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헥센야크트-122화 (122/186)

이탈의 장(4)

4.

빅터의 심상 세계가 뒤틀린다.

단순한 환영.

엑조틱이 머릿속으로 그리는 과거의 재구성에 불과한 것···.

그러나 이는 동시에 미래에 실제로 벌어질 사건이기도 했다.

상대가 떠올린 모든 것이 암안을 통해 그대로 전해져오고 있었기에.

‘이게 우리의··· 인간의 미래란 말인가?’

주변을 장식한 버섯 포자들의 빛깔이 주홍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그것은 점차 부풀어 오르며 덩치를 크게 만들어가더니, 이윽고 구름마저 찢어버릴 정도로 높이 치솟았다.

휘광과 함께 모든 것이 새하얗게 물든다.

뒤늦게 폭염의 바람이 스쳐 지나가면 모든 것이 새카만 재로 변해버린다.

재앙이나 다름없는 대폭발···.

아니, 그 현상은 대연소라고 부르는 편이 더 정확할 지도 몰랐다.

“너희 호모 사피엔스는 폭력성에 한해서만큼은 그 어떤 종보다 우수했지. 환경을 극복하고 나서부터는 항상 편을 갈라 적을 찾아 헤매더군. 정말이지 놀라울 정도의 호전성이야. 모든 것이 파괴될 때까지 멈출 수 없다니. 우리로서는 흉내조차 못 낼 데스트루도Destrudo다.”

별의 형태가 변할 정도로 무시무시한 위력···.

그 충격은 하늘에 뜬 하현의 달마저 수 천리 넘게 밀어버리고, 심지어 행성의 반대편 대륙에 서 있던 이의 피부에 화상을 입힐 정도였다.

이어서 비가 내린다.

무수한 강철의 소나기였다.

그것들이 지상에 닿을 때마다 여지없이 새빨간 봉우리가 만들어진다.

홍련 빛의 꽃잎이 만개하며 세상을 가득 채우는 것이다.

그 모습은 성층권 너머에서도 보일 정도의 절경絕景.

···아니, 사실은 흉경凶景.

세상 어떤 것보다 공포스러운 묵시록···.

대양이 순식간에 말라붙어.

대기를 감싸고 있던 회백색 구름들이 자취를 감췄다.

대지는 여지없이 으깨지고 녹았다.

은은히 섞여있던 청과 녹의 그라데이션은 어느새 적자색으로 물들어버렸다.

착각이었을까?

빅터는 그 환상 속에서 별이 비명을 지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헉··· 허억!”

암안을 강제로 제어하고 나서야, 빅터는 겨우 숨을 쉴 수 있었다.

호흡하는 것마저도 잊을 정도의 두려움···.

그는 보았다.

붉은 폭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무엇이 남았는지를.

건조하게 분쇄된 지각 아래···.

끓어오르는 용암 사이를 맴돌고 있던 사념死念의 무리가 있었다.

부디 착각이길.

빅터는 그것이 잔혹한 광경을 마주한 충격으로, 자신의 유치한 상상이 뒤섞인 것 뿐이기만을 바랐다.

그러나 믿음과 현실의 괴리는 여지 없이 빅터의 정신을 파고든다.

자신의 죽음조차 인지하지 못한 수 많은 생명들의 절규가 울려 퍼지고 있는 것이다.

그 자리엔 연옥이 있었다.

인류 스스로가 만들어낸 지옥이었다.

“···이제 알겠군. 네놈들이 왜 우릴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지.”

생명을 이루는 최소 단위마저도 좀먹는 기이한 청백색 광선.

그것이 대지 깊숙한 곳까지 스며들고 모든 걸 살아있는 존재를 사멸시킨 후에서야···.

그들, 엑조틱은 비로소 태어날 환경을 갖출 수 있는 것이다.

“결국 너희는 우리가 멸망하지 않으면 너희는 존재할 수 없다는 의미인가?”

“호오, 겉보기와 다르게 의외로 영특한 개체로군. 이 짧은 대화만으로 모든 전말을 이해했단 말인가?”

“다 아는 수가 있지.”

빅터가 단호히 고개를 끄덕이자, 검은 외래종은 기쁜 듯이 답했다.

“그렇다면 부연 설명 할 필요 없이 간략히 정리하겠다. 머리가 좋은 개체를 인간 무리에 풀게 되면, 인류가 멸종하는 시간이 아주 조금이지만 변화한다. 그게 어떤 방향인지는 우리도 모른다. 빠르게 가속할 수도, 혹은 지연될 가능성도 있지. 하지만 그렇게 되면···.”

“너희가 이 별에 출현하는 미래의 시간대까지 함께 변한다는 건가?”

빅터가 결론을 가로챘다.

더 이상 들을 필요도 없어.

엑조틱의 의도가 너무도 명확했기 때문에.

‘우리의 개입으로 역사가 변화하면, 놈들의 존재가 위협 받는다. 아마 대충 그런 식이겠지. 마르나 다른 녀석의 몸이 갑자기 투명해진 현상과도 깊은 연관이 있을 터···.’

그럴싸한 추론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빅터와 로이드가 접촉한 시점을 기점으로 마르의 존재감이 옅어지기 시작했어.

이는 어떤 식으로든 미래가 개변됨을 의미했다.

‘단순한 것 같으면서도 어려운 이야기다. 동시에 묘하군. 시간을 넘어 방문한 괴물 놈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게, 고작해야 우리 인간의 계몽이라니.’

안타깝게도, 시공간의 복잡한 개념까지 전부 이해하기에 빅터의 학식은 현저히 부족했다.

하지만 엑조틱이 품고 있는 불안과 걱정만큼은 알 수 있어.

적어도 자신들을 처리하는데 혈안이 된 까닭도 어느 정도 납득이 갔다.

“이상한 일이다. 처음 한 번은 우연이라 쳐도, 같은 일이 연속해서 일어나다니? 호모 사피엔스여. 너는 설마···”

한편, 눈앞의 상대는 빅터가 몇 번이고 자신의 생각을 읽은 것에 적지 않게 놀라워하는 중이었다.

설마하니 인간이 고도의 지적생물체인 자신의 의식체계를 따라잡았을 리는 없어.

달리 원인이 있을 것이라 짐작한다.

그리고 머지않아 검은 엑조틱은 한 가지 현실적인 결론을 내렸다.

“역시 내 정신파동을 읽은 모양이군. 불안정하고 원시적인 정신감응이지만, 영장류치곤 나쁘지 않아. 놀랍군. 너는 우리가 아직 관측하지 못한 현생 인류의 상위종인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 그런데 내가 그런 능력을 가진 걸 어떻게 알았지?”

검은 외래종은 가시 촉수를 자신의 두상에 가져가더니.

“장치를 사용해 투사했다. 간단한 기술이야. 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방사선을 이용하면 간단한 화학 분석 쯤이야 얼마든지 가능하다.”

“방사··· 그게 뭐지?”

“아니, 잊어라. 그건 아직 이 시대의 인간에게 허락된 지식이 아니니까. ···아무튼 너처럼 송과체와 전두엽이 비대해진 개체는 처음 본다. 매우 드문 사례야. 굉장히 특이하군. 자연적인 돌연변이로 보이진 않는데···. 하위종과 융합한 것과는 별개의 작용, 달리 유전적인 영향이 있는 건가?”

“말하자면 길다. 빌어먹을 사정이 있어서 말이지.”

“그 체질이 후천적으로 발현되었단 걸로 받아들여도 되겠나?”

“멋대로 생각해라.”

“그렇다면 호모 사피엔스여, 이 이상 무용한 저항은 그만두길 권하마. 나는 네 육체에 필요 이상의 손상을 가하고 싶지 않다. 가능하면 널 보존하고 싶군.”

몇 마디 대화를 나누고서 마르와 같은 유대와 동질감이라도 생겨난 것일까?

아니면 빅터의 특이성을 인정하기라도 한 것인가?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나? 그 말은 무슨 뜻이지? 나에게 해코지를 하지 않겠다고?”

하나, 빅터가 상대를 통해 엿본 것은 음험하면서 무기질한 감정이었다.

검은 외래종이 빅터의 힘에 관심을 보였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학문적 흥미에 불과했다.

곧 엑조틱은 인간이 이해 못할 관점에서 오싹한 욕망을 드러냈다.

“몸을 맡겨라. 그리하면 육체적 손상 없이 죽여주겠다.”

“개소리를 하는군.”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 보도록. 고통에 대한 거부반응이 걱정된다면 안심해라. 최대한 정성을 다해 대해줄 테니. 마침 우리에겐 아픔이 느껴지지 않게 신경을 적출하는 우수한 기술이 있다. 특히 너희 영장류의 해부라면 질릴 정도로 많이 해봤지. 두상 안에 담긴 장기의 단백질 구조 재해석에 한해서라면, 나는 학위까지 보유한 전문가다.”

“···.”

“너무 어렵게 이야기했나? 다시 설명하마. 나는 너의 뇌피질과 척수 전반을 원한다.”

빅터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한탄해야만 했다.

만에 하나라도, 이 상대가 마르와 같이 순진한 면이 있길 기대했던 게 잘못이었다.

인간에게 감정이 있다는 걸 제대로 이해시킨다면, 어떻게든 우호적으로 나오지 않을까 바랐던 것을···.

“네 두개골 속 내용물은 훌륭한 연구 자료가 될 거다. 특이한 개체인 만큼 학계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킬 테지. 어쩌면 너희 영장류가 미래로 나아갈 진화 모델로서 혁신적인 가설을 세울 수 있을 지도···.”

마르 이상으로 어려운 용어들을 남발한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 담긴 건 실험동물을 내려다보는 싸늘한 시선 뿐.

‘역시 이놈들과 우리는 공존할 수 없는가?’

빅터는 5년 전에 마공작 올비우스와 대면했을 때 느꼈던 것과 흡사한 마음의 파동을 다시금 떠올렸다.

그러나 엄밀히는 그보다 훨씬 더 잔혹해.

순수하게 인간의 철학적 담론에 흥미를 보이던 올비우스와는 달리, 눈앞의 상대는 빅터의 육체 쪽에만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하게도, 빅터는 그걸 받아들이지 않았다.

“거절한다.”

“유감이다. 너라면 좋은 표본이 될 수 있었을 텐데.”

“나오는 대로 지껄이는군. 뚫린 입도 없는 주제에.”

“신체적 특징을 가지고 비하하는 건 저급한 인신공격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취식기관이나 발성을 위한 구조는 불필요해. 기도와 식도가 한 구멍으로 통하는 웃기지도 않은 육체를 가진 너희 종과는 차원이 다르지. 따라서 음식을 섭취하다 호흡기에 걸려 질식할 위험도 없다.”

“···오냐, 어디까지나 네놈들은 인간 위에 있는 초월종이라는 거군.”

“겨우 알아주었나? 이제 너희들이 왜 이물질이며, 어째서 반드시 제거되어야 하는 지도 충분히 이해한 것 같군. 그리하면 잘 생각해보게. 어차피 오래 살지도 못할 그 목숨, 기왕이면 보다 가치 있는 것에 쓰지 편이 좋지 않겠나?”

“구경거리로 말인가?”

“그것과는 다르지. 너는 훌륭한 표본으로 취급될 것이다. 마땅치 않다면, 네 친구 개체도 함께 전시하도록 하마.”

빅터는 말문을 잃었다.

같은 언어로 말할 수 있고, 소통도 가능한 존재이건만, 어째서 벽을 두고 이야기하는 기분이 드는 것일까?

‘사고방식이 전혀 다르다. 외형뿐만이 아니라, 역시 우리는 완전히 다른 생물이야.’

가능한 이해하려했다.

할 수 있다면 납득하고 싶었다.

엑조틱이 탄생하기 위한 필연의 과정···.

그리고 타협점을 찾기를 누구보다 바랐다.

하지만 드러난 진실이란, 인간인 빅터로서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단념해라. 너와 네 동족은 살아서 이곳을 나갈 수 없는 운명이다. 우리가 관리하고 있는 이상, 너는 본래의 시대로 돌아가는 것조차 불가능해.”

상대는 단언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빅터와 로이드를 제거하는 것으로, 엑조틱의 미래에 영향이 가는 일을 차단하리라고.

하지만 이 시점에서 빅터는 한 가지 모순, 기괴한 맹점을 눈치 챘다.

검은 외래종이 말하는 것과 달리, 이미 역사가 변했어.

그 증거로 눈앞의 엑조틱 무리들의 몸은 여전히 비춰 보인다.

이만큼 열변을 토했다면 조금이라도 회복 되어야 할 것을···.

놈들이 모습은 돌아올 낌새가 전혀 없었다.

‘결국 말장난이군. 뭐가 미래고 운명이란 거냐?’

오히려 빅터는 더욱 강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돌아갈 수 있는 길이 원천 차단되어 있다면, 애초에 그들의 미래에 무슨 영향이 간단 말인가?

‘타파할 길이 보인다. 아니,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지. 우리는 돌아간다. 처음부터 그렇게 정해져 있었던 거다.’

미래가 자신들을 긍정하고 있단 것을 인지하자, 저절로 용기가 끌어올라.

빅터는 자기도 모르게 입가를 실룩였다.

“감찰관이라고 했나? 미안하지만, 나는 순순히 잡혀줄 생각이 없다.”

“어리석은 소릴. 우리의 집행은 너라는 개체의 의사와는 무관계하게 행해질 것이다.”

“좋지. 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해봐라.”

부조리에 대한 반항.

죽음에 맞서는 발버둥.

결코 쉽사리 당해주진 않으리.

빅터가 끝까지 맞서 싸울 것을 마음먹은 그 순간···.

또 한 번, 외래종들에겐 달갑지 않은 이변이 일어났다.

대치하고 있던 놈들의 몸이, 이번엔 유리처럼 더욱 투명해지는 것이 아닌가?

“네놈··· 무슨 짓을 했나?”

“아무 것도 안했다. 아직은 말이지.”

“뭐라?”

“내가 뭔가를 하는 건 지금부터다.”

“지금 웃은 건가? 이 상황에서 안면 근육을 의도적으로 비틀 다니? 공포심이 마비되기라도 한 거냐? 아니면 이 우리와 장시간 접촉하면서 성이 날아가 버렸나?”

“나는 제정신이다.”

“···이 이상의 소통은 무의미할 것 같군.”

그 말을 끝으로 검은 빛깔의 그림자들이 물결치기 시작했다.

말할 필요도 없이 적대적인 반응.

지금까지 억눌려있던 외래종의 군세가 동시에 몰려들었다.

그러나 빅터는 물러서지 않았다.

차라리 바라는 바···.

그가 준비하던 비장의 수는, 몇 번이고 쓸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에.

‘일어나라. 드디어 네가 나설 차례가 왔으니···.’

그 읊조림이 향한 상대는 빅터의 손아귀에 위치했다.

푸르스름한 이형의 도끼···.

표류자가 남긴 유산.

주인의 의사에 반응하기라도 하듯, 그것은 점점 모습을 바꾸어 나가기 시작했다.

아니, 생김새만이 아니야.

마치 성장하는 것처럼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쩍, 쩌적!

칼날 부분이 기괴하게 벌어진다.

대형 육식 동물의 벌어진 입과 같은 모양새로···.

‘그래. 잔뜩 먹어라. 모조리 삼켜. 이 순간을 위해 비축해둔 사념이다. 어서 네 진짜 모습을 드러내.’

어느새, 빅터는 이븐 가지의 분말이 뿜어져 나오는 자신의 가슴 정중앙을 개방한 채였다.

고오오오!

가루의 흐름이 폭풍을 만든다.

가공할 기세로 도끼가 빅터의 마음의 힘을 빨아들이고 있었다.

“큭···!”

그 영향이었을까?

힘을 조절할 수가 없어.

빅터의 왼쪽 눈을 통해 피눈물이 흐른다.

따로 발동시킨 것이 아니었음에도, 암안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검게 물들어 있었다.

‘역시 아직 내 힘만으론 온전히 다룰 수 없나?’

체감 상 대략 팔 백근 남짓···.

현대의 측정값으로 환산하면 500킬로 그람에 육박할 정도의 질량.

초인적인 빅터의 완력으로도 가누기 힘든 무게였다.

그가 든 도끼의 몸집은 서넛 배를 한참 넘어, 거의 여덟 배까지 커져 있었다.

빅터는 무기를 들기 위해 오른팔에 거인의 그림자를 덧씌워야만 했다.

“···네놈!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엑조틱이 동요를 숨기지 못한다.

그만큼 빅터의 진가는 그들의 예상을 훨씬 넘어선 것이었다.

“왜 그러나? 잘나신 너희 외래종들께서도 아직 더 놀랄 것이 있었나?”

“그건··· 그것은 제노리움Xenolium이 아니더냐?”

“생소한 이름이군. 우리는 유성의 파편이라 부른다.”

하나, 이미 상대는 빅터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감찰관 무리의 대표자는 넋이 나간 듯 중얼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왜냐? 한낱 인간 따위가··· 어떻게 규소기반 생물체의 유체를?”

그것은 경악.

틀림없는 두려움의 반응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