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의 장(5)
5.
제노리움.
별 세계에서 온 이계의 금속.
그 빛나는 표면에 엑조틱들의 모습이 비춘다.
하나같이 움츠려 든 모습.
표정이 존재하지 않는 외래종이었지만, 빅터만은 알 수 있었다.
놈들이 이 날붙이에 진저리칠 정도로 겁을 집어먹었다는 사실을.
본색을 드러낸 표류자의 유산이 그들에게 있어서 천적이나 다름없다는 걸.
“왜 그러고 있지? 조금 전까진 당장이라도 덮칠 듯이 엄포를 놓더니?”
“가, 감히 네까짓 생물이 우릴 우롱하는가?”
“꼴 한 번 좋군. 콧대 높은 네놈이 이젠 빌빌거리는 지경까지 오다니.”
“입 다물어라, 호모 사피엔스. 너는 그것이 얼마나 끔찍한 물건인지 모른다!”
“아니, 표류자가 남긴 정보가 충분히 알려주었다. 너희 외래종을 이루고 있는 그 에네르기아라는 것이 고농축된 사념의 일종이라면서?”
“···.”
“그리고 이 유성의 파편은 사념을 동력으로 삼지. 다시 말해, 너희들은 먹이란 뜻이다.”
“네놈은 어디까지 그 힘을···.”
빅터는 말없이 어깨를 들어올렸다.
그것이 허세란 것도 눈치 채지 못하고서, 검은 외래종이 언성을 높였다.
“불가능해! 아무리 자아를 잃었다곤 하나, 규소 계통 생물의 유체는 인간이 다룰만한 성질의 것이 아닐 터!”
“못 믿겠나? 그렇다면 직접 확인해봐라.”
비대해진 오른팔이 그에 걸맞는 크기로 변한 도끼를 움켜쥔다.
하지만 그것은 빅터의 의지가 아니었다.
뭔가가 손바닥과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어와.
머리카락보다도 미세한 신경 단발이 그의 몸속으로 이어진 것이었다.
그리고 탐욕스럽게 빨아들인다.
빅터가 수년간 담아둔 죽음의 기록을···.
동료 사냥꾼.
무고한 죽음을 당한 희생자.
사역마의 재료로 사용된 원념.
심지어는 그간 구원해준 마녀들의 것까지···.
“이 녀석은 항상 허기가 저 있지. 한 번 깨어나면 한도 끝도 없이 쳐 먹어야 만족한다. 과연 이번엔 얼마나 삼켜야 잠잠해질지···.”
가볍게 말했지만, 이젠 그 스스로도 장담할 순 없었다.
이 무기는 일단 한 번 해방하기라도 하면 의지를 가진 것 마냥 제멋대로 날뛰기 시작해.
주인인 빅터로서도 수수께끼투성이인 미지의 물질이었다.
“그만! 이 시간부로 너라는 개체를 최우선적으로 멸절할 것을 선언한다!”
“해보시지. 할 수 있다면 말이야.”
콰과과과!
검은 파편들이 사방에서 쏟아진다.
정면은 물론, 빅터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방향에서까지 뻗어오는 무시무시한 폭격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노린 목표물은 이미 지상에 발을 붙이고 있지 않아.
한 박자 빠르게 빅터의 몸이 공중을 날고 있었다.
“흠!”
순간, 도끼의 날이 붉게 달아오른다.
이빨처럼 돋아난 돌기에서 빛이 뿜어져 나온 것이다.
주변의 형태가 뒤틀릴 정도의 열기.
공기 중의 습기와 무기를 든 사용자의 혈액마저 증발시킬 정도로 고열을 방출하고 있었다.
그것은 마기를 동력으로 삼아 발현되는 현상.
가공할 속도로 진동하는 고주파였다.
부우우웅!
빅터의 몸 전체가 앞으로 숙여짐과 동시에 참격이 허공을 가른다.
보이지 않는 궤적.
지면에 닿지도 않았는데 충격파가 퍼진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주변의 땅 아래가 뒤집어졌다.
곧 이상 현상이 일어났다.
굉음과 함께 엑조틱을 보호하는 수 십 개의 파문이 등분되었다.
초자연적 장막이 찢겨지고 만 것이다.
“이럴 수가! 그 흉물에는 허수공간마저 꿰뚫을 위력이 있단 말인가?!”
“그걸로 끝이 아니다.”
“뭣이?”
잠시 후, 형광의 점액들이 하늘로 튀어 올랐다.
동굴 안은 저 세상에서 건너온 비명으로 흘러넘쳤다.
“이, 있을 수 없어! 이건 완전히 어긋났다! 우리가 관리하는 시간대에 이런 변수는 결코···!”
“뭘 놀라고 자빠졌나? 이미 말했을 텐데. 네놈들은 먹이라고!”
찢겨진 엑조틱은 빛의 입자로 변해.
쩌억 벌어진 도끼의 균열 사이로 빨려 들어갔다.
“가긱!”
“키에에에엑!”
베어낸 것은 허무의 세계만이 아니었다.
물리적 공격을 원천 차단하던 무형의 벽은 물론, 그 안에 숨어있던 외래종까지 함께 날려버린 것이다.
“다음!”
움직일 방향은 본능이 인도한다.
오른팔과 이어진 유성의 파편이 자동적으로 적의 위치를 추적하고 있었기에.
“쏴라! 어서 막아! 저 호모 사피엔스가 이 이상 접근시켰다간···!”
콰과과과과!
빅터를 저지하기 위해 엑조틱들이 가시를 한 점으로 집약시킨다.
전부 회피하기는 무리다.
실제로 꽤 많은 수의 파편이 명중했다.
그럼에도 빅터는 다리를 멈추지 않았다.
중요한 급소는 왼팔의 쇠사슬이 전부 튕겨냈어.
몸에 새겨진 건 시시한 생체기 뿐이었다.
“흡!”
부우우웅!
다가온 빅터에게서 몸을 숨긴 외래종을 뒤쫓아, 도끼가 틈새에 기이한 잇자국을 만들어냈다.
동시에 예리한 칼에 베인 커튼이 갈라지듯 공간이 도려 나가졌다.
포식.
유성의 파편은 닥치는 대로 자신이 찢어발긴 에너지 생명체들을 집어 삼켰다.
“아직··· 아직 이다!”
땅을 박차는 빅터의 도약에는 망설임이 없다.
그는 속전속결로 싸움을 끝낼 셈이었다.
왜냐하면··· 오래도록 이 상태를 유지할 자신이 없었기에.
‘견뎌라. 앞으로 단 1분만이라도 좋으니···!’
숨이 차올라, 빅터는 슬슬 막바지가 다가온다는 걸 느끼고 있었다.
몸을 날린 사선 베기, 높이 뛰어올라 덮치는 내려 가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힘을 낭비하지 않는 전력의 공격이었다.
파직!
팔을 휘두를 때마다 통각이 전신에 퍼진다.
여러 근섬유가 요동치고, 장력을 지탱하던 인대와 힘줄이 한계까지 늘어졌다.
그림자를 덮어씌운 것으로도 제어가 안 되는 힘···.
그도 그럴 것이.
많은 엑조틱을 베어나갈수록, 그의 도끼가 점점 더 몸집을 불려나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걸로 서른다섯 마리!’
빅터는 자신이 쓰러뜨린 적의 수를 착실하게 새어나갔다.
하지만 마지막 한 놈···.
개중에 우두머리로 짐작되는 녀석이 보이지 않는다.
부하들을 방패로 삼아 아슬아슬하게 몸을 감춘 모양이었다.
‘어디냐? 지휘자는 어디에 숨었나?’
가장 성가신 놈을 무찌르기 전까진 안심할 수 없어.
빅터는 가능한 마지막 힘을 비축하려 했다.
그러나···.
“잡았다, 이 노오오옴!”
노기를 띤 목소리.
외래종은 자신의 동족이 죽어나가자 그 원흉인 빅터에게 증오의 화살을 향했다.
그리고 그건 시덥잖은 비유가 아닌, 실질적인 의미에서의 맹공이었다.
“윽!”
푸우우욱!
빅터의 등에 날카로운 통증이 퍼졌다.
양어깨와 여러 개의 검은 파편.
인지가 불가능한 사각을 노리고 파고든 기습이었다.
사냥꾼의 반응 속도로도 기척을 눈치 채지 못할 만큼 재빠른 저격인가?
아니···.
이는 공간을 비트는 엑조틱의 기술을 살짝 응용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영거리.
표적 바로 앞에다 공간 균열을 직접 들이밀어, 절대로 피할 수 없는 공격을 먹인 것이다.
그 증거로 빅터의 주변에는 자그마한 파문이 수도 없이 일렁이고 있었다.
더욱이, 등짝에 깊이 파고든 것들의 형상은 하나같이···.
‘빌어먹을, 이건 갈고리··· 아니, 낚시 바늘?’
자연스레 빅터의 뇌리에서 불길하고 끔찍한 장면이 스쳐지나갔다.
아니나 다를까, 그 가혹한 상상은 현실이 되어 찾아왔다.
“크윽!”
무시무시한 압력.
일방적인 힘의 방향이 빅터를 움직였다.
살점과 근육 사이에 박힌 작살 모양의 파편을 통해 끌어올려진 것이다.
반항할 틈도 없이, 빅터의 몸은 천장을 향해 튀어 올랐다.
쿵!
쿠과앙!
머리부터 균열 진 돌부리 사이에 처박혔다.
이마의 피부가 찢겨지고, 지나온 방향을 따라 선혈이 퍼졌다.
하나, 그건 시작에 불과해.
외래종의 본격적인 앙갚음은 지금부터였다.
오른쪽 측면, 불규칙하게 튀어나온 절벽으로···.
또 한 번 빅터는 무방비하게 내던져졌다.
콰아앙!
콰과과광!
연달아 무자비한 충격이 그의 전신을 감싼다.
이번엔 암벽이 다 무너질 때까지 멈추지 않아.
몇 번이고, 쉴 세 없이 바위 속을 헤집는다.
그 일연의 과정은 이형의 도끼가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고, 빅터의 움직임이 멈출 때까지 계속 되었다.
엑조틱 무리의 우두머리가 고개를 내민 것은, 그로부터 거의 수분이 지났을 무렵이었다.
“···큰 희생을 감수했다. 인간 한 마리를 처치하기 위해 수많은 동족이! 진즉 이렇게 처리할 것을!”
이 정도로 패대기쳐진 몸뚱이가 남아 날 리 없어.
검은 엑조틱의 무리는 넝마가 된 빅터의 주검을 확인하려 했다.
하지만 그들은 사냥꾼이란 족속의 끈질김을 너무도 얕보았다.
또한 빅터가 아직 도끼를 놓치지 않았다는 것 또한 간과하고 있었으니···.
“···다 했나?”
얼굴의 절반이 피로 흥건하지만, 빅터는 건제했다.
놀라 자빠진 외래종에게 조소를 보낼 여유까지 보일 정도로.
“아직도 살아있다니, 설마··· 너는 마법사인가?”
“나를 그딴 것과 같은 취급하지 마시지.”
“그게 아니라면 영장류, 너란 개체는 무쇠로 만들어지기라도 했단 말이냐?”
“그럴 리 없다는 걸 너도 잘 알고 있을 텐데?”
“달리 설명이 안 된다!”
촤륵···.
왼손을 펼치자, 금속질의 기다란 뭔가가 흘러내렸다.
그가 조금 전까지 그림자를 주입해 몸에 휘감고 있던 쇠사슬이었다.
“인간은 단련하기 나름···. 내 사부의 말버릇이었지.”
5년 전.
동방에 남아 체의 유파를 따르기로 마음먹은 그 날 이후, 빅터는 몇 번이고 얻어맞았다.
호권 베누다란 이명만큼이나 무지막지한 대스승의 주먹질에···.
‘빌어먹을 영감탱이···. 그에 비하면, 이까짓 장난질쯤 아무 것도 아니다.’
고된 시간을 떠올리자, 빅터의 입가에 저절로 쓴웃음을 지어졌다.
이 순간, 그는 대스승 베누다의 가르침에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었다.
동양의 체술이 가진 신비.
금종조金钟罩, 혹은 철포삼鐵布衫.
세간에서 흔히 외공外功, 금강불괴金剛不壞 따위로 불리는 수상쩍은 기술.
가혹한 수행을 거치면 금강석에 비할 정도로 육체를 단단하게 만들 수 있다는 둥의 망상과 헛소리가 퍼져있지만···.
그 실상은 사뭇 달랐다.
인간의 몸은 유연하다.
골격은 어지간한 충격을 분산시킬 수 있도록 결합되어 있으며, 피와 살을 이어붙이는 근육은 기본적으로 부드럽다.
탄력을 이용하면 힘의 분산도 가능해.
단순한 운동역학 만으로도 치명상을 피할 수 있다.
그러나, 제아무리 날고 긴다한들···.
뼈보다 훨씬 높은 경도의 바위나, 근육의 탄성이 뾰족한 주석을 견뎌낼 수 있을 리가 없다.
어떤 특수한 재주가 동반되지 않는다면···.
‘연研과 경硬. 이븐 가지의 분말로 아주 짧은 시간 육체의 성질을 바꾸는 기술···. 여기까지 도달하는데 2년이란 세월이 걸렸지.’
육체의 손상은 경미.
부러진 곳이 단 한 군데도 없을 정도야.
빅터의 온전한 상태를 뒤늦게 깨달은 엑조틱이 급히 몸을 숨기려 했다.
“소용없다. 도망쳐봐야 전부 보이니까.”
그때, 암안의 힘을 통해 동요한 외래종의 사고가 흘러들어왔다.
놈은 다시 한 번 공간을 조작하여 빅터를 지면에 메다꽂을 셈이었다.
그 시도는 유효했을 지도 모른다.
위협에서 멀어지고, 적을 해치울 수단으로서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단, 맞서는 상대가 빅터라는 사실이 엑조틱에겐 불행한 일이었을 뿐···.
“···그래, 어디 한 번 실컷 발버둥 쳐봐라.”
그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어차피 이제 네놈 혼자만 남았으니.”
빅터는 자신의 몸에 직접 가루를 흩뿌렸다.
무슨 조화인지, 그는 자연스럽게 공중에 매달려있던 속박에서 해방되었다.
몸속 깊숙하게 박힌 파편 사이 환부의 현실과 비현실을 엇나가게 만들어, 갈고리를 투과시킨 것이었다.
바닥에 무사히 착지하자마자, 빅터는 다시금 도끼를 위로 치켜들었다.
매서운 안광이 번득여.
그의 시선 끝은 이미 공간 속에 숨은 최후의 엑조틱을 노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