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5 화
키안은 고갤 숙이지 않기 위해 노력 중이었다. 긴장으로 심장이 무섭게 뛰었다.
‘괜찮아. 지금부터 난, 릴리스 프로필리아야.’
복잡한 머릿속과는 달리, 키안의 하늘빛 눈동자는 흔들림 없이 고요했다. 천천히 숨을 고른 후, 한 발짝 한 발짝 무도회장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황실 무도회장 중앙에 매달린 크리스털로 된 수천 개의 샹들리에 불빛을 받아 보랏빛이 감도는 은빛 드레스가 신비롭게 반짝였다.
“누, 누구라고요?”
“프로필리아 가문이라는군요. 근데, 유스타나에 그런 가문이 있었나요?”
“국경 지방의 시골 영주겠죠. 저도 처음 들어보는군요.”
그때 귀족들의 웅성거림 속에 탄식이 섞인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런데 정말 아름답지 않나요? 사람이 아닌 것 같군요.”
그 말에 동의하듯 귀족들의 웅성거림이 잦아들었다.
감미로운 음악과 귀족들의 소음으로 가득하던 무도회장 안에 정적이 흘렀다. 누구 하나 입을 열지 못하고 반쯤 넋이 나간 표정으로 키안을 바라보았다.
‘긴장할 것 없어. 침착해.’
키안은 한꺼번에 자신에게 쏟아지는 시선이 부담스러웠다. 마치 전쟁터에서 적의 화살이 한꺼번에 수십 개가 날아드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심장을 내리누르는 중압감에 뒷걸음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러고 보니, 시종장 아이크가 중앙 계단으로 가라고 했어. 전하께서 그쪽에서…….’
무도회장으로 들어서기 직전, 아이크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키안은 중앙 계단이 있는 쪽으로 고갤 돌렸다. 그 순간, 키안의 기다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더니 놀란 듯 커졌다.
그였다.
유스타나 제국의 황태자인 세이란 구스타프. 그가 자신을 계단 난간에 서서 내려다보며 서 있었다.
순식간에 키안은 그의 짙은 녹색 눈동자에 사로잡혀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심장이 벌써부터 뛰고 있었다. 샹들리에 불빛 아래 서 있는 그는 잔혹한 맹수의 본성을 숨긴 검은 사자처럼 보였다.
지독히도 아름답고, 강한. 그래서 눈을 뗄 수가 없는.
“유스타나 제국의 황태자 전하께서 입장하십니다.”
그때 시종장 아이크의 목소리가 무도회장을 울렸다. 그 순간 귀족들의 시선이 일제히 무도회장의 중앙 계단 위로 향했다.
“세상에, 황태자 전하십니다.”
“맙소사! 어쩜 저리도 완벽하실 수 있을까요?”
여기저기서 숨죽인 탄성이 새어 나왔다. 검은색과 황금색의 술로 장식이 된 황태자 복장을 한 세이란은 완벽한 모습이었다.
세이란이 계단을 내려오기 시작하자, 무도회장에 모여 있는 귀족들이 그제야 정신이 든 듯 허릴 숙였다.
키안 역시 그에게서 시선을 떼곤, 재빨리 고갤 숙였다. 귓불이 뜨거웠다.
‘바보처럼 전하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다니.’
키안은 시골 처녀처럼 얼뜨게 행동하는 자신이 한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고 싶다는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슬쩍 고갤 들어 세이란을 보았다. 단정하게 쓸어 올린 머리카락하며, 제복의 목 부분까지 채워진 금 단추. 그리고 주름 하나 없이 반듯한 새하얀 셔츠가 무척이나 금욕적으로 보였다.
순간 금욕적이란 단어에 얼굴이 붉어졌다. 생각해 보니, 사랑을 나눌 때의 그는 평소 냉랭하던 모습과는 정반대로 굉장히 열정적이었다. 게다가 집요하기까지 했다.
‘하아, 더워. 갑자기 왜 열이 나는 거지? 침착해야 하는데…….’
**
정각 9시. 세이란은 무도회장으로 이어진 중앙 계단으로 걸음을 옮겼다. 2층 계단 앞에 선 순간, 무도회장의 문이 열리는 게 보였다.
마지막 등장인 모양이었다.
무의식적으로 고갤 들어 무도회장 입구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세이란은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제길, 너무 예뻐도 문제군. 심장이 멎을 뻔했어.’
자신의 시선을 느낀 듯 키안이 중앙 계단 쪽으로 고갤 돌렸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자 긴장으로 굳어 있던 키안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게 보였다.
반쯤 넋이 나간 듯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에 픽 하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유스타나 제국의 황태자 전하께서 입장하십니다.”
시종장 아이크의 목소리가 무도회장을 울렸다.
그러자 키안에게 향해 있던 시선이 중앙 계단에 서 있는 자신에게로 향했다.
만족스러웠다. 귀족들의 시선이 키안에게서 떨어져서. 그는 조금 전 뜻밖의 진실을 알게 되었다. 자신은 키안을 바라보는 귀족들의 찬탄 어린 시선에도 질투를 느낀다는 걸.
세이란이 계단을 내려가자, 귀족들이 정신을 차린 듯 재빨리 허릴 숙여 예를 갖추기 시작했다. 귀족들의 행동에 키안 역시 고갤 숙였다.
평소의 냉철한 레녹스 공작과는 달리, 당황한 키안을 보자 자꾸만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키안 레녹스가 당혹스러워할 때도 있군. 사람들 앞에선 눈빛 하나 흐트러진 적이 없는데 말이야.’
세이란은 묘하게 만족스러웠다. 오직 자신만이 키안의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오늘, 귀족들 앞에서 키안의 손을 잡을 생각이었다.
세이란이 계단을 다 내려오자, 아센 공작이 그에게 다가와 고갤 숙였다.
“성대한 무도회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황태자 전하.”
“편히 무도회를 즐기시길 바랍니다, 아센 공작.”
“나이 든 신하의 주책쯤으로 여겨주십시오. 오늘 전하의 모습에 밤잠 설치는 레이디가 아주 많을 것 같군요. 허허허!”
세이란은 자신의 외모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는 아센을 보며, 고갤 끄덕였다.
“칭찬 감사합니다, 아센 공작.”
세이란의 우호적인 태도에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아센 공작이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귀족들이 앞다투어 인사를 건네왔다.
하지만 세이란은 그들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의 서늘한 기세에 눌린 귀족들이 재빨리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그러곤 그가 어떤 영애에게 가는지 숨을 죽이며 지켜보기 시작했다.
“렌스터 공작 영애일까요? 아니면, 테란국의 공주일까요?”
부채 뒤로 귀부인들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사실, 황태자인 세이란이 이번 사교 시즌에 황태자비를 간택한다고 발표한 순간부터 귀족들의 초미의 관심사는 첫 황실 무도회에서 황태자가 첫 댄스 상대로 누구를 지목하느냐였다.
뚜벅, 뚜벅.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는 가운데 무도회장엔 황태자 세이란의 발소리만이 들렸다. 그가 옆을 지나칠 때면, 한껏 치장한 레이디들이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무릎을 굽혀 예를 갖췄다.
“전하, 제 여식입니다. 기억하십니까?”
그때 렌스터 공작이 세이란에게 고갤 숙이며 말을 걸어왔다. 세이란은 자신의 길을 막아서는 렌스터 공작을 서늘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성 캐서린 수도원에 갔다고 하더니 돌아온 모양이군. 레이디 베로니카, 다시 봐서 반갑다.”
세이란이 렌스터 공작의 옆에 서 있는 베로니카에게 말을 건넸다. 그러자 베로니카가 드레스 자락을 쥐곤 우아한 자태를 뽐내며 예를 갖췄다.
“오늘 새벽 돌아왔습니다. 안부를 물어주셔서 감사합니다, 황태자 전하.”
순간 렌스터 공작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세이란이 베로니카를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자, 무척이나 기쁜 모양이었다. 마치 황태자비에라도 간택된 듯 눈을 빛냈다.
“그럼 충분히 무도회를 즐기길 바란다, 레이디 베로니카.”
그 말과 함께 세이란이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전하, 유스타나 제국의 무도회에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세이란은 자신의 앞에 허릴 숙인 헬로이즈를 보며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자꾸 자신의 앞길을 막아서는 이들로 인해,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세이란은 서늘한 눈빛으로 헬로이즈를 바라보았다. 길고 윤기 나는 갈색 머리카락을 한껏 위로 틀어 올려, 길고 우아한 목선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지난번 접견실에서 보았을 때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유스타나 제국의 무도회는 마음에 드는지 모르겠군. 그대도 충분히 즐기길 바란다.”
헬로이즈의 보랏빛 눈동자가 보석처럼 빛났다. 아름다웠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하지만 문제는 그의 심장은 그녀의 매혹적인 미소에도 불구하고 미동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황태자 전하께서 신경 써주신 덕분에 충분히 즐기고 있습니다. 무도회에 참석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셔서,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정치적으로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아는 여인이었다. 세이란 역시 책잡히지 않는 한도에서 헬로이즈에게 예를 갖췄다. 그러곤 그녀를 지나쳐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쳇, 또 한 번 내 앞을 막아서는 자가 있다면, 검으로 베어버려야겠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듯 세이란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 그러자 그에게 인사를 건네기 위해 대기 중이던 귀족들이 서늘한 냉기에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반면 귀족들과는 달리 레이디들은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냉기가 뚝뚝 떨어질수록 그는 묘하게 색스러운 분위기가 풍겼다.
암컷을 유혹하는 맹수처럼, 페로몬이 뿜어져 나왔다.
“왜 여기에 있는 거지? 나와 가장 먼 곳에 말이야. 일부러 날 여기까지 오게 할 심산이었나?”
다짜고짜 불만을 터뜨리는 세이란을 보며, 귀족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두 사람을 지켜봤다.
거만하고 인정머리라곤 없는 냉혹한 황태자가 마치, 눈앞에 서 있는 여인 때문에 일부러 이곳까지 온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황태자를 움직이게 하는 레이디가 있었다니. 믿을 수 없군.’
귀족들은 새삼스러운 눈빛으로 릴리스 프로필리아를 바라보았다.
첫 데뷔여서인지 긴장한 얼굴로 서 있었지만, 그 여린 모습조차도 굉장히 아름다웠다. 특히 황태자인 세이란과 마주 서 있자, 그녀의 신비롭고 청초한 아름다움이 더욱 두드러졌다.
‘설마 황태자에게 연인이 있었던가?’
하지만 불가능했다. 지금까지 세이란은 국경 지방에서 테란국과 전쟁 중이었다. 전쟁 중에 그런 일이…….
“죄송합니다. 무도회에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아이크가 말해주지 않았나? 중앙 계단 앞에 서 있으라는 명령 말이다.”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곳에 제가 있어도 되는지 판단을 내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서 있었다는 것이냐?”
세이란의 물음에 키안이 긴장한 표정으로 고갤 끄덕였다. 최대한 눈을 커다랗게 뜨곤, 잔뜩 겁을 먹은 듯 순진한 표정을 지었다.
“가난한 시골 영주의 딸인 제가 어떻게 감히…….”
키안이 뒷말을 흐리자, 세이란의 입가가 씰룩이는 게 보였다. 분명 웃음을 참고 있는 것이었지만, 귀족들의 얼굴엔 화를 참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모양이었다.
그가 손을 뻗어, 턱을 붙잡았다. 귀족들이 보는 앞에서 그에게 턱을 붙잡히자, 괜스레 긴장이 됐다. 입안이 바짝 마르는 느낌에 입술을 축이자, 찌푸렸던 그의 얼굴이 더욱 싸늘해졌다. 세이란이 목을 가다듬더니, 조금 전과는 달리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내 말을 거역했다는 건가? 유스타나 제국의 황태자의 명을 말이다.”
키안은 재빨리 세이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전하. 제가 무도회에 참석하는 건 처음이라 모든 게 서툽니다. 그리고 사람이 너무 많아, 겁도 나고 또 부끄럽기도 해서…….”
키안이 잔뜩 겁먹은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눈가며 입이며 경련이 일 것 같아.’
키안은 평소와 달리 한껏 눈매를 내리며 강아지 같은 얼굴을 하기 위해 노력했다. 어젯밤 세이란은 자신에게 레녹스 공작과는 정반대의 이미지를 연기해야 한다고 했다. 그 결과, 키안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기절을 밥 먹듯이 하는 레이디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런 것치곤, 꽤 대담하게 꾸미고 왔군.”
마치 품평이라도 하듯 세이란의 시선이 노골적으로 키안의 모습을 훑어 내렸다. 특히 평소와 달리 훤히 드러난 목선에 그의 시선이 닿았다.
“감사합니다, 전하.”
“너에게 묻고 싶은 게 있다.”
“뭐든 말씀하십시오. 답하겠습니다.”
키안은 마른침을 삼켰다. 대체 무슨 질문을 하려는 것인지 긴장이 됐다.
“지금도 내가 잘생겼다고 생각하나, 릴리스 프로필리아?”
“네에?”
키안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다 귀족들의 시선을 의식하곤 재빨리 고갤 숙였다.
‘이건 또, 무슨 말이지? 이런 질문을 할 것이란 말은 없었는데.’
어젯밤 세이란은 자신은 국경 지대에 위치한 작은 영지를 가진 자작의 딸이고, 숲에서 그를 도운 것이 인연이 되어 만났다고만 했었다.
자신이 그에게 첫눈에 홀딱 반했다는 내용은 전혀 없었다.
“그게 그러니까…….”
“지금은 아닌 모양이군. 은빛 늑대의 숲에서 덫에 걸린 날 도와주었을 때, 분명히 그대가 혼잣말하는 걸 들었거든. 내가 숨이 막힐 정도로 잘생겼다고 했었지. 평생 나처럼 잘생긴 사람은 처음이라고 말이야.”
키안의 얼굴이 붉어졌다. 마치 사실인 양 거짓말하는 그를 보며, 키안은 자신이 선수를 쳤어야 했다고 후회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먼저 전하께서 내게 홀딱 빠진 걸로 말을 했어야 했는데.’
뒤늦은 후회였다. 이미 자신은 유스타나의 귀족들 앞에서 그에게 홀딱 빠져 물불 안 가리고 고백한 레이디가 되었다.
“저는…….”
키안은 입이 떨어지지 않아, 마른침만 삼켰다. 귀족들이 보는 앞에서 오글거리는 대답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자, 발바닥이 간질거리는 느낌이었다.
‘제길, 될 대로 되라지. 어차피 난, 전하께 첫눈에 반한 여인이야. 쉽고, 자연스럽게 말하면…….’
됐다. 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힘들었다.
“실망이군. 마음이 변한…….”
세이란의 목소리에 키안이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곤 최대한 우아하고, 당당하게 고백했다.
“지금도 잘생겼다고 생각합니다. 눈을 뗄 수가 없어서, 심장이 멎는 줄 알았습니다.”
황제의 독사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