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르몬시터-7화 (7/86)

#7. 사람을 둥실 뜨게 만드네

2017.05.24.

“자꾸 거짓말하면 코 길어져요.”

견이 허리를 폈다. 눈앞에서 사락대던 머리카락이 저 위로 멀어지며 옅은 샴푸향을 흘렸다.

“내가 보기엔 진짠데. 반영구 문신은 살짝 색소가 번지는 경우가 있거든요.”

‘점 감별사야 뭐야? 미인점 페티쉬가 진성 변태급인 놈이네.’

“물론 다른 데 있는 점을 이식하면 표시가 전혀 안 나는 경우도 있는데.”

“이식했어요.”

“어디서 얼마 주고?”

“어어, 그게…….”

“거짓말 되게 못 하시네요. 순수한 아이들과 매일 함께 계셔서 그런가?”

견이 싱긋 웃었다.

“사내어린이집 선생님 좋은 분으로 잘 뽑은 것 같아요. 희명의 앞날이 눈부셔.”

정말 눈부시다는 듯 이마까지 찌푸렸던 견이 모단의 팔을 잔망스레 툭 쳤다.

“예쁘게 잘 있는 점을 왜 가짜라고 해요? 그 점이 나한테 어떤 의미인데.”

의미고 뭐고 선빵 맞았으니 쳐도 되냐고 하려는데, 견이 다시금 몸을 낮춰 눈높이를 맞췄다.

“진짜 코 길어지기 전에 사실대로 말해봐요. 정말 희명리조트 오션에 간 적이 없어요?”

모단의 눈동자가 차게 굳었다.

일순 주변의 소음마저 묻어버릴 만큼 날카로운 침묵이 스쳤다.

“어디까지 봐드려야 할까요?”

견조차 긴장하게 만들 만큼 싸늘한 시선이었다.

“선을 넘고 앞서 가는 것도 정도가 있죠. 백견 씨랑 제가 어린 시절 추억까지 공유할 만한 사이였던가요?”

“그게 아니라, 사람을 찾고 있는데 혹시나 해서…….”

“그건 백견 씨 사정이잖아요. 내 사정은요? 만일 그때 우리 집이 리조트는커녕 리조트 주차장 근처에도 못 가볼 형편이었다고 하면 어떡하실 건데요?”

견이 얼른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숙였다 들었다.

“내가 생각이 짧았어요. 아주 중요한 일이라서, 마음이 급해서…… 묻지 않을게요. 미안해요.”

마침 버스가 왔다. 견이 얼른 모단의 등을 밀었다.

“81번 왔다. 버스 놓치면 안 되니까 얼른 가세요. 주말 잘 보내시고. 쓸데없이 남자 같은 거 만나지 마시고.”

“어어……!”

버스 계단에 한 발을 올리고 나서야 제 손에 커피가 들려 있음을 깨달은 모단이 도끼눈을 뜨고 돌아보았다.

대체 어느 틈에 쥐어준 건지, 잃은 건 없고 되레 얻었는데도 소매치기를 당한 기분이었다.

“아, 뭐야.”

“죄송합니다…….”

뒤에 타려던 사람들에게 밀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버스에 오른 모단은 이를 악물고 창밖을 노려보았다.

견은 긴 다리를 꼬고 서서 제 몫의 커피에 꽂힌 빨대를 우아하게 입에 물고 있었다.

‘잠깐, 내가 81번 타는 건 어떻게 안 건데!’

금방이라도 콧김을 뿜어낼 것 같은 모단과 눈이 마주친 견은 웃음을 참느라 잇새의 빨대를 꾸욱 씹었다.

버스가 출발하기 직전, 입술을 말아 올리고는 눈썹을 까닥했다.

‘또 봐요.’

멀어지는 버스 뒤꽁무니를 아쉬운 눈으로 지켜보던 그가 중얼거렸다.

“뭔 버스가 저렇게 금방 오고 금방 가?”

하긴, 더 늦게 왔으면 심장 떨어지게 쌀쌀맞은 목소리로 더 혼났을지도 모르지.

갑자기 목이 탔다. 견은 얼음이 다 녹아 커피인지 보리차인지 애매해진 액체를 한 모금 삼켰다.

조금 전, 숨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보았던 동그란 코가 떠올랐다. 눈꺼풀 안에 아직도 잔상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오늘은 정말 진지하려고 했는데, 그녀를 보자마자 생각과 마음과 말이 죄다 따로 놀고 말았다.

이런 적이 없는데, 이래서도 안 되는데, 희한하게 저 여자가 자꾸……

“사람을 둥실 뜨게 만드네.”

***

다음 날, 못다 이룬 늦잠의 꿈을 부여잡고 엄마에게 질질 끌려 나온 모단은 한탄을 쏟아냈다.

“속 쓰려. 해장이나 했으면 좋겠구만.”

“TV 보면서 한 캔만 마시고 잔다더니 얼마나 마신 거야? 아휴, 토요일이라 사람이 더 많네.”

모단의 엄마, 혜숙이 눈을 흘기고는 앞장섰다. 모단은 터덜터덜 뒤를 따랐다.

“이 많은 사람들이 다 어디가 아픈 거래…….”

아무리 크고 유명한 희명병원이라지만 이렇게까지 붐빌 줄이야. 로비가 미어지도록 복작이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멀미가 다 나려고 했다.

“젊은 애가 왜 그리 걸음이 느려? 얼른 와. 산부인과 이쪽이야.”

“하여간 이 여사님, 다른 병은 없는데 그게 병이야. 건강염려증.”

“자고로 병은 키우기 전에 미리미리 검사하고 치료받는 게 답이야.”

혜숙은 본인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이 조금만 어디가 안 좋다고 해도 걱정을 넘어 공포까지 느끼는 경향이 있었다. 두 남편을 다 병으로 일찌감치 잃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덕분에 모단은 어지간히 아파서는 말도 안 꺼내고, 오히려 엄마한테 들킬세라 몰래 앓는 게 몸에 배었다.

“알았어요, 알았어. 엄마 건강하게 오래 살면 나야 좋…… 에헤이, 간만에 예쁜 말 했는데 못 들으셨네.”

저만치에서 의자 두 개 맡아놓고 빨리 오라고 손짓하는 혜숙을 본 모단이 구시렁거렸다.

“역시 자리 맡는 건 대한민국 아줌마가 최고라니까. 동네 아줌마들이랑 뒷산 약수터 다니다가 축지법이라도 익힌 거야?”

“정모단! 다리 좀 오므리고 앉으랬지!”

쩍벌에 이어 오만상 다 구기는 하품으로 아재미를 뿜어낸 모단이 한쪽 다리를 반 접어 다른 쪽 무릎 위에 떡하니 걸쳤다.

대기 시간이 꽤 될 것 같아 옆에 굴러다니던 잡지를 집어 드는데, 혜숙이 뜬금없이 모단의 팔을 쿡 찔렀다.

“생리할 때가 좋은 줄 알어, 이것아.”

“좋을 게 그렇게 없어? 할 때는 월경전증후군이 어떻고 생리통이 어떻고 생리대값이 어떻고 쌍욕을 하셨으면서.”

“그래도 여자 노릇 할 때가 좋은 거지 싶어. 에휴.”

혜숙은 얼마 전에 완경(完經) 진단을 받고 한동안 우울해하다가 이제 조금씩 극복하는 중이었다.

모단은 그러려니 하고 보던 잡지로 시선을 돌렸다.

“근데 넌 언제 저러고 다닐래?”

“뭐가?”

혜숙의 손가락이 배가 봉긋하니 나온 임산부를 가리켰다. 모단은 얼른 그 손을 잡아 끌어 내렸다.

“딸 배 나온 게 그렇게 보고 싶어? 간만에 목욕탕 가서 몸이나 지지든가. 지금도 안 나오진 않았어.”

“자랑이다. 벌써 서른이야, 이것아. 언제 시집가서 언제 애 낳을래?”

“서른이면 아직 애기지. 애기가 애기를 낳나.”

세상 어처구니없고 기가 찬다는 시선이 되돌아왔다.

“표정이 왜 그래? 누가 보면 내가 송중기랑 사귄다는 말이라도 한 줄 알겠네.”

“언제 정신 차릴래? 새윤이 봐라. 일찌감치 가서 일찌감치 낳아 키우니까 벌써 내년이면 애가 학교 들어가잖아! 해빛이 고거 보면 이뻐 죽겠으면서도 내 손주는 언제 이렇게 키워보나 하고…….”

“할망구 같은 소릴 하고 그래.”

철썩.

결국 등짝 한 대 내주고 나서야 끝이 났다.

애꿎은 잡지를 팍팍 넘기는데 갑자기 종이에서 샤아아 하고 빛이 나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주부잡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재벌가 관련 기사였는데, 웬 연예인 사진이 들어가 있나 싶었다.

―[기획시리즈] 드라마 말고, 현실 속 ‘상속자들’ ① - 희명그룹의 백지협, 백견

희명그룹 창립기념 행사에서 찍힌 두 남자의 사진은 슈트 화보가 따로 없었다.

모단은 ‘미친 유전자들’로 기사 제목을 바꾸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물론 한 명은 외모 말고 정신 상태도 포함해서.

“정모단 씨!”

“네! 여기 있어요!”

제 이름을 들은 모단이 혜숙을 돌아보았다. 이번에는 모단의 얼굴에 세상 어처구니없고 기가 찬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내 이름이 왜 나와? 그리고 왜 엄마가 대답해?”

“엄마가 접수했어. 온 김에 너도 기본검진 받으라고. 아가씨들은 산부인과 드나드는 거 싫다고 검사 한번 안 받는데, 그러면 안 된다니까. 좋은 회사 오래 다니려면 건강도 잘 챙겨야지.”

‘비상사태다! 어떡하지?’

모단이 잡지를 덮고 벌떡 일어섰다. 얼굴이 희게 질렸다 돌아왔다.

“갑자기 왜 이러실까? 아무 이상 없다는 말 한마디 듣자고 비싼 돈을 써야 되겠어? 그러지 말고 그 돈으로 고기나 사 먹읍시다. 응? 그게 더 건강에 좋겠네.”

“엄마가 다 낼 테니까 잔말 말고 해. 시간도 얼마 안 걸려. 고기는 저녁에 집에서…….”

“하긴 뭘 해! 엄마나 하셔, 엄마나!”

얼결에 목소리가 커지고 말았다. 이상한 눈으로 보는 간호사에게 모단이 얼른 말했다.

“정모단 접수 취소해 주세요.”

“근데 얘가!”

“엄마, 나 안 받아도 돼. 그리고 중요한 약속이 있던 게 생각났어. 먼저 갈게!”

혜숙의 고함이 뒷덜미를 잡았으나, 모단은 못 들은 척 냅다 튀었다. 이따 집에 가서 맞더라도 지금은 도망가는 게 상책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산부인과 검진은 절대 안 된다. 그것도 엄마 앞에서는.

‘당황해서 괜히 더 이상하게 굴었네. 그냥 지금 생리 중이라서 못 받는다고 둘러댈걸.’

갑자기 놀랐다가 가라앉아서인지 머리가 띵했다. 이마를 짚었던 손으로 머리카락을 넘기고 마저 걸음을 떼려는데, 뒤에서 어깨를 붙잡혔다.

“안 받는다고! 못 받아! 나 지금 생리 중이야!”

엄마한테 잡힌 줄 알고 낮게 윽박지르며 돌아섰던 모단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어깨를 잡았던 손을 어색하게 뗀 견이 웃을까 말까 고민하는 듯한 눈으로 웃었다. 한 걸음 옆에 서 있던 섭호는 주먹 쥔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아…… 그러시구나.”

얼굴로 피가 확 몰린 모단이 주춤거렸다.

‘이 미친 자가 왜 여기에……! 설마 주말까지 나를?’

제가 더 발그레해져서는 두 손으로 뺨을 감쌌다 뗀 견이 입을 열었다.

“그날일 때 힘들죠. 허리 아프지, 배 아프지, 식욕은 솟구치는데 소화는 안 되고 변비까지 생기지, 피부 뒤집어지고 부을 때도 있지, 불안하지 초조하지 우울하지 예민하지…….”

조곤조곤 이어지는 말을 듣고 있던 모단의 눈매가 슬슬 치켜 올라가기 시작했다.

심상찮은 분위기를 눈치챈 섭호가 견을 툭 쳤으나, 이미 늦은 후였다.

‘이 새끼가 볼 때마다 뒤질랜드 자유이용권을 예매하고 있네?’

모단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아래에서 위로 훅 솟구치는 입김을 따라 이마 위의 머리카락이 폴싹 날렸다.

“무례한 거예요, 눈치가 없는 거예요? 아니면 둘 다?”

뒤로는 섭호의 팔꿈치에 등을 찔리고, 앞으로는 모단의 눈총에 찔린 견이 얼른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너무 공감이 가서 저도 모르게 그만.”

“뭘 공감하는데요? 한 달에 한 번씩 생리라도 하시나?”

견과 섭호가 동시에 움찔했다. 흔들리는 동공 사이로 소리 없는 대화가 오갔다.

‘이 자식이. 네가 얘기했어?’

‘그럴 리가 없잖유!’

두 남자가 눈빛 교환을 하거나 말거나, 모단은 마저 쏟아냈다.

“됐어요. 나쁜 것도 부끄러운 것도 아니고 존중받아 마땅한 성스러운 일을 가지고 뭐 하자는 건지. 관두고 각자 갈 길 갑시다.”

모단이 한 손으로 뒷목을 주무르며 다른 손으로 휘휘 손짓했다.

“일부러 보려고도 안 했는데 만나진 건 반갑지만…….”

견이 반걸음 물러섰다.

“그날엔 밖에 나오기는커녕 누구 만나기도 귀찮은 거 다 아니까 더 이상 잡지 않을게요. 얼른 집에 가셔서 몸 따뜻하게 하시고 푹 쉬세요. 혹시 차 없으면 모셔다 드릴까요?”

“거기까지. 존중받을 일은 맞지만 아무 사이도 아닌 남자한테 과한 배려받는 건 오히려 불쾌합니다.”

“아무 사이 아니라니. 어떻게 그런 말을…….”

잔뜩 속상한 각도로 눈꼬리를 늘어뜨렸던 견이 이내 다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더 짜증 났다.

“견아.”

누군가 그를 불렀다. 이때다 싶어 자리를 피하려던 모단이 어, 했다. 다가오던 상대방도 눈을 크게 떴다.

“정모단 씨, 맞으시죠?”

견이 쓰러질 때 보았던 남자, 지협이었다.

“네, 안녕하세요.”

눈인사를 건네며 다가온 그가 손을 내밀었고, 모단도 자연스럽게 맞잡았다. 지협의 외모만큼이나 깔끔한 악수였다.

5초 만에 견의 심기가 몹시 불편해졌다.

“형이 여기 웬일이야? 바쁜 사람이. 어디 아파?”

“아프기는. 조 박사님 뵐 일이 있어서 들렀어. 너는?”

“할아버지 검진받으시는 데 따라왔다가 고모 보고 가려던 참이야.”

둘이 나란히 서서 대화를 주고받는 모습이 조금 전 잡지에서 본 사진을 떠오르게 했다. 심지어 실물이 더 근사했다.

지협이 모단을 돌아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때 잘 들어가셨다는 말은 비서에게 듣긴 했는데, 따로 연락을 못 드렸네요. 저희 회사 어린이집에서 근무하게 되셨다는 것도 들었습니다.”

“아, 네.”

“겸사겸사 연락드리려다가, 첫 주는 아무래도 정신없으실 것 같아서 미뤘어요.”

누구는 더 정신없으라고 출근 첫날 아침부터 대환장 파티를 열어주던데. 모단은 잠잠히 웃었다.

“이번에도 인사만 드리고 가기엔 죄송한데…….”

시계를 확인한 지협이 정중히 말을 건넸다.

“시간 괜찮으시다면 식사라도 대접해 드리고 싶은데요.”

“아닙니다. 그날 배려해 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사했어요.”

“부담 갖지 않으셔도 됩니다. 사례라는 말이 거북하시면 같은 희명 직원끼리 가볍게 한 끼 한다고 생각하시면 어때요?”

모단이 딱 잘라 거절하지 못하는 틈을 타, 견이 끼어들었다.

“아냐, 형. 정모단 선생님 얼른 집에 들어가셔야 돼.”

“응?”

“사실 정모단 선생님이 오늘…….”

‘근데 이 자식이!’

지금까지 한 짓으로 봐서는 ‘오늘 생리 중이시래’ 하고도 남을 것 같았다. 사색이 된 모단이 얼른 말끝을 잡아챘다.

“그럼 부담 갖지 않겠습니다! 먹죠, 밥.”

의아한 눈으로 견과 모단을 살피던 지협이 옅게 웃었다.

“그래요. 제 차로 가시죠.”

“네, 실례할게요.”

“잠깐만.”

견이 잽싸게 끼어들었다.

둘 사이에 매끄럽게 오가는 대화가 거슬려 ‘오늘 선약 있으시다더라’는 말로 자리를 파해 버리려 했으나 모단이 말을 잘라 버리는 바람에 실패했다.

이렇게 된 이상 최선을 다해 헤살을 놓는 수밖에.

“정모단 선생님, 멀미 있어요?”

“그건 왜요?”

“있으면 내 차 타고 가요. 내 비서가 운전하는 차 타면 부산까지 가도 멀미 안 해요.”

섭호가 ‘저희 지금 밥 먹으러 부산 가나요?’ 하는 눈을 했다. 모단은 단호하게 쳐냈다.

“멀미 없어요.”

“없으면 내 차 타고 가요. 지협이 형 차는 뽑은 지 얼마 안 돼서 가죽 냄새 장난 아니에요. 멀미 없는 사람도 멀미하게 만드는 차라고.”

지협 또한 황당할 따름이었다. 그렇게까지 새 차는 아닌 데다 멀미날 때까지 견을 태워준 기억도 없었다.

“타봤는데 냄새 좋기만 하던데요.”

“언제? 언제 타봤는데요? 아, 맞다. 그날 집까지 모셔다 드렸다고……. 그럼 지협이 형 차는 한 번 타봤으니까 오늘은 내 차 탑시다.”

“자꾸 말 걸지 마세요.”

어금니를 꽉 깨문 모단이 지협에게는 안 들릴 만큼 목소리를 낮춰 으르렁댔다.

“허리 아프고 배 아프고 불안하고 초조하고 우울하고 예민한 날이니까. 공감한다면서요?”

고개를 홱 돌린 모단이 걸음을 빨리해서 지협의 옆에 섰다. 지협은 상황을 파악하느라 얼마간 날카로워졌던 눈매를 얼른 누그러뜨렸다.

“특별히 좋아하시거나 못 드시는 거 있으십니까?”

“평소였으면 아무거나 잘 먹는데 지금은 기름지거나 느끼한 건 못 먹을 것 같아요.”

“하하. 그러고 보니 어제 불금이었군요.”

“혹시나 까르보나라 맛집 같은 데로 신경 써서 안내해 주셨는데 맛있게 못 먹으면 죄송하니까요.”

저한테는 말 걸지 말라고 해놓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만 잘하다니.

모단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견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토요일 오후, 모두의 일정에 없던 점심식사를 하게 된 곳은 복어 요리로 유명한 식당이었다.

정갈한 인테리어에, 내부가 그리 넓지 않음에도 방이 나뉘어 있어 편했다.

“회사는 어때요? 불편하신 건 없습니까?”

“네, 좋아요.”

지협과 모단이 가벼운 대화를 나누는 동안, 맞은편에 앉은 견은 다소곳하게 수저를 놓아주고 물을 따라주었다. 무서운 거라도 본 듯한 섭호의 표정을 보아하니 평소에도 이러는 것 같진 않았다.

“저희 회사, 직원 복지시설이 잘 갖춰져 있는 편이에요. 지하에 수영장하고 헬스장이 있는데 시설이 꽤 괜찮아요.”

“그래요? 수영장까지 있구나.”

“어린이집은 다른 부서처럼 점심시간을 자유롭게 쓸 수가 없어서 좀 그렇지만, 퇴근 후에라도 들러 보세요. 아, 11층에 구내식당도요. 석식까지 제공하거든요. 야경도 보이고 맛도 있고, 웬만한 레스토랑 못지않아요.”

“꼭 가봐야겠네요.”

좋은 목소리로 조곤조곤 설명해 주는 게 듣기 좋았다. 흡사 사보에 실릴 인터뷰를 듣고 있는 것 같았다.

잠시 후 음식이 나왔다. 뚝배기에 담겨 바글바글 끓고 있는 맑은 복국이 각자 앞에 하나씩 놓이고, 미나리향이 물씬 풍기는 복껍질무침과 윤기 흐르는 복튀김에 정갈한 반찬들까지 한 상 가득 차려졌다.

“얼른 드세요.”

“네. 잘 먹겠습니다.”

보기만 해도 속이 풀리고 든든해지는 것 같은 국물을 한 숟가락 떠먹은 모단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크으.”

소주 한 잔 걸친 아저씨 소리를 들은 세 남자가 움찔했다.

맛있는 게 입에 들어오면 다른 건 죄다 잊는 습관이 있는 모단은 제가 그런 소리를 낸 줄도 모르고 식사에 열중했다.

그야말로 복스럽게 먹는 광경을 흥미롭게 구경하던 견과 지협, 섭호도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수저를 들었다.

거의 다 먹었을 때쯤에야 모단은 생각했다.

‘내가 지금 어디서 누구랑 밥을 먹고 있는 거지?’

옆에는 젠틀하고 수려한 이사님이, 그 앞에는 이탈리아 모델처럼 생긴 데다 유능해 보이기까지 하는 비서가 앉아 있다.

맞은편에는 입 다물고 있으니 존재감이 더 폭발하는 잘생긴 미친놈까지.

이래저래 비현실적인 기분에 잠겨 있던 모단은 전화벨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잠시만 실례할게요.”

엄마임을 확인한 그녀가 재빨리 휴대폰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거의 다 비워진 그릇들을 사이에 두고 남자 셋만 남았다. 냅킨을 들어 가볍게 입가를 누른 지협이 입을 열었다.

“백견.”

견은 대답 대신 팔짱을 꼈다. 두 사람 다 모단이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정신 똑바로 안 차릴래?”

지협의 손가락이 모단의 수저 바로 옆을 딱딱 두드렸다.

“왜 벌써 을처럼 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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