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르몬시터-84화 (84/86)

#84. 처음이었다. 천국이었다

2018.02.18.

투명한 유리 너머, 이지러진 달빛이 바다 가득 쏟아졌다.

달빛만큼이나 보얀 모단의 몸 위에는 달떠 이지러진 눈빛이 흩뿌려졌다.

“아…….”

다붓하게 닿은 입술을, 소담한 귓불을, 젖빛 목덜미를 머금던 견의 입술이 밀어를 흘렸다. 혈관을 타고 가닥가닥 퍼져 나간 목소리가 온몸을 휘감았다.

손길이 스칠 때마다 어깨가 옴찔거렸다. 헛숨이 짧게 끊어졌다.

“……단아. 정모단.”

벅찬 마음이 담뿍 담긴 목소리가 그녀를 쫓았다.

사람 환장하게 도발할 땐 언제고, 정말 괜찮겠느냐고 열 번쯤 물었더니 한 대 때릴 기세로 짜증까지 낼 땐 언제고.

막상 제가 정말로 들이대니 눈도 제대로 못 마주치며 끙끙대는 게 미치도록 사랑스러웠다.

이렇게나 집요해지게, 점점 더 정신을 못 차리게 만든다.

모단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면 견은 끝까지 쫓아가 눈을 맞췄다. 차라리 감아버리면 슬며시 혀끝을 내어 속눈썹을 핥았다.

손을 올려 얼굴을 가릴라 치면 손 사이에 제 손가락을 바듯이 밀어 넣어 깍지로 눌렀고, 베갯잇에 뺨을 묻을라 치면 제 손을 대어주었다.

모단은 결국 견에게 모든 걸 내맡기고 매달렸다.

힘이 들어갈 때마다 푹 파이는 등골이, 저를 그러안은 팔에 솟은 힘줄이 손바닥을 타고 고스란히 전해졌다.

하나로 이어진 채, 견은 모단의 가슴놀이에 귀를 대었다. 달근달근 노니는 소리가 귓가에 여울진다.

견의 눈동자가 일순 푸르게 보일 만큼 짙어졌다가 소용돌이쳤다. 찡그린 미간으로 땀방울이 굴렀다.

뜨겁게 뒤엉킨 숨, 열락의 향이 괴어올랐다.

눈앞에 아까 본 눈송이들이 후드드 떨어졌다. 아까 본 파도가 어우렁더우렁 일렁였다. 곧 저를 덮치리라는 것을 알았다.

견이 낮게 신음하고, 모단의 허리가 아찔하게 젖혀졌다.

잡힐 듯 말 듯 너울대던 파도 속으로 순식간에 잠겨들었다. 숨도 못 쉬게 꽉 조여들었다가 파삭 깨어졌다.

영롱한 잔재가 산산이 쏟아졌다. 영영 헤어 나오지 못할 것처럼 아득한 전율이 발끝부터 머리끝까지를 몇 번이고 훑었다.

견이 무너지듯 내렸다. 모단은 기꺼이 받아 안았다. 둘은 꽉 달라붙은 채로 한동안 숨을 골랐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을 맞췄다.

달콤하고 애틋한 맛이 꽃봉오리처럼 터져 물들었다. 코끝이 알싸해졌다.

처음이었다.

천국이었다.

찰랑.

견의 손길을 따라 휘돌아온 물이 모단의 가슴께를 잘박잘박 간지럽혔다.

모단은 절로 녹작지근해지는 몸에서 스르르 힘을 뺐다. 뒤를 받치고 앉은 견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스파룸의 천장은 유리로 되어 있었다. 맨 꼭대기 층이라서인지 별이 촘촘히 박힌 밤하늘이 바로 앞에 있는 것처럼 가까이 보였다. 조금씩 호흡이 느려지며 나른해졌다.

“괜찮아요?”

풀어지려던 모단은 다시 울컥했다. 괜찮아 보이느냐는 말이 목까지 치밀었다.

한 번만 더 건드렸으면 젖 먹던 힘까지 쥐어짜서 걷어차 버리려고 했는데, 일말의 양심은 있는지 소중히 보듬어 안더니 따뜻한 물이 가득 찬 욕조에 넣어주어서 간신히 참고 있는 중이었다.

“정말 괜찮은 거죠?”

아무 말도 없으니 걱정이 커지는지 견의 목소리가 슬슬 기어들어 간다.

뒤에서부터 감아 안은 팔도 침대 위에서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얌전했다. 간혹 따뜻한 물을 동그란 어깨 위에 끼얹어주는 게 다였다.

“……두 번까진 괜찮았어요.”

“그럼 지금은요?”

해맑은 질문이 화를 돋웠다. 모단은 잠자코 손을 올려 잡히는 대로 견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다.

“아! 미안해요…….”

한껏 기죽은 목소리가 어깨를 타고 넘어왔다.

“경험 부족이라 그래요. 그러니까…….”

오싹, 모단의 척추를 타고 불길한 한기가 흘렀다.

부르돋는 충동이 등 뒤에서 고스란히 느껴졌다.

“경험치를 빨리 올려야겠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모단은 창문 밖 바다까지 헤엄쳐 갈 기세로 몸을 뺐다. 그러나 얼마 멀어지지도 못하고 커다란 손에 골반을 꽉 붙들려 다시 끌려왔다.

“이럴 거면 걱정을 하지를 말던가!”

모단이 난리통에 얼굴까지 튀어버린 물을 어푸푸 닦아내는 사이, 먼저 일어나 탕 밖으로 나간 견이 옆에 놓아두었던 샤워가운을 대강 걸치고 타월을 집어 들었다.

“나와요. 닦아줄게.”

“안 나가요!”

“아직 침실 두 개 더 남았잖아. 체크아웃하기 전에 다 써봐야죠. 안 그래요?”

“안 그래요! 안 그렇다고! 애초에 쓸데없이 넓다 했어! 사람은 둘인데 왜 침대는 세 개나 있는 거야!”

물속에 옹송그리고 앉아 바락바락 외쳐 대는 모단을 감상하던 견이 고개를 모로 틀었다.

“나오기 싫어요? 그럼 여기서…….”

“야! 백겨어어어언!”

둘째 날에는 바깥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다.

새벽이 되어 푸르러지고 해가 오르는 것도, 깜박 잠들었다 일어나 보니 펑펑 쏟아지던 눈도, 밤이 되고 달이 뜨는 것도 모두 창문 너머로만 보았다.

둘이 꼭 붙은 채로.

정말로 괜찮다는 걸 확인하고 나자 견은 그야말로 거침이 없어졌다. 세상에서 가장 천진한 표정을 하고서 잘도 가장 어른스러운 장난을 쳤다.

그러다 장난이 아니게 되고, 엉망으로 뒤엉킨 채 하늘 위까지 올라가 구름 같은 천국에 폭삭 떨어져 파묻히기를 반복했다.

시트로 몸을 휘감고 소파에 늘어져 있던 모단이 저 멀리서 물을 마시고 있는 견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중얼거렸다.

“저 망할 놈의 체력…….”

자진해서 체중계 위에 올라가 보고 싶어진 적은 처음이었다. 최소 5㎏은 빠진 것 같았다.

체력도 좋고 귀도 밝은 견이 한 손에 컵을 들고 돌아오며 대꾸했다.

“그러게 평소에 운동 좀 하지 그랬어요. 헬스장에 어느 순간 안 나타날 때부터 알아봤지.”

소파에 앉은 견이 섹시한 울대뼈를 자랑하듯 고개를 뒤로 젖히고 컵에 든 물을 입에 머금었다. 그대로 몸을 숙여 모단의 입술에 포개고는 시원함을 흘려 넣었다.

젖은 입술을 손끝으로 닦아준 견이 끈적끈적 갈구하는 눈빛으로 물었다.

“그래서, 나 싫어요……?”

방금 물을 마셨음에도 모단은 입안이 바싹 마르고 목이 타는 것만 같아 눈을 감아버렸다.

차라리 싫었으면 좋겠다.

힘들어 죽겠는데 마냥 싫지만은 않은 내가 싫다…….

마지막 날 아침.

룸서비스로 들어온 조식을 두어 번 입에 댄 모단이 포크를 내려놓았다.

“입이 깔깔해서 안 넘어가네요. 그만 먹을래요.”

“다른 걸로 시켜줄까요?”

“아니에요. 이따 점심 먹으면 되죠, 뭐.”

모단은 끄응 기지개를 켰다. 잠을 제대로 못 자서 그런지 입맛이 없고 몸이 무거웠다.

“조금만 더 먹지…… 알겠어요. 그럼 서울 가서 몸보신 시켜줄게요.”

“몸보신 따위 하나봐라. 먹여놓고 또 축내려고 그러는 거잖아요.”

“쓸데없이 예리하기는.”

따뜻한 차 한 잔을 쥐여주며 소파에 앉아 있으라고 한 견이 혼자서 짐을 챙기고 체크아웃 준비를 했다.

그사이 모단은 꿈처럼 아름다운 풍경을 조금이라도 더 눈에 담으려 했다.

그런데 아랫배에서부터 무지근하게 번지는 불쾌한 통증과 두통 때문에 도저히 집중이 되질 않았다.

혹시 정말로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건가 싶어 슬그머니 겁이 났다.

‘아냐. 그렇게 들볶였으면 누구라도 이 정도 후유증은 있는 게 정상이지.’

견이 알면 걱정할까 봐 몰래 진통제 한 알을 찾아 삼켰다. 조금 나아지는 것 같기도 했다.

호텔을 나서 차에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모단은 조수석에서 기절하듯 잠에 빠졌다.

피곤하기도 했겠지 싶어 양심상 푹 자게 내버려 둔 견이었으나, 너무 오래 잔다 싶었다.

“모단 씨, 일어나요. 서울 거의 다 왔어요. 식당 들렀다 가는 게 낫겠죠? 배고프지 않아요?”

그제야 모단이 슬쩍 몸을 뒤척였다. 나직이 앓는 소리가 새었다.

“모단 씨?”

힘들게 눈을 뜬 모단이 손짓했다.

“잠깐 차 좀 세워줄 수 있어요? 속이 안 좋아서.”

견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마침 저 앞에 휴게소가 보였고, 얼른 차선을 바꿨다. 모단이 애써 미소를 지었다.

“견이 씨 말대로 아까 아침 더 먹을 걸 그랬나 봐요. 안 하던 멀미를 다 하네요.”

굳은 얼굴로 차를 세운 견이 먼저 내렸다. 금방 화장실만 다녀올 테니 차에 있으라는 말은 꺼낼 틈도 없었다.

“여자화장실 안까지 따라올 건 아니죠?”

모단은 부러 농담을 던지며 차에서 내렸다. 한 발짝 내딛자마자 취한 것처럼 머리가 핑 돌았으나, 옆에 선 견을 의식해 꼿꼿하게 걸으려 애썼다.

막상 화장실로 들어가자 울렁대던 토기는 언제 그랬냐는 듯 가라앉아 있었다. 바로 나가기도 뭐해서 모단은 가까운 칸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후.

모단은 살면서 세 손가락 안에 꼽고도 남을 만한 크나큰 충격에 빠졌다.

***

‘말도 안 돼.’

점심도 마다하고 집으로 돌아온 모단은 심각한 고민에 휩싸였다.

아까 휴게소 화장실에서 본, 속옷에 꽃잎처럼 묻어 있던 갈색 흔적.

‘설마.’

양도 적고 색도 애매했다. 그저 경미한 출혈이 생긴 거라고 여기는 쪽이 더 타당한 듯도 했다.

혹시라도 견의 차에 무슨 흔적이라도 남길까 봐 편히 앉지도 못하고 바짝 긴장하고 온 탓인지 온몸이 다 뻐근했다.

침대에 철푸덕 주저앉아 지친 몸을 뉘려 했을 때였다.

울컥.

태어나 처음 느껴보는 감각이 허리 아래에서 번졌다.

세상에서 가장 찜찜한 뜨듯함.

모단은 튕기듯 일어섰다. 그러고는 바보처럼 입을 벌렸다.

“허…….”

하얀 이불 위에 새빨갛게 남은 혈흔이 눈을 찔렀다.

이 정도의 하혈이면 응급실에 가야 했다. 그리고 진단서를 떼서 짐승 같은 백견을 고소해야 마땅했다.

근데 그게 아니라는 게 본능적으로 느껴졌다. 현기증이 일었다.

‘이건, 분명……!’

“모단아, 빨랫감 있으면 지금…….”

마침 방문을 열고 반쯤 몸을 내밀었던 혜숙이 멈칫했다.

굳어버린 모단의 시선을 따라 침대를 내려다본 혜숙의 눈꼬리가 한껏 치켜 올라갔다. 쿵쿵 쳐들어온 그녀가 딸의 등짝을 찰싹 내려쳤다.

“이놈의 기지배는 나이가 몇 살인데 새는 줄도 몰라, 칠칠맞지 못하게!”

“어, 엄마. 그게, 이거…….”

“가뜩이나 겨울 이불이라 잘 마르지도 않는데, 어휴! 네가 빨아, 이 기집애야…… 어?”

서슴없이 구박을 퍼붓던 혜숙이 덜컥 멈췄다.

그렇게까지 세게 때리진 않은 것 같은데, 평소보다 더 모질게 말한 것 같지도 않은데 모단의 눈에서 눈물이 펑펑 쏟아지고 있었다.

“엄마, 나…….”

***

“이게 뭐예요?”

며칠 후, 견은 만나자마자 자그마한 케이크와 꽃다발을 내밀었다.

“초경 시작하면 초경파티 해주는 거라면서요.”

“초경파티…….”

서른 넘어 듣기에는 너무나도 낯부끄러운 말에 모단의 귓가가 꽃다발 속 장밋빛과 똑같아졌다. 뻔뻔하기로는 어디 가서 지지 않는 견도 이런 상황은 서름한지 같이 빨개졌다.

“고마워요. 엄마에게 받은 꽃 옆에다 같이 꽂아둘게요.”

“어머님도 주셨어요?”

“네.”

모단이 주섬주섬 케이크를 꺼내고 견이 초를 꽂았다.

“예전에 제가 숨기다 못해서 초경한다고 거짓말했을 때 엄마가 너무 좋아하시면서 떡하고 미역국 해주셨던 게 계속 여기 쌓여 있었거든요. 이제 내려갔어요.”

모단이 명치께를 손으로 가리키며 웃었다.

“엄마가 어떻게 그렇게 감쪽같이 속였냐고, 언제까지 속일 생각이었냐고 그러면서 화내시다가 나중엔 미안하다고 우시더라고요. 딸내미 마음고생하는 거 하나 몰랐다고.”

언제 봐도 참 애틋한 모녀라고 생각했다.

견은 모단의 머리를 다독다독 쓰다듬어 주고는 촛불을 가리켰다. 모단이 수줍게 웃고는 촛불을 후우 불어 껐다.

“근데, 어머님도 모자라서 나까지 속여요?”

“내가 뭘요?”

“고모가 그러시던데. 약 같은 거 준 적 없다고.”

“아, 그거요.”

모단이 최대한 불쌍해 보이게끔 어깨를 움츠렸다.

“거짓말해서 미안해요. 견이 씨 마음 편하라고. 여차하면 보여주려고 종합비타민 몇 알 가지고 갔었는데…….”

“쓸데없이 치밀하기는.”

밉지 않게 눈을 흘긴 견이 웬 상자를 하나 더 내밀었다.

“아마 어떤 남자한테도 이런 선물은 받아본 적 없을 텐데, 오해 없이 받아줬으면 좋겠어요.”

“뭔데 사설이 길어요?”

상자를 받아 뚜껑을 열어본 모단의 눈이 동그래졌다.

생리대 한 팩과 예쁜 파우치, 생리통이 심할 때 배나 허리에 붙이는 핫팩과 허브티까지 가지런히 들어 있었다.

“남자한테 받기에는 조금…… 그런가요?”

모단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뇨. 너무 좋은데요. 실용적이면서 예쁘고. 내 남자친구 되게 세심하구나 싶어서 또 반했어요.”

견이 안심하는 눈으로 웃었다.

“근데 모든 여자가 좋아하진 않을 수도 있겠죠?”

“음…… 사람에 따라서는 좀 민망해할 수도 있겠죠? 가까운 사이가 아니라면 더 그럴 거고. 속옷 선물이랑 비슷하려나?”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근데 전 생리대라는 물건이 감춰야 하는 부끄러운 게 아니라 대부분의 여자들에게 필요한 생필품이라 다름없다고 생각하는 쪽이라.”

“그렇구나.”

“잠깐. 근데 그런 건 왜 물어요? 다른 여자들이 좋거나 말거나 그런 건 왜?”

“별 뜻 없어요. 모단 씨를 포함한 일반 여성들이 이런 선물에 대해서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했던 거니까요.”

“그러니까 그게 왜…….”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신기하지 않아요?”

견이 자연스럽게 말을 돌렸다.

“이렇게 거짓말처럼 모단 씨가 월경을 시작하게 된 게요. 정말로 음양의 조화, 뭐, 그런 걸까요?”

“그럴 수도 있겠지만 난 조금 다른 생각이 들었어요.”

“어떤?”

“내가 해야 할 월경을, 내가 겪었어야 할 어떤 불편들을 견이 씨가 대신 겪어준 것 같아요. 그날 그렇게 부딪히게 돼서요.”

견은 할 말을 잃은 눈이었다. 그런 생각까진 해보지 않은 듯했다.

“17년 동안 월경까지 대신 해준 남잔데 어떻게 책임을 안 져. 평생 데리고 살아야지. 안 그래요?”

모단이 견의 손을 덥석 잡더니 그 손 위에 상자 하나를 박력 넘치게 올렸다.

“큰 빚을 졌어요, 내가. 살면서 두고두고 갚을게요.”

“뭐예요, 이게?”

“반지에 비하면 약소하지만 견이 씨 생각나서 샀어요.”

심플한 가죽시계였다. 차고 있던 시계를 풀고 바로 새 시계를 찬 견이 이리저리 한참을 살펴보다 환히 웃었다.

“완전 내 취향인데. 나 안 그래도 이렇게 빈티지한 갈색 줄 찾고 있었거든요. 정말 고마워요.”

자리에서 일어난 그가 모단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고는 슬슬 수작을 부리기 시작했다.

“지난번엔 넥타이로 목을 묶었으니 이번엔 시계로 손목을 묶어보겠다는 뜻이죠?”

“한국어를 짱뚱어로 번역하는 소릴 하고 있어.”

씨알도 안 먹히는 통에 오기가 치민 견이 노선을 틀었다.

“아니면 24시간 동안 자기만 생각하라고?”

“지금은 안 그런 것처럼 말하네? 그새 좀 식었니?”

견은 그냥 침대 위에서나 이겨먹기로 하고 다짜고짜 뺨을 끌어다가 쪽 입을 맞췄다.

복층 구조로 이루어진 작은 카페의 2층에는 둘밖에 없었기에 모단도 선선히 받아주었다.

모단의 손을 제 무릎 위에 놓고 만지작거리며 뭔가를 생각하던 견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럼 혹시…… 난 이제 변하지 않게 될까요?”

왠지 그럴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섣불리 확신 어린 대답을 내기가 어려웠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말이 떠오르기도 했고, 근거 없는 미신이지만 괜히 입방정을 떨면 부정이라도 탈 것 같달까.

“이번 보름에 한 번 볼까요? 모단 씨 없어도 괜찮은지?”

“괜찮을 거예요. 안 괜찮으면 또 어때요? 난 무탈이도 좋아요. 영영 백견이 없어지는 것도 아니고.”

모단은 일부러 심상한 투로 답했다. 견은 잠잠히 웃었다.

“참, 고모가 월경 완전히 끝나고 나면 병원 한번 들르래요. 아예 앞으로는 고모에게 정기검진 받았으면 좋겠다고 하시네요.”

“영광이네요. 전에 다니던 병원에 마지막으로 한 번 다녀오고 나서 갈게요.”

“그래요.”

돌아온 보름, 견은 아이로 변하기는커녕 아예 코피조차 나지 않았다.

반면 모단은 보름이 되기 며칠 전부터 예민함, 우울함, 공격성, 컨디션 난조, 편두통, 불면증, 식욕 및 성욕 극대화 등 그동안 견이 겪었던 모든 것을 겪었다.

거기에 코피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스케일의 출혈과 극심한 월경통까지.

“와아이씨, 옘병……!”

모단은 뭐라 말할 수 없는 억울함에 휩싸였다.

그동안 이런 걸 대신 겪어줬구나 생각하면 성은이 망극하면서도, 아랫배를 비틀어 짜는 통증과 함께 뜨거운 굴을 낳는 감각을 체험하는 순간에는 배은이 망덕하게도 이거 다시 가져가라고 머리채를 잡고 싶어졌다.

더불어 뼈저리게 깨달았다.

저는 더 이상 호르몬을 지배하는 용사가 아니라는 걸.

장렬히 백견 왕자를 구해주고 그와 결혼하는 대가로, 호르몬 마녀의 노예가 되어버렸다는 걸.

***

어린이집에 출근한 모단은 평소에 다름없이 등원하는 아이들을 맞았다.

“서율이 왔어? 와아, 머리핀 너무 예쁘다.”

“동후 왔네? 어제는 공룡 꿈 꿨다더니, 오늘은 무슨 꿈 꿨어?”

출근시각에 맞춰 아이들도 한꺼번에 몰려오는 터라 정신이 없었다. 그래도 미소를 유지하며 능숙하게 아이들을 맞이하고 있는데, 원장실에서 호출이 왔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원장이 얼른 모단의 손을 잡아끌었다.

“선생님, 다른 게 아니고 방금 동후 어머니가 들어오셔서 뭘 물어보고 가셨는데.”

“네. 무슨 일인데요?”

“선생님, 혹시…….”

안절부절못하던 원장이 소곤거렸다.

“임신하셨어요?”

“느에엑?”

초경 시작한 지도 얼마 안 됐습니다만!

차마 그 말은 못 하고 모단은 홰홰 고개를 저었다.

“아뇨. 전혀 아닌데요. 근데 그걸 동후 어머니가 여쭤보셨다고요?”

“나도 황당하더라고요. 다짜고짜 며칠 전에 산부인과에서 선생님을 봤다면서, 의사가 축하한다는 말을 하는 것까지 똑똑히 들었다는 거예요.”

듣자마자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이제까지 다니던 산부인과에 들러 진료기록을 받아 나올 때 본 모양이다.

몇 년간 봐주었던 의사는 월경이 시작됐다는 말에 고마울 정도로 기뻐했다. 진료실 밖까지 배웅을 나와서 축하한다고 해주었었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선생님 애 가지신 거 아니냐고, 입덧한다거나 결혼한다면서 당장 그만두신다고 하는 거 아니냐고 걱정이 태산이시더라고요. 어차피 얼마 안 있으면 7세 졸업인데 축하는 못 해줄망정 말을 꼭 그렇게…….”

주절주절 늘어놓던 원장이 대답 없는 모단을 살피다가 덜컥 굳었다.

“선생님, 아닌 게 아니라 정말 임신하신 거예요?”

“예? 그게…….”

산부인과에서 임신 말고 뭘 해야 의사한테 축하를 받을 수 있을까 열심히 고민하고 있었는데, 원장의 오해가 폭발했다.

“세상에나, 그럼 진작 말씀을 하셨어야죠! 왜 감추고 그런대. 축하해요, 선생님! 몸은 괜찮아요? 초기에 더 조심해야 하는데 어떡하지? 가뜩이나 손도 귀한 집안인 것 같은데…… 헙.”

“예? 손도 귀한 집안…… 이요?”

뭘 아는 듯한 말투에 모단의 눈매가 가느스름해졌다. 뭔가 싸했다.

“저…… 말이 나와서 말인데, 사실 예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정 선생님이랑 백견 씨랑 사귀는 사이인 거. 백지협 이사님하고 백견 씨, 외아들 둘밖에 없어서 손이 귀한 집이구나 했던 거고…….”

“딸꾹.”

모단은 뒤를 홱 돌아보았다. 원장실 문이 한 뼘쯤 열려 있었다.

거기 있는 거 다 안다는 눈으로 뚫어져라 쳐다보자 끼이이 문이 마저 열리더니 연경과 효림이 얼굴을 내밀었다.

“일부러 들으려고 한 건 아닌데…… 볼일이 있어서 왔다가.”

“저도요.”

모단은 예감했다.

어차피 여기서 시치미를 딱 떼어봤자 ‘근데 이거 확실하진 않으니까 너만 알고 있어’로 시작하는 소문이 널리널리 퍼질 것임을.

그리고 아마도 한 바퀴 돌아 자신에게 올 때쯤엔 ‘지인한테 들은 건데 확실해’가 되어 있을 것임을.

안 그래도 견이 저 그만두면 다른 놈들이 더 신나게 집적거릴 것 같다며 사내 전체메일로 둘이 사귄다고 소문내고 관두겠다는 걸 뜯어말린 게 무색해졌다.

“백견 씨하고 저하고 만나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모두가 뜨아악 했다. 심지어 알고 있었다던 원장마저도.

“임신은 아닙니다. 그…… 다른 검사를 받으러 갔던 거구요. 심각한 병인 줄 알았는데 아니어서 축하한다고 하신 거고, 그러니까…….”

어떻게 말을 맺어야 하나 고민하다가, 모단은 오늘따라 아침밥을 잔뜩 먹어 볼록해 보이는 배를 슬그머니 가렸다.

“이 배는 그냥 제 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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