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의 정석 171화
대문을 넘어서는 순간, 빈첸은 세상이 바뀌었음을 인지했다.
‘영역이다.’
누군가 이곳에 영역을 펼쳐놓았다.
거대한 영역이었다.
‘이렇게까지 거대한 영역을 펼칠 수 있는 자는…….’
세상에 몇 없다.
자신을 제외하면 세 명쯤 되었을 것이다.
사미온의 가주 발키아 사미온.
아덴카의 가주 고(故) 칸 아덴카.
바르티칸의 가주 폰시아노 바르티칸.
이제는 둘이었다.
그리고 빈첸은 익숙한 기운과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은 사미온의 영역이다.’
그토록 사미온의 직계를 넘어서기 위해 노력했었던 빈첸이기에, 그래서 이 기운을 보다 정확히 느낄 수 있었다.
사미온 직계가 전심을 다하여 창조해 낸 새로운 세계.
빈첸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이 공간은 이전의 사미온가와는 철저히 분리된 곳이었다.
완전히 새로운 곳이라고 보는 것이 옳았다.
그 영역 속에서 빈첸은 많은 것들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영역의 창조자는 괴로워하는구나.’
무엇이 그토록 괴로운가.
영역 전체가 아릿하게 다가왔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음울함이 빈첸을 둘러쌌다.
저벅저벅.
빈첸은 이 어두운 공간을 걸었다.
한참의 시간을 걸었다.
저만치 멀리, 인기척이 느껴졌다.
빈첸은 그곳을 향해 계속해서 나아갔다.
‘닿을 듯, 닿을 듯, 닿지 않는군.’
그저 걷기만 해서는 닿을 수 없었다.
빈첸 또한 영역을 전개했다.
‘영역과 영역의 싸움.’
이것은 이미 경험했고 배웠다.
빈첸은 빈첸의 세계를 만들어 세계에 저항했다.
그리고 걸었다.
저벅저벅.
적막한 발걸음 소리만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얼마 후, 목소리가 들려왔다.
“도달하였느냐?”
“역시 당신이군요, 발키아 경.”
저만치 앞.
사미온의 가주인 발키아가 보였다.
그녀는 머리카락을 질끈 동여 묶은 채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피 냄새가 나는군요.”
“그래.”
자세히 보니 발키아의 볼에 눈물 자국이 가득했다.
“울었습니까?”
“울었다.”
“왜 울었습니까? 아들을 잃어서 그렇습니까?”
발키아는 고개를 저었다.
“만약 그 때문이었다면, 나는 울지 않았을 것이다.”
“…….”
“대신 네 목을 베러 갔겠지.”
“그렇겠죠. 그게 사미온의 방식이니까.”
죽음의 값은 죽음으로 받는다.
그게 사미온이 지켜온 방식이었다.
“내가 왜 이곳에서 너를 기다린 것인지 아느냐?”
“제 아버지의 죽음을 추모하기 위해서 아니었습니까?”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지.”
발키아는 눈을 감고서 칸을 회상했다.
“칸은 내 친우라고 할 수는 없었으나 더없이 훌륭한 경쟁자였다. 어떤 의미로는 내 동반자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칸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
“칸의 마지막은 어떠했느냐?”
“제게 명예로운 무인의 최후가 무엇인지 가르쳐주셨습니다.”
“본받을 만한 아버지였느냐?”
“예.”
발키아는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때, 그게 나의 꿈이었다.”
빈첸은 무언가 이상함을 눈치챘다.
한때 꿈이었단다.
“지금은 그 꿈이 사라졌습니까?”
“그 꿈을 없앴지, 내가.”
발키아가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그녀의 오른손에 핏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녀의 세계 속에서, 피는 영영 마르지 않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설마…….”
“그래, 설마가 맞아. 내가 모두 죽였다.”
빈첸은 어째서 사미온 내에서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지 알 수 있었다.
인기척을 못 느낀 게 아니라, 실제로 인기척이 없었던 것이었다.
모두 죽었으니까.
“자식들을 포함해서 말이지요.”
“단언한다. 사미온 내에 살아 있는 자는 나와 너뿐이다.”
“…….”
빈첸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왜 이렇게 극단적인 선택을 하셨습니까?”
“카곤이 나를 찾아왔다. 볼썽사나운 꼴을 하고서.”
“카곤이었습니까, 악몽이었습니까?”
카곤의 육체 자체는 산산이 부서졌다.
스스로를 영웅왕 카진이라고 말하면서.
그 카곤이 발키아를 찾아왔단다.
“나도 그걸 구별할 수 없었다.”
구별할 수 없었다.
악몽인지.
아들인지.
그래서 아들을 베었다.
“빈첸. [피에 새겨진 사명]에 대하여 알고 있느냐?”
“예. 그러한 사명을 지니고 태어난 자들을 알고 있습니다.”
“네가 진즉에 알고 있던 것을, 나는 이제야 깨달았구나.”
발키아는 자신의 오른손에 흐르는 핏물을 계속해서 바라보았다.
“사미온이 악몽에 물든 사미온을 베었을 때, 그 목숨을 취했을 때에, 비로소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
“우리는 악몽을 담는 그릇이었다.”
그것은 사미온으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가던 발키아의 정체성을 뿌리째 뒤흔들었다.
대륙 제일의 무가였던 사미온은 사실 악몽의 그릇으로서 존재해 왔다.
“그것도 [진짜 그릇]을 찾을 때까지 쓰는 일회용품 같은 것. 그게 사미온의 존재 이유였다.”
“…….”
“진짜 사미온은 500년 전에 멸망했어. 우리는 그저 가짜였고, 껍데기였을 뿐이다.”
빈첸 입장에서도 충격이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사미온은 대악마 데이븐에게 굴복했고, 나의 선조는 그와 굴욕적인 맹약을 맺었던 것 같다. 그를 통해 피에 사명이 새겨졌고.”
발키아가 크게 탄식했다.
영웅왕 카진은 사실 영웅왕이 아니었다.
그저 대악마 데이븐에게 굴복한 하수인일 뿐이었다.
이내 발키아는 실성한 듯 깔깔대며 웃었다.
한참 동안 그렇게 웃던 발키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검을 들어라.”
“…….”
“영역을 구축하고 간신히 버티는 중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악몽은 나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어.”
사미온을 계승한 자들은 악몽의 그릇.
악몽의 의지는 계속해서 발키아의 몸을 빼앗으려 들었다.
발키아는 적극적으로 그에 저항하고 있는 중이었다.
“나의 존재가 부정당하였으나, 내가 익힌 무예는 거짓이 아니었다.”
발키아의 몸이 사라졌다.
빈첸이 ‘칸’을 꺼내 들었다.
검과 검이 부딪쳤다.
그 자리에 백광이 빛났다.
어두운 세계에 균열이 생겼다.
“나는 그것을 확인받아야겠다.”
빈첸과 발키아의 격돌은 더 이상 인간의 것이라 볼 수 없었다.
영역과 영역이 서로를 밀어내었다.
그것은 우주끼리의 격돌이었다.
챙!
검과 검이 맞부딪쳤다.
맑은 검명이 일었다.
뒤이어,
충격파가 터져 나왔다.
발키아는 본능적으로 자신의 영역이 밀려나고 있음을 직감했다.
‘어쩌면…… 너야말로 악몽이 찾는 진짜 그릇일지도 모르겠군.’
순수 검술의 영역에서만 보자면 자신이 빈첸보다 우위였다.
검끼리 부딪치는 그 순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녀의 생각보다 빈첸이 익힌 검술의 깊이가 깊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발키아를 능가할 수준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패배하겠군.’
검술은 전투였고 영역은 전쟁이었다.
전투에서는 이기겠지만 전쟁에서는 패배할 것이 분명했다.
‘명확히 정해진 패배를 향해 가는 것도 나쁘지 않구나.’
그녀는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기로 했다.
한시도 사미온이 부끄러웠던 적이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그녀는 패배를 잊게 되었다.
그녀는 그게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고독하고 외로웠었다.
그 마음을 달래주었던 사람이 아덴카의 칸이었다.
“네가, 네 아버지보다 낫구나.”
“아버지께서 많은 것을 전수해 주셨습니다.”
발키아가 씨익 웃었다.
모든 식솔을 죽였다는 죄책감.
존재가 부정당한 허무함은 모두 잊었다.
지금 이 순간 빈첸과의 검투에만 집중했다.
‘네 격이 나를 압도하는구나.’
이건 수련의 영역이 아니었다.
존재 자체가 가지는 격의 차이였다.
어떤 격을 지니고 태어났길래.
어떤 경험을 하였길래.
이러한 격을 갖출 수 있단 말인가.
격의 열세를 검술의 우위로 버텨내며, 순식간에 수천 합을 나누었다.
발키아의 적황미력이 빈첸을 덮쳤다.
빈첸은 중검으로 적황미력을 받아낸 뒤, 용왕의 대인결전기로 반격했다.
발키아는 시간을 잊고 자신을 잊었다.
무아지경에 빠져들어 검을 휘둘렀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그녀의 존재를 깨달았을 때에, 그녀가 본 것은 새하얀 백광이었다.
‘모든 세계가 백색으로 물들었구나.’
이 백색의 세계는 빈첸의 세계였다.
어느덧,
빈첸의 영역이 발키아의 영역을 모두 밀어낸 것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일곱 날은 지난 것 같습니다.”
“그렇군.”
발키아는 이마의 땀을 닦아내고서 씨익 웃었다.
가짜의 마지막치고는 꽤 근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아. 이제 나도 너희를 따라가야겠구나.’
가짜는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
마지막 유희를 즐겼으니, 이제는 돌아갈 때였다.
그녀는 검을 역수로 쥐고서 자신의 심장을 찔렀다.
“미안하지만 그렇게 둘 수는 없습니다.”
가슴팍에서 피가 났다.
그러나 심장을 뚫지는 못했다.
이건 빈첸의 영향력이었다.
빈첸의 세계가 발키아를 구속했다.
발키아는 허탈한 듯 웃었다.
“그동안 나를 봐준 것이냐?”
“…….”
발키아는 또 한참이나 웃었다.
서로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착각이었다.
“세상에 발키아 사미온을 상대로 그토록 여유를 부린 자는 단연코 네가 처음일 것이다.”
“봐준 게 아닙니다.”
봐주기 위해서 봐준 게 아니었다.
빈첸은 일곱 날 동안 정말 많은 것들을 생각했다.
‘사미온이 사미온을 벤다. 그러면 피에 새겨진 사명을 각성한다.’
악몽이 그걸 몰랐을까?
‘일부러 카곤의 모습으로 발키아에게 접근했을 거야.’
카곤이 일전에 말했던 ‘그 새끼.’
‘악몽의 실체’가 일부러 다 가르쳐준 것만 같은 상황이었다.
어쩌면 이 상황은 ‘악몽’이 의도한 상황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마치 악몽이 이 상황을 바라고 있는 것 같아서 벨 수 없었을 뿐입니다.”
“결과적으로 네가 봐주었다는 것이 틀린 말은 아니지.”
“악몽은 어쩌면 발키아 경 스스로보다, 발키아 경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
“발키아 경이 존재를 부정당한 순간, 어떻게 행동할지도 알았을 겁니다. 자신의 핏줄과 자신과 관련된 모든 자들을 멸족시킬 거라는 것도. 최후의 순간 자결을 하리라는 것도 말입니다.”
발키아는 검을 쥐고 있던 팔에 힘을 풀었다.
저도 모르게 검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3세 때 검을 쥔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래도 최후는 괜찮게 장식하고 싶었는데. 끝까지 악몽에게 놀아난 꼴이 되어버렸구나. 그래서? 네 생각이 무엇이냐?”
혹시나 싶어 물어보았다.
“제가 살려드리면, 살아갈 것입니까?”
“어차피 내 대답은 알고 있을 텐데.”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자결은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
그 말은 곧, 빈첸이 직접 죽이겠다는 뜻이었다.
빈첸이 정신을 집중했다.
빈첸의 전신에서 검붉은 기운이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발키아는 깜짝 놀랐다.
“너…… 설마.”
“예. 적황미력입니다.”
현재의 빈첸을 이루고 있는 근간.
그 영혼의 본질은 외팔이 데이븐이었다.
그리고 데이븐에게 가장 친숙한 기운은 사미온의 적황미력이었다.
“네가 어떻게 사미온의 힘을 익히고 있는 것이냐?”
“사미온이 사미온을 베면, 피에 새겨진 사명을 각성한다고 하셨습니다.”
어쩌면 악몽은 그것을 미연에 막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초대 가주 아슬란은 어쩌면 오늘을 예견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사미온가(家)를 넘어서라.
-그리하여 진실과 마주하라.
순서가 중요했다.
진실을 마주하여 사미온을 넘어서는 게 아니었다.
사미온을 넘어서야 진실을 마주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아슬란이 남긴 사명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사미온을 베었을 때에.’
직접 그 목숨을 취했을 때에, 비로소 진실이 드러난다.
그래서 빈첸은 적황미력을 꺼내 들었다.
“그러니 저도 진실을 마주해야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