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5 화
“전하.”
키안이 바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제야 귀족들의 시선 역시 자신에게 향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했는지 궁금하군. 내가 앞에 있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다니 말이야. 아니면, 내가 그대에게 그 정도로 존재감이 없는 사람인 건가?”
“아닙니다, 전하. 그런 게 아니라, 다른 생각을 하느라. 죄송합니다.”
당혹스러움을 감추며, 키안이 침착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세이란이 고갤 끄덕이며, 말했다.
“앉아도 좋다, 릴리스 프로필리아. 별로 먹지도 않은 것 같던데, 내가 고기를 가져다줄까?”
“네?”
키안이 놀라 숨을 삼켰다.
‘대체 이건 또 무슨 소리지? 지금 황태자인 세이란이 직접 나에게 고기 접시를 가져다준다는 건가? 하인처럼?’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여긴 바레나 거리의 식당이 아니라, 귀족들이 모두 지켜보고 있는 만찬 자리였다. 그 누구라도 절대 황태자를 하인처럼 부릴 순 없었다.
“아닙니다, 전하. 제가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키안이 걸음을 옮기려 하자, 세이란이 키안의 팔을 붙잡더니 의자에 앉혀다.
“앉아 있어. 내가 해주고 싶어서 그래. 널 벌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세이란은 벌이 아니라고 했지만, 벌이나 다름없었다. 황태자에게 음식을 받아먹고 체하지 않을 간 큰 귀족은 없을 테니까.
키안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가 귀족들 앞에서 착실하게 연극을 하고 있다는 사실쯤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꾸 그의 연극이 진짜처럼 느껴져 심장이 두근거렸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어.’
키안은 난처한 얼굴로 맞은편 탁자에 앉아 있는 베로니카를 슬쩍 보았다. 하지만 베로니카는 세이란의 행동에 전혀 관심이 없는 듯 주위를 살피며 누군가를 찾고 있었다.
‘레이디 베로니카께선 전하께 관심이 없으신 건가? 아니며 일부러 저러는 걸까?’
간혹 레이디들은 좋아하는 상대의 애를 태우기 위해 일부러 반대로 행동하는 경우가 있다고 기사들이 불평했던 게 떠올랐다.
“알맞게 구워졌군. 어서 먹어.”
그사이 잘 구워진 고기를 접시에 담아 들고 온 세이란이 키안의 앞에 놓아주었다.
“먹어.”
“전하께서도 드십시오.”
“난 됐다. 만약 내 정성을 생각해 네가 먹여준다면, 생각해 보겠다.”
세이란의 입가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귀족들은 그의 행동에 입을 떡 벌리곤 다물 줄을 몰랐다. 그저 할 말을 잃은 채 멍하니 두 사람을 바라볼 뿐이었다.
다만 제임스 에버콘과 렌스터 공작의 눈빛만은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뭐해, 어서 주지 않고?”
세이란의 재촉에 키안이 포크로 고길 찍으며, 그를 곁눈질했다. 그러자 그의 모양 좋은 입술과 가지런한 치열이 눈에 들어왔다.
살짝 열린 입술 새로 보이는 그의 붉은 혀가 묘하게 색스러워 보였다.
‘침착해.’
키안이 서둘러 그의 입 안에 고기를 넣어주었다. 그러자 그가 맛있다는 듯 고길 씹어 삼켰다.
“맛있군.”
키안은 넋을 잃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다 그와 시선이 마주치자, 민망함에 얼굴을 붉히며 서둘러 시선을 피했다.
“보답을 해야겠지?”
세이란이 키안의 손에서 포크를 받아 들었다. 그러곤 잘 구워진 고기를 찍어 키안의 입 앞에 가져다 댔다.
“아닙니다. 제가 먹겠습니다.”
키안이 재빨리 포크를 받아 들려 하자, 세이란이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설마 내 성의를 거절하는 것인가, 릴리스 프로필리아?”
황태자의 호의를 거절하다니.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키안이 어쩔 수 없이 입을 벌렸다. 그러자 그가 키안의 입 안으로 고기를 넣어주었다.
그러곤 옆에 놓여 있던 냅킨을 들어 기름이 묻은 키안의 입가를 닦아주었다.
“잘 먹으니 기쁘군.”
그 말과 함께 세이란이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그 모습에 귀족들은 경악에 가까운 표정을 지은 채 시선을 어디에다 두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허둥지둥 고갤 돌리는 게 보였다.
“내일 사냥을 위해 나는 이만 돌아가 쉬어야겠다. 오랜만에 몸을 움직였더니, 곤하군.”
세이란이 내일 사냥을 핑계로 자릴 떴다. 그러자 귀족들 역시 하나둘 눈치를 보며 자릴 뜨기 시작했다. 귀족들이 만찬 자리를 떠나자, 키안은 안도했다. 자신에게 쏟아졌던 따가운 시선들에서 벗어날 수 있던 것이다.
그때 베로니카가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키안이 앉아 있는 쪽으로 걸어오는 게 보였다.
“아키텐 공작부인, 뭐 좀 물어보고 싶은데…….”
다행히 베로니카가 용건이 있는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벨라인 모양이었다.
“말씀하십시오, 레이디 베로니카.”
“그게…….”
베로니카가 꺼내기 어려운 말인 듯 주위를 살폈다. 그러곤 귀족들이 어느 정도 빠져나간 걸 확인하고는 낮은 목소리로 물어왔다.
“혹시 레녹스 공작님께선 어디에 계시는지 알고 계신가요? 내내 보이지 않으셔서.”
베로니카는 레녹스 공작과 연인 사이라고 소문이 난 벨라에게 키안의 행방에 대해 절대로 묻고 싶진 않았다. 묘하게 자존심이 상했던 것이다. 하지만 달리 물어볼 이가 없었다.
“키안 레녹스 공작님 말씀인가요?”
벨라가 재차 질문을 하자, 베로니카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모닥불의 일렁거림일 수도 있었지만, 수줍어하는 눈치였다.
‘설마 베로니카가 키안에게 마음이 있는 건가?’
벨라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베로니카를 보았다. 만약 그렇다면, 일이 너무 재미있게 흘러가고 있었다.
“레녹스 공작이라면 황태자 전하의 명령을 받고 셀서스 궁으로 갔습니다.”
에드윈의 설명에 키안을 비롯해 벨라와 베로니카, 그리고 헬로이즈의 시선이 그에게 향했다.
“궁금해하시는 것 같아, 무례를 무릅쓰고 끼어들었습니다. 불쾌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아닙니다. 오히려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베로니카가 감사하다는 말과는 달리 잔뜩 실망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럼 전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들어가 쉬어야 할 것 같아서.”
베로니카가 막사로 돌아가려는 듯 발걸음을 옮기는 게 보였다.
“저기, 레이디 베로니카. 혹시 괜찮으면 저희와 차라도 한잔 하시겠어요? 벌써 잠자리에 들기엔 이른 시각이라.”
벨라의 제안에 베로니카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레녹스 공작에게 아름답게 보이기 위해 한껏 성장을 했었다. 그러다 그가 보이지 않자, 실망으로 모든 게 귀찮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벨라의 초대로 의기소침해 있던 베로니카의 눈빛이 반짝였다.
‘어쩌면 차를 마시면서 레녹스 공작님에 대해 물어볼 수도 있을 거야. 그러다 운이 좋다면 공작님께서 마음에 두고 계신 레이디가 있는지 알 수 있을지도 몰라.’
그런 생각이 들자, 베로니카는 고갤 끄덕이며 대답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초대에 응하겠습니다. 피곤한데,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아서요.”
“제가 피로를 풀어주는 차를 준비해 왔답니다. 마시면, 오늘 밤 푹 주무실 수 있을 겁니다.”
벨라의 말에 베로니카가 고갤 끄덕였다.
“그럼 가실까요?”
아무도 거절하는 사람이 없자, 벨라가 앞장섰다. 그렇게 벨라를 따라 아키텐 공작가의 막사로 향하던 키안 앞에 세이란이 불쑥 모습을 드러내며, 길을 막아섰다.
분명 곤해서 쉬어야겠다며 막사로 간다고 했는데, 가지 않은 모양이었다.
“어딜 가는 거지?”
“아키텐 공작부인께서 저희를 막사로 초대하셨습니다. 전하께서도 함께 가시겠습니까?”
키안 대신 에드윈이 대답했다.
“아니, 난 다른 볼일 있다. 그리고 릴리스, 그대도 갈 수 없을 것 같다. 조금 전 나와 함께 다른 볼일이 생겼거든.”
세이란이 키안의 팔을 붙잡곤 자신 쪽으로 끌어당기며 선을 그었다.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도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이젠 놀랍지도 않다는 듯, 고갤 끄덕였다. 조금 전 만찬 식탁에서 릴리스 프로필리아를 바라보며, 감정을 뚝뚝 흘리던 세이란을 똑똑히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럼 저희만 가야겠군요. 전하, 좋은 시간 보내십시오.”
에드윈이 세이란에게 인사를 건넨 후 막사로 향했다.
하지만 헬로이즈는 일행을 따라가기 전, 두 사람을 예리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무례할 정도로 직설적인 눈빛이었다.
“뭐지, 헬로이즈 공주? 나에게 할 말이라도 있나?”
“처음 알았습니다. 전하께서 이렇게 다정하고 배려가 깊은 분이란 걸 말입니다.”
접견실에서 내내 자신을 싸늘하게 쏘아보던 녹색 눈동자와는 너무도 달랐다. 그는 마치 눈에 꿀이라도 뚝뚝 떨어지는 듯 릴리스 프로필리아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키안 레녹스 공작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사실 헬로이즈는 황실 무도회에서 세이란과 릴리스를 보았을 때, 귀족들을 속이기 위한 연극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오늘 사냥터의 냇가에서 보았던 세이란의 눈빛을 보고 확신했다. 황태자인 세이란이 키안 레녹스에게 특별한 감정이 있다는 걸. 그녀가 느끼기에 세이란의 눈빛에 담긴 감정은 분명 질투였다. 남자가 여자를 마음에 품었을 때 생기는 감정.
하지만 오늘 만찬 자리에서 보았던, 릴리스를 향한 세이란의 시선 역시 진심이었다. 절대 이런 절절한 감정을 거짓으로 꾸밀 수는 없었으니까.
‘설마 두 사람에게 다 마음이 있는 건가? 그게 아니라면, 두 사람이 같은 사람이거나.’
후자는 너무도 말도 안 되는 상상이었다. 그때 세이란이 싸늘한 목소리로 경고하듯 말했다.
“이제라도 알았으니,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지 않겠군. 그 정도의 현명함은 갖고 있을 테니까. 갈까, 릴리스?”
그가 릴리스의 손을 붙잡는 게 보였다. 조금 전 자신을 바라볼 때와는 달리 그의 눈빛이 확 바뀌어 있었다.
‘연극이 아니었어.’
아니, 처음 시작은 연극이었을지 몰라도 최소한 지금은 아닌 것 같았다.
“릴리스, 뭐해?”
세이란이 자신의 손을 당기며 재촉하자 키안은 그제야 고갤 들어 그를 응시했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그윽한 녹색 눈동자와 마주치니 심장이 들썩였다.
“아, 네.”
아, 네라니. 왜 그 앞에서만 이렇게 바보처럼 어리숙하게 구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렇게 그의 손에 이끌려 걷는 동안에도 심장의 떨림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어딜 가시는 겁니까?”
“구스타프 1세의 비밀의 방은 아니니 안심해.”
사실 사냥대회가 열리는 황실 사냥터는 세이란과 함께 갔던 곳과는 다른 사냥터였다. 한마디로 그가 농담을 건넨 모양이었다.
키안의 귀엔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지만.
“그럼 더 흥미로운 곳으로 데려가셔야 할 겁니다. 이렇게 예쁘게 입었으니까요.”
순간 그의 눈동자에 열기가 어렸다. 농담이었는데, 그는 진심으로 반응하고 있었다.
“노, 농담이었습니다.”
키안은 당혹감에 고갤 돌렸다. 하지만 그의 시선이 자신에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숨도 쉬지 못할 정도로 긴장돼. 이러다 얼굴은 물론이고 온몸이 빨갛게 달아오른 것 같아.’
당황해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 세이란이 말에 올랐다. 그러곤 키안에게 손을 뻗더니, 말 위로 끌어당겼다.
“내게 기대. 숲으로 갈 거야.”
그가 키안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그러자 순식간에 그의 품에 안긴 자세가 되었다. 몸을 바로 할 새도 없이 두 사람을 태운 말이 순식간에 숲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황제의 독사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