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월경, 그리고 무월경
2018.02.14.
얼마 후, 견은 조용히 월경연구소를 찾았다.
“고모, 나 진단서 하나만 써줘.”
“무슨 진단서?”
“나 불임이라고.”
보고 있던 논문에서 눈을 뗀 지미가 이게 무슨 메주로 치즈 만드는 소리냐는 눈을 했다.
“네가 월경을 해서 그렇지 불임은 아닐 텐데? 왜, 피임 안 하는데도 임신이 안 돼서?”
“그게 아니라.”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불임 타령이야? 나이도 어린 게. 1년 이상 정상적인 성생활을 했는데도 임신이 안 되는 경우에 불임으로 진단 내리는 거야. 그리고 어느 쪽에 어떤 문제가 있고 무슨 치료를 해야 하는지는 같이 검사를 해봐야…….”
“아, 아니라고! 피임이고 뭐고 그럴 일 안 했어!”
“……뭐?”
가뜩이나 조용한 연구소 안에 세상 뻘쭘한 고요가 흘렀다.
“너 전에 내가 했던 말은 귀로 듣고 코로 흘렸니? 어쩐지, 그동안 몇 번 물어도 줄기차게 말만 돌리는 게 수상하더라. 호르몬 문제는 호르몬으로 치료할 수도 있으니까 해보라고……!”
“가설이잖아. 아무 일도 없을지, 나에게 뭔가 득이 될지, 어쩌면 그만큼 모단 씨한테 해가 될지 아무것도 모르잖아.”
“그 걱정 하느라고 여태껏 도를 닦았어?”
“안 닦고 싶어도 고모가 한 말이 자꾸 생각나는데 어떡해! 고모가 모단 씨 이용해 보라고만 안 했어도!”
“내가 언제 이용하라고까지 말을 했어?”
“차라리 아무것도 못 들었으면 내가 벌써! 하여간 아는 게 병이야!”
“아는 게 힘이지, 자식아.”
“아냐! 모르는 게 약이야!”
지미가 짜증스레 안경코를 밀어 올렸다.
“근데 하지도 않고 웬 불임 타령이야?”
“사실은 모단 씨가 무월경이야.”
지미의 입이 소리 없이 벌어졌다. 이건 또 무슨 고르곤졸라에 된장 발라 먹는 소리냐는 얼굴이다.
“우리끼리는 합의했지만 어른들은 아이를 바라실 수도 있잖아. 괜히 헛된 기대 하다가 실망하시면 안 되니까 미리 말씀드리려고 하는데, 어느 한쪽만의 문제가 아닌 걸로 하고 싶어서.”
견이 차분히 말을 이었다.
“할아버지야 섭섭하긴 하시겠지만 그래도 장가라도 가는 게 어디냐고 생각하실 것 같은데, 모단 씨 어머님은 괜히 안 가져도 될 죄책감까지 가지실 것 같아서…….”
“무월경이라고 했어?”
“응?”
짧게 되물은 지미가 입을 다물었다. 견 쪽을 보고는 있으나 생각은 다른 데 가 있는 듯했다.
저런 눈을 할 때의 지미를 잘 알고 있다. 의사이자 학자의 눈.
견이 스스럼없이 이것저것 다 털어놓을 수 있는 것도, 저 눈을 한 지미와 마주하면 성별과 핏줄을 떠나 그냥 신뢰가 가기 때문이었다.
한참 만에 지미가 말을 꺼냈다.
“이렇게 하자. 말 나온 김에 호르몬시터도 정식으로 검사를 받아보도록 해. 임신 가능성이 확실히 없는지 확인부터 한 후에 본격적인 치료법도 같이 의논해 보는 걸로.”
“치료?”
“결혼한다며. 임신은 안 해도 되지만 부부관계는 해야지. 평생 손만 잡고 잘래?”
견은 바위로 얻어맞은 표정을 했다.
“평생까지 참을 생각은 없었어…….”
“그래야지. 그랬다간 이혼당해도 할 말이 없지. 충분한 사유가 되니까.”
“결혼도 안 했는데 이혼이라니! 부정 타게! 나 이제 회사 그만둬가지고 본격적으로 대책을 찾아보려고 했어!”
“대책? 무슨 대책?”
“월경에 관해 적혀 있는 책이 모두 세 권이라고 했잖아. <울투라날개중형>하고 <예지미인>이 나왔으니 한 권 더 있을 거 아니야. 거기에만큼은 원인이나 근본적인 해결책 같은 게 나와 있지 않을까 싶어서…….”
“그쪽은 내 전공 아니니까 알아서 하고.”
지미가 한 손을 들어 말을 끊었다.
“호르몬시터한테 잘 얘기해서 날 잡아. 요새 신혼부부들 결혼하기 전에 기본으로 하는 검사 같은 거니까 부담 갖지 말라고 잘 말해주고.”
***
그 주 주말, 견과 모단은 여행을 가기로 했다.
월요일이 회사 창립기념일이라 2박 3일의 휴가가 생겼다. 여러 곳을 두고 고민한 끝에 견의 의견을 따라 희명리조트 오션으로 가기로 했다.
평생 다시 올 일은 없을 줄 알았던 곳에 도착한 모단은 조금 복잡한 기분으로 화려한 건물과 로비를 둘러보았다.
17년 전에 왔던 곳이 맞나 싶을 만큼 엄청나게 변해 있었다. 키가 커졌으니 상대적으로 작아 보일 만도 한데, 오히려 더 커진 것처럼 보였다.
“몇 층이에요? 방에서 바다 보여요?”
견이 여행 계획부터 예약까지 백수인 제가 다 알아서 하겠다고 나서서 모단은 장소만 알 뿐 아무것도 모르고 따라왔다.
“맨 꼭대기 층이고 바다는 당연히 보이죠. 하늘도 보일 거고.”
“맨 꼭대기층…… 이요?”
모단이 덜컥 굳었다.
희명리조트 오션의 맨 꼭대기 층에는 VIP를 위한 하나뿐인 객실, 프레지덴셜 스위트룸이 있다고 들었다.
침실만 세 개고, 바다를 향한 거실 창문은 통유리로 되어 있어 바다와 하늘 사이에 떠 있는 것만 같은 환상적인 뷰를 제공한다고.
‘돈을 낸다 해도 아무나 손님으로 받진 않는다던데……. 물론 회장 손주를 안 받을 순 없겠지만.’
1박 비용이 그녀가 짐작하는 가격에서 0 하나가 더 붙는다는 것까지 알았다면 놀라 턱이 빠졌을 터였다.
모단이 괜히 바짝 굳어 있는 사이 엘리베이터가 멈췄다.
얼마 되지 않는 짐을 내려준 직원들이 공손히 물러나고, 둘은 문을 열고 들어섰다.
“……!”
감탄사조차 나오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정말로 눈앞에 바다와 하늘이 한데 펼쳐졌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라 위의 쪽빛과 아래의 물빛이 더더욱 구분이 가지 않았다. 세상의 모든 푸른빛은 다 모여서 일렁이는 듯한 장관이었다.
그 고요하면서도 웅장한 광경 앞에 ‘환상적인 뷰’라는 수식어는 너무나도 하찮고 빈약하게 느껴졌다.
“와…….”
참았던 숨을 흘린 모단이 다가가 유리를 짚어보았다.
유리창을 가장한 모니터에서 가상의 화면을 내보내는 거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그만큼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그 뒤로 다가온 견이 부드럽게 허리를 안았다.
“우리한테 주는 선물이에요. 여기서 아무 생각 하지 말고 좋은 것만 누리고 푹 쉬다 가요.”
제 어깨에 턱을 얹고 편히 기대오는 견의 체온에 감싸인 채, 모단은 발아래로 내려다보이는 리조트의 전경을 감상했다.
프라이빗 비치를 감싸듯 곡선으로 지어진 건물과 그 뒤로 보이는 골프장, 지중해풍의 광장과 커다란 수영장까지 찬찬히 눈에 담은 모단이 빙글 몸을 돌렸다. 그러고는 견의 목에 팔을 감고 다짜고짜 입을 맞췄다.
깊은 키스를 나눈 후에 떨어져 선 모단이 코트를 벗어 옆의 소파에 걸쳐 놓았다. 뒤이어 니트를 끌어 올리고, 청바지까지 순식간에 벗었다.
“아니, 뭐, 오자마자 이러면…….”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누구보다 빠르게 코트를 벗던 견이 멈칫했다.
“짠. 어때요?”
훌렁훌렁 옷을 벗어 던진 모단은 속옷이 아니라 수영복을 입고 있었다.
심플하다 못해 얌전해 보이는 원피스 수영복이었는데, 한 바퀴 빙글 도는 순간 견은 컥 하고 헛숨을 뱉었다. 뽀얀 등이 많이, 아주 많이 드러나 있었다.
모단은 잔뜩 들뜬 눈으로 문을 가리켰다.
“여기 인피니티 풀이 온수라면서요. 겨울에도 비키니 입고 들어가도 된다던데. 나 수영은 잘 못 하지만 물은 엄청 좋아해요! 일단 수영장부터 가면 안 돼요?”
보름도 아닌데 코피 터질 뻔한 견이 지그시 코를 감쌌다. 모단은 그제야 견이 저만큼 흥겨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요? 물놀이 너무 기대돼서 집에서부터 수영복 입고 오는 사람 처음 봐요?”
“네…….”
많이 본 게 더 이상한 거 아니냐고 하려다가, 견은 두 팔을 올려 X 자부터 그렸다.
“안 돼요.”
“뭐가요?”
“수영복이 불량이잖아요. 등에 이따만 한 구멍이 났는데?”
견이 팔짱을 꼈다. 모단도 똑같이 삐딱한 포즈로 응수했다.
“갑자기 웬 유교 마인드? 이게 불량이면 비키니는 뭔데요?”
“아무튼 안 된다고! 거긴 다른 손님들도 있잖아요. 저기 안쪽에 스파 있으니까 거기서 놀아요.”
“헉! 룸 안에 스파까지 있…… 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스파는 스파고 수영장은 수영장이지! 빨리 수영복이나 갈아입고 나와요. 안 그러면 나 혼자 간다?”
얼마간 더 실랑이가 이어졌으나 집에서부터 수영복을 입고 온 자의 열정을 이길 도리가 없었다.
가운 등등을 챙기며 신나 하던 모단은 막상 옷을 갈아입고 나온 견을 보고는 움직임을 멈췄다.
잘 빚어진 너른 어깨에서부터 수영복 허리 위로 무심히 튀어나온 장골 윗부분에 이르기까지, 미끈하고 우아하게 좁아지는 선이 유려하기 그지없었다. 가슴이며 배에 꽉 짜인 근육들이 그려낸 섬세한 음영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문득 너무나도 아깝고 불안해졌다.
‘저 몸에 물까지 적셔서…… 다른 사람들한테 보여줘야 한다고?’
더불어 또 다른 걱정까지.
‘다이어트 더 빡세게 할걸. 슈퍼모델급 몸매 아닌 이상 저 옆에 붙으면 안 될 것 같은데…… 가뜩이나 물까지 닿으면 진짜 오징어 해산물 되는 수가…….’
모단의 의지가 급 수그러들었다.
“견이 씨, 우리 그냥 스파나 할까요?”
“갑자기 무슨 소리예요. 스파는 스파고 수영장은 수영장이지. 괜히 나 신경 쓰느라 하고 싶은 거 참고 그러지 말아요. 농담이었어요.”
“꼭 그래서라기보다는…….”
“막상 갈아입으니까 빨리 가고 싶네. 가요.”
“농담이라면서 웬 목욕가운을 입히고 난린데요?”
“일단 걸치고 있어봐요. 수영장에 아무도 없으면 벗겨줄게요.”
“당장 안 거둬요? 누가 보면 방문 잠겨서 못 들어가고 배회하는 사람인 줄 알겠네!”
“걱정 마요. 아무도 안 봐요. 어차피 엘리베이터도 최상층 전용이고.”
“더헉! 그 넓은 엘리베이터를 우리만 쓰는 거였…… 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수영장에 있는 손님은 다정해 보이는 노부부와 서너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를 데리고 온 부부가 다였다.
그래도 남자가 있으니 안 된다고 우기던 견은 모단이 작작 하라며 정색을 하고 나서야 가운 앞섶을 놓아주었다.
막상 물에 들어간 후에는 다른 건 아무것도 신경 안 쓰고 실컷 놀았다.
물에 겨우 뜨는 게 다인 모단에게 수영을 가르쳐 주겠다며 나섰던 견은 빠르게 포기하고 인간 튜브가 되는 길을 택했다.
모단이 편히 떠 있을 수 있게 잘 받쳐 주다가도 물속에서 은근슬쩍 스킨십을 한다거나 발목을 잡아당겨 물을 먹게 만들곤 했다.
그때마다 젖은 머리카락을 한 움큼씩 잡히면서도 견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이 하도 천진난만해 모단도 덩달아 웃을 수밖에 없었다.
“목말 태워줄까요? 저기 저 애기처럼.”
수영장 가장자리에 앉아 잠시 쉬는 동안, 견이 저 멀리 아빠의 어깨에 앉아 까르르 웃고 있는 아기를 가리켰다.
“아뇨. 나는 너무 크고 너무 늙었고 너무 무겁고…….”
모단이 주절대는 사이 이미 물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간 견이 모단의 다리를 제 어깨에 얹고 두 손으로 단단히 붙잡았다.
“꽉 잡아요.”
견이 그대로 허리를 폈다. 앉아 있던 자세 그대로 쑤욱 올라가게 된 모단이 꽥 비명을 내지르며 얼결에 견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정말 거기밖에 잡을 데가 없어요? 오늘 너무 잡네.”
“그러게 왜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도 안 주고…….”
간신히 균형을 잡은 모단이 손에서 힘을 뺐다. 시야가 확 높아지자 풀 너머의 바다가 더 멀리 보였다.
그 순간, 어느새 어둑해진 수영장에 팟 하고 조명이 들어왔다. 일렁이는 물 위로 색색의 불빛이 조각조각 쏟아지며 이국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새삼 설레어 감탄하던 모단이 견을 내려다보았다.
“나 무겁죠?”
“그런 건 안 물어봤으면 좋겠어요.”
모단이 장난스레 견의 귀를 잡아당겼다. 낮게 웃은 견이 팔에서 힘을 풀었다.
“이제 들어가요.”
“으아악!”
어쩔 틈도 없이 물속으로 풍덩 빠졌다. 얼마 허우적거리기도 전에 단단한 팔이 허리를 감아 끌어당겼다.
숨을 참느라 앙다문 모단의 입술 위로 견의 입술이 닿았다. 물거품인 양 간지럽히더니 기어이 틈을 벌리고 파고들어 왔다.
서로가 서로에게 깊숙이 숨을 불어넣어 주며, 둘은 뜨지도 가라앉지도 않는 따스한 우주 속에서 한참을 유영했다.
저녁 식사는 밖에서 하고, 부른 배도 꺼뜨릴 겸 바닷가를 걸었다. 맵찬 바람이 불어서 점점 더 꼭 붙게 됐다.
“눈 오는 것 같은데요?”
“그러네.”
견이 허공에 손을 내밀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던 눈송이들이 선득한 찰나를 남기고 사라졌다.
“감기 걸리겠다. 그만 가요.”
견은 제 코트 주머니 안에 있는 모단의 손을 꼭 잡고 걸음을 조금 빨리했다.
로비로 들어선 그는 엘리베이터가 아닌 다른 쪽으로 향했다.
“어디 가요?”
“가보고 싶은 데가 있어서요.”
어리둥절하며 따라가던 모단은 곧 어디로 가는지 깨닫고 눈을 내리깔았다.
그때 그 연회홀.
잔혹한 줄 알았던, 실은 누구보다 상냥한 운명이 등을 떠밀었던 바로 그곳.
예약이 없어서인지 연회홀이 있는 층은 최소한의 조명만 켜져 있고 복도부터 캄캄했다.
둘은 언젠가 폐교의 울타리를 넘어갈 때처럼,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데도 괜히 눈치를 살피며 손을 잡고 걸었다.
비상계단 입구 앞.
급히 뛰어 내려오던 소년과 울며 걷던 소녀가 부딪혀 주저앉았던 곳에서 둘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걸음을 멈췄다.
“모단 씨, 이거 받아요.”
“뭔데요?”
워낙 대수롭지 않은 말투인 데다, 다른 생각에 잠겨 있던 모단은 아무 의심 없이 손을 내밀었다.
“그 손 말고.”
견이 내밀어진 오른손 대신 왼손을 잡아 올리더니, 약지에 반지를 끼워주었다.
그 동작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담담해서, 모단은 한참 늦게야 놀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결혼반지는 우리가 처음 만난 곳에서 주고 싶어서.”
심장에서 쿵, 소리가 났다. 안에서부터 울려 귓속을 선명히 때렸다. 강한 정전기 같은 게 스친 것 같기도 했다.
“그때 그렇게 내 인생에 들어와 줘서 고마워요.”
어두운 복도에 하나씩 불이 켜지고 환해지는 것만 같았다. 그날 그때처럼 그의 등 뒤에 샹들리에가 반사해 낸 빛들이 가득 쏟아지는 듯 보였다.
“앞으로도 계속 머물러 줬으면 좋겠어요.”
눈앞에 펼쳐진 동화 같은 착각이 아픈 기억을 살그머니 문질러 주었다.
동시에 견의 손이 모단의 뺨을 애틋하게 쓸었다.
저도 모르게 울고 있었나 보다.
“나야말로…….”
모단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영롱한 반지 옆에 눈물방울이 아슬아슬하게 떨어져 흘렀다.
그때 혼자 여기까지 올 용기를 끝끝내 내지 못했다면 어땠을까.
그가 계단을 뛰어 내려와 문을 열어젖히지 않고 줄곧 방에만 머물러 있었다면 어땠을까.
다른 사람과 헤어지지 않았더라면, 이직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다시 만난 날, 차에서 내려 싸늘하게 멀어지는 그의 팔을 잡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이 복잡미묘하게 벅차오르는 마음을 눈물로 다 쏟아내려면 밤새 울어도 모자랄 것 같아, 모단은 대뜸 말했다.
“나랑 또 부딪혀 볼래요?”
“네?”
“이제부턴 이렇게.”
발돋움을 한 모단이 두 손으로 견의 뺨을 감싸고 입을 맞췄다.
야릇한 소리를 내며 붙었다 떨어지는 포실한 입술을 바라보다가, 견은 눈부신 듯 이마를 찡그렸다.
그렇게 불이 붙었다.
CCTV가 있거나 말거나, 엘리베이터 안에서부터 둘은 서슴없이 서로의 입술을 탐닉했다. 문이 열리고 닫히는 몇 초의 시간도 아까울 만큼 안달이 났다.
급한 대로 코트부터 떨어뜨리고, 견은 모단의 엉덩이 아래를 두 팔로 받쳐 가뿐하게 안아 올렸다. 모단은 팔과 다리로 그를 휘감고 꼭 매달렸다.
“어떤 침대로 갈까요?”
“……제일 가까운 침대요.”
견의 입꼬리가 만족스레 휘어졌다.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침실로 들어가 불도 켜지 않고 뒤엉켜 무너졌다. 몸을 감싸고 있던 옷가지가 낙엽처럼 맥없이 떨어졌다.
모단이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오늘은, 다 해요.”
막 부딪혀 밀려들어 오려던 견의 입술이 바로 앞에서 멈췄다.
그 위로 은밀한 속삭임이 훅 끼얹어졌다.
“아직 하나 남았잖아요.”
이미 후크가 풀어헤쳐진 속옷 말고, 마지막으로 하나 남은 것.
그리고 암묵적으로 미뤄둔 약속을 말하는 거였다.
그동안은 늘 그랬다. 매번 오늘은 정말 못 참을 것처럼 굴지만, 항상 끝을 보기 전에 참아내곤 했다.
아마 들은 이야기였다면 안 믿었을 거다. 어떻게 그런 상황까지 가서 ‘하지 않을’ 수가 있느냐고.
처음엔 모단도 그랬다. 거친 속내가 다 보이는 눈을 하고서 참는 게 경이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다 깨달았다.
제게 매력이 없어서 밀어내는 것이라 오해했던 것 때문에 신경을 쓰는 거라는 걸.
아예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힘들게 참을 일도 없을 텐데, 그러지 않음으로써 갖고 싶은 마음과 걱정하는 마음이 모두 진심임을 보여주고 있다는 걸.
그걸 알고 나자 더욱 애틋해졌다.
그래서 이제는 제가 먼저 나서기로 했다.
“견이 씨, 사실은요…….”
지금까지와는 어딘가 달라 보이는 모단의 분위기에 견은 당황했다.
긴장으로 굳은 목덜미에 나긋한 손길이 감겼다.
더불어 생각지도 못했던 말들이 흘러들어 왔다.
검사 얘길 전해 들은 후에 시간을 비워보겠다고 해놓고, 몰래 지미에게 연락을 해서 견 모르게 병원에 갔었다고.
그가 옆에 있으면 솔직하게 말씀해 주시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아 그랬다고.
차분하려 애쓰지만 긴장한 게 눈에 보이던 모단에게 지미가 해준 말은 그랬다.
아무 이상 없다고. 무월경이라는 증상이 납득이 안 될 만큼 건강하다고.
혹시나 이번에야말로 원인을 알아내지 않을까, 그래서 고칠 수 있다는 말을 듣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했던지라 순간 눈물이 핑 돌 만큼 속이 상했다.
그러나 이어진 말에 눈물이 쏙 들어갔다.
“건강한 성인 남녀고, 본인들은 물론 양쪽 집안에서도 결혼에 동의하고 있고, 만약 아이가 생긴대도 충분히 책임질 여력까지 되고. 그러니까 관계를 가져도 전혀 문제가 없을 거라는 게 의사로서의 소견입니다.”
“……예?”
“성관계 시에는 일상생활에서 분비되지 않는 호르몬들이 나오니까, 저는 그게 일종의 치료가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성장호르몬이나 여성호르몬 같은 호르몬 요법처럼. 하지만 견이는 결사반대하더라고요. 모단 씨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지 몰라서 불안하다면서.”
그가 저를 아끼는 마음은, 느끼는 것보다도 훨씬 더 깊고 깊었다.
“난 분명 괜찮을 거라는 입장이에요. 연인으로서, 부부로서 응당 누릴 수 있는 것들을 포기할 만큼의 위험성은 전혀 없다고 보는 거죠. 과학적인 말은 아니지만 음양의 조화라는 것도 있고.”
듣고 보니 그랬다.
월경, 그리고 무월경.
그 두 단어를 곱씹으며 며칠을 잠 못 이루고 뒤척이다가 맘을 먹었다.
“말도 없이 혼자 다녀온 건 정말 미안해요.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고모님 말씀이 맞는 것 같아요.”
모단은 굳어버린 견의 뺨을 다정히 쓰다듬었다.
“그래도 걱정할 것 같아서 약도 받았어요. 호르몬 요법 받고 나서 간혹 힘들어하는 환자들이 있는데 그럴 때 쓰는 약이래요.”
“약이라니…….”
“그러니까 이제 그만해요. 견이 씨야말로 괜히 나 신경 쓰느라 하고 싶은 거 참고 그러지 말라고요. 난 정말 괜찮고 아무렇지도 않을 거니까.”
그래도 견의 표정은 좀처럼 풀어지지 않았다.
두 개의 자아가 치열히 전투를 벌이고 있는 중인 듯, 눈썹과 턱에 힘이 들어갔다 풀어졌다 했다.
결국 모단은, 차라리 그의 이성을 똑 잘라 버리기로 했다.
“처음인데…… 꼭 내가 벗게 만들어야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