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르몬시터-8화 (8/86)

#8. 17년 전 그날처럼

2017.05.28.

“왜 벌써 을처럼 굴어?”

웃음기를 싹 거둔 지협은 다른 사람 같았다. 견은 태연히 대꾸했다.

“을이니까.”

“뭐?”

“나에게 필요한 걸 갖고 있는 건 정모단 씨고, 어떻게든 받아내야 하는 건 나야. 상대적으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갑이 저쪽 맞잖아.”

“그걸 모르게 해야지. 받는 만큼 대가를 제공하면 되는 거고. 너 이제껏 거래의 기본도 모르면서 사업을 한다고 했어?”

“이게 지금 사업으로 보여?”

“사업이지. 그것도 엄청나게 큰 사업. 네 인생하고 희명그룹의 명운까지 달려 있는.”

지협이 미간 사이를 지그시 눌렀다.

“희명그룹 둘째 며느리라는 자리. 많은 여자들이 탐내는 조건이잖아. 그 정도 쥐고 있으면 너도 딱히 을은 아니지.”

“불특정다수가 탐내는 게 뭐가 중요해? 내가 거래하고자 하는 사람한테 충분히 매력적인 조건인지가 중요하지. 이거야말로 기본 중의 기본 아닌가?”

견의 말투가 지협만큼이나 딱딱해졌다.

“나는 정모단 씨가 옆에 있어주지 않으면 사람답게 살 수가 없지만, 그 여자는 나랑 못 산다고 죽진 않을 것 아니야. 갑을 관계만 되어도 다행인 거라고. 깊게 따지면 아예 계약 자체가 성립이 안 되는 조건이니까.”

끼고 있던 팔짱을 푼 견이 입매를 비틀었다.

“형이 예전에 그랬었지. 온 식구가 누군지도 모르는 한 여자한테 질질 끌려가는 걸 언제까지 봐야 하느냐고. 이미 죽은 사람이면 어쩔 거냐고, 애초에 없었던 셈치고 살라고.”

“그래서 내 말 듣고 잘 살았었잖아. 갑자기 그 호르몬시터인가 뭔가에 다시 매달려서 죄다 무너뜨리기 전까지는.”

“잘 살았었다고?”

지협의 눈가에 실수했다는 기색이 스쳤다. 꾹 다물어진 지협의 입을 주시하던 견이 느릿하게 눈을 들었다.

“난 열두 살 생일 이후로 잘 살아본 적이 없어. 잘 살려고 악착같이 노력했을 뿐이야.”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지협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정모단 씨가 정말 네 호르몬시터라면, 지금 네가 그러듯 온 식구가 은인처럼 떠받들겠지. 혹시라도 너 버릴까 봐 더 각별히 대하겠지. 그러면 그 여자가 고마워하고 감동하면서 기꺼이 우리 가족이 되어주고 평생 널 책임져 줄까?”

지협은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신랄하게 내뱉었다.

“내가 그 사람 없이는 못 산다는 걸 알게 되면, 정말 나 없으면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걸 알아버리면 말이야, 사람은…….”

은, 소리를 그려내고 잠시 멈췄던 입술이 다시 움직였다.

“잔인해져.”

바싹 메마른 말끝에 짧은 열기가 확 일었다 사그라졌다.

“자기 마음대로 휘두르다가, 자기 마음대로 휘둘리는 게 재미없다고 버려.”

견은 등 뒤의 바닥에 팔을 짚고는 몸을 뒤로 기댔다.

“그러니까 정말로 평생 그 여자를 곁에 둘 생각이면, 네 사정 같은 거 낱낱이 알게 하지 마. 그런 거 몰라도 네 옆에 있을 수밖에 없게 만들어. 좋아서든 조건 때문이든 뭐든. 싫어도 못 떠나게 할 법한 거 하나쯤 쥐고 있으면 더 좋고.”

차갑게 말을 맺은 지협이 섭호를 돌아보았다.

“정모단 씨에 대해서 어디까지 조사해 봤어?”

“기본적인 인적사항과 가족관계, 출신학교와 이력 정도만 파악했습니다.”

“17년 전에 희명리조트 오션에 갔던 건 확인했어? 찾을 수 있는 데까지 다 찾았는데 왜 못 발견한 거지?”

“안 그래도 그 부분이 좀 걸립니다. 가보신 적 있느냐고 물어봤더니 아예 간 적이 없다고 대답하셨습니다. 물론 본인의 말만 들은 것이니 사실인지는 모르고요.”

“그게 사실이면 호르몬시터가 아닐 수도 있다는 거잖아.”

지협이 노골적으로 언짢은 얼굴을 했다.

“백 프로 확실한 것도 아닌데 그렇게 설레발을 쳤어? 저 여자 때문이 아니라 그냥 그 순간에 우연이 겹친 거였다면? 마음 놓고 있다가 다음 달에 또 월경을 해버리면?”

월경, 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견의 미간에 힘이 들어갔다.

“너는 헛고생한 거고 저 여자는 영문도 모르고 농락당한 거야. 거기에 만에 하나 진짜 호르몬시터라고 다른 여자가 나타나기라도 하면 어떻게 수습할 건데?”

“정모단 씨 맞아, 내 호르몬시터.”

“제대로 조사도 안 해봤다면서 뭘로 확신을…….”

“심장이 뛰었어, 17년 전 그날처럼.”

지협도 섭호도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심장이 뛰었다니. 낭만과 감성이 있어야 할 자리에 예민함과 괴팍함이 들어찬 견과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차라리 ‘17년 전에 봤던 점과 크기와 모양과 좌표가 정확히 일치한다’고 했으면 얼마간 수긍했을지도 몰랐다.

지협이 먼저 충격에서 헤어 나왔다.

“시간도 감정도 미리 투자하지 마. 호르몬시터가 아니라면 티끌만큼의 의미도 없어.”

“반대로 호르몬시터라면 태산만큼의 의미라는 뜻도 되지.”

견이 기댔던 팔을 떼고 몸을 일으켰다.

“내가 죽지 않은 게 정모단 씨 덕분이길 간절히 바라고 있어. 이제 와서 그날 일은 우연이었다거나 다음 월경 때 더 많은 피를 토하고 죽을지도 모른다거나 그런 생각들이 들면 좀 무섭거든.”

섭호의 눈매가 일그러졌다. 견의 입에서 죽는다는 말이 나올 때마다 가슴이 답답해지는 그였다.

“근데 그 여자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놓여. 플라시보 효과인지 뭔지 몰라도 일단은 그래. 그리고 또…….”

견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너무 재밌어.”

이제껏 멀쩡해 보이던 견의 눈이 희번득하더니 흰자에서 광채가 나기 시작했다.

“그냥 살아난 게 아니라, 제대로 살맛이 나고 있어.”

지협과 섭호의 눈이 마주쳤다. 섭호는 웃는 게 아닌 것 같은 웃음을 머금고 변명 같은 말을 흘렸다.

“아시잖습니까. 도련님의 삶의 원동력이 집착이신 거.”

지협은 잠잠히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가 인정하듯, 견은 어렸을 때부터 탁월한 집착가의 면모를 보였다.

뭐든 한 번 꽂히면 짧게는 몇 달부터 길게는 몇 년에 이르기까지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뭔가에 쏟던 열정이 식었는데 새로운 집착 대상을 찾지 못하면 무료함과 괴로움에 몸부림치곤 했다.

“죄송합니다. 통화가 생각보다 길어져서.”

때마침 모단이 돌아왔다.

블랑아이 론칭과 호르몬시터 찾기에 이어 집착견의 삶의 낙이 된 모단에게 지협과 섭호의 안쓰러운 시선이 꽂혔다. 물론 모단은 그 시선의 의미가 무엇인지 꿈에도 짐작하지 못했지만.

“실례하겠습니다.”

뒤이어 들어온 직원이 다 먹은 그릇을 치우고 후식을 내어주었다.

더없이 우아한 자태로 매실차를 한 모금 넘긴 견이 입을 열었다.

“정모단 선생님, 나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모단은 안 된다고 하면 안 할 거냐는 시선으로 응수했다. 견은 씩 웃었다.

“아는 일곱 살짜리 중에 하루라도 빨리 어른이 되고 싶어 하는 아이가 있거든요. 아이인 게 너무 싫어서 밖에도 잘 안 나가고 그래요.”

짐작대로 뜬금없는 소리구나 했으나, 견의 표정은 생각보다 진지했다.

“어른만 되면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매일매일 진짜 어른이 되기만 기다리는 아이인데…… 선생님이라면 걔한테 뭐라고 말씀해 주시겠어요?”

견은 가만히 쳐다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모단이 말을 골랐다.

“어른이 되면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시절이 있긴 하죠. 사실 그렇지는 않지만. 나는 왜 이렇게 작아서 아무것도 못 할까, 답답할 때도 있을 거구요.”

견의 눈동자가 빛을 빨아들이듯 깊어졌다.

“하지만 아이는 어른이 될 수 있어도 어른은 아이가 될 수 없잖아요. 그러니까 어른을 너무 부러워하지 말라고 해주고 싶네요. 매일매일 잘 먹고 잘 놀고 잘 자다 보면 저절로 어른이 되어 있을 거라고.”

어느새 지협과 섭호마저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근데 이렇게 말하면 알아듣는 애들도 있고, 그렇지 않은 애들도 있어요. 영 모르겠다는 표정이면 달리 말해주시는 게 나을 거예요.”

“어떻게요?”

아이들을 대하듯 나긋해졌던 모단의 목소리가 평소의 털털한 톤으로 되돌아왔다.

“여덟 살 돼서 학교 가보면 아, 유치원 다닐 때가 좋았구나, 할 거다. 한 살 더 먹기 전에 야무지게 놀기나 해.”

“푸흡!”

견이 매실차를 뿜기 직전에 입을 틀어막았다. 섭호와 지협의 표정도 묘해졌다.

저놈 또 왜 저래, 하는 시선을 던진 모단은 조용히 매실차를 들어 입에 댔다가 눈을 크게 떴다.

“으음.”

후식이랍시고 고작 두어 모금 담겨 나온 차조차 이렇게 맛있다니.

모단이 혹 빠져든 사이, 견이 아직도 웃음기를 거두지 못한 눈으로 툭 던졌다.

“방금 또 반했어요. 책임져야죠?”

“푸흡!”

견과는 달리 미처 막지 못한 모단이 입안의 액체들을 아낌없이 뿜었다.

복어 독 잘못 먹었나 싶은 견의 멘트에 한 번, 웃는 얼굴에 침 뱉는 광경을 실제로 목격한 것에 두 번 기겁한 섭호가 얼른 냅킨을 찾아 건넸다.

“미, 미안해요.”

모단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반쯤 몸을 일으켰다가 다시 앉았다.

“괜찮아요. 저는 피도 뿌렸는데 먹던 음료랑 침쯤이야.”

괴기스럽고 더러운 말로 화답한 견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얼굴과 앞섶의 물기를 닦아내고는 싱긋 웃었다.

“미안하면 책임지세요.”

“말 같지도 않은 소릴.”

미안해서 안절부절못하던 것과는 별개로, 그녀의 대답은 매몰차기 짝이 없었다.

지협은 미미하게 눈가를 찌푸렸다.

마침 그의 휴대폰이 울렸고, 짧게 통화를 마친 지협이 몸을 일으켰다.

“다 드셨으면 이만 갈까요? 제가 다음 약속이 있어서.”

“아, 네.”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식당 밖으로 나오자마자 모단은 공손히 인사를 했다.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조심해서 가세요.”

“댁까지 바래다 드려야 하는데, 약속 시간이 촉박해서…….”

모단이 괜찮다고 미소를 지었다. 뒤늦게 식당 문을 열고 나온 견이 끼어들었다.

“잘 가, 형. 빨리 가.”

견에게 떠밀리다시피 한 지협이 제 차에 올랐다.

멀어지는 차를 따라 모단도 자연스럽게 사라지려 했으나 견에게 붙잡혔다.

“타세요. 가시는 데까지 안전하고 쾌적하게 모셔다 드립니다. 그것도 공짜로.”

“버스 탈게요. 그럼 이만.”

“그럼 나도 버스 타고 가야지. 악착같이 쫓아가서 버스비 내가 내야지. 내릴 때 같이 내려서 바로 집 앞까지 모셔다 드려야지. 그리고 그 동네 편의점에서 밥 사 먹고 사우나에서 자다가 월요일 아침 출근할 때 집 앞에서 굿모닝 인사하면서 버스비 언제 갚을 거냐고 쫓아다녀야지.”

“탑시다, 타요!”

진저리를 친 모단이 뒷좌석 손잡이를 잡았다.

씩 웃은 견은 모단의 손을 부드럽게 밀어내고는 제 손으로 문을 열어준 후에 타라는 손짓을 했다. 모단이 뒷좌석에 앉자 문을 닫아주고 조수석에 올랐다.

“어디로 가면 될까요?”

모단은 집에서 가까운 지하철역에서 한 정거장 앞을 댔다. 견은 상세히 묻지 않았다.

“이거 받아요. 밥값을 지협이 형이 낸다고 해서. 제가 대접했어야 하는데.”

반쯤 몸을 돌린 견이 식당에서 나올 때부터 들고 있던 작은 쇼핑백을 건넸다.

모단이 머뭇거리자 긴 팔을 쭉 뻗어 그녀의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아까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기에. 거기 사장님께서 직접 만드신 매실차예요.”

모단은 제 무릎 위에 놓인 쇼핑백을 내려다보았다. 그리 크지 않은 유리병 두 개가 가지런히 담겨 있었다.

‘의외로 섬세한 구석이 있네.’

여전히 몸을 틀어 그녀를 보고 있던 견이 목소리를 은근하게 낮췄다.

“그날 매실차 마시면 좋대요.”

모단이 울컥했다. 생리 중이라고 말실수 한 번 한 거 가지고 언제까지 우려먹을 거냐는 말이 혀끝에 장전된 순간, 견이 덧붙였다.

“술 마신 다음 날. 혹은 소화 안 되는 날.”

한 손으로 제 배를 스윽 쓸어내린 그가 눈꼬리를 휘었다.

“왜요? 뭐 다른 거 생각했어요?”

모단은 한 손으로 다른 손 주먹을 잘 감쌌다. 안 그러면 한 번 더 욱했을 때 기어코 잽을 날릴 것 같았다.

“얄밉다거나 꼴 보기 싫다거나 한 대 때리고 싶다는 말 많이 듣죠?”

“한 번도 못 들어봤습니다. 신선하네요.”

묵묵히 운전만 하던 섭호가 넌지시 말을 보탰다.

“우리 도련님께서는 남의 속마음을 읽는 능력까진 없으십니다.”

“이 자식이…….”

5분 후, 모단이 말한 지하철역 근처에서 차가 멈췄다. 견이 진지하게 말했다.

“내 선물 놓고 내리면 바로 챙겨서 들고 쫓아갈 겁니다. 정모단 선생님! 이거 놓고 가셨어요! 여기 내 마음! 하면서.”

“내가 미친놈 소리 들을 것도 아닌데 뭔 상관인지. 해보시던가요.”

“못 할 것 같나 보네.”

견이 딸깍 하고 안전벨트를 풀었다. 모단이 쇼핑백 손잡이를 멱살 쥐듯 꽈악 틀어쥐었다.

“고오마압습느드.”

이를 악물고 쇼핑백을 챙긴 모단이 차에서 내렸다. 창문을 연 견이 팔랑팔랑 손을 흔들었다.

“조심해서 들어가요! 세상은 위험하니까.”

‘네가 제일 위험하고 해로워, 이 월요일 아침 같은 새끼야.’

모단은 홱 하니 몸을 돌려 빠르게 사라졌다.

창틀에 팔을 겹쳐 올리고 턱을 기댄 견의 입가에 낫낫한 미소가 번졌다.

“빨리 월요일 됐으면 좋겠다.”

***

그리고, 월요일.

출근하던 희명그룹 직원들이 작게 웅성거렸다.

“백견 아니야?”

“지난주에도 회사에서 본 것 같은데.”

“요새 웬일이래?”

외국물 좀 먹은 것 같은 비서와 함께 나타난 그가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먼저 기다리고 있던 다른 직원들이 주춤 물러나며 흘끔거렸다. 견은 심상히 인사를 하고는 15층으로 향했다.

“회장님 뵈러 왔나 보네.”

“그러게요.”

그러나 15층에 도착한 견은 회장실과는 정반대 쪽에 있는 계단으로 향했다. 반 층 정도만 올라가면 옥상이었다.

“날씨 엄청 좋다.”

견은 손갓을 하고 몇 번 와본 적 없는 옥상을 둘러보았다.

절반 이상이 사내어린이집 아이들을 위한 공간이다.

널찍한 실외놀이터와 소담스런 텃밭도 있었다. 한쪽에는 자판기와 작은 테이블, 의자를 놓아두었다.

근무 시작 전에 바람도 쐬고 음료수도 마시며 수다를 떨러 올라왔던 여직원 몇 명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견은 그녀들 쪽은 보지도 않고 입구 바로 맞은편의 난간에 등을 기대고 섰다.

“각도 확인해 봐. 딱 문 열고 들어왔을 때 가장 잘생겨 보일 만한 위치인지.”

“지금도 아주 눈이 부십니다.”

“새삼스럽게 왜 이래.”

“역광이라 뵈는 게 없어서요. 눈도 제대로 못 뜨겠네요.”

“그럼 여기 서 있으면 안 되잖아! 똑바로 좀 보라고!”

“적당히 하시죠, 도련님.”

뒤늦게 여직원들을 의식한 견이 섭호에게 가까이 오라는 손짓을 하고는 속닥거렸다.

“진짜로 오늘 정모단 씨 옥상 올라오는 거 맞아?”

“오전에 바깥놀이 활동이 있다고 했으니께유. 어린이집 홈페이지는 아무나 가입이 안 되더만유. 글서 사무실 한 바퀴 돌아봤더니 재무팀 강경은 과장님 책상 앞에 주간계획안이 떡하니 붙어 있더라구유.”

“넌 정말 센스 넘치는 비서야.”

“되도록 어둠의 경로를 통하지 않으려고 애썼쥬.”

“어둠의 경로……. 너 비서 되기 전에 뭐 했어?”

“코찔찔이 시절부터 봐놓구선 새삼스럽게 뭘 묻는대유? 별거 안 했슈. 연장 들고 땅이나 파고 그랬쥬.”

“평범한 영농후계자는 아니었을 것 같은 이 기분은 뭐지?”

“기분 탓이유.”

그사이, 이마를 맞대고 속닥이는 두 남자를 영 수상한 눈으로 살피던 여직원들이 눈치껏 일어나 내려갔다.

텅 빈 옥상, 단단히 팔짱을 끼고 선 견은 또다시 그녀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17년도 기다렸는데 그깟 몇 시간쯤 더 못 기다릴까, 하는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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