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의 정석-170화 (170/184)

환생의 정석 170화

율리안이 작게 말했다.

“어머니의 상태가 이상해요.”

빈첸도 그렇게 생각했다.

베르사는 마치 최후를 향해 걸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미쳐가는 아들을 제 손으로 끝내기 위해서만 걷는 것 같지 않았다.

빈첸을 정신을 집중했다.

빈첸의 세계가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이 공간 전체에 빈첸의 세계가 강림했다.

‘영역 전개.’

빈첸의 기백으로 일구어낸 소우주.

이 우주의 창조자는 빈첸이었고, 이 우주에서 벌어지는 모든 것들이 정보가 되어 빈첸에게 전달되었다.

베르사의 굳은 다짐과 마음도 빈첸에게 전해졌다.

‘어머니는, 휴식을 원한다.’

아덴카를 위하여 수십 년간 달려왔다.

그녀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칸’이라는 버팀목 때문이었다.

그녀는 헬라임 출신이었고, 아덴카의 혈육들과 같은 사명은 없었다.

‘그렇구나.’

아주 잠시나마 베르사가 되어 베르사의 감정과 경험들을 공유했다.

빈첸이 미처 신경 쓰지 못했던 것들이 있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와 정략결혼을 한 것이 아니었다.’

사실 칸이 진심으로 사랑했던 사람은 오직 한 명뿐이었다.

빈첸의 친어머니인 사르비나.

이미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수많은 아덴카의 사람들이 그리워하는 여인.

‘어머니는 내 친어머니의 그늘에 가려 살아왔구나.’

무인 베르사가 아닌, 여인 베르사는 늘 고독했다.

여인 베르사는 칸을 사랑했으나, 칸은 베르사를 동료로서만 대했다.

‘어머니는…… 정략결혼이라 포장된 결혼조차도 기뻐했었다.’

베르사는 사르비나를 무척 좋아했었다.

좋아하는 한편, 또한 미워했었다.

사르비나가 아니었다면 칸이 자신에게 감정을 주지 않을까.

그런 막연한 희망을 품고서.

‘내 친어머니가 죽었을 때, 어머니의 마음은 복잡했었을 거야.’

친구 사르비나가 죽어서 슬펐다.

그렇지만 사르비나의 죽음이 기쁘기도 했다.

그 양가적인 감정을 느끼며 베르사는 자기혐오에 빠지기도 했다.

‘어머니가 처음부터 내게 많은 기회를 줬던 것도, 내 친어머니에 대한 미안함이겠지.’

결국 그녀는 정략결혼으로 포장하여 칸에게 청혼하게 되고, 결국 허울뿐인 결혼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베르사에게 있어서 그 결혼생활은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

그러나 칸의 곁을 떠날 수는 없었다.

어린 시절부터, 칸은 베르사의 모든 것이었다.

그녀가 칸의 옆에 있기 위해서, 그녀는 유능한 안주인이어야만 했다.

그 목표를 위해서만 살았다.

그것이 철혈의 여인 베르사가 탄생한 배경이었다.

‘그런데 이제 세상에 아버지가 없다.’

베르사가 살아왔던 이유가 사라졌다.

‘그리고 가장 아픈 손가락이었던 첫째가 악령계약자가 되어 간다면…….’

그것은 곧 베르사의 세계가 망가진다는 뜻이었다.

이 소우주에서 느껴지는 베르사는 더 이상 거인이 아니었다.

하루빨리 쉬고 싶은, 나약한 여인이었다.

‘카르멘과 함께 죽을 생각이구나.’

빈첸은 그 자리에서 검을 뽑았다.

베르사가 자신이 매듭을 짓겠다 말하였으나, 빈첸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부탁은 한 번 들어드렸습니다.”

빈첸이 허공에 검을 휘저었다.

그것으로 모든 것이 충분했다.

툭.

카르멘의 목이 땅에 떨어졌다.

피는 나지 않았다.

고통에 겨운 비명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냥,

그렇게 끝이 났다.

카르멘의 몸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마치 처음부터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처럼.

이것은 베르사를 위한 빈첸의 배려였다.

베르사에게 있어서 카르멘은 아픈 손가락이었다.

그만큼 마음이 쓰이는 자식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시신을 남기지 않았다.

빈첸은 베르사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베르사의 몸이 잔뜩 굳어 있었다.

“어머니. 제가 어머니를 떠나보낼 준비가 안 되었습니다.”

가까이서 보니, 베르사의 몸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러니 살아주십시오.”

“…….”

베르사는 한참 동안이나 침묵했다.

“내가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하느냐?”

평생을 바라왔던 칸은 죽었다.

첫째 아들도 죽었다.

아니, 아예 소멸해 버렸다.

이제 그녀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커다란 상실감만이 그녀의 마음속에 가득했다.

무망(無望).

그야말로 바라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공허한 상태였다.

빈첸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아덴카를 위하여 살아달라?

어머니 스스로를 위하여 살아달라?

그 어떤 것도 베르사의 마음에 위로가 되지는 않을 터였다.

그런데 그때, 율리안이 으에에엥! 눈물을 터뜨렸다.

쫄래쫄래 뛰어가 베르사의 품에 와락 안겼다.

“어머니, 죽지 마요.”

율리안은 많은 것을 생각하지 않았다.

철저한 논리와 이성만이 전부라고 생각하던 율리안이, 막무가내로 칭얼거렸다.

“죽지 마요. 제발요. 말 잘 들을게요.”

그에게 이유 같은 건 없었다.

그저 어린애처럼 애원했다.

한참의 시간이 흐르고, 베르사가 말했다.

“빈첸. 아니, 가주.”

당장은 왜 살아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많이 흐르면,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 일을 다오.”

* * *

검투의 날이 다가왔으나 카르멘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뭐야, 설마 무서워서 도망쳤나?”

“그러게나 말이야.”

소식지의 기자들은 크게 실망했다.

빈첸이 홀로 6마탑을 굴복시켰다는 소문이 떠돌고는 있으나, 그것을 실제로 믿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너무 허황된 이야기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번 1공자와 빈첸의 대결은, 빈첸의 무위를 증명해 줄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마리아가 빈첸의 집무실을 찾았다.

“어떻게 된 건가요?”

“카르멘은 죽었습니다.”

“……네?”

마리아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었다.

“……왜 그렇게 됐죠?”

“카르멘은…… 하여…… 됐습니다.”

“……그렇군요. 충격적인 이야기네요. 소식지에 실어도 될까요?”

빈첸은 고개를 저었다.

“훗날, 누군가의 상처가 아물고 난 이후에 부탁드립니다.”

누군가를 ‘베르사’라고 지칭하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마리아는 그 누군가가 베르사라는 사실을 눈치챘다.

“빈첸 공자, 아니 빈첸 경은 참 신기한 사람이네요. 가끔은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 같은데, 또 가끔은 누구보다 따뜻한 사람 같아요.”

“칭찬으로 받겠습니다.”

빈첸은 여전히 검은색 제복을 입고 있었다.

칸의 죽음 이후로 벌써 한 달 가까운 시간이 흘렀으나, 빈첸은 여전히 아버지의 죽음을 추모하고 있었다.

“그럼 다음 일정에 대해서 조금 흘려주실 수 있어요?”

“…….”

“에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저를 호출하지는 않았을 거잖아요.”

그런데 그때,

누군가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야! 빈첸! 너 진짜 너무한 거 아니냐!”

마리아는 슬쩍 뒤로 빠졌다.

아덴카 가주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며 이렇게 집무실에 뛰어올 수 있는 사람은 몇 되지 않았다.

긴 붉은 머리와 하얀 피부를 가진 여자였다.

‘헤르카 경?’

붉은 요새의 요새장 헤르카가 뛰어 들어왔다.

그녀는 다짜고짜 빈첸 앞에 서서 말을 쏘아냈다.

“바르곤 경이 얼마나 유능한지 잘 알면서! 바르곤 경을 빼내가면 어쩌자는 얘기야!”

“유능하니까 빼낸 겁니다.”

“야, 제발, 나 바르곤 경 없이는 못 살아.”

“그동안 많이 편하지 않았습니까?”

바르곤의 다크써클이 깊어지는 만큼, 헤르카는 편하게 요새장 생활을 해왔다.

“이제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뿐입니다.”

“아잉, 왜 그래? 내가 미워서 그래? 내가 뭐 잘못해쪄? 웅? 빈첸, 헤르카가 뭐 잘못한 고야?”

헤르카가 몸을 뒤집었다.

여러 차례 몸을 굴려 거리를 벌린 뒤, 벽면에 딱 붙어 섰다.

“야. 아무리 그래도 살의를 날리면 어떡해?”

헤르카의 머리카락 몇 가닥이 잘려 나갔다.

헤르카는 후우- 하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의지만으로 사람을 베는 경지가 있다더니, 그게 진짜였네.”

헤르카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빈첸이 높이 성장할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강해질 줄은 몰랐다.

“아무튼 가주님, 바르곤 경은 저한테 주시면 안 돼요?”

“바르곤 경은 어머니를 도울 겁니다. 아덴카에도 꼭 필요한 인재입니다, 요새장님.”

“애교 부려도 안 돼?”

“다음에는 정말로 죽일 겁니다.”

“힝.”

헤르카는 관자놀이를 긁적거렸다.

“그럼 바르곤 경만큼 훌륭한 행정가를 스카웃해줘.”

“요새장님께서 직접 하십시오. 권한과 비용은 지원해드리겠습니다.”

“진짜? 그럼 나 네 이름 판다? 아덴카 가주가 특별채용하는 거라고 말한다?”

“예.”

헤르카는 그제야 활짝 웃었다.

“탑 외 마법사들 중에 쓸 만한 애들을 이미 몇 봐놨거든. 근데 가주님, 꼭 한 명이어야 하는 건 아니죠?”

“어째 뭐 요구할 때에만 존대하시는군요.”

“어머, 그게 무슨 소리세요? 저는 교양을 아는 요새장인걸요. 호호호! 아무튼 세 명 고용해도 돼요?”

“……그렇게 하십시오.”

“아싸, 사랑해, 빈첸!”

헤르카는 한바탕 소란을 일으킨 뒤 사라져 버렸다.

마리아는 허허- 웃고 말았다.

“바람같이 사라졌네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헤르카 요새장은 가주님의 실력을 본인의 눈으로 확인해 보고 싶었던 것 같아요. 왠지…… 떠나갈 때 표정이 엄청 안도하는 표정이었거든요.”

이 정도 실력을 가졌으니 안심해도 되겠다.

마음이 놓인다.

그런 표정이었다.

“아무튼, 다음 일정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알려주세요.”

“사미온을 찾아갈 겁니다.”

“오, 진짜요? 저 같이 가도 돼요? 혹시 종군기자 표식 받아가야 되나요?”

빈첸은 고개를 저었다.

“이번에는 저 혼자 갑니다.”

“……네? 왜요?”

마리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상식적으로, 기자들을 대동하고 가는 게 맞다.

“지금 시점에서 사미온을 찾는 이유는 빈첸 경의 실력과 무위를 증명하기 위해서가 아닌가요?”

많은 사람들이 빈첸의 무위를 의심하고 있다.

빈첸의 소문이 과장되었다고 생각한다.

이 상황에서 빈첸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패는, 세계의 패자인 사미온가를 찾아 그 무위를 증명하는 것이었다.

“그게…… 아닌가 봐요?”

“다만 중요한 것은, 제가 카곤을 죽였다는 것이겠지요. 그렇다면 남은 은원을 해결해야 합니다.”

카곤과의 격돌로 인하여 아버지인 칸이 죽었다.

그리고 아들인 빈첸은 카곤을 죽였다.

“하지만 그건 악몽에게 지배당한 악령체 같은 거였다면서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카곤을 없앴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카곤이 죽은 건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확실한 건, 카곤이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사미온의 가주인 발키아 사미온은 아들을 잃었고.

“발키아 경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발키아는 거의 한 달째 침묵하고 있다.

그것은 빈첸을 향한 마지막 배려이자, 친우였던 칸의 죽음에 대한 애도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마리아는 인상을 찡그렸다.

“저는 이해가 잘 안 돼요. 이게 어떻게 은원관계가 성립되나요? 오히려 발키아 경은 빈첸 경에게 감사를 표해야 하는 거잖아요.”

“세상에는 머리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이 더러 있는 법입니다.”

베르사를 보면서.

율리안을 보면서.

그러한 이치를 깨달았다.

“사미온은 저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빈첸에게는 사미온을 찾아야 할 또다른 이유도 존재했다.

-사미온가(家)를 넘어서라.

-그리하여 진실과 마주하라.

결국, 진실과 마주하기 위해서는 사미온을 찾아야 했다.

마지막 열쇠가 사미온에 남겨져 있을 것이다.

다음 날.

빈첸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사미온가를 향해 떠났다.

사미온가의 정문에 도착했을 때, 빈첸은 이상함을 느꼈다.

‘뭐지?’

사미온가의 위용에 걸맞은 이 거대한 나무문이 오늘따라 초라해 보였다.

‘지키는 자가 아무도 없다?’

사미온가.

그곳에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무언가 이변이 벌어졌다.’

빈첸이 문을 열고 사미온의 본가에 들어섰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