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독사과-64화 (64/139)

제 64 화

에드윈 리치문트는 습관적으로 황실 기사단의 연병장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다 자신보다 먼저 연병장에 와 훈련 중이던, 세이란을 발견하곤 걸음을 멈췄다.

“최근에 검술 훈련을 시작했다고 하더니 사실이었군, 리치문트 공작.”

세이란 역시 에드윈을 발견하곤, 들고 있던 검을 내려놓았다.

“전하께서도 일찍 나오셨군요. 혹시 긴장이 되시는 겁니까?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황태자비 간택이 시작될 테니 말입니다.”

에드윈의 말에 세이란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내며, 서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는 리치문트 공작이야말로, 집에 있어야 할 시각 아닌가? 오늘은 내가 특별히 휴가까지 준 것 같은데?”

세이란의 지적에 에드윈은 할 말이 없었다. 사실 요 며칠 마음이 심란해 잠을 이루지 못했다. 불면증은 아니었다. 하지만 침대에 들면, 자꾸 붉은 머리카락의 여인이 생각나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사실 평소의 그라면, 무도회에 참석하기 전까지 느긋하게 도서관에 앉아 책을 읽었을 터였다.

하지만 요즘 답답해 도무지 책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정신없이 몸을 혹사하면, 답답함이 사라질까 하는 마음에 이른 새벽부터 연병장을 찾은 것이다.

“새벽마다 훈련했더니, 습관이 된 모양입니다.”

에드윈의 변명에 세이란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자신을 보는 게 느껴졌다. 표정을 보건대, 믿지 않는 눈치였다.

“잡념이 생긴 모양이군, 책에 집중하지 못하는 걸 보면.”

사실 최근 들어 멍해 있는 에드윈의 모습이 종종 눈에 띄었다. 마치 나사가 빠진 것처럼 행동하는 에드윈을 보며,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여자인 모양이군.”

“네?”

“경이 정신을 못 차리는 이유 말이다.”

세이란의 지적에 에드윈이 멋쩍은 얼굴을 했다. 그 모습에 세이란의 추측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궁금하군. 책밖에 모르는 경을 평범한 남자로 만들어놓은 레이디가 누군지 말이야.”

“그런 게 아니라, 조금 특이한 사람 같아 신경이 쓰이는 것뿐입니다.”

에드윈이 특별한 감정이 아니라며, 부정했다. 하지만 세이란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요즘 에드윈 리치문트는 확실히 변했다.

칼날 같은 지성과 이성이라 일컬어지는 그가 종종 넋을 잃은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곤 했다. 게다가 신중하기 짝이 없는 그가 몇 번이나 잉크를 엎지르는 실수를 한 것이다. 게다가 자신의 이름을 써 넣어야 할 곳에 낙서를 해놓은 적도 있었다. 이런저런 정황으로 미루어 보건대, 스스로 감정을 깨닫고 있지 못할 뿐 그는 지금 사랑에 빠져 있었다.

“별일이군. 그대가 사람에 대해 고민하다니 말이야. 예전엔 사람엔 관심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난 그렇게 들었는데 말이야.”

그랬었다, 최근까진. 하지만 지금은 그의 머릿속에 지식을 탐구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문제에 당면해 있었다.

“최근 난제를 만났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지식으로 아무리 답을 찾으려 해도, 답이 나오지 않아 고민 중입니다.”

“여인이란 최대의 난제지. 종잡을 수가 없거든. 하지만 리치문트 공작. 책 속의 지식은 이성이 필요하지만, 여인에겐 진심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게 좋아.”

에드윈이 놀란 표정으로 세이란을 올려다보았다. 마치 경험한 것처럼 얘길 하는 그를 보자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혹시 전하께서도 그러십니까?”

에드윈의 질문에 세이란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 아주 지옥 같지. 하지만 곧 깨닫게 될 것이다.”

세이란의 시선이 연병장의 입구로 향했다. 그러자 서늘하던 그의 녹색 눈동자가 짙어지더니, 믿을 수 없게도 촉촉이 젖어들었다. 에드윈이 놀라 고갤 돌리자, 연병장 입구로 들어서는 키안을 볼 수 있었다.

키안이 에드윈과 눈이 마주치자, 고갤 끄덕여 인사를 건넸다.

그때 세이란이 키안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감정이 축복이란 사실을. 리치문트 공작, 뒤늦은 후회는 절망뿐이라는 걸 기억해야 할 것이다.”

순간 에드윈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러자 세이란이 들고 있던 검을 자신에게 건네곤, 키안에게 걸어가는 게 보였다.

에드윈은 멍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응시했다. 그 순간, 두 사람을 둘러싼 공기가 변해 있음을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대체 뭐지? 뭐가 변한 거지?’

뭐라고 딱 꼬집어 말할 순 없었지만, 두 사람에게 지금까지와 다른 친밀함이 느껴졌다. 에드윈이 미간을 찌푸리는 그때, 세이란이 손을 뻗어 키안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는 게 보였다. 그제야 에드윈은 뭐가 변했는지 눈치챘다.

“전하의 표정이 변하셨어. 마치, 마치…….”

에드윈은 차마 입에 담을 수 없어, 목구멍으로 삼켰다.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왜 이제야…….”

두 사람이 함께해 온 시간은 자그마치 14년이었다. 그동안 여러 번 남자인 두 사람이 그렇고 그런 관계라는 소문은 있었다. 하지만 다 거짓 소문이라고 판명이 났을 뿐만 아니라, 에드윈은 한 번도 두 사람에게서 이상한 감정의 기류를 느끼지 못했다. 그래서 두 사람의 관계를 의심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맙소사!

키안이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알 수 없었지만, 세이란의 감정은 확실했다. 그는 지금, 키안 레녹스 공작에게 흠뻑 빠져 있었다.

**

키엘체에 밤이 찾아왔다. 사교 시즌이 시작되는 첫날, 황궁에서 열리는 무도회에 참석하기 위한 마차 행렬이 로체 거리를 따라 끝도 없이 늘어서 있었다.

키안과 벨라는 마차 행렬의 끝에 서서 화려하게 꾸민 마차들을 바라보았다. 마치 가문의 부와 명성을 마차에 쏟아부은 듯 화려하게 꾸민 마차 행렬을 보며, 키안은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놀랄 것 없어. 원래 마차란 게 가문의 부를 상징하는 수단 중 하나거든. 아마 오늘 무도회는 그 어떤 때보다 화려할 거야. 눈치작전 역시 치열할 테고 말이야.”

“눈치작전이라고?”

“그래. 키안, 내 말 명심해. 레이디들의 무리가 있는 곳으로 갈 땐, 발에 걸리지 않게 최대한 조심히 걸어야 해. 그리고 오늘은 레이디들이 넘어지는 사고가 아주 많이 일어날 거야. 특히 황태자 전하와 에버콘 공작 근처에서 말이야. 그러니 거기에 휩쓸려, 바닥에 넘어져 창피당하지 않으려면 정신 똑똑히 차려야 해.”

벨라의 말에 키안이 눈살을 찌푸렸다. 혹시 이것이 세이란이 말했던, 남자를 유혹하기 위한 레이디들의 고전적인 수법을 말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레이디들의 고전적인 수법에 휘말려서는 안 된다는 거지?”

“맞아. 그 얘길 하는 거야. 그리고 이걸, 갖고 있는 게 좋을 것 같아.”

벨라가 가죽 주머니 안에서 상아로 만들어진 작은 수첩 같은 걸 꺼내 키안에게 건넸다.

“이게 뭔데?”

“댄스 카드야. 무도회에 참석하는 레이디들의 필수 아이템이지. 부채와 함께 말이야.”

사실 이 댄스 카드에 누구의 이름이 쓰이느냐에 따라 올해 사교계의 꽃이 결정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댄스 카드를 채우는 일은 레이디에게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그런 건 관심 없어. 어차피 전하 외엔 춤도 추지 않을 테니까.”

키안이 필요 없다는 듯 상아로 만든 댄스 카드를 벨라에게 다시 건넸다.

“그건 안 돼. 추지 않더라도 갖고 있어야 해.”

벨라가 부채와 함께 댄스 카드를 쥐여주었다.

“분명 웃음거리가 될 거야. 내가 춤은 물론 모든 게 서툴다는 걸 알게 된다면 말이야.”

키안이 자신 없는 표정을 하자, 벨라가 평소와 달리 맹렬하게 고갤 가로저었다.

“아니야, 절대 그럴 리 없어. 키안, 사실 내가 잊은 게 있었어.”

“잊은 것? 그게 뭔데?”

“최강의 미모는 모든 걸 초월한다는 사실 말이야. 난 네가 이렇게 아름다울지 몰랐거든. 아마 귀족들의 눈엔 네가 서툰 것 따윈 보이지도 않을 거야. 너와 눈만 마주치면,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 버릴 테니까. 사실 난 걱정이야, 그들이 심장마비를 일으켜 기절하지 않을까 하는.”

벨라의 지나친 과장에 키안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피식 웃었다. 그제야 마차를 탄 후부터 심장을 조이던 긴장감이 사라지고 있음을 느꼈다.

“귀족이 기절했다는 말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어.”

“맞아. 하지만 웃길 것 같지 않아?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유스타나 제국의 흑 역사로 길이길이 회자될 게 분명해.”

두 사람이 웃으며 농담을 주고받는 사이 굳어 있던 키안의 표정이 평소의 침착한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벨라, 너 때문에 긴장이 좀 풀렸어. 고마워.”

“사실 걱정이 되긴 했어. 네가 이 상태로 무도회에 갔다가, 귀족들이 말만 걸어도 검을 뽑아 들 것 같은 무시무시한 표정이었거든.”

벨라의 농담에 키안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사실 맞아. 네 말처럼, 전쟁터에 나가는 기분이야. 아니, 그것보다 더 떨린다면 믿겠어?”

“믿어. 나도 그랬거든.”

벨라가 키안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그러자 한결 안심이 됐다.

“그런데 정말 큰일이야.”

벨라가 무슨 걱정이 있는지 미간까지 찌푸리며 말했다.

“또 뭐가?”

“전하 말이야.”

“전하가 왜?”

“너에게 추파를 던지는 귀족들에게 하루가 멀다 하고 결투라도 벌이시지 않을까 걱정이라니까.”

“뭐, 결투?”

“그래. 제발 전하께서 질투로 귀족들을 다 죽이지 않기를 바랄 뿐이야.”

벨라의 과장에 키안이 말도 안 된다는 얼굴을 했다.

“재미없으니, 농담 그만해.”

“농담 아니라니까. 너도 어제 봤잖아. 전하께서 널 어떤 눈빛으로 보는지 말이야.”

사실 보긴 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세이란이 귀족들을 상대로 결투를 벌일 것 같진 않았다.

“전하께선 굉장히 이성적이신 분이야.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아.”

키안의 말에 벨라가 남자에 대해 정말 모른다는 얼굴을 했다.

“키안, 내 말 잘 들어. 남자의 질투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아? 레이디들은 개싸움이 고작일 테지만, 남자들은 목숨을 건다고. 그러니 전하께서 곁에 계실 땐, 절대 웃으면 안 돼. 아니, 시선도 마주치지 마.”

“벨라, 걱정 말라니까. 전하께선 절대 그럴 분이 아니래도. 질투로 결투를 신청하시다니. 절대 그럴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맹세할 수도 있어.”

너무도 쉽게 생각하는 키안을 보며, 벨라는 걱정이 됐다. 사실 어젯밤 키안을 바라보는 세이란의 눈빛을 보지 않았다면, 걱정도 하지 않았을 터였다. 세이란이 그런 열정적인 감정을 가진 사람이란 걸 몰랐을 테니까.

“키안, 아니, 릴리스. 내 말은…….”

하지만 다음 순간, 벨라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기로 했다. 생각해 보니, 세이란의 질투를 자극하는 것도 괜찮은 방법인 것 같았다.

“뭐야? 하고 싶은 말은 다 한 거야?”

말을 멈춘 채,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고 있는 벨라를 보며, 키안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자 벨라의 입가에 미소가 떠오르면, 고갤 끄덕였다.

“뭐, 잘될 거야. 전하께서 네 곁에 계실 테니까.”

그때, 덜컹 소리와 함께 마차가 멈췄다. 키안이 창문 쪽으로 고갤 돌리자, 어느새 마차는 셀서스 궁에 도착해 있었다.

“드디어 도착했어, 릴리스. 준비됐어?”

키안이 몸을 바로 하며, 천천히 숨을 골랐다. 그러곤 고갤 끄덕이자, 벨라가 부채로 마차의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마부가 내려와 마차의 문을 열었다.

마차에서 두 사람이 내린 순간, 붉은 카펫이 깔려 있는 셀서스 궁의 계단을 오르려던 귀족들이 돌아보았다.

벨라 아키텐 공작부인의 아름다움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 옆에 서 있는 아름다운 레이디를 발견하곤, 모두 놀라 숨을 삼키는 모습이었다.

키안은 귀족들의 시선을 의식해 고갤 숙였다. 그러곤 벨라가 준 부채로 얼굴을 가리자, 키안에게 향했던 시선들이 하나둘 다른 곳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세상에나, 지금 도착한 저분. 렌스터 공작가의 영애가 아닌가요?”

한 귀부인의 말에 귀족들의 시선이 어느새 이제 막 도착한 마차 쪽으로 향했다. 키안 역시 들고 있는 부채 너머로 렌스터 공작가의 마차가 서 있는 쪽을 보았다.

짙은 금빛 드레스를 입은 베로니카가 우아한 모습으로 마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언제 돌아왔을까요?”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못 보던 1년 사이에 더 아름다워진 것 같군요.”

귀족들은 베로니카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키안은 계단을 올라가는 베로니카의 우아한 뒷모습을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가 빼어난 미모를 가졌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황실 무도회에서 보니, 그 차이가 확연히 느껴졌다. 자신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만큼 아름다웠다.

“그러고 보니, 소문엔 테란국에서 온 공주 역시 무도회에 참석한다고 하더군요.”

“저도 그 얘기 들었답니다. 굉장한 미인이라고 하더군요.”

“그럼, 두 사람의 경쟁이 되겠군요.”

“아마, 그렇지 않을까요?”

귀부인들이 멀어지자, 키안은 얼굴을 가렸던 부채를 천천히 내렸다. 머뭇거리는 사이, 이미 셀서스 궁 앞엔 벨라와 자신 외엔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릴리스, 걱정할 것 없어. 네가 훨씬 아름다우니까.”

벨라의 응원에 키안이 희미하게 웃었다. 그러곤 오늘따라 높게만 느껴지는 셀서스 궁의 계단을 천천히 오르기 시작했다. 마침내, 유스타나 제국의 사교 시즌이 시작되었다.

**

“시종장님, 누구 기다리시는 분이라고 계시는 겁니까?”

연신 초조한 모습으로 초대장 명단을 확인하는 아이크를 보며, 어린 시종이 다가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무도회가 곧 시작될 시각이라, 명단을 확인하는 중이었다.”

사실 사교계의 첫 무도회인 황실 무도회는 9시가 되면, 문이 닫혔다. 그 사실을 모르는 영애들은 첫 데뷔 무대에 지각해, 무도회에 참석하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아이크는 재빨리 고갤 들어, 벽에 걸려 있는 시계를 확인했다. 무도회가 시작되려면 이제 10분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늦기라도 하면, 큰일인데……. 나가서 기다려야 하는 걸까?’

아이크가 걱정스러운 마음에 복도 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아름다운 레이디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런 난처하게 됐어.”

아이크는 복도를 따라 걸어오는 레이디들을 보며, 미간을 좁혔다. 시간을 보니, 이제 무도회장의 문이 닫히려면 5분밖에 남지 않은 시각이었다. 그런데 두 명의 레이디가 한꺼번에 도착한 것이다.

“시간이 없으니, 한꺼번에 입장을 해야 하는 겁니까? 이런 경우엔 말입니다.”

시종의 지적에 아이크가 침착한 모습으로 레이디들 앞에 섰다.

“시종장 아이크입니다. 제가 입장을 돕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시종장의 말에 베로니카와 헬로이즈는 익숙한 듯 무도회장 입구에 서서 자신들의 이름이 호명되길 기다렸다.

그때 셀서스 궁의 현관문이 열리더니, 보랏빛이 감도는 은빛 드레스를 입은 키안이 들어서는 게 보였다. 그제야 긴장으로 굳어 있던 아이크의 얼굴이 풀어졌다. 그러곤 베로니카와 헬로이즈를 향해 고갤 숙이며 양해를 구했다.

“죄송하지만, 두 분께서 함께 입장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아이크의 말에 베로니카와 헬로이즈가 서로를 경계하듯 흘끗 보았다. 셀서스 궁에 도착해 화장을 고치기 위해 간 파우더 룸에서 두 사람은 이미 서로를 마주했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두 사람 사이엔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유스타나 제국의 규칙이 그렇다면, 상관없습니다.”

헬로이즈의 말에 베로니카 역시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갤 끄덕였다.

“저 역시 상관없습니다.”

“양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이크의 신호에 닫혀 있던 무도회장 문이 열렸다. 그러자 무도회장에 있던 귀족들의 시선이 일제히 문 쪽으로 향했다.

“테란국의 헬로이즈 공주님과 렌스터 공작가의 영애이신 레이디 베로니카께서 입장하십니다.”

이름이 호명되자, 헬로이즈와 베로니카가 동시에 무도회장 입구에 섰다.

갈색 머리카락에 이국적인 외모를 지닌 테란국의 공주와 금발에 아름다운 푸른 눈을 지닌 전형적인 미인인 베로니카의 등장으로 무도회장 안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정말 레이디 베로니카께서 키엘체로 돌아오셨군요.”

“저 테란국의 공주라는 분도 아름답지 않나요? 레이디 베로니카와 함께 서 있어도 전혀 밀리지 않는군요. 굉장히 아름다우세요.”

귀족들의 웅성거림에 두 레이디는 고갤 들었다. 그러곤 우아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무도회장 안으로 들어섰다.

사실 사교계에선 가장 마지막에 등장하는 레이디가 바로, 사교계의 꽃이라는 불문율이 있을 정도로 그 순서가 중요했다. 그래서 레이디들은 최대한 마지막 순간에 무도회장에 들어가기 위해 경쟁을 벌일 정도였다.

이내 무도회장의 문이 닫히자, 귀족들의 소음이 한순간 사라졌다. 그제야 아이크가 무도회장 입구에 서 있는 키안과 벨라를 향해 돌아섰다.

“레이디 릴리스님과 아키텐 공작부인이십니까?”

“아, 네. 저희가 늦지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키안의 말에 아이크가 고갤 가로저으며 말했다.

“아직 1분이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무도회의 마지막 입장이시기도 합니다.”

사실 키안은 마지막 입장이란 말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지각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할 뿐이었다.

“다음부터, 빨리 와야겠네요. 하마터면, 지각할 뻔했습니다.”

순간, 아이크의 입가에 미소가 깊어졌다.

“아닙니다. 딱 적당한 시간에 오셨습니다.”

그때 벨라가 키안 쪽으로 고갤 숙이더니, 낮게 속삭였다.

“릴리스, 혹시 모르는 거야? 무도회에서 마지막 입장은 가장 아름다운 레이디에게 주어지는 특권이란 걸 말이야.”

“특권이라고?”

“그래. 한마디로 오늘 주인공은 바로 너란 뜻이지.”

그때 시종장 아이크가 키안에게 말했다.

“레이디 릴리스 님, 전하께서는 무도회 중앙에 있는 계단을 통해서 내려오실 겁니다.”

“아, 네.”

“준비되셨으면, 문을 열겠습니다.”

아이크의 말에 키안이 심호흡을 했다. 그러곤 장갑을 낀 손으로 드레스 자락을 정리했다.

“긴장할 것 없어.”

벨라가 키안의 손을 붙잡곤 걱정하지 말라는 듯 웃어 보였다.

“다행이야, 너와 함께여서.”

이미 주사위는 던져진 후였다. 이제 와서 떨어봤자, 들킬 가능성만 커졌다.

‘좋아, 해보는 거야.’

키안이 결심한 순간, 굳게 닫혀 있던, 무도회장의 문이 열렸다. 당연히 조금 전 테란국의 공주인 헬로이즈와 렌스터 공작가의 영인엔 베로니카가 마지막 순서라고 생각했던, 귀족들의 시선이 의아한 듯 무도회장 입구로 향했다. 시종장 아이크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힘찬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의 마지막 입장입니다. 벨라 아키텐 공작부인과 프로필리아 자작가의 영애이신, 레이디 릴리스님이십니다.”

황제의 독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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