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3 화
당연한 일이었다. 세이란도 레이디 베로니카께서 무도회에 참석하길 기다릴 터였다.
“레이디 베로니카께 실례가 안 된다면, 잠깐 인사를 드려도 될까? 전해 드려야 할 말도 있고.”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젬마가 고갤 끄덕인 후, 서둘러 마차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곤 잠시 안에서 뭔가 속삭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문이 열렸다.
“잠깐이라면, 괜찮다고 하십니다.”
젬마가 서둘러 마차에서 내려온 후, 베로니카가 밖으로 나올 수 있도록 옆으로 비켜섰다. 그러자 키안이 재빨리 마차의 문 앞으로 가, 손을 뻗었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제 손을 잡고 내려오십시오.”
자신이 내민 손을 베로니카가 잡지 않자, 키안이 고갤 들었다. 그러자 베로니카가 얼굴을 붉힌 채 서 있었다.
순간 자신이 주제넘은 건 아닌가 생각했다. 하지만 다행히 베로니카는 키안의 손을 붙잡고 마차에서 내려왔다.
“감사합니다, 레녹스 공작님.”
맑고 투명한 목소리였다. 키안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린 베로니카가 수줍게 웃으며 감사의 말을 전했다.
‘작고 연약해, 보호해 주고 싶을 만큼.’
그렇게 생각한 순간 베로니카가 쓰고 있던 외투의 후드를 벗었다. 그러자 구불구불한 아름다운 금발이 폭포수처럼 아래로 흘러내렸다.
아름다웠다. 아침 햇살을 받은 베로니카의 투명한 피부며, 푸른 눈동자엔 여행의 피곤은 느껴지지 않을 만큼 싱그러웠다. 마치 이슬을 머금은 장미꽃처럼 아름다웠다.
키안의 시선을 느낀 듯 베로니카가 수줍게 고갤 드는 게 보였다.
“전쟁터에서 돌아오셨다는 소문은 편지를 통해 전해 들었답니다. 다치신 곳은……?”
자신을 걱정했다는 베로니카의 말에 놀랐다. 하지만 이내 납득했다. 분명 황태자인 세이란의 안부를 전해 들으면서, 자신의 소식 역시 들은 모양이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보시다시피 전, 건강합니다. 그리고 전하께서도 무탈하시구요. 레이디 베로니카께서도 좋아 보이십니다. 여전히 아름다우시고요.”
사실 아름답다는 말은 레이디들이 가장 좋아하는 칭찬이란 말을 기사들이 했었다. 키안이 어색한 분위기를 무마시키기 위해 한 말이었지만, 잘한 선택인 모양이었다.
베로니카의 얼굴이 눈에 띄게 밝아지더니, 기쁜 듯 미소까지 지었던 것이다.
“레녹스 공작님께서 절 그렇게 생각하시는지 몰랐습니다. 너무 기쁩니다.”
베로니카가 양손으로 뺨을 감싸 쥐는 게 보였다. 그 모습이 너무도 사랑스러워, 키안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섬세한 이목구비와 연약해 보이는 사랑스러운 모습의 베로니카를 보자, 세이란이 왜 그녀에게 빠졌는지 알 것 같았다.
키안은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러다 어젯밤 세이란이 준 시계가 손에 닿자, 움직임을 멈췄다.
순간 키안은 회중시계에서 손을 뗐다. 마치 남의 것에 손을 덴 듯한 느낌에 죄책감마저 들었다.
“전하를 뵙기엔 아직 이른 시각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저 역시 이제 막 키엘체에 도착해, 전하를 뵐 순 없는 상태거든요. 전하는 무도회에서 뵐 수 있으니, 괜찮습니다.”
“그럼 아직 공작저엔 가시지 않은 겁니까?”
“아, 그게 그러니까…….”
키안이 눈을 가늘게 뜨곤 베로니카를 보았다. 말은 하지 않고 있었지만, 세이란이 무지 보고 싶은 모양이었다. 공작가로 가기 전에 황궁까지 달려온 걸 보면.
“저희 아가씨께선 황제 폐하께서 위독하시다는 말씀을 듣고, 걱정되는 마음에 잠깐 들르신 겁니다.”
난처해하는 베로니카를 보며, 재빨리 옆에 서 있던 젬마가 변명을 늘어놓았다.
‘황태자 전하가 보고 싶어 왔다는 사실을 숨기려 하다니. 이것이 레이디들의 자존심인 건가?’
만약 그렇다면 모르는 척하는 게 예의였다.
“제가 황태자 전하께 레이디 베로니카께서 걱정하고 계시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니요, 아닙니다. 아무 말도 하지 말아주세요.”
베로니카가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만 전하께서도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순간 키안의 말에 베로니카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전하께서 절요? 아니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베로니카가 절대 그럴 리 없다는 듯 말했다. 순간 키안은 베로니카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전혀 모르는 눈치야, 전하께서 어떤 마음을 품고 있는지.’
여전히 믿기지 않았지만, 천하의 세이란이 짝사랑 중인 건 분명했다. 오지랖일 수도 있었지만, 키안은 뭔가 말을 해야 할 것 같은 의무감을 느꼈다.
“레이디 베로니카, 전하께선 차갑게 보이시지만 진중한 분이십니다.”
“그거야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굉장히 무뚝뚝하시고, 무서우신 분이시죠.”
베로니카가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키안이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차갑고 냉정해 보이는 껍질을 한 꺼풀 벗겨내면, 믿을 수 없을 만큼 다정한 세이란이 있었다.
“대부분은 그렇지만, 마음에 두신 분껜 다정하십니다.”
“전하께서요? 믿을 수가 없군요. 하지만 공작님의 말씀이니, 믿겠습니다.”
베로니카가 고갤 들어 키안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멀리서만 바라보던 얼굴을 아주 가까이에서 보자,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특히 서늘한 하늘빛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자, 얼굴이 붉어졌다.
“생각보다 다정하시네요. 전하만큼은 아니지만, 공작님께서도 굉장히 무뚝뚝할 것이라 생각했거든요. 가끔 파티에서 마주칠 때면, 화가 나 있는 것 같기도 했고요.”
키안이 어색한 표정으로 머릴 긁적였다. 사실 평소에도 표정이 없긴 했지만, 레이디들과 있으면 특별히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더 굳은 얼굴을 했던 건 사실이었다.
“아, 그건 레이디들과의 대화가 익숙하지 않아서였습니다. 게다가 파티는 좋아하지 않기도 하고요.”
“그랬군요.”
베로니카의 미소가 더욱 깊어졌다. 그러자 아침 여명에 그녀의 푸른 눈동자가 마치 보석처럼 빛났다.
“이젠 가야 할 것 같아요. 너무 지체했다간, 무도회에 참석하지 못할지도 모르거든요. 그런데, 레녹스 공작님.”
“말씀하십시오, 레이디 베로니카.”
“만약에 무도회에서 뵙게 되면 아는 척해도 될까요? 그러니까 제 말은, 레이디들과 얘기하시는 게 익숙하지 않다고 하셨으니, 제가 도움이 되어드릴까 해서요.”
순간 키안은 베로니카가 이렇게 살가운 성격이었나? 하는 의문이 들었다. 키안은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베로니카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분명 소유욕이 강한 세이란이 알면, 화를 낼 일이었다.
“감사합니다, 레이디 베로니카. 하지만 제가 레이디들과 친해질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럼, 조심히 돌아가십시오.”
키안이 베로니카를 향해 예를 갖췄다. 베로니카는 아쉬운 표정으로 키안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자신을 거절한 게 아니라, 다른 레이디들과 친해질 생각이 없다는 말엔 안심했다.
‘이 무심함이 레이디들의 애를 태운다는 걸 모르시는 모양이야.’
베로니카는 실망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좋아져 버린 마음을 품고 마차에 올랐다.
“레녹스 공작님, 무도회에서 뵙겠습니다.”
베로니카를 태운 마차가 출발하자, 키안은 발걸음을 돌렸다. 그러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사무엘 스텐호프를 발견했다.
그 역시 멀어져 가는 렌스터 공작가의 마차를 보았는지, 놀란 얼굴이었다.
“스텐호프, 일찍 출근했군.”
“사람들이 오기 전에 검술 훈련을 하려고 일찍 나오던 참이었습니다. 그런데 조금 전 그분 말입니다. 혹시 그분이 렌스터 공작가의 영애가 맞으신 겁니까?”
키안은 거짓말을 할 수가 없어 고갤 끄덕였다.
“맞다. 성 캐서린 수도원에서 돌아온 모양이야.”
“맙소사, 그럼 어젯밤 셀서스 궁에서 제가 본 레이디가 바로 렌스터 공작가의 영애셨던 겁니까?”
잠깐, 이건 또 무슨 소리지? 키안이 눈을 가늘게 뜨곤 사무엘 스텐호프를 보았다.
“맙소사. 소문이 사실이었군요. 황태자 전하께서 레이디 베로니카께 마음이 있으시다는 그 소문 말입니다. 어젯밤 뵀을 땐, 설마, 설마 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보니 확실히 알겠습니다.”
잔뜩 흥분한 표정으로 말하는 사무엘 스텐호프를 보며, 키안은 그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설마, 지금 어젯밤 황궁에서 본 나와 조금 전 본 레이디 베로니카를 동일 인물로 생각하는 건가?’
무슨 이유에서 그런 착각을 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사무엘의 눈동자가 흥분으로 빛나고 있었다.
“단장님, 저 잠시만 다녀올 곳이 있습니다.”
사무엘의 말에 키안이 눈을 가늘게 떴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검술 훈련을 하겠다던 사무엘이 급히 갈 곳이 있다는 말에 의아했다.
“아직 출근하긴 이른 시각이니, 다녀와도 좋다.”
키안의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사무엘에 재빨리 말에 올랐다. 그러곤 서둘러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멀어지는 사무엘을 보며, 키안을 눈살을 찌푸렸다.
“그나저나, 어떻게 오해를 푼다?”
아니, 오해를 풀 필요가 없는 건가? 키안은 눈살을 찌푸리며, 서둘러 황실 기사단의 사무실로 향했다.
황제의 독사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