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헥센야크트-139화 (139/186)

역습의 장(5)

5.

아무 것도 없는 창공에서 뭔가가 나타나는 건, 동서를 막론하고 불길한 현상으로 치부된다.

더욱이 하필 등장한 게 용을 닮은 벌레 마물이라면 더더욱 끔찍할 것이리라.

그것은 지상의 사냥꾼이 바라보기에, 표정을 관리하기 어려울 정도의 재앙이었다.

‘여기까지 와서 소환이라고? 빌어먹을 마녀 같으니, 진짜 이런 마법 같은 일이 가능할 줄이야···.”

로이드는 이 이상 사태가 어디까지 악화될 수 있을까 궁금해질 지경이었다.

이제 의기양양한 쪽은 포박당한 홍련이었다.

“왔구나, 아란듀라! 이 예쁜 것! 네 주인은 빌어먹게 싫지만, 역시 너만은 미워할 수가 없다니까! 딱 필요할 때 나타났어! 언제나 말을 잘 들어서 좋아!”

홍련의 찬사에 화답하듯, 괴물은 아가리를 쩌억 벌렸다.

구동할 수 있는 최대한 가로 턱을 펼치자, 그것은 장성한 사내의 키의 너댓 배는 되어 보일 정도가 되었다.

몸의 너비만 해도 건물 하나를 익히 파먹기에 충분해보였다.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는 오거급 중합체.

이 정도로 큰 덩치라면 가공할 분량의 마기가 필요할 것이 틀림없을 터···.

그러나 아래로 쭉 늘어진 놈의 긴 꼬랑지가 균열과 이어져있어.

사역마는 이를 통해 다른 공간에서 마기를 공급받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과연, 육망성··· 그냥 잡혀주진 않는단 건가?”

감탄하는 척 허심탄회하게 내뱉지만, 로이드는 표정으로 드러나는 혐오감을 숨길 수 없었다.

‘뭘 어떻게 하면 꼬라지가 저 모양이지? 사역마의 재료는 분명 인간의 몸뚱이가 아니었냐고!’

외견만 보아선 사람의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

저 뒤틀린 이형에서 느껴지는 것은 오직 창조한 자의 정신 나간 세계관뿐이었으니···.

“하하하! 우리 귀염둥이를 보고 넋이 나가셨나봐, 꺽다리 씨?”

“귀염··· 뭐? 너희 마녀들의 미적 감각은 어지간히도 쳐 돌아 있나 보구만?”

“후후, 대화로 시간을 끌려 해봐야 소용없어. 이미 늦었으니까.”

“그 입 닥쳐. 내 딴엔 궁리하는 중이거든. 네 년을 어떻게 구워삶을지 말이야!”

“하! 말투에서 익살이 사라졌네? 초조해졌어?”

“···젠장!”

로이드는 이를 갈았다.

달리 무슨 수가 없단 말인가?

마음 같아선 홍련의 사지를 찢어놓고 싶어.

하지만 그랬다간 자칫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진다.

그녀가 품고 있는 불꽃의 아스트랄이 강제적 억지력으로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녀를 죽이면 모두가 잿더미가 되고 만다.

빅터가 허튼 소릴 할 리가 없었기에, 로이드는 전적으로 그 사실을 믿고 있었다.

“고오오오오!”

“아아, 이리오렴! 아란듀라! 이쪽이란다!”

로이드가 망설이는 사이, 어느덧 중합체의 그림자가 지상에 더욱 짙게 내리깔렸다.

쿠과아아앙!

놈은 그대로 마녀가 선 자리를 향해 주둥이를 처박았다.

“크윽!”

아슬아슬했다.

서둘러 땅을 박차고 뒤로 물러난 덕에 로이드는 덮쳐드는 중합체에게서 가까스로 벗어날 수 있었다.

“아닛?!”

하나, 필사적으로 거리를 벌리면서도 로이드는 자신의 눈앞에서 펼쳐진 광경을 의심했다.

자기가 불러낸 중합체에게, 지금 막 홍련이 잡아먹혀 버렸기 때문에···.

“고오오오!”

적발의 마녀를 위장 속으로 집어 삼키자마자 벌레 마물은 고개를 치켜들었다.

다시금 입이 전개되었어.

이번에 향한 곳에는 아니나 다를까, 빅터와 교전 중인 청람이 있었다.

“사냥꾼을 상대하는 건 그쯤 해! 서두르란 말이야, 망할 신입!”

재촉하는 특유의 말투는 홍련이었다.

놀랍게도 그녀의 목소리는 벌어진 벌레의 입안에서 증폭되어 흘러나오고 있었다.

“···쳇, 어쩔 수 없군요.”

번쩍!

청람이 날카로운 시선을 향하자 비로소 마지막 벼락이 친다.

이 순간, 그녀는 그것으로 자신이 대동했던 적란운의 사역마들을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

“지금이에요, 홍련 언니!”

“옳지!”

빅터가 최후의 전격을 흘려보내는 잠깐의 틈을 노리고, 거충이 청람을 덮쳤다.

그때, 푸른 머리의 여인은 마물의 급습을 거부하지 않았다.

오히려 양팔을 벌리며 벌레의 위장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대체 무슨 수작이지?

로이드는 혼란스러웠지만, 빅터의 눈만큼은 마녀들의 속셈을 간파하고 있었다.

“요란하게 불러낸 것 치곤 추하군. 기껏해야 도망질인가?”

그랬다.

홍련이 아란듀라라고 부른 이 거대한 벌레는 애초에 전투용 중합체가 아니야.

그 주된 목적은 이동수단.

오로지 수송에 특화된 사역마였던 것이다.

“육망성이라 자처하던 것 치곤 시시하군. 수치를 모르는 마녀 계집들 같으니. 둘이서 달려 들어 놓고, 이제 와서 내 빼시겠다? 내가 그렇게도 두려운가?”

빅터의 노골적인 악담에 벌레형 중합체가 알기 쉽게 반응했다.

놈은 잠시 흠칫하더니, 곧 청람의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도끼를 든 사냥꾼이여. 이 굴욕은 다음에 기필코!”

“시끄러, 청람! 그딴 그럴싸한 대사나 늘어놓을 때가 아니야!”

“하, 하지만!”

“저 사내는 위험해.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가 멈칫하는 걸 노리고 있다고! 어서 벗어나야해. 그러니까 바로 돌아갈 거니까 입이나 싸 물고 있어!”

“치잇···.”

두 명의 마녀를 입 안에 넣은 중합체는 곧장 하늘로 날아오를 준비를 마쳤다.

흉물스런 머리를 수직으로 들고, 자기가 나타났던 균열을 향해 상승···.

거리가 벌어지는 것은 순식간이야, 빅터나 로이드가 급히 달려갔지만 때는 이미 너무 늦은 뒤였다.

“멈춰! 이 썩을 년들! 돌아오라고!”

하늘을 노려보며 로이드는 분통을 터뜨렸다.

“제길, 제기랄!”

평소의 느긋하기만 하던 태도와는 사뭇 다른 모습.

어울리지 않게, 그는 이 순간 진심을 다해 감정을 토해내고 있었다.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가?

신세를 진 빌헬미나의 복수를 끝내 마치지 못한 것 때문에?

아니면 육망성을 쓰러뜨렸다는 경력에 자신의 이름이 들어갈 기회를 놓친 까닭으로?

‘이래선··· 이딴 식으로 끝나버리면! 너무 하지 않냐고!’

아니, 아니었다.

로이드가 격노한 이유는 달리 있었다.

그것은 바로 빅터 때문이었다.

‘덩치는··· 빅터 자식은 대체 뭘 위해 그 긴 시간을 버린 거냔 말이야!’

지나가버린 시간은 돌아오지 않는다.

당연히 빅터가 소모한 세월도 이제 주워 담을 순 없다.

자그마치 오 년.

빅터가 시공을 초월한 시간.

가뜩이나 고통뿐인 여생이 더욱 줄어버렸다.

‘결코 짧지 않아. 빅터 자식에겐 벅찰 정도의 희생이라고. 그런데···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마녀를 놓치다니!?’

사실 빅터는 잘 해주었다.

그 역할을 충분하다 못해 넘칠 정도로 잘 수행해주었다.

로이드로선 상상조차 못할 경지.

빅터는 이미 마녀가 가장 위협적인 이유인 마법마저 무효화시키는 수준까지 이르렀다.

명실공이 최강의 사냥꾼.

언젠가 대스승 크레이가 말했던 대로야.

그는 과거에 없던 영웅으로 성장했다.

모든 마녀가 두려워하기에 충분한 반격자로서 절대적인 위상을 가지게 된 것이다.

하지만···.

‘무력한 건··· 내 쪽이다!’

청람의 번개에 로이드는 속수무책이었다.

뻔히 홍련이 사역마를 불러낸 것에조차 대처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빅터가 치룬 가혹한 대가에 조금도 도움을 주지 못한 것이다.

로이드는 그 사실을 도무지 참을 수가 없었다.

‘한 놈이라도, 마녀 하나라도 여기서 떨어뜨려야 해!’

빅터가 아슬아슬한 한계까지 자신을 밀어붙인 까닭은 일행들 때문.

로이드 자신을 포함해서 나머지 두 제자가 너무도 약했던 탓.

빅터는 동료를 지키기 위해 희생을 결단한 것이나 다름없어.

그 답답할 정도의 우직함에 로이드는 이제 웃음조차 나오지 않을 지경이 되었다.

‘단순무식한 빅터 자식이 여기서 더 무리하게 내버려 둘까보냐!’

로이드는 증명해야만 했다.

자신이 의지할만한 전우라는 사실을.

가혹한 운명을 빅터 혼자서만 짊어질 필요가 없다는 걸.

그렇기에 최소한 로이드는 당장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해야만 했다.

“체, 죽이 되던 밥이 되던 해볼 수 밖에 없구만!”

“로이드, 뭘 하려는 거지?”

“헤, 넌 지켜보기만 하라고. 이럴 때를 위해서 숨겨둔 비장의 기술이 있으니까!”

로이드는 오른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그것은 사냥꾼이 이븐 가지의 분말을 최대한 끌어내기 위한 자세였다.

일점집중.

풀어 헤친 은사는 단 한 줄기.

그곳에 힘의 흐름을 모아 집중한다.

그리하면 응축된 그림자의 파동이 뻗어나가, 다소 거리가 멀어졌다고 해도 아직이라면 어떻게든 닿으리라.

‘정신 차려라, 나! 전엔 천리나 되는 거리까지 휘감은 적도 있잖아? 이건 그 응용에 불과하다고. 즉, 이론상 가능해. 아니, 되고도 남아!’

비록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실험해 본 적이 없는 기술이긴 했으나···.

“거기까지다. 너무 무리하지 마라, 로이드.”

“무리는 얼어 죽을! 이 정도는 이 천재 로이드님에겐 아무 것도 아니란 말이다!”

“앞으로 10초 뒤, 그 시도는 실패한다.”

“하?”

“은사가 견디질 못하고 터져버리지. 힘이 역류할 거다. 오히려 네 양손만 재기불능 될 뿐이야.”

“그, 그래도 해보기 전까진 모르는 일이잖아?”

“소용없다. 아직 네 힘으론 무리야.”

“이 자식이···.”

로이드가 버럭했지만, 빅터는 그저 미래에서 본 것을 있는 그대로 말했을 뿐이었다.

“그만. 너의 심정은 충분히 잘 알고 있다.”

“아, 그러시겠지? 너는 그 잘난 암안으로 흘겨보기만 해도 내 머릿속을 전부 읽어버릴 테니까!”

“로이드.”

퍼억!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로이드의 주먹이 빅터의 가슴팍을 강타했다.

하지만 미동도 없어.

빅터는 약간의 주춤함이 없었다.

아픈 것은 로이드의 손목 뿐이었다.

“···개자식아, 나도 무모한 짓거리란 건 알아. 하지만 하게 해달라고··· 제길, 언제까지고 너만 앞세우면 선배 체면이 말이 아니란 말이야!”

“네가 책임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이건 전부 나 스스로가 한 선택이니.”

“까불지 마, 임마! 네가 그딴 식으로 나오면 면목이 없다고! 레이나 클라르테 아가씨, 크레이그 영감탱이한테 뭐라고 해야 하냔 말이다!”

“잃는 건 나만으로 충분하다.”

“···뭐?”

“걱정마라. 두 눈뜨고 놓치진 않을 테니.”

그때, 빅터는 로이드의 어깨를 잡고 거칠게 잡아 당겼다.

압도적인 완력에 휘둘린 로이드가 엉덩방아를 찧자, 빅터는 즉시 선수를 쳤다.

“야, 너···.”

로이드가 목소리를 삼켰다.

그의 눈앞에 모습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짙은 검은 연기가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이 경우, 그릇이 다르다고 해야 하는가?

빅터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이븐 가지의 분말은 상상을 초월했다.

한낱 개인이 가질 수 있는 감정의 크기를 아득히 넘어섰어.

그가 품고 있는 울분은 가히 측정이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하아아···.”

땅 아래에 희미하게 새겨진 실루엣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다.

그것은 흑색의 연막을 집어 삼키며 점점 더 몸집을 불려나갔다.

열 배.

아니, 스무 배.

산등성이마저 가려버릴 정도로 비대해진 빅터의 분신이 지금 막 대지에 섰다.

땅거미Schatten의 거인.

그것은 체體의 유파가 도달하는 비기의 정점.

대량의 가루를 소모해서 덧씌우는 최강의 오의.

바로 심록과 싸웠을 때 대스승 베누다가 보여줬던 것을 토대로 빅터가 독학으로 완성시킨 기술이었다.

“빅터, 너는 어디까지···.”

로이드는 숨이 다 막혔다.

빅터가 더 얼마나 큰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인지, 그 미래가 도무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기에.

하나, 그를 지켜보는 동료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냥 보내진 않겠다.”

부우웅!

강렬한 풍압이 언덕을 가른다.

빅터가 만들어낸 거인의 오른손에 쥐여진 것은 그에 어울리는 크기로 전개된 도끼···.

모든 사념을 해방시켜 증폭된 유성의 파편이 허공을 갈랐다.

“고오오오!”

일도양단一刀兩斷.

단지 그것만으로도 하늘이 찢긴다.

구름의 무리가 갈라지고, 선명한 쪽빛을 만들어냈다.

그 참격에는 중합체가 나왔던 균열마저 흐려지게 만들 정도의 위력이 담겨져 있었다.

후두둑···.

지상으로 지저분한 파편이 내린다.

산산조각으로 찢겨나간 중합체의 내장과 살덩이들이었다.

“···후.”

깊이 내쉬는 한숨.

이윽고 거인의 그림자가 형상을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검은 가루가 순식간에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위풍당당한 뒷모습의 사내만이 남았다.

“빅터···.”

“미안하군, 로이드. 끝까지 내 멋대로 해서.”

“됐네, 망할 자식아. 이미 이렇게 된 거 뭘 어쩌겠어? 그보다··· 해낸 거냐?”

두 마녀를, 육망성을 해치운 것인가?

···라고 묻기엔 차마 입이 떨어지질 않아.

로이드는 그대로 말문은 닫았다.

빅터의 홀가분한 태도가 모든 걸 말하고 있었기 때문에···.

“놓쳐버렸다.”

“역시 그랬냐···.”

실패다.

어떤 원리인지는 몰라도, 마녀가 사역마에게 먹힌 시점부터 전송이 시작된 모양이야.

그들은 중합체와 연결된 꼬리 부위를 통해 공간 저편으로 사라진지 오래였다.

“···이건 우리가 진 거지?”

“그렇게 생각하나?”

“이 난리를 피웠는데 얻은 것 하나 없어. 특히나 너는···.”

로이드는 빅터의 가루가 지나치게 소모된 것이 염려되었다.

아무리 타인에게서 감정을 파동을 받아들이는 그일지라도, 인간을 초월한 힘을 언제까지나 무한하게 쓸 수 있을 리 만무했기에.

더욱이 내색하지 않았지만 빅터의 상태는 심각했다.

예지 능력을 남용한 탓에 뇌혈관이 많이 파열되었어.

당분간은 어떤 능력도 쓰지 못할 정도로 망가져버렸다.

조금만 늦었어도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넜을 지도 모를 일···.

하지만 빅터는 당장 두통을 억누르며, 애써 피식 웃어보였다.

“그걸로 된 거다.”

“되긴 뭐가···.”

“아무도 죽지 않았다.”

“너 설마···.”

불공평하게도, 로이드는 이 덩치가 뭘 생각하는 지 알 수 없었다.

처음부터 그의 목적은 두 마녀의 숨통을 끊는 게 아니었나?

희생자를 만들지 않는 싸움.

단지 그런 이유로 빅터는 이토록 필사적이었단 말인가?

‘···아냐, 돌이켜보면 이 자식은 처음부터 이랬지.’

모두를 구하기 위해서라면 자기 인생의 수년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희생하는 면모···.

이제 와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빅터는 그런 자였기에.

때로는 무모하게 돌진해서 걱정만 되는 동생 같으면서도, 어쩔 때는 든든한 맏형의 면모를 보이곤 했다.

로이드는 생각했다.

빅터의 정체성은 이제 사냥꾼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지만···.

그만큼이나 복수자가 어울리지 않는 이는 드물 것이라고.

분노와 증오만으로 살아가기에, 빅터는 너무도 이타적인 인간적이었던 것이다.

“···사부! 빅터 사부!”

쾌활한 목소리.

로이드가 궁리하는 사이, 리리 리가 한껏 들뜬 얼굴로 뛰어들었다.

소녀는 그대로 빅터의 허리춤에 안겨 얼굴을 비볐다.

“저요, 저요! 사부가 말씀하신 대로 한 명도 안 놓쳤어요! 다 합쳐서 다섯! 전부 처리했어요!”

“그래. 잘 해주었다.”

“헤헤.”

“그리고 아랑.”

“앗!”

소년이 계단을 통해 고개를 내밀자 마자, 어떻게 알았는지 빅터가 그의 이름을 불렀다.

아랑은 희나를 마을 사람들에게 맡기자마자 바로 되돌아온 상태였다.

그는 소년의 곁으로 다가가더니 대뜸 머리 위에 손을 올렸다.

“애썼다. 내가 지시한대로 잘 해주었구나.”

“저는 도망치기만 했을 뿐인데···.”

“살아남았으면 그걸로 족하다. 그리고···.”

“네?”

“기뻐해라. 이번에 너는 지켜냈다.”

“지켜···요?”

“네가 이끈 하얀 무당말이다. 너의 용기가 그 누나를 살린 거다.”

반복된 예지의 플래시 백 속에서, 빅터는 희나가 몇 번이나 살해되는 모습을 보았다.

그녀의 최후는 비참해.

겁을 집어먹고 끝내 달아나지 못해서···.

싸움에 휘말려 목숨을 잃는 운명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변화했다.

소년이 각오를 굳힌 순간, 희나의 손을 이끌고 함께하기로 다짐한 시점부터 미래가 바뀐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실질적으로 희나를 구한 건 아랑이었다.

‘지켰어? 내가?’

그 전말을 전해듣자, 소년이 어깨가 떨리기 시작했다.

어째서일까?

순간 아랑은 자신의 눈가가 뜨거워짐을 느꼈다.

동생을 잃고, 친모였을 지도 모를 누이에게 버림받은 이후로 분명 다신 울지 않으리라 맹세했을 것을···.

“자부심을 가져도 좋다, 아랑.”

“···네.”

“앗, 치사해요! 빅터 사부, 저는요! 왜 저한텐 살갑게 안 해주시고, 아랑만?”

“리리 리. 너에겐 방금 전에 칭찬해주었잖느냐?”

“한참 부족해요! 왜냐면, 왜냐하면··· 제가 더 많이 죽였으니까!”

“···.”

얼굴에 혈흔을 남긴 채 눈을 번뜩인다.

소녀의 눈동자에는 뭔가 형용하지 못할 감정이 맴돌고 있었다.

잔뜩 날뛰고 나서도 해소하지 못해 잔존하는 광기의 색깔.

그것은 흡사 피에 취한 쾌락 살인마의 정욕에 가까운 것이었다.

리리 리에겐 이런 일면이 있다는 걸, 빅터는 실로 오랜만에 실감했다.

“리리 리, 그건···.”

뭐라고 해주면 좋을까?

마녀 사냥꾼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아이에게 살인이 나쁘다고 어떻게 설명해야 한단 말인가?

빅터가 망설이는 사이, 로이드가 끼어들었다.

그는 리리 리의 양 어깨를 잡고 빅터에게서 때어놓더니.

“꼬마 아가씨. 너는 분위기 파악하는 것부터 배워야겠구나.”

“아얏!”

“자리를 피해줘야지. 다음 손님 차례가 왔으니.”

“손님?”

“저길 보셔. 아주 우르르 몰려왔잖아.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눈치인데?”

“어? 관군 언니야랑 그 부하들이네?”

로이드가 실실거리며 턱 끝을 한쪽으로 향한다.

그리고 그곳에는 한 무리의 대표자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빅터는 맨 앞에 나온 소녀의 이름을 불렀다.

“시안. 아까부터 왜 그러고 있지?”

“···빅터 선생님께 예를 올립니다!”

“뜬금없군.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나?”

“지, 지금까지 저희들의 무례를 용서해주십시오!”

시안의 태도가 지나칠 정도로 돌변했다.

지금 막 선보인 빅터의 싸움을 지켜보고서 뭔가를 깨달은 것일까?

“이 모든 건 통솔자인 제 책임입니다. 진짜 고수를 알아보지 못한 제 하찮은 안목 탓이죠. 하나, 뒤늦게라도 선생님의 진짜 힘과 기술에 탄복한 바··· 부디 부족한 저와 동료들을 이끌어 주시길 바랍니···.”

푸훕!

···하고 로이드가 뿜어버리자, 시안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동공이 흔들리고 입술이 물결친다.

부끄러워 죽을 것만 같은 얼굴.

하지만 그것은 시안이 처음으로 보인, 또래 소녀에 어울리는 생기 있는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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