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의 정석 172화
발키아는 자신을 향해 뻗어오는 검을 피하지 않았다.
자신의 목숨을 취하기 위해 다가오는 발검을 눈에 똑똑히 담았다.
저것은 분명히 사미온의 힘, 적황미력이었다.
“기분이 나쁘지 않구나.”
빈첸의 검 ‘칸’이 발키아의 몸에 깊은 검흔을 새겼다.
사선으로 깊은 자상이 생겼다.
‘고통 없이 보내드리려 했습니다만 실패군요.’
초월검격의 검로에 적황미력을 융합하여 사용했건만, 발키아의 존재가 가지는 존재 스스로의 방어 능력이 검로를 망가뜨렸다.
‘이번엔 끝내겠습니다.’
발키아는 기쁜 듯 눈을 감았다.
“칸과 발키아의 시대가 가고, 빈첸의 시대가 도래하는구나.”
“…….”
적황미력을 담은 초월검격이 기어이 발키아의 심장을 찔렀다.
빈첸은 발키아가 이미 죽었다고 생각했다.
신체적으로, 생물학적으로, 그녀는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그런데도 그녀는 입을 열었다.
“부탁이 하나 있다.”
“무엇입니까?”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절대자의 의지가 남아 육체를 움직이고 있는 것이었다.
“나를 칸 옆에 묻어다오.”
스르르-
발키아의 몸이 무너져 내렸다.
평생의 호적수였던 칸의 뒤를 따라서.
대륙의 검술을 견인하던 두 개의 별이 졌다.
‘결국 사미온을 넘어섰다.’
허공에 대고 물었다.
“이만하면 초대 가주 아슬란이 남긴 사명을 완수한 것이겠느냐?”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희미하게 남아 있던, 율리안과의 연결고리가 툭! 끊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율리안의 존재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군.’
육체가 분리되었어도 존재감 정도는 느낄 수 있었는데.
이제는 아예 다른 존재가 된 것 같았다.
‘정말로 신이 된 것인가.’
율리안이 말하는 ‘진짜 신’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멀리서도 내 말을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군.’
어쩐지 조금 아쉬운 생각마저 들었다.
먹구름이 몰려들었다.
투둑 투둑.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발키아의 영역이 점차 걷혀가기 시작했다.
‘세상이 떠들썩해지겠어.’
빈첸은 잠시 눈을 감았다.
지금 순간에도 많은 정보가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것에 집중하지 않으면 중요한 것들을 모조리 잊어버릴 것만 같았다.
‘머리가 아프군.’
지끈지끈.
머리가 욱신거렸다.
본능적으로 무엇인가를 느꼈다.
‘알면 안 될 것들을 알아간다.’
빈첸은 한 가지를 깨달았다.
‘천기.’
천기.
직역하면 하늘의 뜻.
지금 빈첸이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분명 ‘천기’였다.
누군가 ‘천기’라는 단어를 가르쳐준 것도 아닌데 절로 ‘천기’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투둑 투둑.
빗방울이 점차 굵어졌다.
‘빗방울에…… 신기(神氣)가 담겨 있잖아?’
일반적인 비가 아니었다.
신기를 담고 있는 비.
‘먼 하늘은 맑게 개어 있다.’
이 비는 사미온가에만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이곳에만 내리는 인위적인, 아닌 신위적인 비였다.
어느덧 이곳은 신력으로 가득 찬 세상이 되었다.
‘이것도 일종의 영역인가?’
인간의 영역과는 약간 다른 느낌.
풍만한 신력으로 가득 채워진 이 새로운 공간은, 여태껏 경험해 왔던 것과는 다른 종류의 새로운 ‘영역’이었다.
빗방울이 어찌나 굵은지, 곳곳에 물웅덩이가 생겼다.
경사가 있는 곳에서는 빗줄기가 작은 계곡처럼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음?’
저 물줄기에 무엇인가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이내 사람의 형상으로 변했다.
“형님!”
빈첸의 몸이 굳었다.
“너는…….”
율리안이 나타나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그런데 율리안이 아니었다.
“아슬란?”
“진짜 오랜만이네요.”
빈첸은 저도 모르게 눈을 비볐다.
눈앞에 있는 자가 정말로 아슬란인가.
기억 속 아슬란보다 키와 덩치가 훨씬 컸고, 얼굴도 많이 변해 있었다.
그가 알던 아슬란보다 많이 늙어 있었다.
그렇지만 표정은 어릴 때와 똑같았다.
‘아니, 아니다.’
저 신력으로 이루어진 육체는 진짜 육체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율리안과 같은 신력도 느껴지지 않았다.
‘신’도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저, 신의 영역에 남겨진 파편인 것이냐?”
작은 파편의 조각.
아슬란이 후대에 무언가를 전하기 위해 남겨놓은 마지막 안배.
눈앞의 아슬란은 그 정도인 것 같았다.
“반갑지 않아요? 반가우면 막 안아주고 그래야죠.”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이 많지 않은 것 같은데.”
그런데 문득.
빈첸은 아슬란에게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어딘지 모르게…….’
묘하게.
‘율리안과 닮았다?’
육체를 갖추게 된 율리안과 비슷한 구석이 있었다.
골격과 표정과 기세가 너무나 달라서,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이기는 했지만 육안으로 보았을 때는 꽤 닮아 있었다.
아슬란이 빙그레 웃었다.
“형님이 여기 계신다는 것은, 과거이자 미래의 저와 잘 만났다는 뜻이겠군요.”
“…….”
빈첸의 머릿속이 복잡해 졌다.
무슨 말인지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때.
캄캄한 어둠이 빈첸을 덮쳤다.
전에도 경험한 적이 있었다.
‘기억전이?’
많은 기억이 빈첸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 * *
혼란스러웠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율리안이 곧 아슬란이라고?’
율리안의 본래 이름은 ‘빈첸’이었다.
외팔이 데이븐과 만나지 않았던 세계의 빈첸은 원래 생각대로 정령신과 계약했고, 그 힘을 사용하여 아덴카를 지배하기에 이르렀다.
‘이게 도대체 무슨…….’
몇몇 장면들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빈첸이 지배하는 아덴카.
그리고 인류는 유래가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의 태평성대를 맞이한다.
음유시인들은 행복과 사랑을 노래했고, 수많은 이가 낭만을 누리며 즐거워했다.
역사가 기록된 이래로 가장 찬란한 시기라고까지 불렸다.
그러나 그 시기는 그리 길지 않았다.
장면이 바뀌었다.
-지루해졌어. 새로운 육체는 어차피 물 건너간 모양이고. 그냥 다 죽이는 게 좋을 것 같아.
말을 하는 자는 분명히 ‘데이븐’이었다.
데이븐의 부활.
발발한 전쟁.
영웅들의 죽음.
사람들의 절망.
그리고.
멸망한 세계.
‘그 세계에도…… 악몽이 있었고. 악몽의 또 다른 이름은 데이븐?’
500년 전 봉인되었다 알려진 데이븐이 움직였다.
가장 찬란한 순간을 맞이한 인류를 멸종시켰다.
영웅들이 궐기하여 데이븐과 맞섰으나 결국 모두 죽었다.
세상에 단 한 사람이 남았다.
-나를 기억할 자가 한 명은 있어야겠지.
대악마는 단 한 명을 일부러 살려두었다.
모두가 소멸한 그곳에, 살아남은 사람은 빈첸 하나였다.
‘그러니까 내가 보고 있는 이 빈첸은…… 다른 세계의 빈첸, 뭐 그런 건가?’
기억전이를 통해 본 세상은 다른 시간 축의 세계였다.
그 시간 축에서, 율리안이자 아슬란인 빈첸이 홀로 중얼거렸다.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다.
이 세계는 이미 멸망했다.
-첫 단추부터 새로 끼워야 해.
-답은 500년 전, 과거에 있다.
다른 세계의 빈첸은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아주 어린 시절, 정령신을 불러왔던 그때의 집념을 불태우면서.
‘그때보다는 상황이 훨씬 좋지.’
정령신을 받아들였던 덕분에 신의 힘을 다스릴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수많은 시간과 경험을 통해 신의 영역과 권능까지 일부 다룰 수 있게 되었다.
그는 시간을 다루는 신인 크로노티아의 힘을 빌려오기로 했다.
-성공할지는 모르겠다만.
회귀에 성공하지 못한다면, 조각난 시간축에 의하여 온몸이 찢어져 죽을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상관없었다.
어차피 홀로 남은 세계였다.
-돌아가야 한다.
역천의 힘을 다루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정령신과의 계약은 끊어졌고, 몸도 만신창이가 되었다.
그러나 결국 500년 전으로 회귀하는 데에 성공했다.
너무 많은 시간 축을 거스른 부작용 때문에, 모든 것을 기억하지는 못했다.
그저 무의식적인 사명감만이 남아 데이븐을 따랐다.
-나는 커서 형아처럼 될 거야.
시간이 흘렀다.
-형은 죄를 짓지 않았어요.
조금씩, 많은 것들이 생각났다.
자신이 어째서 회귀를 선택하여 시간을 역행했는지도 깨달았다.
-권력은 진실을 이길 수 없어요.
그가 알게 된 데이븐은 결코 ‘대악마’가 아니었다.
그저 최선을 다해 살아가던, 외팔이지만 존경스러운 무인이었다.
시간이 더 흘렀다.
결국 외팔이 데이븐은 사미온의 감옥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세상에는 그렇게 알려졌다.
-아니. 죽지 않았다.
아슬란은 직감했다.
데이븐의 육체는 죽었을지 몰라도, 그 존재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의 눈 앞에 검은색 일렁거리는 기운이 보였다.
-이 섬뜩한 기운은…….
저 기운은 데이븐이 남긴 것이었다.
가문에 대한 원망과 증오.
치가 떨리는 배신감에 물들어 오염된 데이븐의 격.
마주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려왔다.
예상은 하고 있었으나, 데이븐의 타고난 ‘격’은 상상을 초월했다.
이미 인간의 경지를 아득히 뛰어넘었다.
-그래.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지.
저 말도 안 되는 격.
저러한 격을 타고났기에, 외팔이로도 사미온의 천재를 넘어설 수 있었던 것이었다.
그게 당연했다.
-애초에 노력만으로는 넘어설 수 없는 재능의 격차였어.
단순히 노력만으로는 넘을 수 없는 재능을, 격의 차이로 메꾸어버린 것이었다.
-베어야 한다.
저것을 내버려 두면 온갖 악령들이 들러붙을 것이다.
그리고 훗날 ‘악몽’이 되어 세계를 멸망시킬 것이다.
순간.
검은 그림자가 ‘데이븐’의 모습으로 변했다.
데이븐은 울고 있었다.
그래서 아슬란은 데이븐을 베지 못했다.
데이븐의 형상을 하고 있는 ‘격’이 씨익 웃었다.
‘아차!’
아주 짧은 찰나였다.
그러나 그림자는 이미 사라져 있었다.
‘격을 막아야 한다.’
애초에 ‘그것’을 데이븐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그저 ‘악몽’이라 부르는 것이 옳을 것 같았다.
‘우리가 악몽을 만들어낸 거야.’
그간 데이븐이 겪었던 부당한 일들이 격의 오염을 일으켰다.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저렇게 섬뜩한 ‘악몽’이 태어난 것이겠지.
‘악몽을 막을 방법을 찾는다.’
지금 이 순간에도 저 격은 악령들을 흡수하고, 인간들의 부정적인 마음을 집어삼키며 강해지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500년 후.
인류가 가장 행복한 순간을 맞이했을 때, 모조리 부숴 버릴 것이다.
아슬란은 방법을 찾아내기 위해 평생을 바쳤다.
‘악몽을 벨 수 있는 자는, 그와 같은 격을 갖춘 사람밖에 없다.’
아슬란이 경험하기로 그러한 격을 가진 사람은 단 한 명밖에 없었다.
데이븐.
오로지 그 한 사람뿐이었다.
‘형님만이 악몽을 벨 수 있어.’
수많은 것을 안배하기 시작했다.
500년 후에 태어날 ‘빈첸’은 다시금 소환의식을 통해 정령신과 계약할 것이다.
그러면 똑같은 미래가 반복될 것이다.
‘정령신이 아니라 형님이 소환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데이븐을 벨 수 있는 자는 데이븐 밖에 없었으니까.
그것을 위하여 수많은 것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더 흘렀다.
데이븐의 형상을 한 ‘악몽’이 사미온에 스며들었다.
악몽이 사미온을 집어삼키는데에는 한나절밖에 걸리지 않았다.
-내 피를 받아 마셔라. 내 너희를 종으로 받아주마.
사미온은 악몽에게 복종했다.
그의 피를 마시고 그와 계약을 맺었다.
대신 악몽은 사미온의 식솔들을 살려주었다.
‘사미온의 혈육’은 악몽의 그릇이었다.
쓸 만한 그릇이 태어나면 육체를 빼앗았다.
악몽은 스스로 역사를 조작하며 세계의 그림자 속에 몸을 감추었다.
‘악몽’은 교활했고, 역사의 이면에 숨어 많은 것을 조작하고 암약했다.
‘악몽’에게 남은 것은 그저 모두가 불행하길 바라는 마음과 파괴욕뿐이었다.
‘남은 것은 500년을 기다리는 것인가.’
500년이 흘러 또 다른 빈첸이 태어난다면.
그래서 데이븐에게 몸을 내어주는 날이 온다면.
그때 비로소 인류는 새로운 희망을 꿈꿀 수 있을 것이었다.
아슬란이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500년이 흘러, 우리가 여기서 마주한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