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의 정석 166화
“으허어어어엉!”
율리안이 엉엉 울었다.
평생 아버지를 두려워했고, 아버지에게 인정받기 위하여 절실하게 노력해 왔던 율리안이었다.
그저 ‘아들’이라는 한 마디에 펑펑 울었다.
사실 율리안이 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할 논리적인 이유 같은 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리안은 목놓아 울었다.
빈첸은 히끅대는 율리안을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아버지의 우주가 사라지지 않는다.’
이것은 존재의 격을 토대로 만들어진 새로운 세계.
그 존재가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사라지지 않았다.
그만큼 칸의 격이 남달랐다는 의미였다.
‘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할 시간은 충분하겠지.’
시기의 문제일 뿐.
이 세계는 사라진다.
아버지가 창조한 세계는 사라지고, 원래의 세계로 돌아갈 것이다.
그곳에는 카곤이 있을 것이다.
한참 동안 눈물을 흘린 율리안이 입술을 깨물었다.
“형님, 나 왜 슬퍼요?”
“원래 그런 것이다.”
“이제 다시는 아버지 못 보죠?”
빈첸이 고개를 끄덕였다.
빈첸의 눈 또한 여전히 붉어져 있었다.
율리안에게는 슬퍼하지 말라 하였으나 빈첸 또한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찰랑거리는 느낌이었다.
빈첸이 검을 들어 올렸다.
“아버지께서 이 검의 이름을 칸이라 명하셨으니, 나는 칸과 함께 나의 사명을 다할 것이다.”
조금씩 세계가 옅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원래의 세계가 느껴졌다.
‘다르군.’
6마탑의 존재.
카곤의 존재.
모든 존재들이 빈첸의 존재에 느껴졌다.
시각, 청각, 촉각 등과는 개념이 달랐다.
모든 것들이 정보화되어 존재 자체에 전달되는 느낌이었다.
보지 않아도 볼 수 있었고.
듣지 않아도 들을 수 있었다.
거짓말을 조금 보탠다면, 전지전능의 권능을 얻은 것만 같았다.
빈첸이 말했다.
“율리안. 네게 부탁할 것이 있다.”
“……뭔데요?”
“아버지의 시신을 온전히 지켜라.”
율리안에게서는 강한 신성력이 느껴졌다.
어쩌면 1급 신관이자 성왕의 선택을 받은 둘란보다 더한 신성력이었다.
승격한 율리안의 힘이라면, 아버지의 시신을 지킬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것이 내 유일한 부탁이다.”
“형님이 부탁 안 해도…….”
율리안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신력을 끌어 올렸다.
“그렇게 할게요.”
아버지의 시신만큼은 온전히 보존하기로 마음먹었다.
빈첸이 고개를 끄덕였다.
율리안의 모든 것이 느껴졌다.
정신적으로 연결되어 있을 때보다 더 격렬한 감정이 전해졌다.
‘그래.’
저 진심이라면.
저 의지라면.
아버지의 시신을 지키는 일 정도는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카곤의 기운이 강하게 느껴진다.’
심장이 아릿아릿했다.
백익이 꽂혔던 그 자리였다.
‘아버지.’
빈첸의 사명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진실을 마주하라는 그 사명을 이루기로 했다.
그의 왼손에 들린, 아버지의 이름을 수여받은 ‘칸’과 함께.
칸의 세계가 사라졌다.
카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잔재주를 부리는구나!”
카곤의 묵검이 칸의 심장을 찌르려하고 있었다.
아마도,
칸이 일군 세계의 시간이 너무 빨라서, 이쪽 세계 시간은 정지해 있었던 것 같았다.
카곤의 시점에서는 칸이 ‘동귀어진’이라고 말을 한 직후였다.
카곤은 빈첸의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카곤에게 있어서 빈첸은 죽어가는 반송장이나 다름없던 상태.
‘응?’
그런데 이상했다.
빈첸이 새로운 검을 쥐고 있었다.
그 검으로 카곤의 검을 막아냈다.
순간 카곤은 컥! 하고 신음성을 냈다.
‘엄청난 반탄력이다.’
깜짝 놀란 그는 황급히 거리를 벌렸다.
직접적인 데미지는 없었으나 심적으로 굉장히 많이 놀랐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거냐?”
그는 인상을 찡그렸다.
방금까지 서 있었던 칸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칸은 왜 죽었지?”
“그분께서는 아덴카의 사명을 택하셨다.”
카곤이 실실 웃었다.
“너, 강해졌구나?”
“…….”
“아비를 잡아먹고 강해진 건가?”
이내 그는 푸하하핫! 웃음을 터뜨렸다.
“천하의 아덴카가 흑마법에 손을 대는구나! 말세다, 말세야.”
“…….”
이는 흑마법이 아니었다.
사람의 생명을 소모시켜 자신의 영달을 꿈꾸는 그런 것과는 본질적으로 달랐다.
“왜 말이 없어?”
“나는 아덴카의 31대 가주로서, 선대 가주들의 숭고한 의지를 받들 것이다.”
“뭐라는 거야?”
“널 죽이겠다는 거야.”
빈첸의 눈이 가늘어졌다.
순간적으로 살의가 폭발했다.
카곤이 황급히 검을 휘둘렀다.
그가 벤 것은 허공이었다.
‘내가 왜?’
그저 살의에 반응해서 저도 모르게 몸이 움직였다.
‘어?’
정신 차려보니 그의 오른손이 땅에 떨어져 있었다.
그가 손에 들고 있던 묵검도 마찬가지였다.
검을 쥔 손이 땅에 나뒹굴었다.
‘피가…… 나네?’
멍하니 피분수를 바라보았다.
피 몇 방울이 그의 볼에 닿았다.
그는 잘리지 않은 왼손을 움직여 자신의 볼을 만져보려 했다.
‘안 움직여.’
볼을 만지려고 했는데 만져지지 않았다.
고개를 내려서 팔 쪽을 바라보았다.
‘왼팔이 없네?’
너무나 비현실적이었다.
비현실적이어서 인지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내,
그의 왼 어깨에서도 피가 솟구쳤다.
“뭘 한 거냐?”
“네 정체가 뭐냐?”
둘은 서로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빈첸이 카곤을 향해 걸어갔다.
카곤은 본능적인 두려움에 사로잡혀 뒷걸음질 쳤다.
“다, 다가오지 마라!”
빈첸의 모습에 칸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다가오는 사람은 한 사람인데, 두 명의 거인이 다가오는 기분이 들었다.
카곤은 공포감과 무력감에 사로잡혔다.
“다, 다가오지 말라고 했어.”
카곤은 그나마 남은 오른팔을 휘둘렀다.
그의 손목에 마나가 맺혔고, 그 마나는 하나의 마법이 되었다.
파괴력을 갖춘 마나가 소용돌이치며 율리안 쪽을 향해 쏘아졌다.
칸의 시신을 노려 시간을 벌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율리안은 눈을 똑바로 뜨고 마법을 바라보았다.
‘흥!’
저깟 마법 따위.
내가 막는다!
그렇게 생각했으나, 막상 그가 할 일은 없었다.
‘엥?’
마법이 잘렸다.
빈첸은 가만히 있었는데도 마법이 토막 나서 사라졌다.
이쯤 되면 마법의 존재 자체를 모조리 베어버린 것과 같았다.
율리안은 저도 모르게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저건 마법을 벤 것이 아니었다.
‘의지를 일으켜서 공간을 베었어.’
마법이 존재하는 공간 자체를 베어버렸다.
공간이 없으니, 마법도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었다.
공간째로 토막 난 마법은 힘을 잃고 소멸했다.
“너를 죽인 자를 기억해라.”
빈첸은 왼손에 힘을 주었다.
의지로 베어도 벨 수 있겠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의 심장에 맺힌 9개의 심상을 내버려 두지 않았다.
“이 검은 초대가주 아슬란께서 창안하여, 30대 가주 칸 아덴카에 의해 전승되었다.”
아덴카 정검 8식.
비상검화(飛上劍花).
뇌력도 연환하지 않았다.
그저 정직하게 아덴카의 정검을 운용했다.
아덴카의 검.
그것으로 카곤을 베었다.
빈첸의 몸이 마탄처럼 쏘아졌다.
그의 몸과 대기의 마나가 공명하여 진동했다.
마치 거대한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 같았다.
본질을 잊지 않은 9성의 경지는 8성의 성취와는 궤를 달리했다.
카곤은 단말마를 내질렀다.
“마, 말도 안 돼!”
카곤의 몸이 백광에 둘러싸였다.
검상은 보이지 않았다.
그의 몸이 백광에 잠식되어 사라지기 시작했다.
백광에 불타는 것 같았다.
그의 몸과, 그를 둘러싼 세계가 하얗게 물들기 시작했다.
이것은 또 다른 형태의 ‘영역 전개’였다.
그와 그의 세계가 거의 동시에 소멸했다.
카곤의 몸은 이제 절반도 남지 않았다.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한 것처럼 물었다.
“도대체…… 뭘 어떻게 한 거냐?”
“네 세계가 아덴카의 세계에 패배했을 뿐이다.”
카곤이 피식 웃었다.
“그렇게 믿는 거냐?”
“그렇게 만들 것이다.”
빈첸은 카곤이 끝이 아님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놈은 악몽에 실체에 근접한 놈일 뿐, 악몽의 실체는 아니었다.
이내 소멸을 깨달은 카곤은 재미있다는 듯 깔깔대며 웃었다.
“그분께서도 퍽 놀라시겠군.”
“그분?”
“아니지.”
빈첸은 의지를 일으켜 카곤의 소멸을 잠시 멈추었다.
카곤은 이런 것도 가능하냐며 또 낄낄대고 웃었다.
“그 새끼한테 500년간 충성한 것만 생각하면 아직도 이가 갈려.”
빈첸은 지금 자신이 펼친 세계에 커다란 충격이 전해지고 있음을 직감했다.
이것 또한 ‘금제’인 것 같았다.
카곤이 말하는 ‘그분’이 걸어놓은 금제.
그것이 카곤에게 강하게 작용하고 있었고, 그 힘이 빈첸의 세계와 충돌하고 있었다.
카곤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어라? 내가 아직도 살아 있네? 너 진짜 물건이구나.”
그의 표정은 굉장히 즐거워 보였다.
실제로 그는 즐거웠다.
큰 해방감을 느끼고 있었다.
500년을 발버둥 쳐도 벗어나지 못했던 ‘금제’의 힘이 지금은 빈첸의 세계에 가로막혀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었다.
말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말하기로 했다.
“너도 기억해라. 네가 죽인 자가 영웅왕임을.”
그는 아쉽다며 중얼거렸다.
카곤의 육체가 꽤 쓸 만한 그릇이었다면서 말이다.
“영광으로 알라고. 날 패배시킨 자는 한 명밖에 없었어.”
“외팔이 데이븐을 말하는 거냐?”
“그래.”
그나마 남아 있던 카곤의 얼굴에 쩍- 쩍- 금이 가기 시작했다.
카곤도 거의 한계에 이르렀다.
“아무튼, 데이븐 그 새끼를 죽여. 그 새끼가 곧 악몽이니까.”
거기까지 말한 카곤의 얼굴이 산산이 부서졌다.
* * *
세리는 손톱을 물어뜯었다.
윌슨은 너무 무서워서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그들은 현재 마탑의 마법사단에 의하여 생포된 상태.
“누, 누나. 우리 괜찮겠지?”
“걱정 마. 공자님께서 구하러 오실 거야.”
그들 입장에서는 충격의 연속이었다.
갑자기 2공녀 데이아가 나타나서 결계 안으로 들어갔고, 이후 칸이 그녀를 안아 들고 밖으로 나왔다.
호법당의 무인들이 그녀를 안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후,
칸이 다시 결계 안으로 들어간 이후 감감무소식이었다.
그 와중에 마법사단이 세리와 윌슨을 잡아들였다.
생포된 사람은 그 둘뿐만이 아니었다.
“저는 기자라고요. 이거, 표식 안 보여요?”
“조용히 좀 해라.”
“자유 언론을 탄압한 대가를 혹독하게 치르게 될 겁니다!”
6마탑의 마법사단장 알베르토는 인상을 찡그렸다.
“마지막 경고요.”
알베르토는 마법 결계 쪽을 바라보았다.
그는 빈첸과 나름대로 많은 접점이 있었다.
빈첸과 카곤의 친선 교류회를 주도했었고, 헬라임의 조사단으로 파견되었던 조사단장이기도 했다.
‘빈첸. 네놈과의 악연도 여기서 끝내자.’
데이아에 이어 칸까지 모습을 드러냈을 때.
사실 알베르토도 크게 놀랐었다.
그러나 안에서 충분한 시간이 흘렀다.
그는 헬리오스의 ‘영역’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들을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빈첸의 기운이 먼저 사그라들었다.
칸의 기운마저도 거의 사라졌다.
‘마탑주께서 결국 해내신 건가?’
그는 헬리오스의 기운과 카곤의 기운을 구별하지 못했다.
중요한 것은 빈첸과 칸의 기운이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마탑의 승리구나!’
그렇게 직감하고 있을 무렵.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갑자기 상상하지도 못했던 존재감이 ‘영역’을 가득 채웠기 때문이었다.
‘누구지?’
칸보다 더욱 강대한 세계를 일구는 힘이었다.
그가 알기로 이 정도 힘을 내뿜을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사미온가의 가주조차도 이런 영역을 전개할 수는 없으리라고 생각했다.
‘묘하게 익숙한데?’
그 익숙한 기운이 헬리오스의 세계를 단숨에 집어삼켰다.
이내,
마탑의 결계가 모조리 부서졌다.
술식 하나하나가 끊겨 나갔다.
부서진 것이 아니라 소멸했다.
“사, 사단장님!”
“저, 저, 저, 저기 보십시오! 마, 마탑이!”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마탑이 스르르 미끄러지고 있었다.
“마, 말도 안 돼……!”
무엇인가 날카롭고 예리한 것에 베어진 것처럼 말이다.
저 거대한 마탑이.
온갖 마법으로 보호되고 있는 마법방벽이 잘려나갔다.
그리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희들이 억압하고 있는 자들이 아덴카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느냐?”
누군가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그의 왼손에는 백색으로 빛나는 검이 들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