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찾았다
2017.05.14.
“도련님! 지금 어딜 가신다고 이러시는 거유?”
견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섭호가 아무리 말려도 귀를 닫은 듯 대꾸도 하지 않고 후다닥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지미는 완전히 살아난 거 맞다며 미련 없이 자리를 떴다.
“만나야지! 직접 봐야겠다고! 그 여자 연락처는 받았겠지? 당장 집 주소 알아오고 차 빼와!”
“이이, 시방 첫인상이 너무 약할까 봐 이러시는 거구먼유?”
“뭐야?”
끼이익 멈춰 선 견이 홱 노려보았다.
“개인정보보호법 위반한 스토커라고 하믄 짱하게 강렬하긴 하겄슈.”
뒷짐을 지고 먼 산을 쳐다보는 섭호의 얼굴 가득 ‘이건 너한테 하는 말이 아녀’ 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나라면 이 개갈 안 나는 시키는 뭐여, 허겄지. 뭔데 갈쳐 준 적도 없는 집까지 멋대로 찾아오고 지랄이여, 허겄지. 거따 대고 ‘이제부터 한 달에 한 번씩 지 책임져유∼’ 하면은 그때 숫제 뒤지게 내뿌려 둘 것을, 헐 것인디…….”
“아,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만해!”
견이 혼란스러워하는 틈을 놓치지 않은 섭호가 냉큼 그를 붙들어 앉혔다
“찬찬히 보셔도 충분하단 말유. 도련님은 이제 살았으니께.”
못 나가게 하면 다 부술 것처럼 흉흉하던 견의 낯빛이 금세 환해졌다.
침대 끄트머리에 주저앉은 그가 아련하게 중얼거렸다.
“그치. 나 이제 살았지…….”
“기댕겨 봐유. 이제 맘만 먹으면 맨날 볼 수도 있겄드만.”
견이 뭔 소리냐는 눈으로 돌아보았다. 섭호가 다시 뒷짐을 졌다.
“이사님께 듣고서 짱하게 놀랬잖유. 내가 살면서 별 희한한 꼴을 다 봐서 엥간해선 놀래지도 않는데 좀 놀랬슈. 짚신짝도 짝이 있고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녕이 있다 하드만은…….”
“뭐? 뭔데? 이왕 말해줄 거면 빨리빨리! 내가 기껏 살아놓고 너 때문에 숨넘어가야 되겠어?”
속 터지게 생긴 견이 손을 내저었다. 섭호가 빙긋 웃고는 툭 뱉었다.
“그분, 녈(내일)부터 희명 사내어린이집 교사로 출근하신다네유.”
***
“보아라. 이것이 희명그룹 사원증이다.”
별건 아니지만 좀 봐줄래, 하는 눈을 한 모단이 손에 든 목걸이형 사원증을 스윽 내밀었다.
새윤은 박수까지 치며 감탄했다.
“증명사진 포토샵 되게 잘해줬다! 어디 사진관에서 찍었어? 나도 거기 가서 찍어야겠다. 운전면허증 갱신할 때 됐는데.”
“감격 포인트가 내가 생각한 부분이랑 영 다른데.”
방금 손님이 나간 테이블을 치우고 돌아온 은규가 키득 웃었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우리 새윤이가 희명그룹 사원증 본다고 무슨 감흥이 있겠냐? 내년이면 대리 다실 남편님 사원증을 4년째 보고 있는데.”
새윤의 남편이자 모단과 고등학교 동창인 은규 역시 희명그룹 사원이었다.
“그래! 그 사원증이 어떤 사원증인데. 백견인지 백구인지 하는 놈 때문에 날아갈 뻔했다가 간신히 붙든 사원증인데!”
분노 어린 새윤의 말을 들은 모단이 괜히 뜨끔했다.
그 백견인지 백구인지 하는 놈은 1년 전까지만 해도 경영천재 소릴 들었다는데, 본인이 주축이 되어 이끌던 브랜드 론칭을 앞두고 갑자기 중2병이라도 온 양 방황하다가 결국 반강제로 대표 자리에서 밀려나고 지금은 한량 취급받는다 했다.
그 방황의 시기에 하필 은규가 거기 소속이었던지라 적잖은 맘고생을 했었다. 새윤은 지금도 가끔씩 입에 거품을 물고 욕을 해댔다.
다른 때였다면 신나게 맞장구를 쳐줬을 것이나, 왠지 이제는 쉽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에이, 안 잘렸으면 됐지. 그리고 솔직히 백 대표 있을 때가 나았어. 변진상 그 새끼는 완전 똥이야. 거기다 김 과장 새끼는, 딱 봐도 개망할 아이템인데 역시 대표님의 선구안이 어쩌고 하면서 다 빨아주고, 아오…….”
무심코 쏟아내던 은규가 저만치서 놀고 있던 딸 해빛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듣지 못한 듯했다.
“아무튼, 내가 우리 해빛이랑 우리 새윤이 때문에 참고 다닌다.”
“해빛이는 몰라도 윤새윤은 그냥 새윤이라고 하면 안 되냐? 부부니까 자기나 여보까지는 봐줄 수 있는데 우리 새윤이는 듣기가 영.”
“왜? 난 좋은데.”
“나도 좋아, 우리 새윤이.”
끈적한 눈길을 주고받는 새윤과 은규를 본 모단이 치를 떨었다.
“차라리 개명을 해라. 윤 우리새윤으로. 그럼 참아볼게.”
“안 돼. 그럼 다른 사람들도 우리 새윤이를 우리 새윤이라고 부를 거 아냐.”
“와아이씨! 커피집이면 커피집답게 원두나 볶으라고! 틈만 나면 깨를 볶고 지랄이야!”
“이모.”
옆에서 스윽 넘어오는 해빛의 목소리에 모단이 움찔했다. 눈을 흘긴 해빛이 앙증맞은 손가락을 까닥까닥 흔들었다.
“소리 지르고 나쁜 말 하면 개구리 입이랑 바뀐다.”
‘지 아빠가 그 새끼니 개망이니 할 때는 못 듣고 꼭 나한테만 그래.’
좀 억울했으나, 일곱 살짜리의 희번득한 흰자와 무시무시한 저주 앞에서는 별수 없었다.
“알았다. 솔로인 것도 서러운데 개구리 입까지 달면 안 되지.”
“근데 이모, 이거 우리 아빠 거랑 똑같아!”
모단의 사원증을 가져다 제 목에 건 해빛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 어린이집이다!”
아직 한글을 읽지 못하는 해빛이었으나, 희명 사내어린이집 로고와 글씨체를 눈치껏 알아보고 반가워했다. 모단은 씩 웃고는 해빛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모도 내일부터 희명어린이집 다닐 거거든.”
“정말? 무슨 반?”
“바다반.”
“우와아! 말도 안 돼! 나랑 같은 반이야!”
그래, 내가 네 선생이다. 모단이 말해주려는데 해빛이 먼저 물었다.
“그럼 이모는 어린이집 누구랑 가? 나는 아빠 손 잡고 가는데. 이모 엄마는 할머니니까 할머니 손잡고 올 거야?”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은규가 어리둥절해하는 해빛을 안고 뽀뽀를 퍼붓는 사이, 새윤이 모단 앞에 커피를 놓아주었다.
“선생님 좋아하시는 아이스카페모카 나왔습니다. 우리 해빛이 잘 부탁드려요. 호호호.”
“에헤이, 이거 김영란법에 걸리는데.”
느긋하게 커피 한 모금을 마신 모단이 해빛에게 설명했다.
“이모는 혼자 버스 타고 갈 거야. 어른이고 선생님이니까. 내일부터 이모가 바다반 선생님이 되는 거야.”
“정말? 그럼 이모라고 해, 선생님이라고 해?”
“선생님이라고 해야지. 절대로 이모라고 하면 안 돼.”
커피 한 잔을 들고 온 은규가 맞은편에 앉으며 거들었다.
“어린이집에서는 선생님인 거야. 해빛이 말고 친구들도 다 함께 봐야 하는 선생님. 알았지?”
“알았어. 근데 이모, 내가 엄청난 거 알려줄까?”
“뭔데?”
해빛이 손짓을 했다. 모단은 몸을 기울여 귀를 갖다 댔다.
“있잖아…… 바다반 친구들 전부 다 토끼띠다? 다 똑같아! 되게 신기하지?”
“세상에, 그렇게 신기한 일이! 근데 난 토끼띠 아닌데. 나만 땅콩이네.”
“걱정하지 마, 이모. 바다반 친구들은 사이좋은 친구들이야.”
모단의 어깨를 다독여 준 해빛이 색칠공부를 들고 다른 테이블로 향했다. 참았던 웃음을 흘린 모단이 은규를 쿡 찔렀다.
“너랑 나랑 내일 처음 보는 거다? 알고 보니 고등학교 동창이었던 거야. 아예 모르는 척하다가 걸리면 더 욕먹으니까.”
“알았어. 친한 사이라 우리 해빛이만 더 챙겨주네 어쩌네 그런 말 나오면 피곤하지.”
“절대 그럴 일 없을 건데. 나 직업정신 완전 투철하거든.”
“알아.”
은규가 미소를 지었다.
“그나저나 대단하다, 너. 희명그룹 공채보다 희명 사내어린이집 입사가 더 힘들다던데.”
희명어린이집은 다른 사설 유아기관들보다 월등히 좋은 환경을 갖춰 부모와 아이는 물론이고 교사도 만족도가 높았다.
그만큼 입사 경쟁률이 치열한 데다 애초에 자리가 잘 나질 않았다. 희명어린이집 교사 되기가 웬만한 국공립 어린이집 들어가기보다 힘들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네 덕분이지. 채용공고 날 거라고 미리 알려줘서. 그때 모르고 넘어갔으면 1년 더 근무하는 걸로 확정돼서 이직하고 싶어도 못 했을 거야. 고맙다.”
“그거 말고 내가 해준 건 아무것도 없는데 고맙기는. 아무튼 합격해서 다행이다. 떨어지면 백수 된다고 모 아니면 도라고 걱정했었잖아.”
“떨어지면 우리 가게에서 알바로 써먹을까 했더니만.”
어느새 은규 옆에 앉은 새윤이 모단 앞 테이블을 가볍게 두드렸다.
“근데 너, 그날 일 정말로 말 안 해줄 거야?”
“어?”
모단의 눈동자가 데구루루 굴러갔다.
“갑자기 옷에다 피를 묻히고 와서 얼마나 놀랐다고.”
백견을 만났던 그날, 비서의 차를 얻어 탄 모단은 집 대신 얼마 멀지 않은 새윤의 집 앞에서 내렸었다.
상상력이 과한 탓인지는 몰라도, 혹시라도 그 백지협 이사라는 사람이 집을 알아두려고 비서 시켜서 모셔다 주라고 한 거 아닐까 싶은 의심이 들어서였다.
“길에서 갑자기 코피가 나서 그랬던 거라니까. 엄마가 보면 놀라 기절하실까 봐 옷 빌려 입은 거라고.”
“무슨 코피가 그렇게까지 나? 빈혈로 쓰러지고도 남았겠다.”
그러게. 완전 영화처럼 쓰러지더라니까.
“안 그래도 어질어질하더라. 나도 깜짝 놀랐어. 고3 때도 안 났던 건데.”
“너 진짜 어디 아픈 건 아니지?”
“아프기는. 우리 엄마가 때마다 해 먹이는 게 얼만데.”
적당히 둘러댄 모단은 서둘러 일어섰다.
“내일 보자, 해빛아. 이모, 아니, 선생님 간다!”
***
다음 날, 이른 아침부터 차 한 대가 희명그룹 본사 앞에 서 있었다.
“도련님.”
“왜?”
“임원회의는 10시부턴데 벌써부터 여기 와 계시는 까닭이 대체 뭐유?”
언제 쓰러졌었냐는 듯, 병색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말끔한 슈트 차림으로 뒷좌석에 앉아 있던 견이 느긋하게 받았다.
“나는 회장님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손주이자 대주주니까 슬슬 출근해도 되지만 정모단 선생님은 안 그럴 거 아니야. 게다가 첫 출근이니까 더 일찍 오시지 않을까?”
“그래도 이건 너무 이르잖유! 아무리 부지런혀도 인자 눈 떴을 시각……!”
“어어, 저기!”
견이 튕기듯 몸을 세우며 창문에 달라붙었다. 수수한 옷차림의 여자가 버스정류장 쪽에서부터 걸어오고 있었다.
“저 여자 아니야?”
“잠시만유. 서류에 붙어 있던 증명사진하고는 좀 다르지만 대강 맞는 것 같은디유? 참말로 부지런하구먼.”
“너 그때 나 쓰러질 때 마주쳤다며? 얼굴도 제대로 안 보고 뭐 했어?”
“도련님이 피칠갑을 하고 길바닥에 자빠져 있는데 여자 얼굴 뜯어볼 정신이 있겄슈? 그러는 도련님도 17년 전에 마주치셨잖유. 그때 제대로 안 보고 뭣 혀서는 여러 사람 피를 말리고…….”
“이 자식이……! 어어, 회사 안으로 들어갔어!”
차 안에서 두 남자가 난리가 난 줄도 모르고, 모단은 발걸음도 씩씩하게 희명그룹 본사로 들어섰다.
복층 구조로 천장을 높인 로비는 밖에서 볼 때보다 더 넓게 느껴졌다. 아직 오가는 사람이 많지 않아 더 그랬다.
한복판에 2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이 보였다. 저기로 올라가면 바로 희명 사내어린이집이다.
“안녕하세요.”
경비원에게 싹싹하게 인사를 건넨 모단은 목에 걸고 있던 사원증을 출입구 센서에 갖다 댔다. 그런데 빨간 X 표시가 뜨며 삐리릭 소리가 났다.
“어라, 이거 왜 이러지?”
“다시 한 번 찍어보세요.”
전에 사원증을 받아 확인했을 때는 아무 이상 없었는데. 모단은 다시 사원증을 댔으나, 이번에도 에러였다. 당황으로 얼굴이 빨개지기 시작했다.
“이상하다…….”
그때, 모단의 어깨 옆으로 사원증을 든 손이 스윽 나왔다.
삑 하는 소리와 함께 출입구가 열렸다. 동시에 누군가가 뒤에서 모단의 어깨를 가볍게 밀어 안으로 들어가게 했다.
“사원증에 오류가 생겼나 보네요.”
“아, 예.”
확인차 다가오려던 경비원이 눈을 크게 뜨더니 깊이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모단은 휙 뒤를 돌아보았다. 낯익은 얼굴이 있었다.
“어느 부서에서 근무하시죠?”
“……오늘부터 사내어린이집 교사로 출근하게 됐습니다.”
“그러셨군요. 사원증은 나중에 인사팀에 연락해서 확인해 달라고 하세요.”
얼떨떨해 있던 모단은 뒤늦게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싱긋 웃은 견은 섭호의 사원증을 돌려주고는 모단을 보았다.
사원증에 적힌 이름도, 분명 마주쳤음에도 전혀 기억나지 않아 답답했던 얼굴도 반가웠다. 무엇보다도 눈물 나게 반가운 건……
아이처럼 검은자가 또렷한 눈 사이, 되똑하게 자리한 코끝의 작은 점.
‘……찾았다.’
‘나 못 알아본 건가?’
마주 보는 둘 사이에 각자의 생각이 떠다녔다. 모단은 어색하게 눈인사를 하고 몸을 돌렸다. 저라도 모른 척하고 싶었다.
옅은 웃음을 머금은 견은 자연스럽게 뒤를 따랐다. 그러다 경비원과 어느 정도 거리가 생기자 그녀를 불러 세웠다.
“정모단 선생님?”
어깨를 흠칫 떤 모단이 슬그머니 돌아섰다. 생각보다 가까이 서 있는 바람에 한 번 더 흠칫했다.
“혹시 저 기억하시나요? 일주일 전에 회사 앞에서 도와주셨던.”
웃는 입꼬리 끝에 자그마한 보조개가 파였다. 눈 밑이 도도록해지며 보일 듯 말 듯하던 눈 아래 매력점도 덩달아 도드라졌다.
“안녕하세요. 백견이라고 합니다.”
얼굴에 있는 점이 대부분 그렇긴 하지만, 견의 눈 아래 있는 점은 유난히 시선을 잡아끌었다.
모단은 절로 이마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아, 아아. 예. 그때랑 달라서 못 알아봤네요. 안녕하세요.”
완전 거짓말도 아닌 것이, 환자 몰골일 때와는 완전히 달라 보였다.
“몸은 괜찮으세요?”
“저 아주 괜찮죠.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예?”
“덕분에 저 되게 안녕하다고요. 정말로, 진짜.”
모단의 눈썹 끝이 슬쩍 이지러졌다.
그녀를 알아보자마자 견의 심장이 터질 듯한 비트에 맞춰 내적댄스를 추기 시작했음을, 그래서 저렇게 헤벌어진 상태임을 몰랐기에 좀 이상해 보였다.
“안 그래도 따로 연락해서 인사드리려고 했는데, 여기서 먼저 뵙게 될 줄은 몰랐네요. 이름만 가지고 어떻게 찾나 막막했는데 이렇게 나타나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정이 사정인지라 어둠의 경로를 통해 이미 어린이집 입사지원서 사본을 확보했다는 건 알려서 좋을 거 없을 듯했다.
“근데 엄청 일찍 출근하시네요?”
“신입이고 첫날이라 익힐 게 많아서요.”
“그런 마음가짐 덕분에 마음 편히 커피 한잔할 수 있겠네요. 조금 있으면 출근하는 사원들이 막 지나가면서 쳐다보고 그럴 텐데, 그전에 얼른 마셔요.”
견이 자연스럽게 사내 카페테리아 쪽으로 걸음을 틀었다. 모단이 됐다고 하려는데, 있는 듯 없는 듯 견의 옆을 따르던 섭호가 끼어들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백견 도련님 비서, 위섭호라고 합니다.”
섭호 특유의 이국적인 외모와 분위기에 모단도 깜빡 속았다. 그녀 역시 열에 여덟이 그렇듯 그의 이름을 영어로 알아들었다.
“아, 예. 안녕하세요, 위스퍼 씨.”
견이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섭호는 분명 입꼬리는 웃고 있는데 정색처럼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위스퍼가 아니라 위섭호입니다. 위 비서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예? 죄송합니다. 국적을 초월한 잘생김이라 외국 분이신 줄…….”
나름 혀까지 굴렸던 모단이 민망해했다.
뜻밖의 글로벌한 칭찬을 들은 섭호는 제 이름을 잘못 부르는 대부분의 이들에게 보이는 싸한 표정을 거두고 진짜 웃음을 머금었다. 반면 견의 미간에는 못마땅한 기색이 들어찼다.
“선생님께서는 어떤 커피 드십니까?”
“저는 아이스카페모카…… 가 아니라 잠깐만요. 저 여기서 커피 마실 시간이…….”
“그럼 정 선생님은 아이스카페모카, 도련님은 아메리카노로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섭호가 멀어지고, 모단은 얼결에 견과 마주 앉았다.
‘2인조 사기단이야, 뭐야? 자연스럽게 정신을 쏙 빼놓는구만. 내가 이렇게까지 잘 휩쓸리는 사람은 아닌데…….’
속으로 혀를 찬 모단은 카운터 앞에 선 섭호의 뒷모습을 힐끔거렸다. 앞에 앉은 견을 마주 보기가 어색하기도 했거니와, 궁금하기도 했다.
그날, 가장 먼저 달려와 울 것 같은 얼굴로 견을 안던 남자.
‘부하 직원이 상사를 그렇게까지 걱정하기 힘든데. 자기 사람한테는 엄청 잘해주는 타입인가?’
“그땐 정말 죄송했습니다.”
견의 목소리에 모단은 퍼뜩 고개를 돌렸다.
“몸이 안 좋을 때 운전대를 잡으면 안 된다는 건 상식 중의 상식인데, 제가 너무 몰상식했습니다. 사정이 있긴 했지만…… 변명일 뿐이죠. 하마터면 돌이킬 수 없는 사고를 낼 뻔했네요.”
나 죽으면 네가 책임질 거냐고 묻던 싸늘한 얼굴이 떠올랐다. 도저히 매치가 되지 않았다. 그땐 정말 제정신이 아니었던 건가.
“지협이 형한테 얘기 들었어요. 아직까지 연락이 없어서 불쾌하셨다면 오해하지 마세요. 제가 병원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됐어요.”
그때와는 달라도 너무 다른 목소리며 말투가 들을수록 의외였다. 그렇다고 경계가 완전히 풀어지진 않았지만.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됩니다. 차에 부딪힌 것도 아니었고요.”
“블랙박스 돌려보니까 차 말고 제가 거하게 치었던데요. 죄송합니다. 넘어지시면서 어디 다치신 덴 없으세요?”
“괜찮습니다. 아무 데도 이상 없어요.”
“그럼 정신적 피해보상이라도 받으세요.”
재킷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던 견이 흰 봉투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고 모단 쪽으로 스윽 밀었다. 모단은 펄쩍 뛰었다.
“아뇨! 이런 의미 불명의 돈 같은 거 안 받습니다!”
“돈봉투 아닌데.”
견이 어깨를 으쓱했다.
“제가 명함이 없어서요. 그냥 종이에 적어드리면 성의 없어 보일 것 같아서 여기다 적어봤어요.”
다시 보니 봉투 위에 휴대폰 번호가 적혀 있었다. 부담스러워 보이는 것보다 성의 없어 보이는 게 훨씬 나을 뻔했다.
“괜찮습…….”
“돈봉투 아니라고 했지, 빈 봉투라고는 안 했어요.”
“네?”
“일단 열어보세요. 사과는 말로만 하는 게 아니지.”
황당한 눈으로 견을 보던 모단이 봉투를 집었다. 솔직히 궁금하니까 열어보고 봉투만 받아야겠다 하는데, 웬 검은색 카드가 나왔다.
“마음껏 긁으세요.”
그야말로 상상 초월이었다. 휘둥그레진 모단을 본 견이 꼬고 앉은 다리 위에 포개두었던 손을 까닥했다.
“그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