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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독사과-86화 (86/139)

제 86 화

“설마설마했더니, 오늘 보니 명백해졌습니다. 황태자 전하께서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말입니다.”

헤링턴 백작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렌스터 공작을 돌아보며 말했다.

“공작님, 이젠 머뭇거릴 시간이 없습니다. 서둘러 귀족들을 규합해 귀족 회의를 열어야 합니다.”

헤링턴 백작의 말에 렌스터 공작이 눈살을 찌푸렸다. 사실 그의 계획 역시 황실 사냥대회에 참석할 귀족들을 설득할 생각이었다.

‘제길, 아센 공작이 손을 쓰다니, 아니, 황태자가 미리 손을 쓴 건가?’

하지만 이번 황실 사냥대회는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귀족들이 대거 불참했다. 특히 귀족 회의를 구성하는 스펜서 자작과 캐슬리스 후작과 아센 공작 역시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참석하지 않은 것이다.

“곧 에버콘 공작이 올 테니 기다리게, 헤링턴 백작.”

렌스터 공작의 말에 헤링턴 백작이 서둘러 알렉산더 스텐호프 백작의 옆에 자릴 잡고 앉으며 말했다.

“벌써 약속을 하신 겁니까?”

그때 막사의 문이 열리고 보초병이 안으로 들어왔다.

“조금 전 전하께서 프로필리아 영애와 숲으로 가셨습니다.”

보초병의 말에 헤링턴 백작이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쳇, 이젠 황실의 위엄과 명예는 바닥에 던지실 모양입니다. 어떻게 그런 비루한 가문의 영애를……. 쯧쯧!”

렌스터 공작의 표정 역시 냉소로 비틀려 있었다.

“잠깐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열린 막사의 문으로 제임스 에버콘과 데칸 후작이 들어섰다.

그를 본 렌스터 공작이 표정을 갈무리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난번 루시타니아 상단의 비밀 클럽에서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왔군, 에버콘 공작. 이쪽으로 앉게. 그렇지 않아도 그대를 기다리고 있었지.”

“반겨주셔서 감사합니다, 렌스터 공작님.”

제임스와 데칸 후작이 의자에 앉았다.

“여기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렌스터 공작님.”

데칸 후작이 손에 들고 있던 값비싼 술을 공작 앞에 내놓았다. 술을 본 렌스터 공작의 눈이 놀라움에 커졌다.

“이건 북쪽 끝에 있는 리셋 부족이 만든 술이군요. 내가 이 술을 좋아하는 줄 어떻게 알고.”

렌스터 공작이 술병을 들어 올렸다. 사실 리셋 부족의 술은 정제 과정이 굉장히 까다로워 1년 동안 만들어낼 수 있는 양이 얼마 되지 않았다. 그래서 아무리 돈이 많은 자라도 쉽게 살 수 없었다.

“기뻐하시는 걸 보니, 제가 다 흐뭇합니다. 기회가 된다면, 더 구해다 드리겠습니다.”

데칸 후작의 선물로 인해 막사 안의 분위기가 훨씬 부드러워졌다.

“렌스터 공작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제임스가 이곳을 방문한 목적을 얘기하려는 듯 말을 꺼내자, 렌스터 공작이 술병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이미 황태자비는 물 건너간 것 같으니, 다른 대안이 있으면 말해보게. 듣겠네, 에버콘 공작.”

“렌스터 공작님께서도 알고 계실 겁니다. 저희 에버콘 공작가 역시 공작부인을 찾고 있다는 걸 말입니다.”

제임스의 말에 렌스터 공작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 말은 베로니카를 에버콘 공작부인으로 달라는 뜻이었다. 뭐, 예상은 하고 있었다. 다만, 내키지 않을 뿐.

‘에버콘 공작과의 사돈이라…….’

사실 따지고 보며 그리 불리한 정략혼은 아니었다. 하지만 문제는 베로니카의 남편이 될 제임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유스타나 제국의 귀족들은 자신이 베로니카를 이용해 권력을 쥐고 싶어 한다고 수군거리고 있었지만, 그것만큼이나 자신이 베로니카를 아낀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베로니카가 열 살 되던 해 공작부인인 제인이 죽었다. 그때부터 렌스터 공작은 베로니카를 혼자 키워왔다. 그가 원하는 소원 중 하나는 자신의 딸에게 다정하고 바른 남편감을 찾아주는 것이었다. 아무도 그 사실을 믿지 않겠지만.

그리고 렌스터 공작의 마음에 든 상대가 바로, 황태자 세이란이었다. 냉혹하고 까칠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그가 황후였던 레니아를 닮았다면 분명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에겐 다정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어서였다.

‘내가 사람을 정확히 보긴 했지. 그 상대가 불행히도 베로니카가 아닌 게 유감이지만.’

렌스터 공작은 조금 전 만찬 자리에서 릴리스 프로필리아를 살뜰하게 챙기던 황태자 세이란을 떠올렸다.

다른 귀족들의 시선 따위 안중에도 없다는 듯 행동하는 그를 보며 눈살이 찌푸려졌지만, 한편으론 아쉬웠다.

그의 영역 안에 들어간 레이디가 자신의 딸이 아니라서.

“그건 생각해 보겠습니다. 혼약은 내 의견도 중요하지만, 내 여식의 의사도 중요해서.”

렌스터 공작의 말에 그곳에 있던 귀족들이 의외라는 듯 그를 보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대신 렌스터 공작은 제임스 에버콘에 대해 뒷조사를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쉬쉬하고 있었지만, 그의 주변에 더럽고 추악한 소문이 종종 떠돌곤 했었다.

“그럼 제가 영애의 마음을 사로잡아야겠군요.”

제임스가 자신 있다는 듯 말했다.

“좋도록 하시오, 에버콘 공작.”

“그럼 이제부터 내일 사냥에 대해 얘길 해야 할 것 같군요. 전하께선 분명 사냥대회에 우승해, 로열레이디로 그 천한 여인을 지목할 겁니다.”

그 말은 황태자비로 그 릴리스란 여인을 지명한 것이나 진배없는 말이었다. 제임스의 말에 헤링턴 백작이 발끈하며 소리쳤다.

“절대 그렇게 둘 수는 없습니다.”

“맞아요. 전하께서 사냥에 성공하지 못하게 방법을 써야 합니다.”

알렉산더 스텐호프 역시 동의하자, 제임스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는 듯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이 황실 사냥터 북쪽 숲이 맹수의 서식처였다는 게 생각이 나는군요.”

“맹수라면, 호랑이를 말하는 겁니까?”

“그렇습니다, 헤링턴 백작.”

호랑이라는 말에 귀족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잊고 있었지만, 1년 전 황실 사냥터를 쑥대밭으로 만든 맹수에 대한 소문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혹시 그 호랑이를 이용하자는 겁니까?”

헤링턴 백작의 질문에 제임스 에버콘이 고갤 끄덕였다.

“저만 믿으십시오. 내일 전하를 북쪽 숲으로 보낼 묘책이 떠올랐거든요.”

“그럼 우린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당연히 우린 서쪽으로 갈 겁니다. 그리고 먼저 막사로 돌아와 전하께서 호랑이는커녕, 빈손으로 돌아오시기를 기다려야죠.”

제임스의 입가가 비틀리더니,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

키안과 세이란을 태운 말이 멈춰선 곳은 절벽 앞이었다. 먼저 말에서 내린 그가 손을 뻗어 키안을 내려주었다.

“잠깐만 기다려.”

세이란이 나뭇가지에 말의 고삐를 묶은 다음, 키안의 손을 잡고 절벽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 손으론 그의 손을 잡고, 또 다른 손으론 드레스 자락을 붙잡곤 바위와 나무를 지나 안쪽으로 깊이 들어가자, 물소리가 났다.

“절벽 아래 폭포가 있다.”

그의 말처럼 조금 더 풀숲을 헤치고 안으로 들어가자, 절벽에서 떨어지는 폭포가 보였다. 그리고 그 폭포가 만들어낸 호수 역시 보였다.

“사냥터에 이런 곳이 있었습니까? 정말 아름답습니다.”

숲으로 둘러싸인 그곳은 조용하고 아늑했다. 마치 두 사람만이 그곳에 있는 착각이 들 정도로 공기조차도 달랐다.

호수에 도착한 키안이 무릎을 굽혀 물에 손을 담갔다. 차가울 것이라 생각했는데, 미지근했다.

“온천이다.”

“온천이요?”

“이쪽으로 와. 저기 폭포 뒤에 동굴이 있는데, 그 안에 들어가면 더 놀랄 거야.”

세이란이 키안의 손을 잡고는 폭포 뒤쪽 절벽 안에 숨겨져 있는 동굴로 안내했다.

“잠깐 기다려.”

앞서가던 세이란이 걸음을 멈추더니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키안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그러곤 그것도 모자라 두 팔로 키안을 번쩍 안아 들었다.

“전하!”

“드레스가 젖잖아.”

그의 품에 안겨 키안은 폭포 뒤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어느새 두 사람의 심장이 무섭게 뛰고 있었다.

동굴 안에 들어선 순간, 향긋한 꽃향기와 함께 공기가 변했다. 따뜻했다.

“꽃이 피어 있습니다. 동굴에 말입니다.”

키안이 세이란의 품에서 빠져나와 동굴 안을 살폈다. 믿을 수 없게도 동굴 안에 온천이 있었다.

‘이런 곳에 온천이라니. 그러고 보니, 대신전의 지하에도 온천이 있었어.’

그때 세이란이 키안에게 다가와 옆에 섰다.

“구스타프 1세의 비밀의 방보다 더 신기하지?”

키안의 농담을 기억하다니. 가끔 보면, 그는 자신이 흘려 한 말들조차도 허투루 넘기는 법이 없었다. 그에겐 자신이 하는 사소한 말까지도 중요하다는 듯이.

“훨씬 신기합니다. 대신 위험한 액체는 없으니, 안심이고요.”

말하고 나니, 얼굴이 붉어졌다. 두 사람이 붉은 액체를 마신 후, 벌어진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자신은 그를 살리기 위해 처음으로 그와 몸을 섞었다. 다행히도 그는 의식이 없어 알지 못했지만, 키안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왜 얼굴이 붉지? 열이 나는 거야?”

세이란이 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보며 말을 건네왔다. 마치 그에게 뭔가를 들킨 것 같은 느낌이 들자, 키안이 시선을 피하며 서둘러 부정했다.

“아닙니다. 차가운 곳에 있다가 따뜻한 동굴 안으로 들어오니 조금 더운 모양입니다.”

키안이 그가 어깨에 둘러준 외투를 벗었다. 그러자 세이란이 외투를 받아 바위 위에 올려놓고는 신발을 벗고 바지를 걷어 올렸다.

“지금 뭐하시는 겁니까?”

“너도 이리 와 앉아. 뜨거운 물에 다릴 담그고 있으면, 뭉쳐 있던 근육이 풀어질 거야. 다리 아프잖아.”

“아니요, 저는…….”

“뭘 빼고 그래. 어서 앉아. 이러려고 온 건데.”

나 때문에 여길 온 것이라고? 망설이는 키안의 손목을 끌어당겨 바위 위에 앉게 했다. 그러곤 직접 키안의 드레스를 허벅지 위까지 밀어 올리더니, 가죽 부츠의 지퍼를 내렸다.

“제, 제가 하겠습니다.”

당황한 키안이 그의 손을 밀어냈다. 의식하지 않으려 했지만, 부츠를 벗는 내내 그의 시선 때문에 얼굴이 붉어졌다.

특히 벨라가 억지로 신겨준 실크 스타킹을 벗을 때는 시선을 어디에다 두어야 할지 모를 정도로 그가 뚫어지게 자신의 다리를 보는 게 느껴졌다.

“흠, 흠! 다 됐으면, 여기에 발을 담가.”

세이란이 키안의 맨다리를 붙잡았다. 그의 손이 맨살에 닿자, 키안은 얼굴이 새빨개졌다.

“지금도 더워?”

뻔히 이유를 알고 있으면서 뻔뻔하게 물어오는 그를 보자, 키안은 눈살이 찌푸려졌다.

“절 놀리시는 게, 재미있으신 모양입니다.”

순간 세이란의 미소가 깊어졌다. 그러곤 눈을 빛내며 키안에게 고갤 숙여왔다.

“사실 널 놀리는 것보다 더 하고 싶은 게 있는데, 해도 될까?”

뭐지? 이 느끼함은? 키안은 바로 코앞까지 다가와 귓가에 느릿하게 속삭이는 그를 보며, 잔뜩 경계심을 드러냈다.

“대체 또 뭘 하시려고……. 흐헙! 전하!”

순식간에 키안의 몸이 뒤로 눕혀졌다. 등이 푹신한 걸로 보아, 그가 외투를 바닥에 깐 모양이었다. 놀라 멍하니 누워 있는 사이, 그가 자신의 위로 몸을 겹쳐 왔다.

“바로 이거야.”

세이란이 고갤 숙이자, 그의 더운 숨결이 뺨을 스쳤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을 올려다보는 하늘빛 눈동자를 보며, 그가 웃으며 말했다.

“이젠 키스를 할 때면 눈을 감을 때도 되었건만.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니까.”

그의 속삭임에 얼굴이 붉어졌다.

“눈 감아, 키안.”

황제의 독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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