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호르몬시터-5화 (5/86)

#5. 나 책임지세요

2017.05.17.

“그거…….”

이게 말로만 듣던 블랙카드고 재벌의 스케일인가 싶어 모단은 침을 꼴깍 삼켰다. 동시에 엄청 뿌듯해하는 견의 목소리가 긴장을 파삭 깼다.

“회사 앞 별다방 선불카드예요.”

“아, 예.”

어차피 안 받을 거였는데 왜 실망한 걸까.

스스로의 속물근성을 한탄한 모단이 카드를 돌려주려는데, 커피를 가져온 섭호가 견의 옆에 앉으며 말했다.

“차로 칠 뻔했는데 연락처도 안 드리고 보상도 없으면 그게 바로 뺑소니죠.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 안 받…….”

“그뿐입니까? 자칫 큰일이 날 뻔한 걸 도와주시기까지 하셨잖습니까. 안 그래도 도련님께서 생명의 은인이라면서 인사팀장님께 전화를 하려고 하시더라고요. 정 선생님 연봉을 두 배로 올리라고 해야겠다면서.”

“예에?”

“그건 오히려 선생님께 폐가 된다고 겨우 말렸습니다. 회사에 소문이라도 퍼지면 아주 난리가 날 테니까요. 직원들의 사기 저하는 물론, 정 선생님 인생이 매우 피곤해지실 거라고.”

모단은 정신을 바짝 차렸다.

요약하자면 옆에서 고개 끄덕이고 있는 이 양반은 도무지 어디로 튈지 모르니 인생 피곤해지기 전에 적당히 받아주고 끝내라는 말 아닌가.

“감사합니다. 더 이상의 보상은 절대로 필요 없습니다.”

모단은 얌전히 봉투를 가방에 넣고는 섭호를 보았다. 고생 많으시겠습니다, 하는 애잔한 눈길을 받은 섭호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듯 눈을 슬쩍 내리깔았다가 떴다.

‘용건 끝났으면 이제 그만 가고 싶은데.’

모단이 보란 듯이 손목에 찬 시계를 내려다보았으나 견은 보란 듯이 못 본 척했다.

“코에 있는 점 예쁘네요. 그거 진짜죠?”

점 얘기도, 진짜냐는 물음도 하도 들어서 별로 안 좋아하는 모단이 눈매를 굳혔다.

견은 한 손으로 제 눈 밑을 가리켰다.

“저도 여기 점이 있는데, 연예인 따라서 찍은 거냐는 말을 몇 번 들어서. 그런 말 듣지 않으세요?”

모단은 테이블 아래에서 주먹을 꼭 쥐었다.

그래, 그 점.

불쾌하고 불길한 예감이 슬금슬금 번져 나갔다. 더 이상 휩쓸려서는 안 됐다. 가능하다면 상종도 하지 말아야 한다. 보나마나 안 좋게 엮일 게 뻔하니까.

직원들이 하나둘씩 출근하고 있었다. 회사 입구 쪽을 돌아보는 그녀의 시선을 따라간 견은 로비에 설치된 대형 화면에서 희명리조트 오션의 광고가 나오는 걸 보고 넌지시 물었다.

“혹시 희명리조트 오션 가보신 적 있으세요?”

‘당연히 가본 적 있겠지, 거기서 나랑 마주쳤는데.’

견의 눈빛이 기대로 가득 찼다. 이미 확신하고 있지만, 그 말까지 들으면 더욱 벅찰 것 같았다.

그러나 모단의 대답은 의외였다.

“가본 적 없어요.”

“네?”

“이만 일어날게요. 출근이 더 늦어지면 안 될 것 같아서. 커피 감사히 잘 마셨습니다.”

견이 황급히 따라 일어섰다.

“그럼 퇴근 후에 다시 볼까요? 몇 시…….”

몇 시에 끝나시죠, 까지 할 뻔한 견은 모단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혀를 깨물고 입을 다물었다.

태어나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눈빛이지만 보자마자 뭔 말인지 알 것 같았다.

‘어디서 개수작이야?’

맹세코 이렇게까지 무계획적이고 성급하게 굴 생각은 아니었다.

오늘은 괜찮은 첫인상만 남기고 앞으로 우연인 척 만나고 또 만나며 자연스럽게 가까워지려고 했는데. 그러다 도저히 거절할 수 없는 분위기에서 온 얼굴…… 이 아니라 온 진심을 다해 본론을 꺼내려고 했던 건데.

모단이 리조트에 간 적 없다고 딱 잘라 대답한 순간 머릿속이 하얘져 버렸다. 뭔가가 덜컥 허물어진 것 같아서.

하나 허물어진 건 바로 지금 이 순간인 듯했다.

“퇴근 후에 직장 사람을 왜 봅니까? 퇴근 후 업무카톡 금지법까지 발의된 시대에.”

‘첫 단추를 잘못 끼우다 못해 작살을 냈구나.’

고민하던 견은 이왕 이렇게 된 거 직구를 택했다. 어쩌면 먹힐지도 모른다는 어리석은 바람으로.

“저는 어린이집하고는 전혀 관련 없는 사람인데 퇴근 후 업무카톡 금지법이 왜 나옵니까? 사적으로 중요하게 드릴 말씀이 있어요.”

“뭔지 몰라도 지금 여기서 하세요.”

“나 책임지세요.”

모단의 눈썹이 10시 10분 각도를 그리더니 왼쪽 윗입술이 주욱 치켜 올라갔다. 헤어진 전 남친이 웬 애를 데려와 네 애라며 들이밀어도 이렇게 황당하진 않을 듯했다.

“누군가의 가장 은밀하고 사적인 부분을 봤으면 당연히 책임을 져야죠.”

“내가요?”

“전 다른 건 다 보여줘도 아픈 모습은 남한테 절대 안 보여주거든요.”

“보여달라고 한 적 없는데. 차라리 벗은 모습을 보여주시고 책임지라고 하면 납득이 가겠는데요.”

“그런가요? 그럼 언제 보실래요? 아픈 모습도 보여 드렸으니 벗은 것쯤은 언제든지 보여 드릴 수 있습니다.”

섭호가 말했던 바로 그것, ‘그때 숫제 뒤지게 내뿌려 둘 것을’ 하는 표정이 모단의 얼굴에 여과 없이 떠올랐다.

“이봐요, 백견 씨. 제가 이런 말장난이나 듣자고 일찍 출근한 게 아니에요.”

“저 장난 아닙니다.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이었어요. 생의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순간. 그때 정모단 씨를 만나지 않았으면, 지금 저 여기 없었을 겁니다.”

그동안 내가 어떻게 살았는지, 그동안 당신을 찾는 데 들인 돈과 시간과 공이 얼만지, 때론 얼마나 원망스러웠는지, 얼마나 독한 생각까지 했는지 안다면 그런 표정으로 날 보진 못할 텐데.

“그러니까…… 고맙게도 저를 살려주셨으니까, 저도 뭐든 해드릴 테니까, 책임져 달라는 거죠.”

뭐라 말할 수 없이 미묘한 공기가 둘 사이를 휘감았다.

카페테리아 직원이 흘끔대는 걸 눈치챈 섭호는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향하더니 음료 한 잔을 더 주문했다. 가장 복잡하고 오래 걸리는 걸로.

“사람이 사람을 책임진다는 게 보통 어떤 의미인지는 알고 계시죠?”

“알고 있죠.”

“아뇨. 전혀 모르시는 것 같은데요. 아시면 그렇게 아무 때나 막 쓰실 수가 없죠. 차 몰고 돌진하실 때도 되레 나보고 책임질 거냐고 하시더니만.”

“그건…….”

“물에 빠진 놈 살려줬더니 보따리 내놓으라고 하는 격이네. 다시 물에 처박아 드리면 책임 안 져도 되는 건가?”

견의 입이 무방비하게 벌어졌다.

“혹시 연봉이나 인사나 기타 관련해서 갑질이라도 해보실 생각이라면 곱게 접어 하늘 위로 날리시는 게 좋을 겁니다. 역공격이 뭔지 제대로 보여 드릴 거니까.”

모단이 팔을 크게 휘둘러 가방을 낚아챘다. 한 대 맞는 줄 알았던 견이 잔뜩 움츠러들었다가 얼른 어깨를 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리는 모단의 뒷모습을 보다가, 견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웃겨서 웃는 게 아니었다. 너무 막막해도 웃음이 난다는 걸 깨닫는 참이었다.

음료를 들고 서 있던 섭호가 불쑥 말했다.

“저도 도련님 책임 안 지겠습니다.”

“뭔데, 갑자기?”

“누군가의 가장 은밀하고 사적인 부분을 봤으면 당연히 책임을 져야 한다면서요. 여자한테 차이는 것만큼 은밀하고 사적인 게 어디 있겠습니까. 게다가 저는 불행히도 도련님 벗은 것과 아픈 것까지 다 봤고.”

부글부글 끓는 눈으로 노려보던 견이 이를 악물었다.

“그러네. 역시 네가 날…….”

“싫습니다. 저 지금 표준어입니다.”

얼마나 진심인지 알겠니, 하는 눈과 마주한 견은 기나긴 한숨을 내쉬었다.

“저 여자, 이미 알고 있는 거 아닐까?”

“뭘요?”

“나 빠뜨린 게 저라는 거. 건져 준 것도 저라는 거.”

견이 신경질적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다시 처박아도 내가 매달릴 수밖에 없다는 거.”

***

얼마 후, 희명그룹 본사 12층 대회의실에서 지난번에 미뤄졌던 임원회의가 열렸다.

각 계열사별로 앞으로의 성장 방향에 대해 보고하고, 희명의 브랜드 가치 상승을 위한 전략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백희명 회장이 젊은 시절 운영하던 작은 가게에서부터 시작한 회사는, 지금은 희명출판사, 블랑아이, 에버월드, 희명리조트, 희명병원 등의 탄탄한 계열사들을 거느린 대기업이 되었다.

“안녕하십니까. 홍보팀 이사 백지협입니다.”

클래식한 슈트를 입고 단상 앞에 선 지협은 임원회의가 아니라 시상식에 온 배우 같았다. 단정한 이마와 짙은 눈매가 차분하면서도 지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무선 프레젠터를 든 지협이 입을 열었다.

“저희 홍보팀에서는 ‘아이와 가족을 생각하는 교육문화기업’이라는 희명의 브랜드 이미지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여러 가지 캠페인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먼저 사회공헌활동의 일환으로…….”

단상 앞에 선 그를 바라보는 임원들의 눈빛 가득 신뢰가 어렸다.

“또한 직원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자원봉사활동을 더욱 확대하고자 합니다. 저 역시 함께하고 있는데요, 친근한 기업 이미지 제고에 도움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직원 간의 결속력을 높이는 효과도 있습니다.”

흐르듯 말을 이은 지협이 유려하게 발표를 맺었다.

“……하는 방식으로 언론 모니터링 및 대외 홍보에 더욱 힘쓸 예정입니다. 이상입니다.”

박수 소리가 대회의장 안을 울렸다.

“질문이나 의견 있으시면 말씀해 주십시오.”

이렇게 완벽한 프레젠테이션에 감히 누가 토를 달겠느냐는 시선만이 오갔다.

인사를 한 지협이 자리로 돌아갔다. 백 회장의 바로 옆이었다. 그 반대편 옆에는 견이 앉아 있었다.

멀찍이서 둘을 흘긋대던 블랑아이의 대표 변진상이 몸을 기울여 수군거렸다.

“사촌지간에 너무 차이 나지 않습니까?”

“예?”

“백견 말입니다. 어차피 경영권은 백지협 이사한테 넘어갈 게 뻔하고, 블랑아이에서도 밀려났는데 주주총회며 임원회의는 꼬박꼬박 참석하는 건 뭔지.”

옆에 앉아 있던 희명병원 노형규 원장도 고개를 주억거렸다.

“주주총회야 뭐, 돌아가신 백 사장님 내외 지분을 다 상속받았으니 올 자격이야 있다지만 임원회의는…….”

“내 말이 그 말입니다. 무슨 낯짝으로 꼬박꼬박 회사 일에 끼어드는지 모르겠어요. 심지어 회장님께서도 안 말리시고.”

백 회장 쪽을 흘깃 본 변진상이 말을 이었다.

“어릴 때 사고로 부모 잃고 아직도 트라우마로 고생한다니 안쓰러워하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잖습니까. 이래서 블랑아이를 아무도 안 맡으려고 했던 모양입니다. 아주 피곤해요.”

“변 대표님께서 고생이 많으십니다.”

자기들끼리 주거니 받거니 하는 사이, 블랑아이 차례가 돌아왔다.

변진상이 앞에 서고, 김광남 과장이 프레젠테이션을 도왔다. 론칭한 지 1년 남짓밖에 안 됐음을 감안해도 실적이 그리 좋진 않았다.

“……올해 안에 리빙 라인 출시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엄마용 머플러와 앞치마, 주방장갑, 슬리퍼 등의 아이템을 내놓을 예정입니다.”

회의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던 견이 스윽 손을 들었다.

변진상을 비롯한 모두의 얼굴에 ‘또 시작이구나’ 하는 말이 떠올랐다.

근 1년 사이, 찧고 빻는 사람들의 입방아 속에서 이미지가 바닥까지 추락한 견이었다.

사정 모르는 이들은 한량도 저런 한량이 없다고 수군거렸다. 비서 데리고 전국적으로 놀러 다니는 걸로도 부족해 여자도 수시로 갈아치운다며 견차반이라는 별명까지 붙였다.

본인도 더 이상 회사 일엔 관심이 없는 것처럼 굴었다. 그런데 블랑아이에 관해서만큼은 그렇지 않았다. 더 이상 대표도 뭣도 아님에도 지나치다 싶을 만큼 관심을 보이고 틈만 나면 쓴소리를 퍼붓는 것이었다.

말 자체는 옳은 말들이었지만, 상황이 상황인 데다 변진상을 비롯한 몇몇 사람들이 악의적인 소문을 뿌린 탓에 좋게 보이지만은 않았다.

제가 팽개친 자리에 앉은 변진상 대표에게 뒤늦게 유치한 앙심을 품고 트집과 훼방을 일삼는 것처럼 보였다.

“지금은 기존의 의류 라인부터 재정비하는 게 먼저가 아닐까 싶은데요. 베이비, 토들러, 키즈, 주니어 각각의 콘셉트는 명확히 하되 사이즈 체계는 단일화하면 소비자들에게 더욱 도움이 되지 않을까요?”

웅성대던 불만과 조소들은 날카로운 견의 목소리에 눌려 조용해졌다.

“현재 베이비는 개월수로, 토들러는 신장으로 사이즈를 표시하는데 베이비의 36m과 토들러의 110이 별 차이가 없고, 반면 같은 아동복 사이즈를 쓰는 키즈와 주니어는 같은 9, 11, 13호라도 사이즈가 많이 달라 고객들이 불편을 느끼는 것으로 압니다.”

몇몇이 고개를 끄덕였다. 떨떠름해 보이는 이들도 있었으나, 다들 어느새 집중하고 있었다.

“또한 리빙 라인은, 젊고 세련된 엄마들이 선호하는 브랜드라는 이미지 구축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고 봅니다. 너무 올드해요.”

변진상의 낯빛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매장을 방문한 엄마들의 추가 구매를 유도하려면 앞치마나 주방장갑보다는 에코백과 베이비백, 머플러와 스카프빕, 텀블러와 빨대컵처럼 엄마와 아이가 함께 쓸 수 있는 커플 라인을 출시하는 게 더 반응이 좋을 것 같은데요.”

거침없는 견의 말에, 이번에는 조금 더 확실한 동의의 기색이 보였다.

이런저런 의견을 주고받는 임원들과 흔들림 없이 저를 쳐다보고 있는 견을 번갈아 본 변진상이 헛기침을 하고는 자세를 고쳤다.

“……블랑아이에 많은 관심 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말은 그렇게 했으나, 누가 봐도 눈곱만치도 안 감사한 표정이었다.

“저희 직원회의에도 참석해 주셨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입니다만, 아이고. 좀 불편하시려나?”

분위기가 팽팽해졌다. 몇몇은 백 회장의 눈치를 보기도 했다. 백 회장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얼굴로 장내를 찬찬히 살필 뿐이었다.

“뭐, 블랑아이 대표로서 직원들에게 의견 전달은 해보지요.”

‘블랑아이 대표’를 유독 강조한 변진상이 느물느물한 웃음을 흘렸다. 견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눈썹을 까닥했다.

잘못 건드리면 산산조각 날 듯 위태로운 침묵의 끝은, 견의 사늘한 목소리였다.

“네, 부디 잘 부탁드립니다.”

***

“비여어언지이이인사아아앙!”

회의가 끝난 후, 차에 오른 후에야 견은 비로소 참았던 화를 터뜨렸다. 짜증스레 타이를 풀어낸 그가 뒤통수로 시트를 팍팍 찧었다.

“타고난 감각이 없으면 시장 파악이라도 제대로 하고 최소한 뒤처지지는 말아야 될 거 아냐! 지가 무슨 연어야? 흐르는 강물을 왜 거슬러 가냐고오! 역주행을 하려거든 EXID나 여자친구처럼 하든가!”

섭호는 묵묵히 운전에만 집중했다. 백견이 광견이 됐을 때는 알아서 가라앉을 때까지 놔두는 게 상책이라는 걸 오랜 경험으로 터득했다.

“그래, 남들 보기엔 뭐 저런 게 다 있나 싶겠지. 지금 와서 잔소리하고 참견해 댈 거면 그때 똑바로 하지 그랬냐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섭호는 안다. 견에게 블랑아이가 어떤 의미인지.

몇 년을 공들인 일이었다. 직접 시장조사를 하고 부도난 회사를 인수해 새 콘셉트를 잡고 보란 듯이 재론칭하려던 브랜드였으니 자식 같을 수밖에 없었다.

“그때 아무리 정신이 없어도 회사만큼은 붙들고 있을 걸 그랬어. 나머지 책 한 권도 마저 찾아서 확인하겠다고, 호르몬시터 찾겠다고 미친놈처럼 전국 방방곡곡 헤집고 다닐 게 아니었는데…….”

거기에 계열사의 꽃으로 만들어주고 싶었던 팀원들에 대한 미안함, 해보지도 못하고 놓아야 했던 많은 것들에 대한 아쉬움까지 남아 있을 터였다. 이제는 누구에게 말할 수도 없게 됐지만.

“주주총회에서 나 자르고 변 대표 올린다고 할 때 미친놈처럼 버텼어야 했는데. 내 블랑아이, 아…….”

뒤통수를 실컷 찧고 가까스로 진정한 견이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로 몸을 디밀었다.

“근데 섭호야.”

“예?”

“리조트 간 적 없다고 한 거 진짤까?”

느닷없이 여자에게로 향하는 저 의식의 흐름이라니. 섭호는 나나 되니까 알아먹고 맞춰주는 거라는 말을 알아서 생략했다.

“정확히 기억 못 하시는 걸 수도 있쥬. 얼라 때야 노상 엄니 아부지만 따라다니니 어디가 어딘지 헛갈릴 수도 있고.”

“듣고 보니 그러네. 하긴, 코에 점이 있는 것부터 그 여자 만나고 얼룩이 없어진 것까지, 의심할 게 없지. 특히나 이번 달엔 고모한테 잡혀 있느라 아무도 안 만났으니 다른 가능성도 없고.”

섭호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일단 가까워진 다음에 월경하실 때쯤 같이 계셔보시면 확실히 알겄쥬.”

“가까워진 다음에…….”

다시 처박아 버리면 책임 안 져도 되냐던 모단을 떠올린 견이 깊은 한숨을 흘렸다.

어지간한 사연이었다면 처음부터 솔직히 털어놓았겠지만 아직은 그럴 수 없었다. 이제껏 그 누구에게도 절박하게 진심을 꺼내가며 부탁해 본 적이 없어서 서툴렀다는 변명으로 넘기기엔 큰 실수였다.

‘딱 하나뿐인 절실한 여자일지도 모른다는 걸 잘 알면서 정작 그만큼의 예우를 갖추지 못했어.’

얼마간 생각에 잠겨 있던 견이 입을 열었다.

“혹시 모르니까 준비해 놔.”

“무슨 준비유?”

이어진 그의 대답을 들은 섭호는, 농담이 아님을 깨닫고 핸들을 꽉 움켜쥐었다.

“보름달 뜨는 밤에 사람 하나 정중하게 납치할 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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