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의 정석 169화
카르멘은 침을 퉤! 뱉었다.
이곳에 보는 눈은 아무도 없었고, 이목을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너 같은 계집을 보면 빈첸이 다스릴 아덴카가 뻔해.”
그는 세리를 발로 걷어찼다.
세리는 뒤로 넘어졌다.
비명이 나올 뻔했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이따위 조악스러운 협잡질에 놀아나 비명을 지르는 건, 그녀가 모시는 주인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위계질서도 모르고.”
그는 세리의 머리맡에 쪼그려 앉았다.
손을 들어 올려 세리의 볼을 툭툭 건드렸다.
“시녀 주제에 감히 아덴카의 직계를 되바라지게 쳐다보고.”
카르멘은 아덴카와 빈첸에 대한 원망과 분노를 세리에게 모조리 표출했다.
“이 내가 눈빛이 마음에 안 든다고 말했잖아.”
그는 자신의 손바닥으로 세리의 눈두덩이를 덮었다.
“그러면 눈을 깔아야지.”
마력을 일으켜 꾹- 눌렀다.
세리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절대로, 절대로 나는 비명을 지르지 않아.’
세리는 필사적으로 빈첸을 떠올렸다.
빈첸의 격을 기억했다.
빈첸의 격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그래도…….’
무섭기는 했다.
카르멘이 뭘 하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눈이 폭발할 것 같았다.
강한 압력 때문에 눈두덩이가 무너져내리는 것만 같았다.
“살려달라고 빌어봐.”
“…….”
세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빌어보라고.”
카르멘은 더욱 힘을 주었다.
세리의 손끝이 바들바들 떨렸다.
실명의 공포가 코앞까지 다가왔다.
앞으로 영영 빛을 보지 못할 것만 같은 공포감에 사로잡혔다.
‘무서워.’
겉으로 표현하지 않았으나 지극히 무서운 것도 사실이었다.
그녀로서는 처음 겪어보는 공포였다.
그러나 그녀는 공포에 무너지지는 않았다.
겉으로는 차분하게 말했다.
“제 몸은 구속할 수 있어도, 제 정신은 구속할 수 없을 것입니다.”
“……뭐?”
“저는 가주님을 모시는 사람입니다. 그 격에 어울릴 수는 없겠지만, 그 격에 부끄러운 사람이 될 수는 없어요.”
말을 하다 보니 조금씩 공포가 걷혀갔다.
빈첸을 떠올리니 마음이 안정되었다.
“오늘로 확실히 알겠네요. 공자님은 가주님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이 미친 X이.”
카르멘은 순간 진심으로 분노했다.
적당히 겁주고, 적당히 괴롭힐 생각이었다.
검투가 끝날 때까지 빈첸의 심기를 어지럽히면 그만이었다.
시녀의 용도는 딱 그 정도였다.
카르멘이 씨익 웃었다.
“너는 오늘부로 실종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가 지금까지 살아 있을 수 있는 건, 어머니의 간곡한 부탁이 있었기 때문이다.”
빈첸이었다.
* * *
카르멘은 아덴카의 피를 이었다.
객관적으로는 상당히 뛰어난 검술가였다.
그렇지만 정령술에 대해서는 조예가 없었다.
세리가 정령사라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녀가 몰래 폭폭이를 보냈다는 사실도 몰랐다.
“경고. 세리. 위험. 납치.”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던 빈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젠장.’
이건 명백히 자신의 실수였다.
책상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던 율리안은 울상을 지었다.
“죄송해요.”
“네가 죄송할 일은 아니다.”
율리안 또한 최근 바빴다.
사실상 가주로서의 업무를 율리안이 맡게 되었으니, 그 또한 정신적 여력이 많지 않았다.
“어디야?”
폭폭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빠져나오기는 했는데 거기가 어딘지는 알지 못한다는 의미였다.
빈첸이 율리안을 바라보았다.
율리안이 빠르게 답을 내렸다.
“마법으로 보호받는 공간 같아요. 빠져나온 이후로 돌아가는 길을 찾지 못하고 있는 거예요.”
“찾을 수 있는 방법은?”
율리안은 잠시 눈을 감았다.
수만 가지 생각을 해보았다.
몇 초 후.
“장로원의 지하에 답이 있을 거예요.”
아덴카의 가장 은밀한 공간.
빈첸은 그곳으로 향했다.
빈첸은 기세를 방출하여 장로들을 소집했다.
그는 이성과 논리로 장로들을 대하지 않았다.
“만약 카르멘의 비행을 방조한 자가 한 명이라도 있다면, 나는 너희를 모두 죽일 것이다.”
평소라면 반발했을 장로들도 이번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빈첸의 압도적인 기세 앞에서,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하나, 카르멘의 비행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 자가 있다면, 모든 것을 용서하고 같은 죄로는 더 이상 죄를 묻지 않겠다.”
* * *
카르멘은 깜짝 놀랐다.
“네, 네놈이 여길 어떻게?”
이곳은 장로원의 지하에 있는 이동관문을 적절한 순서에 따라 세 번을 타고 이동해야만 하는 아덴카의 안가(安家)였다.
빈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세리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세리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짐이 되어서 죄송해요.”
빈첸이 뒤를 힐끗 바라보았다.
“피다넬 장로. 세리를 가이아 신전으로 안전하게 후송하도록.”
“알겠습니다.”
피다넬이 가까이 다가왔다.
카르멘이 버럭! 소리 질렀다.
“신입 장로! 네놈이 감히!”
“……비키십시오. 장로들도 당신에게서 등을 돌렸습니다.”
빈첸이 마지막 면죄부를 주었던 그 순간, 손을 들었던 장로가 무려 셋이었다.
그들은 모두 카르멘을 지지하던 장로들이었고 이번 일의 주동자들이었다.
주동자 셋이 전부 카르멘을 배신했다.
진심으로 분노하던 빈첸 앞에서, 신의를 지킬 수 있는 장로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카르멘이 발작하듯 말했다.
“멈춰.”
피다넬은 곤란하다는 듯 발걸음을 멈추었다.
빈첸이 말했다.
“후송해.”
“멈추라고 했어.”
피다넬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같은 공간에서, 일시에 명령을 내리고 있는데, 명령의 격이 달랐다.
빈첸의 음성에는 감히 항거할 수 없는 어떤 위엄이 담겨 있었다.
그는 카르멘을 무시하고 세리를 업었다.
“멈추라고 했잖아, 이 개자식아!”
카르멘은 검을 휘둘렀다.
피다넬의 등을 향해.
세리와 피다넬을 동시에 꿰뚫을 기세였다.
아덴카의 쾌검이었다.
“초대가주께서 남기신 검은 이런 검이 아니었을 텐데.”
카르멘의 어깨에서 피분수가 솟았다.
쾌검을 내지르던 그의 팔이 바닥에 나뒹굴었다.
‘어…… 언제?’
카르멘은 빈첸의 발검을 보지 못했다.
검풍조차 일지 않았다.
‘아니. 검을 뽑지 않았다?’
검을 뽑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러니 이 상황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무슨 더러운 짓을 벌인 거냐!”
카르멘은 이성을 잃고 빈첸을 향해 달려들었다.
빈첸은 카르멘을 피하지 않았다.
그 자리에 서서 카르멘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이, 이……!”
그런데 카르멘은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벽에 가로막힌 것 같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곳에 벽 같은 건 없었다.
마법을 사용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움직일 수 없었다.
거대한 악마가 눈앞에 있는 것 같았다.
‘제, 젠장……!’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압도적인 대자연을 마주한 기분.
아버지를 마주할 때도 이런 패배감은 느껴본 적이 없었다.
세리를 업고 뒤돌아 나가던 피다넬이 뒤를 힐끗 바라보았다.
‘격에서 그저 압도되었다.’
빈첸 앞에서 숨 쉬는 것조차 두려워하고 있었다.
카르멘의 존재가 빈첸의 존재에 짓눌렸다.
‘나참. 살아생전에 저런 기현상을 보게 될 줄이야.’
결국, 카르멘은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미안하다. 내 생각이 짧았다.”
“…….”
카르멘은 겁에 질려 벌벌 떨었다.
보는 사람이 없는 이 공간이 그에게는 두려움의 공간이었다.
구해줄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뜻이었으니까.
“혈육의 정을 생각해다오. 나는 그저 장난이었다.”
“…….”
“네가 이토록 강하니, 그냥 조금 심기를 어지럽히고 싶었을 뿐이었다.”
빈첸 뒤에 숨어 있던 율리안이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으, 형님, 어디서 냄새 안 나요?”
그는 코를 틀어막고 인상을 잔뜩 찡그렸다.
“무슨 냄새 말이냐?”
“비겁한 냄새요. 에베베베.”
율리안이 킥킥대며 울었다.
카르멘은 당장에라도 율리안의 목을 베어버리고 싶었으나, 감히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지금은 그저 무릎 꿇고서 동생에게 용서해달라 비는 수밖에 없었다.
그게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빈첸이 말했다.
“어머니께 감사해라.”
베르사의 부탁이 아니었다면 죽였을 것이다.
빈첸이 보는 카르멘은 아덴카의 수치였다.
카르멘은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어머니께도 감사인사를 올리겠다.”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서서 잘려나간 팔을 주워들었다.
절단면이 워낙 깨끗해서 신전에 가져가면 완벽하게 붙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율리안이 말했다.
“어허, 팔은 내려놔야지.”
“…….”
“죽이지 않겠다고 했지, 팔까지 허락한단 말은 안 했거든요?”
카르멘이 노려보자 율리안은 빈첸의 뒤에 숨었다.
“저놈은 누구냐?”
“알 거 없다.”
“그래도 나는 네 혈육이다. 네 혈육이 저런 놈에게 능욕당해도 된단 말이냐?”
빈첸이 숨을 짧게 내쉬었다.
“한 번만 더 혈육이라는 말을 입 밖에 내면, 나는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것이다.”
카르멘은 딸꾹질을 시작했다.
압도적인 강함 앞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몇 되지 않았다.
“미, 미안하다.”
“팔은 네 마음대로 해.”
그 말에 카르멘은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절망 속에서 한 줄기 희망을 본 것만 같았다.
“고, 고맙다!”
빈첸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서 율리안이 대신 말해주었다.
“어차피 신전에 갖고 가도 안 붙을걸?”
“……뭐?”
“형님이 맘먹고 베었는데, 그걸 어떻게 붙이겠어?”
“…….”
카르멘은 자신의 팔을 살펴보았다.
절단면이 깨끗한 것에만 신경 썼는데, 정신을 집중해 보니 뭔가가 달랐다.
‘설마…….’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빈첸의 검을 직접 본 것도 아니었고, 그저 빈첸의 검에 당한 상처를 바라보았을 뿐이었다.
그런데 깊은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빈첸이 남긴 검의 흔적조차 그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아.”
카르멘은 자리에 엎드려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빈첸과 율리안은 몸을 돌려 밖으로 빠져나갔고, 카르멘은 한참 동안 울었다.
“또다, 또.”
그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다.
“늘 이런 식이었다.”
평생을 데이아와 비교당하며 살아왔다.
1공자였던 그는, 더 뛰어난 재능을 가진 2공녀인 데이아에게 지지 않기 위해 평생을 노력해 왔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는 데이아를 뛰어넘을 수 없었다.
그는 평생을 패배감 속에 살아왔다.
그리고 오늘 그 패배감의 정점을 찍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큰 패배감을 선사한 사람은 데이아가 아니라 빈첸이었다.
그 자리에 엎드려 한참을 울었다.
그런데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해지고 싶나?”
그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달콤한 목소리였다.
“누구냐!”
그는 본능적으로 악령의 목소리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과거, 말론이 악령과 계약했다는 사실에 크게 비웃었었던 카르멘이다.
그런데 오늘은 저 목소리를 거부하기 힘들었다.
“네게 힘을 주겠다.”
“닥쳐라!”
그는 왼팔로 검을 주워들었다.
악령과 계약할 수는 없었다.
그건 아덴카 1공자의 마지막 자존심이었다.
“빈첸까지는 모르겠고, 데이아는 죽일 수 있게 해줄게.”
카르멘의 몸이 움찔했다.
저 말은 비교적 현실적인 말이었다.
“네 고통을 조금은 알려줘야지.”
“…….”
“그리고 너를 배신한 장로들에게 배신의 대가를 치르게 만들어야지.”
점차,
카르멘의 눈이 검게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그의 마음속에 살의가 들끓었다.
“죽인……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분노는 빈첸을 향하지 않았다.
그가 분노한 대상은 데이아와 장로들이었다.
그리고 한 명 더.
어머니인 베르사였다.
어려서부터 베르사를 원망했다.
이럴 거면 나를 둘째로 낳지.
왜 첫째로 낳아서 이토록 나를 절망하게 하는가.
그는 베르사를 원망해 왔다.
그런데 그때 베르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날이 오지 않기를 바랐다.”
베르사의 눈에 눈물이 고여 있었다.
그녀의 오른손에는 검이 들려 있었다.
“빈첸. 내 부탁을 들어주어 고맙구나.”
8성 무인.
베르사가 카르멘을 향해 걸었다.
“매듭은 내가 지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