌으리라.
목욕 시중을 들면서도 간간이 제 귓가를 만지작거리며 콧노래를 부르는 것만 보아도 뻔했다.
그리고 그 충족감은 더 큰 욕심을 불러오기 마련이다.
잠깐의 굴욕을 참고, 이런 식으로 제 경계를 풀어 레베카에게 보고할 약점을 잡는 것이 더 이득이라고 생각한 것이겠지.
회귀 전의 디아나는 타니아 같은 사람에게 귀걸이를 건네주는 역할을 했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한편, 디아나의 웃는 모습을 본 타니아가 친근하게 말을 붙였다.
“물 온도는 괜찮으세요? 더 따뜻하게 할까요?”
“아니, 지금이 좋아.”
“네에. 아, 그러고 보니 요즘 서방에서 새로 유행하는 향유가 있다는데…….”
덕분에 불편함은 줄겠거니, 생각한 디아나가 가만히 눈을 감고 시녀들의 손에 몸을 맡겼다.
목욕 후 치장까지 모두 마치자 어느새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전날 밤, 평소와 달리 몸을 과하게 쓴 탓인지 외려 입맛이 없었다.
오찬을 거른 디아나가 타니아의 재잘거림을 한 귀로 흘리며 책을 읽고 있을 때였다.
“비 전하. 1황자비 전하께서 방문하셨습니다.”
“지금?”
“예. 우선 응접실로 모셨습니다만, 어찌할까요?”
“내가 가지.”
디아나는 황급히 책을 놓고 몸을 일으켰다.
응접실로 향하자 모자까지 갖춰 쓰고 있던 플뢰르가 화색을 띠며 그녀를 맞이했다.
“디아나, 왔어요?”
“전…… 아니, 플뢰르.”
디아나는 습관적으로 그녀를 경칭으로 부르려다가 플뢰르의 얼굴이 시무룩해지자 황급히 말을 고쳤다.
“갑작스럽게 찾아와서 미안해요. 하지만 황궁 안에 친구가 생겼다는 생각에 기뻐서…….”
플뢰르는 디아나를 보자 뒤늦게 부끄러움이 밀려왔는지 모자 끝을 만지작대며 볼을 붉혔다.
그 모습에 디아나는 양심에 콕콕 통증이 이는 것을 느꼈다.
이내 무언가 결심한 얼굴의 플뢰르가 결연히 말을 내뱉었다.
“저, 괜찮으면 나랑…… 피크닉 가지 않을래요? 준비는 다 해 뒀고, 중앙 정원으로 갈 거니까 멀지는 않을 거예요.”
“으음.”
“물론 피곤하면 거절해도 괜찮아요. 정말이에요.”
디아나는 난감한 신음을 삼켰다.
그렇게 말하는 것치고, 플뢰르는 거절의 말을 들으면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굴 것 같은 얼굴이었다.
결국 디아나는 고민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디아나가 해탈한 얼굴로 긍정의 뜻을 내비치자 환한 미소를 지은 플뢰르가 그녀를 이끌고 황궁 중앙 정원으로 향했다.
“오늘따라 날씨가 좋네요. 딱 봄 같아요.”
플뢰르는 사용인들이 간이 테이블과 의자를 설치하는 동안 들뜬 어조로 재잘댔다.
그녀의 말대로, 최근에는 절로 기분이 좋아질 만큼 화창한 날씨가 지속되고 있었다.
그 탓인지 중앙 정원에도 나들이를 나온 귀족이 여럿 보였다.
지나가던 귀족들은 플뢰르, 디아나와 마주치면 멀리서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해 왔다.
그들에게 마주 인사를 건네다 보니 어느새 테이블과 의자를 비롯해 티타임을 위한 준비가 끝나 있었다.
두 사람의 시녀들은 차를 준비한 후 조금 떨어져 섰다.
타니아는 대화를 엿듣고 싶었는지 아쉬운 기색을 보였지만, 보는 눈이 많은 와중 예법을 무시할 수는 없었으므로 별다른 수작을 부리지는 못했다.
그와 별개로 차향은 향긋했다.
플뢰르는 디아나의 맞은편에 앉아 찻잔을 들며 즐거운 듯 속삭였다.
“디아나, 그거 알아요?”
“네?”
“당신과 케이든 전하가 처음 만난 날 이후로, 여기가 연인들의 명소가 됐대요.”
“콜록.”
막 차를 한 모금 넘기던 디아나가 가볍게 콜록거렸다.
놀란 플뢰르가 손수건을 건네자 그것으로 입가를 가린 디아나가 황당하게 눈을 끔벅였다.
“대체 왜……?”
“케이든 전하가 이곳에서 디아나에게 첫눈에 반한 뒤 결혼까지 일사천리로 성공했잖아요. 다들 그 기운을 나눠 받고 싶은가 봐요.”
디아나는 그 말에 손수건을 내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플뢰르의 말대로, 저번과 달리 정원에는 연인으로 보이는 젊은 영식, 영애들이 유달리 많았다.
몇몇은 디아나를 곁눈질하다가 그녀와 시선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케이든과 함께 벌인 사기극의 영향력을 새삼 확인한 그녀는 조금 얼떨떨해졌다.
‘다들 우리가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믿고 있나 보네.’
사실 나…… 연기에 재능이 있었을지도?
<그럴 리가.>
‘입 다물어, 유로.’
속으로 자신의 숨겨진 재능에 대해 고찰하려 하자마자 어둠의 상급 정령, 유로의 비아냥거림이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익숙한 일이었기에 디아나는 대수롭지 않게 차를 홀짝이며 웃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플뢰르와 1황자 전하께서 처음 만난 장소는 유명 관광지나 다름없어졌겠네요.”
“어머. 내가 엘리엇을 처음 만났을 때는 딱히 디아나처럼 낭만적인 상황이 아니었는걸요.”
플뢰르는 이후 그녀의 친정인 위버 공작령에서 엘리엇과 처음 만났을 때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디아나는 그 이야기를 귀담아듣는 한편 머릿속으로는 앞으로 필요한 일들을 정리했다.
‘믿을 만한 시녀 한 사람 정도는 구해야 하는데.’
그녀는 티 나지 않게 타니아를 흘긋 일별했다.
아마 타니아를 비롯한 세 시녀는 앞으로 길어야 2주 안에 레베카에게 이용당하고 사라지겠지.
1황비와 레베카가 더는 디아나를 주시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기까지 필요한 기간이 2주 정도일 테니까.
그들의 성정상, 감시를 그만두어도 되겠다는 판단을 내린 이후에는 디아나의 시녀 자리에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황후 폐하의 안목이라면 물론 괜찮은 사람들이겠지만.’
시녀를 보내 주겠다던 황후의 약속을 상기한 디아나가 눈썹을 슬쩍 일그러트렸다.
‘그와 별개로 온전히 내 사람이 될 수 있는 시녀가 필요해. 아무리 뮈젤이라도 시녀로 들어오지는 못할 테니…….’
황족의 시녀는 귀족가의 부인, 여식들이 맡을 수 있는 가장 영광된 자리였다.
아무리 변장과 위조 등에 능한 뮈젤이라고 한들, 태어난 순간부터 신분이 확실히 보장되는 귀족가의 일원인 척할 수는 없었다.
‘데인 옵스큐르’라는 위장 신분으로도 할 일이 많은 디아나로서는 달갑지 않은 사실이었다.
‘하긴, 귀족 행세를 하다가 잡히면 그게 더 문제지. 자칫하면 윙즈까지 엮이게 될 테니까.’
영 적임자가 떠오르지 않아 디아나가 소리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이 모든 것은 타니아 무리가 사라진 이후의 일이니, 지금부터 머리 아파해 봐야 제 손해였다.
지금은 플뢰르와의 시간을 온전히 즐기기로 마음먹은 디아나가 미소를 띤 채 상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이질적인 소란이 인 것은 그때였다.
“세상에…….”
누군가 경악 어린 탄식을 뱉었다. 그 반응이 사람들 틈으로 번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무슨 일이길래…….”
디아나와 플뢰르는 의아하게 고개를 돌렸다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2황녀 전하?”
디아나가 작게 중얼거렸다.
그녀의 눈은 막 정원에 나타나 자리를 잡고 앉는, 화려한 차림의 소녀에게 향해 있었다.
그녀는 망나니 페란트의 동생, 2황녀 카를롯타였다.
카를롯타는 대지 속성의 하급 정령사이자 제 오라비를 닮아 거만하고 뽐내기 좋아하는 성격으로 유명했다.
하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사람들, 그리고 디아나가 놀란 이유는 그녀가 가져온 새장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