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자꾸 거짓말하면 코 길어져요
2017.05.21.
앞치마를 벗어 내려놓은 모단은 텅 빈 교실을 둘러보았다. 아직도 귓가에 아이들이 재잘대던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똑똑, 열려 있던 교실 문을 누군가 두드렸다. 5세 숲속반 담임인 이연경 교사가 손짓을 했다.
“모단 쌤, 마무리 다 했으면 퇴근해요.”
“네. 지금 가려고요.”
“출퇴근은 어떻게 해요?”
“버스로요. 요 앞 버스정류장까지 바로 오는 게 있어서요.”
“그럼 같이 가요. 차가 카센터에 있어서 이번 주엔 나도 버스 타거든.”
고개를 끄덕인 모단은 겉옷과 가방을 챙겨 나왔다. 아직 남아 있던 다른 교사들에게 인사를 하고, 연경과 나란히 회사를 나섰다.
“첫날이라 정신없었죠?”
“조금요. 아이들은 다 안정이 되어 있는데 제가 적응하느라 바빴네요. 오히려 저를 챙겨주고 이것저것 계속 알려주고, 귀여워요.”
“아휴, 7세가 귀여워봤자지. 우리 아들도 일곱 살이거든요. 미운 일곱 살도 아니고 미친 일곱 살이라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라니까.”
“아하하.”
밖은 이미 깜깜했다. 아이들은 여섯 시에서 일곱 시 사이에 대부분 귀가하지만 청소며 일지 작성이며 다음 날 수업 준비 등을 하다 보면 두어 시간쯤은 훌쩍 지나가기 일쑤였다.
버스정류장으로 향하던 모단은 회사 앞 횡단보도를 보고 멈칫했다.
일주일 전, 그리고 오늘 아침에도 마주친 황당한 남자가 떠올랐다. 종일 정신이 없어서 잊고 있었다.
‘어이가 없어서. 책임지긴 뭘 책임지라는 거야?’
처음 보는 남자랑 한 침대에서 눈 떴을 때나 주고받을 법한 말을 출근 첫날 아침에 듣게 될 줄이야. 다시 생각해도 열이 받았다.
‘정말 어디가 아파도 단단히 아픈 놈이 아니고서야…….’
입술을 질근 깨문 모단이 짧은 한숨을 뱉었다.
‘나 전생에 눈밑점 있는 사람한테 온갖 못된 짓은 다 한 거 아닐까?’
한때 새윤에게 박씨 기피증이 있던 때가 있었다. 속 썩인 구남친이며 절교한 친구, 재수 없는 선배에 시급 떼먹은 알바 사장까지 공교롭게도 다 박씨였던지라 박씨 성 가진 사람만 봐도 울화가 치민다고 했었다.
당시엔 남편 아니고 남사친이었던 은규는 비논리적인 소리 하지 말라고 타박했지만 모단은 깊이 이해했다. 모단 역시 비슷한 이유로 눈밑점을 가진 사람을 피했기에.
그래 놓고 박은규랑 결혼해서 박해빛을 낳고 TV에 박보검과 박도결이 나오면 환장하는 새윤과는 달리, 모단은 영 고쳐질 낌새가 보이질 않았다.
한동안 별일 없나 했더니 이렇게 거하게 치고 들어오는 걸 보면 단순한 징크스나 트라우마가 아니라 진짜 업일지도.
연경이 다시금 말을 걸었다.
“모단 쌤, 남자친구 있어요?”
“아뇨, 없어요.”
“정말? 있을 줄 알았는데. 썸남도 없어요? 작업 거는 남자들 많을 것 같은데.”
에이, 하며 웃던 모단의 입가가 삐끗했다.
“그럼 퇴근 후에 다시 볼까요?”
하필이면 백견 작업 거는 소리가 떠올라 버렸다. 어깨를 움츠린 모단이 주위를 휘 둘러보았다.
“왜 그래요?”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썸은커녕 도를 믿으라는 사람들만 자꾸 따라붙는 처지라서요.”
연경이 웃었다. 모단도 덩달아 웃음으로 넘겼다.
‘그래. 그거나 이거나 다를 게 뭐람. 깔끔하게 무시하면 그만이지. 직장 꼭대기에 있는 사람이라는 게 맘에 걸리긴 하지만…… 아니지, 직속 상사도 아니잖아? 비굴해지지 말자.’
“어, 버스 왔네요.”
“먼저 가보겠습니다. 내일 봬요.”
“그래요. 조심해서 가요.”
꾸벅 인사한 모단은 버스에 올랐다.
그 뒤로 검은 세단 한 대가 조용히 따라붙었다.
***
“첫 출근 어땠어? 아까 제대로 인사도 못 하고.”
원래는 은규가 출퇴근하며 해빛이를 데리고 오지만, 오늘은 갑작스런 외근이 생겨 새윤이 데리러 왔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네 어머니, 하며 어색하게 맞절을 했던 걸 떠올린 모단과 새윤은 동시에 웃었다.
“희명어린이집이 좋긴 좋더라. 전에 일하던 데도 국공립이라 좋은 편이었는데 여긴 더해. 식단부터 시설까지 어휴, 좋다 못해 럭셔리다.”
“말도 마. 해빛이 넣을 때도 경쟁률 얼마나 치열했다고. 결혼정보업체에서도 희명그룹 다닌다고 하면 가뜩이나 플러스인데 더 준다더라. 나중에 애 낳아서 희명어린이집 보낼 수 있다고.”
의자에 앉은 모단이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안 그래도 우리 엄마가 그러시더라. 괜찮은 대리 한 놈만 꼬셔서 시집가라고. 딸이랑 사위랑 나란히 희명그룹 다닌다고 손주 업고 다니면서 자랑하는 게 꿈이래.”
“옛날부터 너희 엄마 소원이시잖아. 자상하고 성실하고 돈 잘 버는 남자한테 시집보내서 편히 살게 하는 거.”
“본인 입으로는 소박한 바람이시라는데 그게 요새 제일 큰 꿈 아니냐? 꿈은 이루어지지 않을 때 아름다운 거라고 했다가 아침부터 한 대 맞았다.”
깔깔 웃은 새윤이 카운터에서 나와 맞은편에 앉았다.
“대리가 뭐 큰 꿈이라고. 이왕 꼬실 거면 팀장이나 과장이나 이사…… 그렇지, 말 나온 김에 회장 손주를 꼬셔보는 건 어때?”
“헉, 백견?”
모단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새윤이 인상을 팍 썼다.
“갑자기 백견이 왜 나와?”
“회장 손주라며!”
“백견 말고! 이사님 한 분 계신다며? 우리 은규가 그러던데.”
“아…….”
그제야 모단은 지갑 안에 넣어둔 명함을 떠올렸다.
홍보팀 이사 백지협이라 했던가. 그러고 보니 그 사람이야말로 드라마 속에서 끄집어낸 것처럼 반듯하고 젠틀했었다.
비서가 운전하던 세단의 승차감이 아직도 생생했다. 안락하지만 절대 제 자리 같지 않던 그 느낌.
“평범한 남자도 못 만나는데 회장님 손주에 이사는 무슨. 부잣집에 시집은 아무나 가냐? 다들 끼리끼리, 몰라? 신데렐라랑 캔디도 원래는 있는 집 애들이었다는 거 잊지 마라.”
“그치. 너처럼.”
“깜박했다. 그런 시절이 있긴 했지.”
무심한 대답 뒤로 딸랑 하는 종소리가 겹쳐들었다. 이제야 퇴근한 은규가 뒷문을 열고 들어왔다.
“자기, 왔어?”
“응. 해빛이는?”
“할머니랑 놀고 싶다고 해서 엄마 집에 맡겼어.”
마침 손님 한 무리가 들어왔다. 새윤은 어서 오세요, 하며 카운터 안으로 돌아갔다. 그 자리에 은규가 대신 앉았다.
“회사 맘에 들어?”
“하루 가보고 뭘 알겠냐?”
“난 맘에 안 든다. 변 대표 개새끼. 김 과장 상개새끼. 아오…….”
타이를 느슨하게 풀어낸 은규가 주절주절 한탄을 늘어놓았다.
“임원회의가 있었거든. 백견한테 변 대표가 제대로 까였나 봐. 그 화풀이를 김 과장한테 하고, 김 과장은 우리한테 하고, 어휴.”
“임원회의? 백견인가 뭔가, 예전에 대표 자리에서 밀려났다고 하지 않았어?”
“일단은 대주주고 하니까. 근데 사업 수완은 그쪽이 훨씬 좋았어. 경영천재 소릴 들을 만했다니까. 몸만 안 아팠어도.”
모단이 넌지시 물었다.
“그 사람…… 어디가 아프다 그랬었지?”
그러고 보니 예전에 은규에게 얼핏 들은 것 같았다. 그렇게 피를 쏟으며 쓰러질 정도인 줄은 상상도 못 했지만.
“어릴 때부터 몸이 좋지 않다던가? 대표로 있을 때도 한 달에 일주일씩 휴가 내고 그랬었어. 꾸준히 관리만 잘 받으면 되는 가벼운 병이라고 했는데, 1년 전쯤에 갑자기 사람이 이상해졌었거든. 얘기했지?”
“어어. 생각나는 것 같다.”
“그때 들통이 난 거지.”
은규가 은근하게 목소리를 낮췄다.
“몸의 병이 아니라 마음의 병이었다는 게. 주식 떨어질까 봐 그러는지 백씨 일가에선 쉬쉬하는데,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 얘기야.”
온몸에서 흘러넘치던 똘끼는 역시 착각이 아니었던 거다.
모단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얼른 떴다. 깜깜한 눈앞이 순간 제 앞날처럼 느껴졌던 건 기분 탓이겠지.
“그래도 돈 많고 잘생겨서 사는 데 큰 지장은 없나 보더라. 여자도 수시로 갈아치운다던데?”
어쩐지 개수작이 남다르다 했다.
“작년이었나? 웬 여자가 낮술 먹고 블랑아이 사무실에 들이닥쳐서 생쇼를 한 적이 있었거든. 무슨 호텔 체인 대표 딸이라는데, 난리도 아니었어.”
은규의 입가가 웃음을 참느라 씰룩거렸다.
“백견 나와! 코에 점 있는 여자 좋아한대서 일부러 박은 건데 이거 어쩔 거야! 오늘은 입술 안 번지게 바르고 왔어! 기습키스 안 할 테니까 얼굴만 보자! 이러면서.”
주문한 음료를 받은 손님들이 나가고, 새윤이 얼른 와서 은규 옆에 앉았다.
“입술? 키스? 뭔데? 야한 얘기면 처음부터 다시 해봐.”
“이 아줌마가.”
“우리 새윤이 또 음란마귀 씌었구나. 훠어이. 이따 집에 가면 다시 와.”
“이 부부가.”
“그래서 미인점 페티쉬가 있다는 게 소문이 났는데…… 어라.”
은규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쎄한 침묵 속, 은규와 새윤의 시선이 모단의 코에 꽂혔다.
왜? 하는 눈을 했던 모단이 뒤늦게 깨닫고 훌쩍 코 먹는 소리를 냈다. 복점은 무슨, 환장대잔치의 원흉이니 진즉 빼버렸어야 했다.
“정모단, 너 조심해야겠다.”
“미인점은 있지만 미인이 아니니까 안심해도 될걸?”
“그런가? 우리 새윤이 똑똑해.”
저들끼리 손바닥을 마주쳐 가며 꺄르륵대는 부부를 노려본 모단이 몸을 일으켰다.
“내가 뭔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맨날 오는 건지. 아무튼, 애들 데리고 산책할 때 아니면 어린이집 밖으로 나올 일도 없는데 회장 손주씩이나 만날 일이 있겠냐? 나 간다.”
커피숍을 나와 골목으로 들어가는 모단의 뒷모습에 두 개의 시선이 꽂혔다.
커피숍 앞에 세워진 차 안에서 은밀한 대화가 오갔다.
“워째, 집까지 따라가면 되겄슈?”
“내가 스토커냐?”
견의 대답을 듣자마자 섭호의 동공이 희번덕 굴렀다.
“참말로 놀랍구먼. 회사 앞에서 퇴근할 때까지 죽치고 있다가 버스 따라와서 또 죽치고 있었음서 스토커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겨?”
“혼잣말을 할 거면 안 들리게 하고 들리게 할 거면 대놓고 해.”
견은 모단의 입사지원서 사본이 끼워져 있는 파일로 제 허벅지를 툭툭 두드렸다.
“스토킹이 아니라 사전조사지. 건물 한 채를 사더라도 서류 떼어보고 직접 살펴보는 게 기본인데, 평생 같이 살 여자를 두고 이 정도 공도 안 들인다는 게 말이 돼?”
“과연 그 짝에서두 공이라고 여길지 모르겄네유. 애시당초 같이 살아주기나 헐지…….”
“아무튼! 정보 너무 부족해! 생년월일하고 연락처하고 집주소하고 고등학교 대학교 어디 나왔는지하고 졸업해서 지금까지 어디서 일했는지까지밖에 모른다니.”
섭호가 입술을 실룩거렸다.
“그래도 오늘은 퇴근할 때 다른 선생님하고 같이 나온다는 것과 81번 버스를 탄다는 것과 집에 들어가기 전에 동네 커피숍 들른다는 것까지 알아냈지만. 아, 아이스카페모카 마시는 것도.”
“뭣을 더 캐내야 직성이 풀리시겄슈?”
“남자친구가 있는지를 알아내야지.”
할 말은 많지만 해봤자 입만 아플 것임을 파악한 섭호가 다 포기하고 장단을 맞췄다.
“그쥬. 서류상 미혼이지만 남자친구는 있을 수도 있응께.”
“사실 미혼인 걸로 충분하긴 해. 남편이나 애 있는 집을 파탄 낼 순 없지만 애인이나 썸남 정도는 뭐.”
견이 가볍게 늘인 아랫입술을 혀끝으로 훑었다.
사업상 냉정하게 밀어붙여야 할 때 짓곤 하는, 해맑게 잔인한 표정이다.
“솔찬히(상당히) 위험스런 꿍꿍이구먼유.”
“다른 남자는 정모단 씨가 없다고 죽진 않겠지만 난 아냐. 더 이상의 이유가 필요해?”
파일을 내려놓은 견이 팔짱을 꼈다.
“보통 여자들이 화나면 풀리는 데 얼마나 걸려?”
“여자마다 다르겄쥬. 허긴, 알 턱이 있남. 노상 승깔 뻗치게 만들 줄만 알았지, 언제 한번 풀어줘 본 적이 있었어야 말이시.”
“혼잣말은 안 들리게 하랬지? 내일 다시 봐야겠다. 막상 내 얼굴 보면 풀릴 것 같은데.”
“얼굴에 손자국이나 안 나야 할 것인디…….”
“저 자식이……!”
운전대를 잡은 섭호가 태연히 말을 돌렸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단 말도 있긴 하쥬.”
“시간이 남아돌아? 뭘 열 번씩이나 찍어? 비효율적이게.”
한 손으로 머리를 넘긴 견이 태연히 뱉었다.
“몇 번 해보고 안 되면 전기톱으로 끝내.”
***
한 주가 정신없이 흘러가고, 금요일이 되었다. 매일 버스정류장까지 같이 갔던 연경은 오늘부터 차를 타고 간다고 했다.
“같은 방향이면 타고 가면 좋은데.”
“아니에요. 버스도 자주 오고 괜찮아요.”
“그럼 조심해서 가고, 내일 봐요.”
손을 흔든 연경은 주차장 쪽으로 종종걸음을 했다. 모단은 로비를 나와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일주일치 피로가 쌓여서일까, 오늘은 새윤의 가게에서 수다 떠는 것조차 피곤할 것 같았다. 커피 한 잔으로 저녁을 때우고 집에 가자마자 씻고 자는 게 나을 듯싶었다.
회사 건물 바로 옆에 있는 별다방으로 향했던 모단은 자동문 버튼을 누르기 직전에 멈칫했다. 받았으나 쓸 수 없는 선불카드가 떠올라서였다.
‘저 아래 콩다방으로 가는 게 낫겠다.’
손을 내리고 돌아서려는데, 웬 목소리가 뒤에서 스윽 넘어왔다.
“왜 가려다 말아요?”
“더헉!”
모단은 소스라쳐 돌아보았다. 낯익지만 반갑지는 않은 얼굴이 바로 앞에 있었다.
“충전해 준 카드 벌써 다 썼어요? 하루에 커피를 10만 원어치씩 마셨나?”
양손에 테이크아웃 커피컵을 들고 서 있던 견이 삐딱하니 짝다리를 짚었다.
“애도 아니면서 왜 맨날 다른 선생님이랑 팔짱 끼고 같이 가는 겁니까? 혼자 가야 말을 걸지.”
견이 한 손에 든 커피를 불쑥 내밀었다.
“아이스카페모카, 맞죠?”
말이며 행동이며 웃음까지도 너무 자연스러워서 하마터면 받을 뻔했다. 퇴근길에 커피 사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시켰었나 헷갈릴 정도였다.
“날마다 선생님 것까지 사가지고 기다렸는데. 맨날 혼자서 두 잔 다 마시느라고 얼마나 힘들었다구요.”
속으로 고개를 세차게 내저은 모단은 철벽 경계태세를 갖췄다.
이 남자, 출퇴근길 만원버스 같다. 짜증 난다는 점과 조금만 방심하면 의지와 상관없이 휩쓸린다는 점이.
“오늘도 두 잔 드세요. 저는 알아서 사 먹게.”
그 말만 남기고 잽싸게 돌아섰다. ‘도를 아십니까’를 퇴치할 때처럼 애초에 눈도 안 마주치고 귀도 안 열 작정이었다.
“지난번엔 죄송했어요.”
그러니까 볼 때마다 죄송한 짓을 왜 하냐고.
“저 좀 잘생긴 미친놈 같았죠?”
굳이 ‘잘생긴’을 넣는 건 더 미친놈처럼 보이려고 그러는 건가?
“대뜸 책임지라고 한 말은 미룰게요.”
아아, 안 들린다. 나랑은 상관없는 얘기다.
“일단 천천히 서로 알아가도록 할까요?”
말도 섞지 않는 게 상책이라고 몇 번이나 되새겼으나, 결국 참지 못하고 말이 튀어나왔다.
“됐어요. 알고 싶기도 전에 너무 많은 걸 알아버려서.”
“아무래도 젊고 잘생긴 재벌 3세다 보니 여기저기서 말이 많이 돌겠죠. 근데 본인이 안 알려줬는데 다른 사람들한테 들은 얘긴 반만 믿는 게 기본 아닌가?”
견이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옆에 오던 사람이 서니 덩달아 멈춰 섰던 모단은 바로 후회했다. 이 기회를 놓치지 말고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쭉 갔어야 했다.
“나 아프다는 얘기도 들었죠?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얘기니까. 직접 봐서 아시겠지만 사실 저 좀 아파요.”
젠장, 눈까지 마주쳤다.
비 맞은 강아지처럼 축 처진 눈이 모단의 눈을 지그시 사로잡았다.
“아픈 사람 책임 안 지면 나쁜 사람.”
“미친놈이…….”
뇌의 어디서 오류가 났는지, 속마음이 밖으로 튀어나오고 말았다.
제가 더 당황한 모단이 눈을 피했다. 충격 받았을 법도 한데, 견은 진지하게 수긍했다.
“그래도 곱게 미친 편입니다. 집착은 있지만 절대 해치지 않아요. 안심하세요.”
안심은커녕 멀쩡하던 골이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버스정류장에 도착하고 나니 더 이상 피할 곳도 없었다. 거기에 시선까지 쏠렸다.
희명그룹 사람이 아니더라도, 백견이 누군지 모르더라도 이 남자의 비주얼은 무조건 눈에 띈다.
시선을 의식하긴 하는지 옆에 가만히 서 있던 견이 목소리를 낮췄다.
“남자친구 있어요? 있다고 하면 안 쫓아다닐게요.”
안 쫓아다닌다는 말에 혹한 모단이 고개도 돌리지 않고 답했다.
“있어요.”
“몇 살?”
“……서른둘.”
“2초나 망설였어요. 없네.”
“있다니까요?”
“그럼 3초 안에 대답해 봐요. 정모단 선생님 남친은 몇 살 때까지 이불에 오줌을 쌌을까요?”
“뭐요? 있어도 그걸 어떻게 알아요!”
“없네.”
‘와아이씨! 짜증 나 죽을 것 같아!’
모단은 깊은 심호흡으로 끓어오르는 분노를 가라앉혔다.
‘돈 많고 시간 많은 사람이 심심해서 하는 짓에 말려들지 말자. 차라리 얘도 미친 일곱 살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절대 흥분하지 말고, 차분하고 단호하게 대하도록 하자.’
“무슨 사연인지는 모르지만 코에 있는 점 때문에 저한테 관심이 생긴 거라면 그만두세요. 이거 가짜예요.”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견이 몸을 숙였다.
같은 눈높이, 한 뼘만 좁히면 코끝이 닿을 수도 있을 것 같은 거리에서 그가 모단을 마주 보았다.
아까와는 전혀 다른 눈.
강아지는커녕 포식자 같았다. 일곱 살이라니, 가당치도 않았다.
그런 시선이 모단의 코를 매만지듯 훑었다. 내리깐 속눈썹이 느릿하게 내려앉았다 올라왔다. 눈도 마주치지 않았는데 압도당하는 기분이었다.
“정모단 선생님.”
낮은 목소리가 느릿하게 파고들었다.
“자꾸 거짓말하면 코 길어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