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습의 장(4)
4.
아버지.
대스승 크레이그.
빅터가 그 이름을 입에 올릴 때마다, 청람의 태도에 일약 변화가 생겼다.
느껴지는 감동의 파동은 불안정하다.
더욱이 마음의 장벽이 두텁다.
육망성급의 마녀가 가진 정신력이 보통이 아니야, 때문에 빅터의 정심감응 능력으로도 그 본심까지 파악할 순 없었다.
허나, 미약하게나마 느껴진다.
귀찮은 일에서 벗어나고픈 욕망과 더불어 주목을 바라는 모순이···.
그것은 스스로조차 받아들이지 못하는 원망의 감정.
흡사 어린애의 칭얼거림에 가까운 뭔가였다.
“솔직하지 못한 아이로군.”
“···무슨 소리죠?”
“시치미 땔 것 없다. 이미 다 알고 있으니까.”
“뭘 다 아는 척 지껄이는 겁니까? 실성이라도 했나요, 사냥꾼?”
“너는 내 능력에 대해서 별 관심이 없지. 네가 화가 난 까닭은 그저 잊고 싶은 가정사를 떠올리게 만들었기 때문이 아닌가?”
“···.”
“그렇게나 아버지의 근황이 신경쓰이나?”
“대화는··· 여기까지 하죠.”
냉정과 냉철로 꾸며진 거짓 가면에 금이 간다.
청발의 여인은 입가를 일그러뜨리더니.
“번개여Blitz···!”
마법의 시동어.
그것은 사역마에게 입력된 특정 행동의 방아쇠였다.
하늘을 가득 매운 뇌운들이 갈라진다.
여러 조각으로···.
무수한 수로 쪼개졌다.
“청람, 이 멍청한 계집애가!? 쑥대밭을 만들 셈이야? 여긴 아직 나도 있단 말이···.”
“제 알바 아니랍니다. 하나 남은 목숨이 아깝다면 알아서 피하시던가요.”
“치잇, 더 이상 못 어울려주겠네! 나는 갈 거야! 너는 여기서 살아! 질릴 때까지 사냥꾼들이랑 놀라고! 너 따위 여기서 어찌되든 내 알바 아니니까!”
“그러시죠. 홍련 언니가 당해내지 못한 사냥꾼은 제가 처리해놓을 테니.”
“이··· 이게!”
차마 상대가 나빴을 뿐이라고 변명을 늘어놓진 않는다.
홍련은 잠깐 분한 마음이 들었다가도, 자신을 속수무책으로 농락했던 빅터의 힘에 대해 떠올렸다.
‘···잠시만, 이거 어쩌면 잘 풀릴 지도 모르겠는 걸?’
도끼를 든 사냥꾼은 강하다.
역량에 끝이 보이질 않아.
마녀로 살아온 수 십 년의 세월 중에서 손에 꼽을 만큼 두려움을 느꼈다.
단순히 마기를 무효화 시키는 것에 그치지 않고, 무서울 정도의 단호함과 행동력을 가지고 있었다.
더욱이 홍련의 모든 행동을 미리 예상하기라도 하듯 움직이는 기이한 전술까지···.
‘머리가 맑아지니 이제야 좀 이해가 되네. 왜 여태 몰랐지? 이거 그거잖아. 이 마을의 무녀가 가지고 있다던 힘··· 예지인가 뭔가 하는 그···.’
치사해.
비겁하다.
사냥꾼 주제에 이능력이라고?
마법을 무효화하고, 미래까지 예측한다면 사기나 다름없지 않은가?
그러나 두 눈으로 직접 본 현실을 부정할 순 없다.
심심풀이 상대로만 여겨온 사냥꾼의 무리에서 과거에 없던 호적수가 나타났음을···.
“···후, 후후. 후후후!”
홍련은 비위가 상해서 위가 느낌이었지만, 곧 다시 미소를 되찾았다.
마치 아이와 같은 장난기 가득한 웃음이었다.
‘청람, 이번엔 네 차례야! 내가 당했던 굴욕··· 너도 어디 한 번 느껴보라고!’
도와줄 생각은 일말도 없다.
오히려 숨통이 끊어지길 바라.
심지어 이 순간만큼은 사냥꾼을 응원한다.
홍련은 가능하면 청람이 이 자리에서 난도질당하길 간절히 원했다.
“기분 나쁘게 뭘 히죽거리는 거죠? 상황 파악했으면 얼른 그 얼빠진 얼굴부터 숨기시지.”
“흥, 네가 말하지 않아도 그럴 거야. 앞뒤 안 가리는 무식한 계집애야!”
폭발로 모든 걸 날려버리는 게 주특기인 마녀가 할 소리는 아니었지만, 지금 청람의 행동은 홍련이 질겁할 정도로 위험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창공에 잔뜩 드리워진 구름들은···.
각자마다 번개의 씨앗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뇌우Gewittersturm!”
번쩍!
수 십 갈래의 벼락이 친다.
전방위 연사.
그것은 대처가 불가능한 천공에서 뻗어 나왔다.
대낮에도 눈이 멀 정도의 찬란한 번개가 지상에 몇 번이나 떨어졌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빅터가 있었다.
“빅터어어어!”
로이드는 아차 싶었다.
제아무리 마기의 농도를 옅게 만든다 한 들···.
도끼를 피뢰침 삼아서 낙뢰에서 벗어난다고 해도 이래선 피할 방도가 없지 않은가?
그러나 로이드의 절규는 닿지 않았다.
뒤늦게 울린 천둥이 목소리를 완전히 지워버렸기 때문이었다.
“어머나, 제가 너무 심했던 걸까요?”
염려하는 듯 말하지만 청람의 입가가 웃고 있다.
그녀는 새카맣게 타버렸을 빅터의 주검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킥, 키킥!”
옆에서 지켜보던 홍련이 실소를 더뜨렸다.
뭐가 우습냐고 청람이 돌아보자, 적발의 여인은 좋아 죽을 것만 같은 표정을 짓더니.
“큰 소리 치더니, 너도 별 거 없네?”
“···뭐라고요?”
바닥에 자욱하게 연기가 피어나, 머지않아 위로 튀어 올랐던 대량의 흙먼지가 지상으로 떨어진다.
빅터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산산조각이 난 것인가?
형태도 남기지 않고 사라지고 말았나?
아니, 어느 쪽도 아니었다.
번개가 만들어낸 고열의 증기 사이에서 불현 듯 안광이 빛을 발한다.
동시에 활짝 펼친 커다란 손바닥이 튀어나왔다.
“컥!”
우람한 왼팔이 청람의 목을 낚아챘다.
무게를 전혀 느끼지 못하기라도 하는 듯, 그대로 들어올렸다.
“어, 어떻···게?”
믿을 수 없다는 듯 청람이 읊조린다.
연약한 피와 살을 가진 인간이···.
몰아치는 벼락의 폭풍 속에서 살아남았다고?
험상 굳은 얼굴이 살짝 그을리긴 했지만, 전반적으로 큰 상처는 보이지 않는다.
‘불사신?’
그게 아니라면 설명할 길이 없다.
청람은 그렇게 현실에서 벗어난 추론을 머릿속으로 정립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혼란을 읽은 빅터가 단호히 부정한다.
“나는 죽었었다. 몇 씩 번이나.”
“그, 그게 무슨···.”
타들어간 옷감이 급박했던 순간을 보여준다.
하지만 빅터의 육신은 무사했다.
그가 받은 충격이라곤, 고작해야 귓가에 퀭하게 울리는 이명 정도뿐이었다.
“있을 수 없···.”
으득.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가공할 악력이 엄습해, 청람의 목뼈가 으스러졌다.
퍼억!
빅터는 축 늘어진 여인의 몸을 바닥에 내팽개치고, 남겨진 머리를 발로 터뜨려버렸다.
이어서 덩치 큰 사냥꾼은 오른팔을 들어올린다.
언제 다시 회수한 것일까?
그의 손아귀에는 바닥에 던져둔 도끼가 어느새 되돌아와 있었다.
놀랍게도, 심지어는 녹아 문드러진 날마저 원상 복구가 된 채로···.
“···크흠.”
빅터가 짧게 신음했다.
갑자기 엄습하는 가공할 두통 탓이었다.
불에 달궈진 쇠꼬챙이를 머릿속에 박아 넣고 인정사정없이 휘저으면 이런 느낌이 들까?
‘여기까지가 한계인가?’
빅터는 뇌를 너무 혹사 시켰다.
인간에게 허용된 힘에서 아득히 넘어선 부하가 걸린 것이다.
내색하진 않았지만, 빅터는 두개골 안에서는 가벼운 뇌출혈이 일어나는 중이었다.
하나, 빅터는 좀 더 무리해야할 상황이었다.
위기는 아직 끝난 게 아니었으니.
“···!”
파앗!
빅터가 현기증에 고개를 숙인 사이, 다시 하늘이 빛났다.
술자인 청람이 머리를 잃었음에도 적란운의 사역마가 공격을 감행한 것이었다.
마녀는 자신이 행동불능이 되었을 때를 상정하고 있었다.
만에 하나 통제권이 끊어졌을 때, 적과 함께 자신의 몸까지 날려버리라고···.
사람의 사고는 빛과 같다고 흔히들 이야기하지만···.
통상적으로, 인간의 반응속도는 0.1초에 머문다.
잔뜩 긴장된 상태로 만전의 준비를 하고 있다 하더라고···.
소리에 자극된 인간이 청각신호가 활성화하기 까지 0.08초.
근육이 반응하기까지는 아무리 빨라도 0.02초는 걸린다.
어느 쪽이든 찰나의 순간.
이렇게 나열해두면 일견 빨라 보이지만···.
불행히도 천둥이 도달하는 시간은 초속 343미터.
나아가선 뇌속雷速은 시속 360,000,000킬로미터에 육박한다.
여러 갈레의 계단처럼 뻗어나가는 번개의 방전은 지상에 고열을 발생시켜.
낙하 지점에는 기체가 팽창되며 충격파가 동반되고, 그 중심부의 온도는 수 만도쯤 가볍게 돌파해버린다.
즉, 피할 수 없다.
인지를 넘어선 속도로 내리꽂히는 뇌격의 영향권에서 벗어나는 것은 원천적으로 무리.
사람의 몸으로는 회피가 불가능하다.
그 좁은 틈에서 열기나 충격파, 잔류 전기가 미치지 않는 영역을 찾을 수 있을 리가 없···.
‘할 수··· 있다!’
그때였다.
섬광 속에서 빅터가 걸어 나왔다.
무슨 조화인가?
어떤 기적이 발동한 것인가?
···아니, 그것은 어디까지나 의지의 발현.
빅터가 가진 근성, 불굴의 정신적이 만들어낸 돌파구였다.
최초의 시도는 실패였다.
벼락 속에서 빅터는 타죽었다.
몇 번이나 죽음을 경험했다.
전류에 전신이 노출되어 혈관과 중요 장기가 터뜨려져 즉사.
충격파에 휘말려 사지가 찢겨서 사망.
운 좋게 플라즈마에서 벗어난다 해도 순간적으로 끓어오르는 오만 도의 불길에선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나 빅터는 찾아냈다.
반복되는 고통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
무수한 가능성의 관측에서···.
단 하나 존재하는 회생의 한 걸음을!
“···이건 말도 안 돼.”
낙뢰에 찢겨진 육체를 재생하며, 반쪽짜리 얼굴로 청람이 경악했다.
자신들 마녀조차 손에 넣지 못한 운명의 개변.
인과율 조작마저 조작하는 그 가공할 힘에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였기에.
“어째서··· 인간이 그런 능력을?”
말하자면 길다.
그러나 빅터에겐 그 사정을 하나하나 설명해줄 생각이 없었다.
그의 목적은 언제나 하나···.
오로지 마녀의 절멸뿐이었다.
“오, 오지 말아요!”
빅터가 접근하려하자, 청람의 사역마가 재차 번개를 연사했다.
하지만 어느 것하나 통하지 않는다.
빅터는 거침없이 다가오고 있었다.
“킥! 이제 너도 충분히 알았겠지, 청람? 내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눈에 띠게 동요하는 청람.
뒷걸음질치는 그녀를 향해 홍련은 보란 듯이 놀리기 시작했다.
번개가 가까스로 빅터를 막는 사이, 청람은 분한 듯 상대를 쏘아보았다.
“계속 그렇게 지켜보고만 있을 건가요, 홍련 언니!”
“물론이야. 네가 허망하게 목숨 하나 날리는 꼴이 너무 재미있는 걸!”
“이건 우리 둘 모두에게 위기라고요!”
“어쩌겠어? 지금의 난 싸울 수 있는 상태가 아닌 걸.”
“칫··· 중요할 땐 도움도 안 되는 쓰레기 년!”
“히히, 아이 고소해. 멋대로 지껄이렴. 지금은 너한테 무슨 욕을 들어도 행복한 기분이야!”
“···분하지만 퇴각하죠. 통로의 준비는 예전에 끝났으니. 원격으로 발동하는 방법은 기억하고 있죠? 적석에 담긴 마기를 다루는 건 오직 언니만 할 수 있는 일이니···.”
“아니이이, 나는 아무 것도 모르거든?”
“지금은 장난칠 때가···.”
“알아도 싫어. 나는 네가 필사적인 모습을 좀 더 보고 싶거든?”
“꾸물거릴 때가 아니라고요!”
“흐응, 존중의 마음이 느껴지지 않는 부탁인 걸? 솔직하게 말하지 그래? 선배님! 도와주세요! ···라고.”
“···.”
“어라, 아무 말도 안 들리는데?”
“···지옥에나 떨어져라, 이 영혼 없는 창부! 너한테 머리를 조아릴 바에 사냥꾼에게 찢겨 죽는 게 더 나아!”
“아핫, 아하하하하핫! 꼭 그렇게 되면 좋겠구나!”
“···이봐, 아가씨들. 한참 즐거운 중에 미안하지만 말이야.”
“앗?”
“여기에 마녀 사냥꾼이 저 몸집 큰 놈만 있는 게 아니거든?”
마녀들의 기이한 만담이 이어지는 와중.
존재감을 숨기고 있던 누군가가 홍련의 배후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림자가 스며든 은사를 능수능란하게 다루는 자는 흔하지 않아.
바로 로이드였다.
“댁은 또 뭐야, 멀대같은 사냥꾼 씨? 청람의 벼락에 겁먹어서 줄행랑 친 줄 알았더니?”
“무슨 섭섭한 소릴. 난 기회를 엿보고 있었을 뿐이라고.”
청람은 빅터를 저지하는데 전력을 다 하고 있다.
그게 아니더라도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 우레를 불러오진 못하리라.
로이드에겐 그런 계산속이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굳이 이목을 집중 시키고 습격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 아닌가?
“얼빠진 양반. 그렇다고 댁이 뭘 할 수 있지? 조금 전에 저 도끼 백정에게 못 들었어? 날 건드리면 너희 모두 끝장이라는 걸?”
아스트랄을 머금은 육신에 대해, 홍련은 절대적인 자신감이 있었다.
무고한 인간을 희생시키지 않으려하는 사냥꾼들의 철칙 또한 잘 알아.
마을을 인질로 삼은 이상, 상대는 자신에게 손가락 하나 대지 못하리라고.
“아아, 당연히 알지. 아가씨는 그거 지? 중증의 분노조절장애. 건드리면 펑하고 터질 정도로 화가 많이 쌓이셨다며?”
“잘 아시네. 마침 난 몸 상태가 엉망이거든? 조금만 칼집이 나기라도 해봐. 너흰 그대로 끝장이니까.”
“하, 그럼 간단하네.”
“···뭐야?”
“죽이지만 않으면 되는 거 아닌가?”
“감히 누구 면전이라고 그딴 건방진 소릴···.”
물론, 그가 여유를 부리는 데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로이드의 목적은 이미 달성되었기 때문에.
“화염을 못 쓰는 홍련의 마녀정도는, 나라도 어떻게든 해볼 수 있단 말씀이지!”
“앗, 아앗?!”
포박술.
몇 겹이나 은사를 겹쳐서 만들어낸 금속질의 로프가 어느새 홍련의 몸을 휘감고 있었다.
그것은 양팔과 다리의 자유를 빼앗아, 그녀가 얼굴부터 땅에 들이박게 만들었다.
“앗차! 미안해, 이건 실수였어. 상처 입힐 생각을 아니었는데. 아, 이 정도는 괜찮은 건가? 이마가 찢어져서 피가 나는 정도론 터지지 않는 모양이지?”
“아윽! ···너어어어, 기생오라비처럼 생긴 게! 건방지게 이런 수작을!?”
“핫하, 이대로 재갈을 물려서 끌고 가주지! 어디 사냥꾼들 집결지에서도 기세등등할 수 있을지 보자고!”
“크으···!”
이때, 홍련은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어째서 사태가 이렇게까지 성가시게 흘러온 것일까?
모처럼의 외출.
마기가 충만한 적석을 회수하기만 하면 되는 간단한 임무였을 것을···.
이대로 빈손으로 돌아가면 틀림없이 한 소리를 듣게 된다.
그럼 자존심이 뭉개지는 것만으론 끝나지 않겠지.
청람에게 비웃음 당하는 정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조롱을 당해서···.
그러나, 사냥꾼들에게 조리돌림 당하는 것과 비교하면 어느 쪽이 더 굴욕적일까?
“어쩔 수··· 없지.”
“앙? 아가씨, 지금 뭐라고 했지?”
“이제 물러서라, 청람! 여기서 빠져나갈 테니까!”
“빠져나가? 꽁꽁 묶인 채로 잘도 그런 농담을···.”
순간, 로이드는 홍련의 두 눈과 입에서 뭔가가 맹렬히 뿜어져 나오는 것을 보았다.
중화되지 않을 정도로 농밀한 마기의 소용돌이···.
그것은 바깥으로 퍼져나가지 않고, 홍련의 몸속에서 어떤 작용을 벌였다.
쩍, 쩌적!
그러자 몰아치던 벼락이 자취를 감추었다.
뇌운으로 가득 차 있던 하늘이 갑자기 거짓말처럼 맑아졌다.
그곳에는 육안으로도 확인할 수 있을 정도의 선명한 균열이 새겨졌다.
창공이 갈라진 것이다.
이어서 그 틈 사이로 뭔가가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이계의 생물체.
가로로 벌어진 큼지막한 아가리와 무수한 가시 같은 것이 잔뜩 박힌 이질적인 벌레의 형상.
그것은 지옥의 존재를 믿게끔 만들 정도로 흉물스러운 외모를 가진 거대한 괴물이었다.
“···고오오오오오오!”
포효.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비명소리가 흘러 나왔다.
빅터는 그 끔찍한 울림에 무심코 위로 고개를 들고 말았다.
그런데.
“저것은···.”
눈에 익다.
오래 전에 본 기억이 남아있어.
떠올리는 데엔 그다지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5년 전.
고향을 집어삼켰던 무수한 악충의 무리···.
클라리스의 사역마로 추정되던 그 벌레들과 한 없이 닮아있었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