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 내 애인 불렀어요
2018.02.11.
―……블랑아이의 신임 대표이사에 김충대 이사가 선임되었음을 알리는 바입니다.
“초스피드네요. 당장 내일부터 출근하신다니.”
“이래저래 공백이 크니 서두르실 수밖에 없겠지. 차장 자리도 승진발령 나고 하면 이제 좀 덜 뒤숭숭하려나.”
“그러게요.”
뭔가를 찾아보던 진우가 우와, 하며 제 휴대폰을 보여주었다.
“전문경영인 출신이시네요. 옛날에 쁘띠앙쥬 기획이사로 계셨대요.”
“맞아, 그때 거의 파산 직전이었는데 업계 3위까지 끌어올려 놨다던가. 엄청 능력 있는 분이실걸.”
“능력과 인성이 비례하시면 더 좋을 텐데.”
누군가가 슬그머니 말을 꺼냈다.
“근데 되게 의외지 않아요? 저는 솔직히 백견 씨가 다시 대표로 올라가실 줄 알았는데.”
“나도. 처음부터 그런 빅 픽쳐를 가지고 입사해서 다 쓸어버린 거구나 했는데 아닌가 봐.”
“아무래도 말들이 많을까 봐 빠진 거 아닐까요? 요즘 다른 회사도 오너경영에서 전문경영인 체제로 넘어가는 추세잖아요.”
“그렇긴 한데, 까놓고 백견 씨 정도면 충분히 대표감이긴 하잖아. 적어도 같이 일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낙하산 소리 안 듣지. 밖에선 뭐라 할지 몰라도.”
“저…….”
탕비실 안쪽의 창고 문이 조심스레 열리며 견이 비죽 얼굴을 내밀었다. 모두가 소스라쳤다.
“배, 백견 씨!”
“언제부터 거기 계셨어요?”
“비품 체크하던 중이었는데 나올 타이밍을 놓쳐서 그만.”
머쓱한 눈으로 나온 견이 헛기침을 했다.
“근데 여러분…….”
다들 바짝 긴장했다.
아무리 흉이 아니라 칭찬이었대도 뒤에서 제 얘기 하는 걸 들었으니 기분이 좋을 리는 없을 터다.
견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점심 뭐 드실 거예요?”
직원들 사이에서 피시식 김이 빠졌다.
“출근하다 전단지를 받았는데 요 앞에 쌀국수 전문점이 새로 생겼대요. 오픈기념 이벤트로 4인 이상 가면 음료수 준다던데 같이 가실 분?”
‘백견 씨 많이 변했다…….’
‘어쩌다 이렇게 찌들었을꼬…….’
어느새 견은 새 대표가 오거나 말거나 오늘 점심 뭐 먹을지가 더 중요한 진짜 직장인이 되어 있었다.
***
며칠 후, 새 대표이사가 온 기념으로 블랑아이 전체 회식이 있었다.
초반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견은 누군가의 권유로 자몽소주를 처음 입에 대보고는 순식간에 홀려 버렸다.
처음 사탕을 먹어본 아이처럼 연신 홀짝거리더니 두 뺨이 자몽 속살 같은 색이 되었다가 아예 창백해졌다.
회식이 끝난 후, 몇몇은 한잔 더 하자며 움직이고 나머지는 택시나 대리운전을 불러 귀가했다.
만취한 여직원을 택시에 태워 보내고 저도 가려던 선해는 스카프를 두고 왔음을 깨닫고 돌아섰다.
택시가 안 잡혀서 한참 걸어 내려왔는데 다시 가려니 절로 짜증이 밀려왔다.
스카프가 좀만 덜 비싼 거였어도 집에 갔다고 구시렁거리며 식당 근처까지 온 선해가 멈칫했다.
식당 앞 플라스틱 의자에 견이 앉아 있었다. 긴 다리를 꼬고서 눈을 감은 채로 휴대폰을 귀에 대고 있다.
“……어디야?”
견의 목소리에서 꿀이 떨어지고, 선해의 심장도 저만치 떨어졌다.
“난 지금 다 마시고 밖에 나왔는데.”
살짝 풀어진 혀 때문일까, 비딱한 자세 때문일까, 내리깐 속눈썹 그늘 때문일까. 괜히 가슴이 선덕거렸다.
선해는 내가 여기서 뭐 하는 건가 싶으면서도 얼어붙은 듯 계속 귀를 기울였다.
“아니야. 조금밖에 안 마셨어요. 원래 요만큼만 마시려고 했는데 자몽소주가 너무 맛있어서…… 안 취했다니까요.”
반말과 존댓말을 자유자재로 섞다 못해 애교까지 듬뿍 섞었다.
꽤 오래 견을 봐왔지만 저런 모습은 맹세코 처음 보았다. 회사에서 보이는 예의 바른 싹싹함과는 차원이 달랐다.
누가 봐도 사랑에 폭 빠진,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
“보고 싶다. 나 데리러 오면 안 돼요? 응?”
저 목소리를 듣고 안 데리러 올 사람이 누가 있겠어. 북한에서 휴전선을 넘어서라도 데리러 와야지.
홀로 중얼대던 선해는 뒤늦게 수화기 너머의 상대가 누군지 궁금해졌다.
“백견 씨!”
어디선가 들리는 외침에 화들짝 놀란 선해는 얼결에 옆 가게의 풍선간판 뒤로 숨었다.
양손에 음료수를 들고 온 은규가 하나를 견에게 건넸다.
“고맙습니다.”
“택시 잡아드릴게요.”
“아니에요. 방금 내 애인 불렀어요.”
내 애인이란다!
코피 터질 것 같았다. 자기가 여기 왜 왔는지, 왜 숨어 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볼 겨를도 없었다.
“순순히 온대요? 지난번에도 엄청 혼나지 않았어요?”
“괜찮아요. 저 혼나는 거 좋아해요.”
혼나는 거 좋아한다는 말에 요상한 생각을 할 뻔했던 선해의 눈동자가 옴찔 굳었다.
저하고도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박 대리만 알고 있었다니, 섭섭해지려고 했다.
“먼저 가보세요. 마침 근처라 데리러 오고 있대요.”
“정말 먼저 가도 괜찮겠어요?”
“네, 괜찮아요. 고맙습니다.”
먼저 택시를 타는 은규를 배웅까지 해준 견은 다시 의자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사이 살금살금 스카프를 찾아 나온 선해는 볼일이 다 끝났음에도 가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저렇게 무방비하게 있다가 소매치기라도 당할까 봐 걱정된다는 핑계였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애인이 누군지도 한 번 보고 싶었다.
10분쯤 지났을까, 우아한 세단 한 대가 길가에 멈춰 섰다.
운전석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내렸다.
‘잠깐만, 저 사람은……!’
희명그룹 3대 비주얼자산 중의 한 명, 홍보팀에 백지협이 있고 블랑아이에 백견이 있다면 비서팀에는 그가 있다는 명성에 걸맞은 모델 비주얼.
견의 비서이자 최측근으로 알려진 섭호가 아닌가.
기럭지만큼이나 시원시원한 워킹으로 다가온 그가 견의 어깨를 짚었다.
“도련님, 모시러 왔습니다.”
눈을 슴벅거리던 선해는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손에 쥐고 있던 스카프를 입에 물었다.
‘데리러 온다던 애인이……!’
고개를 든 견은 졸다가 술이 더 올라왔는지 비몽사몽했다.
“내가 너한테 전화했어?”
“안 취하셨다더니, 어디다 전화했는지도 모르십니까?”
견이 어영부영 일어섰다. 섭호가 혀를 차고는 견의 허리를 감아 부축했다.
“자몽소주가 뭐라고 이렇게 정신까지 놔가며 드신 건지.”
“나 이제 위스키 안 마셔. 위스키 팔아서 자몽소주 사 마실 거야.”
“잘됐네요. 집에 있는 거 다 갖다 파십시오.”
“그래…… 가 아니라 네가 어떻게 여길 알고…….”
“일단 차로 가시죠. 가서 혼나시면 됩니다.”
옛날에 슬그머니 돈 적이 있긴 했다. 비서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소문이.
‘아들이 있다는 소문 말고 그게 사실이었다니!’
저보다 한참 어린 견을 상사로 존경한 적도 있고, 동료로서도 아끼고 있지만 남자로 본 적은 없었다. 그럼에도 괜한 아쉬움에 선해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제기럴. 괜찮은 놈들은 죄다 유부남 아니면 게이라더니.’
조수석에 탄 견이 안전벨트를 하며 구시렁거렸다.
“왜 네가 왔냐니까. 우리 모단 씨는…….”
“우리 모단 씨 여기 있는데.”
뒷좌석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견은 홱 돌아보았다.
“저건 또 뭐야. 웬 개떡 같은 황금지야?”
“어쩜 저렇게 볼 때마다 개떡 같은 소리만 골라서 하나 몰라.”
뒷좌석에 금지가 앉아 있고, 옆에 모단이 잠들어 있었다. 금지의 어깨에 살포시 머리를 기댄 채로.
섭호가 차를 출발시켰다.
“도련님 혼내주실 분은 정모단 선생님밖에 없는데 좀 전에 잠드시는 바람에…….”
술이 확 깨버린 견이 뱁새눈을 했다.
“뭔데? 왜 나만 빼고 다 같이 있는 건데?”
“모단 언니랑 술 마시는데 이상한 남자들이 자꾸 치근덕거려서 섭호 오빠 불렀어. 처리하고 나와서 집에 가려는데 오빠가 언니한테 전화한 거야.”
“이상한 남자들?”
견의 눈빛이 살벌해졌다. 섭호가 바로 진정시켰다.
“별거 아닌 놈들이었습니다. 제가 갔을 땐 이미 정모단 선생님한테 멱살 잡혀 있더라고요. 내가 그놈들을 구해주려고 이 시각에 거기까지 간 건지…….”
“물론 모단 언니 혼자서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는 놈들이었지만, 내가 오빠 보고 싶어서 부른 거지. 뻔한 것도 몰라?”
견과 섭호의 입에서 동시에 한숨이 새어 나왔다.
“그나저나 견이 오빠 소름. 일부러 들은 건 아니고 차가 너무 조용해서 언니랑 통화하는 소리 다 들렸는데 어휴, 토할 뻔했네.”
“그럼 당장 내려서 토해. 그 자리 내가 앉게.”
얄밉게 혀를 내민 금지가 제 어깨에 기댄 모단의 뺨을 살며시 다독였다.
“모단 언니 내 거. 오늘 언니랑 나랑 단둘이 엄청 좋은 데 갔는데. 부럽지?”
어처구니없다는 눈으로 보던 견이 몸을 돌리더니 기어 위에 얹어놓은 섭호의 팔을 지그시 붙잡았다.
“섭호야. 오늘 네 방에서 같이 자도 되지?”
“안 됩니다. 손 치우시고요.”
“내가 잘못했어, 오빠! 나랑 자리 바꾸자!”
모단이 끄응 소리를 내며 뒤척였다. 고개를 얼핏 들고 눈을 반쯤 떴다.
“왜 이렇게 시끄러워. 다 같이 2차 가자, 2차!”
“…….”
단 한 마디로 차 안의 소란을 잠재운 그녀가 다시 잠들었다.
“모단 씨, 다 왔어요.”
다정한 목소리에 모단은 반사적으로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차 뒷좌석의 문을 열고 반쯤 몸을 들이밀고 있는 견이 보였다.
아까 분명 옆에 금지가 있었는데 없다. 운전석에도 아무도 없고 차는 멈춰 있었다. 모단은 황급히 눈을 비볐다.
“언제 왔어요?”
“나보고 취했냐고 뭐라고 하더니 본인이 더 취해 있었네.”
“아, 미안…….”
견이 내민 손을 잡고 황급히 내린 모단은 멍해졌다. 집이 아니라 웬 지하주차장이다.
“여기가 어디예요?”
“다 같이 2차 가자면서요. 좋은 데 왔어요.”
견이 손으로 저 앞을 가리켰다. 언제 샀는지, 뭐가 들었는지도 모를 비닐봉투를 든 섭호와 금지가 앞서 걸어가고 있었다.
“얼른 가요, 우리도.”
견의 손에 이끌려 뒤를 따랐다. 널찍한 엘리베이터에 탄 후에도 모단은 얼떨떨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여기 누구네 집인데요? 아. 혹시 집처럼 생긴 바 같은 데에요? 아는 사람만 가는?”
“아는 사람만 가는 건 맞긴 맞는데, 가보면 알아요.”
10층에서 내려 조용한 복도를 지나 한 집의 벨을 눌렀다.
잠시 후, 문이 덜컥 열리며 웬 부스스한 머리카락이 먼저 보였다.
“이 미친놈들이 지금이 몇 시라고…….”
진정성 넘치는 욕과 함께 몸을 내민 지협이 인터폰 화면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금지와 모단을 보고는 덜컥 굳었다.
모단도 남아 있던 술기운마저 말끔히 날아가는 것을 느끼고는 반사적으로 두 손을 앞으로 모았다.
슈트 안 입은 지협은 자원봉사 동호회에서 본 적 있지만 머리 손질까지 안 한 건 처음 보았다.
‘집에선 안 씻고 안 먹고 안 치우고 안 움직이는 아저씨라더니…… 그래도 잘생겼네. 집안 내력인가.’
견이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우리끼리 마시러 가려다가 형이 못내 마음에 걸려서 끼워주려고 온 건데 미친놈들이라니. 들어가도 되지?”
모단이 더 기겁해서 견을 잡아끌었다.
“죄송해요, 이사님! 저 정말 이사님 댁인지 꿈에도 모르고! 다들 가보면 안다고 무작정 가자고 해서 금지 씨네 집인 줄……!”
“오빠네 집 오랜만에 온다! 한강 보이는 빌라에서 자취방 스멜이 웬 말인가 싶었는데 많이 깨끗해졌네?”
지협이 팔을 내밀어 금지를 막았다.
“안 돼. 돌아가.”
“치사하게. 그러지 말고 같이 놀자, 오빠.”
“형, 자몽소주 마셔봤어?”
“실례지만 실례 좀 하겠습니다.”
한마디씩 내던지며 혼을 빼놓은 삼 남매가 조르르 들어섰다. 들어갈 수도 안 들어갈 수도 없게 된 모단만 곱작 허리를 숙였다.
“정말 죄송합니다…….”
지협은 조용히 이마를 짚었다.
‘어쩐지 꿈자리가 사납더라니 커플이 쌍으로…… 망할.’
결국 그날 밤, 두 쌍의 커플은 집주인의 심기를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어지럽혔다. 차라리 바퀴벌레 두 쌍이 나타났다면 세X코라도 불렀을 텐데, 이건 퇴치 불가능이었다.
대놓고, 혹은 은근히 이루어지는 갖은 커플 짓들을 보며 치를 떤 지협은 결심했다.
‘나는 나만 떠받든다. 나와 연애하고 나와 결혼한다!’
그 결심이 고작 1년도 안 되어 무너질 거라는 걸 꿈에도 모른 채.
***
그해 겨울.
새 대표의 지휘 아래 블랑아이는 완벽하게 자리를 잡았다.
한동안 희명그룹도 블랑아이도 좋지 않은 이미지가 박혀 눈에 보이는 매출 하락까지 있었으나, 기본에 더욱 충실하면서 꾸준히 힘쓴 결과 조금씩 제자리를 찾고 이제는 더욱 올라가고 있었다.
견이 블라인드 공모전에 낸 기획안에서부터 시작된 프로젝트도 본격적인 성과를 내기 시작했다.
희명소프트에서 선보인 유아동 어플리케이션은 좋은 반응을 얻으며 입소문이 났다.
그에 힘입어 희명출판사와 희명토이즈에서 합작으로 내놓은 놀이책 전집도 빠르게 매진됐다.
“좋은 소식과 섭섭한 소식이 있습니다.”
아침회의 시간, 김 대표가 블랑아이 직원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먼저 좋은 소식은 ‘곰곰이 크리스마스 에디션’이 완판됐다는 소식이고요.”
직원들이 환호하며 박수를 쳤다.
크리스마스 시즌을 맞아 곰곰이 캐릭터를 활용한 아이템을 내놓았는데, 캐릭터를 좋아하는 아이들의 니즈와 적당한 가격에 좋은 품질을 원하는 부모들의 니즈를 모두 만족시키며 엄청난 매출을 기록했다.
“그리고 섭섭한 소식은, 다들 알고 있겠지만 백견 씨가 오늘까지 근무하시고 퇴사합니다.”
이번에는 여기저기서 탄식이 나왔다.
얼마 전 특별근무팀이 해산하고 각 부서에 업무가 나눠졌다. 제가 제안한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마무리되기만을 기다렸던 견은 사직서를 제출했다.
대표를 비롯한 모두가 진심으로 아쉬워했다.
“너무 아쉽다.”
“저도요. 더 오래 같이 일하고 싶었는데.”
진심이었다. 이 사람들이 좋았고, 직장 생활이 즐거웠다. 배우는 것도 많았다. 이대로 지내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희명그룹의 그늘 아래 있을 수는 없었다. 이번 일로 제가 회사에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언제든지 큰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그만두는 날이라 해도 평소와 다를 건 없었다. 인수인계도 진작에 다 마쳤고, 오늘 할 일만 잘 마무리하면 되었다.
마지막 점심을 먹고, 은규와 커피를 들고 옥상 휴게실에 앉았다.
“회사 그만두고 이제 뭐 하실 거예요?”
“사업이요.”
은규의 눈이 답삭 커졌다가 슬슬 가늘어졌다.
“혹시 블랑아이를 발라 버리려고 준비하시는 건…….”
“그게 무슨 배은망덕한 말씀이세요. 전혀 상관없는 쪽이에요.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 보려고요. 전 경영천재니까.”
맞는 말이긴 하지만 굳이 본인 입으로 말할 필요는 없지 않나…… 생각하면서도 은규는 진심으로 맞장구를 쳐주었다.
“하긴, 전에 처음 블랑아이를 시작할 때도 유아동복 쪽 사업은 처음이었는데도 추진력이며 성과가 엄청났죠. 이번에도 잘 해내실 거라 믿습니다.”
“고맙습니다, 정말.”
견이 넌지시 스카우트 제안을 던졌다.
“제가 같이 일하고 싶다고 하면 오실래요?”
은규가 거만하게 다리를 꼬았다.
“거기 사내어린이집은 있나요?”
견이 웃음을 터뜨렸다.
“죄송합니다. 아직 회사 건물도 직원도 없어서 복지도 없네요.”
“우리 해빛이가 희명어린이집을 너무 좋아해서 지금은 어쩔 수가 없네요. 하하.”
“은규 대리님 같은 인재 모시기 위해서라도 죽어라 해야겠네요. 직원들 자녀 대학까지 학자금 대줄 만큼 키워놓을 테니 언제든 오세요.”
“영광이고 감사합니다.”
커피를 다 마시고 내려와 자리로 돌아가려는데, 선해가 슬그머니 복도로 불러내더니 자그마한 상자 하나를 쥐여주었다.
“별거 아니지만 퇴사 선물이에요. 좋은 계약서에 사인할 일 한가득 생기라고.”
고급스러운 만년필을 받아 든 견이 감동의 도가니에 빠져 인사를 하려는데, 선해가 스윽 다가서더니 속닥거렸다.
“위섭호 비서님도 그만두셨다고 들었는데.”
“아, 네.”
견이 퇴사 계획을 밝히자마자 섭호는 그럼 저도 나가겠다며 일필휘지로 사직서를 써 내려갔다.
제 사업에 동참해 주려는 건가 싶어서 고마웠으나, 한편으로는 제가 하는 일이 흥할지 망할지도 모르는데 섭호만큼은 연봉 빵빵한 희명에 남겨두고 싶기도 했다.
그러나 섭호는 뜻밖의 말을 했다.
도련님이 이사님만큼 확실하게 자리를 잡으시거나, 아니면 아예 손을 떼시기만을 기다렸다고.
예전엔 월경 때문에라도 늘 가까이에 있어야 맘이 편했지만 이제는 모단이 곁에 있으니, 제가 굳이 비서라는 직업을 고집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고.
집에서도 나갈 것이며, 제가 하고 싶었던 일들을 해야겠다고.
조금쯤 섭섭한 동시에 너무나 미안했다. 어렸을 적부터 그랬기에 옆에 있어주는 걸 너무 당연하게만 여겼다.
제가 하고 싶은 일이 많듯 섭호 역시 그랬을 거라는 걸, 제가 가고 싶은 곳과 섭호가 가고 싶은 곳은 당연히 다를 수 있다는 걸 왜 먼저 생각해 주지 못했을까.
가뜩이나 저보다 큰 애가 부쩍 더 커 보이는 복잡한 기분이었더랬다.
“혹시 어디 멀리라도 가는 거예요? 같이?”
“예? 예. 근데 그건 어떻게…….”
얼결에 대답한 견이 갸웃했다.
주말에 같이 성근에게 다녀오기로 했다. 섭호의 독립선언을 듣자마자 엄청나게 분노하셨다고 했다.
비서 그만뒀다고 남 되고 원수 되는 거 아니라고 아무리 말해도 가업이라도 내팽개친 것처럼 통탄을 하셔서 함께 달래 드리러 가려던 참이었다.
그 사정을 알 리 없는 선해는 안타까운 눈빛으로 혼잣말을 흘렸다.
“그래요. 우리나라에선 아직 힘들겠지…….”
“뭐가요?”
선해가 얼른 손을 저었다.
“아니에요. 백견 씨, 어디서든 행복하게 잘 지내요. 다른 사람들이 뭐라 하건 신경 쓰지 말고요. 난 진심으로 백견 씨 참 멋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늘 응원할게요.”
“가, 감사합니다.”
사무실 안으로 쏙 들어가 버리는 선해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견은 만년필 상자로 턱을 긁적였다.
‘분명 좋은 말 같은데 희한하게 찜찜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