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의 정석 159화
“해당 오류가 존재하는 수식은 바르곤 경의 누이인 바르넬리 경께서 만들어 넣으셨다는 기록이 여기 존재하는군요.”
중요한 건 그 다음이었다.
“제 생각에, 그분께서는 일부러 이런 실수를 저지르신 듯합니다.”
“……왜 그렇게 생각했느냐?”
“6마탑에서 자신이 만들어낸 수식을 가지고 허튼짓을 벌일 거라는 것을 예상하셨고, 일종의 코드를 심어놓은 것이라 판단됩니다.”
말을 마친 빈첸이 속으로 물었다.
‘무슨 말이냐?’
-그냥 쉽게, 바르넬리 경이 함정을 팠단 얘기에요.
바르곤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왜 그러십니까? 혹시 제 말이 틀렸습니까?”
“아니. 틀리지 않았다.”
바르곤은 아공간을 열어 종이 한 장을 더 꺼냈다.
“이것은 내 누이가 내게 남긴 유언장이다. 당시 나는 누이를 원망했었다. 나는 누이가 나를 부끄러워한다고 생각했었고, 왜 이렇게 우스꽝스러운 유언장을 남겼는지 의아해했었다.”
빈첸이 종이를 받아들었다.
유언장 뒤편에 의미 없는 낙서들이 존재했다.
“방금 오류가 있었던 수식이군요.”
“그래.”
바르곤이 입술을 깨물었다.
“이 유언장은 누이가 죽기 10년도 전에 만들어진 유언장이다.”
“…….”
빈첸도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러니까,
바르넬리는 10년도 전에 오늘을 어느 정도 예견했다는 뜻이었다.
바르곤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많이 성장한 줄 알았건만, 나는 여전히 멀었구나.’
바르곤이 말을 이었다.
“결과값이 마법결과에 거의 영향을 끼치지 않는 수준의 실수가 담긴 수식이다. 6마탑 놈들이 신경조차 쓰지 않을 정도의 미세한 오류 말이다. 누님은 검산에도 잡히지 않을 정도의 작은 오차가 담긴 수식을 내게 남겼다.”
그리고 6마탑이 그 수식을 그대로 사용하여 흔적을 남겼다.
바르곤과 탑 외 마법사들이 그것을 발견했고.
“고맙습니다, 스승님.”
“응당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
바르곤이 돌아간 뒤 빈첸은 홀로 앉아 명상에 잠겼다.
‘6마탑을 파헤쳐야 해.’
아덴카의 4대 장로.
그리고 6마탑주를 비롯한 마탑의 수뇌부들도 악몽의 편에 서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잘못된 건지 감조차 안이 안 와요.
‘하나하나 풀어 가야지.’
그리고 이틀 뒤.
빈첸은 칸의 허락을 받아 정식으로 6마탑에 서신을 보냈다.
6마탑을 직접 찾아 의심스러운 것들을 해소하겠다는 뜻이 담긴 서신이었다.
다시 이틀 뒤.
답신이 도착했다.
-이게 진짜 6마탑에서 온 답신이라고요?
율리안은 답신의 내용에 경악했다.
그들은 빈첸의 방문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며, 마탑의 허락 없이 마탑을 찾으면 마탑의 모든 힘을 동원하여 공격하겠다는 경고가 담겨 있었다.
-그, 형님이 아버지의 허락을 받아서 서신을 보냈다는 걸 분명히 썼었죠?
율리안은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분명히 썼었다.
-이건 아덴카랑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뜻인데요? 거의 선전포고에요.
‘이들이 이렇게까지 할 이유가 있나?’
-없죠. 여태까지 그래왔듯 적당히 꼬리 좀 자르고 말면 되었을 텐데요.
빈첸과 율리안은 동시에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둘은 이미 이와 비슷한 상황을 바로 며칠 전 경험했었다.
굳이 무리해 가면서까지 빈첸을 죽이려들 이유가 없던 피다넬 장로가 빈첸을 죽이려고 했었다.
그와 비슷한 상황인 것 같았다.
‘어쩌면 완전한 본심이 아닐 수도 있겠군.’
-악몽의 개입이 있을지도 몰라요.
율리안의 목소리가 진지해졌다.
-그렇게 오랜 시간 숨죽여 왔는데 갑자기 적극적으로 움직임을 보이는 것 같아요. 아무리 실체가 조금 드러났다고는 해도. 너무 과해요.
빈첸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들에게도 매우 급박한 사정이 있거나.’
-그도 아니면 이제 준비가 다 끝났거나요.
둘 중에 하나였다.
-제발 급한 사정이 있는 것이길 바라야겠네요.
* * *
이틀 전.
헬리오스는 책상을 쾅! 내리쳤다.
“당연히! 나도 빈첸 그놈을 죽여 버리고 싶소! 그놈 때문에 우리도 피해가 얼마나 큰지 당신도 알고 있지 않소! 헬라임에서의 연구도 완전히 폐기됐다고!”
헬리오스는 책상 건너편 의자에 앉은 소년을 바라보았다.
겉보기로는 무척 어려 보였으나 헬리오스는 그 소년이 어리지 않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소년의 겉모습은 여태까지 세 번 바뀌었다.
헬리오스가 10살 무렵에 한 번. 50살 무렵에 한 번. 마지막으로 약 5년쯤 전에 한 번 바뀌었다.
소년이 다리를 꼬고 앉은 채 헬리오스를 바라보았다.
“두 번 말하지 않아. 놈을 죽여.”
소년은 6마탑주를 앞에 두고서도 여유롭게 실실 웃었다.
그가 요구하는 것은 딱 하나였다.
빈첸의 죽음.
“이건 아덴카와의 전쟁으로도 이어질 수 있소.”
“그것참 큰일이군.”
소년은 아무래도 상관없는 듯했다.
“뭐가 그리 두렵지, 헬리오스?”
“6마탑이 멸망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란 말이오.”
“그 또한 내가 쥐어준 것이지.”
소년이 손가락을 한 번 튕겼다.
헬리오스가 크아아악! 비명을 지르며 목을 움켜쥐었다.
“그, 그, 그만!”
헬리오스의 눈이 붉게 충혈되었다.
이 고통이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지만, 이보다 훨씬 두려운 것이 있었다.
이 고통은 자신에게만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세 아들과 두 명의 딸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형벌이었다.
그중 한 명의 아들은 어린 시절 이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
“우리 인간이란 참 어리석은 존재야. 가끔 이렇게 혼을 내야만 자기 잘못을 깨닫거든.”
소년의 몸이 사라졌다.
어느새 소년은 헬리오스의 뒤에 서 있었다.
그가 헬리오스의 귀에 속삭였다.
“네가 가진 모든 것들은, 내가 허락했기에 가질 수 있던 것이었다.”
“…….”
“내가 허락했기에, 네가 살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헬리오스는 대답하지 못했다.
저 말이 사실이었으니까.
이것은 ‘피에 새겨진 운명’이었다.
태어나면서부터, 그는 저자를 주인으로 섬기게 되어 있었다.
저자가 명령하면 그와 그의 핏줄은 피를 토하고 죽었다.
“그러니 빈첸을 죽이고 장렬히 전사하도록 해.”
소년이 키득키득 웃었다.
“그러면 네 피에 담긴 저주를 없애주지.”
“…….”
“다섯 명의 네 자식들은 자유를 얻게 될…… 아니지, 한 녀석은 죽었으니까, 네 명의 자식들은 자유를 얻게 될 거야.”
헬리오스의 눈이 붉게 물들었다.
자유.
그가 그토록 갈망해 왔던 것이었다.
“거짓말은 아니겠지?”
“아니라는 걸 너도 느끼고 있을 텐데?”
“…….”
헬리오스는 결국 펜을 들었다.
‘내가 이러한 내용의 답신을 보내더라도…… 빈첸은 6마탑으로 향할 것이다. 내가 빈첸을 죽이고 나면, 아덴카는 모든 힘을 동원하여 나를 죽이겠지.’
그렇게 하면,
‘내 자식들은 자유를 얻게 된다.’
늙은이의 목숨으로 자식들에게 자유를 줄 수 있다면.
그건 그것 나름대로 꽤 괜찮은 거래였다.
수백 년을 이어온 혈통의 저주를 끊어낼 수 있는 좋은 거래.
“하나만 묻자.”
“뭐지?”
소년은 또 어느새 의자에 앉아 있었다.
마탑주 헬리오스조차 소년의 기척과 움직임을 전혀 읽을 수 없었다.
읽을 수 있는 거라곤 그저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올라오는 기이한 공포감과 불길함뿐이었다.
“그간 악몽을 파헤치려던 자들은 많았어. 그러나 그들은 모두 죽었고, 악몽에 관한 얘기는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졌었지. 그런데 왜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지?”
그가 소년을 알게 된 지는 벌써 60년이 넘었다.
소년에게 굴종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지는 30년이 넘었다.
어쨌든 그토록 긴 시간 동안, 소년은 단 한 번도 ‘악몽’이 세상을 드러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었다.
“아주 오래된 준비가 끝났거든.”
“아주 오래된……?”
“글쎄. 한 500년쯤 된 것 같군.”
소년이 킥킥 웃었다.
그의 붉은 눈동자에 기이한 욕망이 일렁이고 있었다.
* * *
빈첸은 다시금 답신을 보냈다.
6마탑의 허가와는 상관없이, 6마탑으로 향하여 진상을 밝히겠다는 내용이었다.
이 소식은 실시간으로 대륙에 전해졌고 수많은 사람들의 이목이 빈첸과 마탑에 쏠렸다.
셀비라가 황급히 빈첸을 찾아왔다.
“빈첸! 아직 안 떠났지! 하, 다행이다. 아직 있었네.”
“셀비라?”
셀비라는 헥! 헥!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잠깐만, 숨 좀 돌리자.”
후, 하, 후, 하.
숨을 돌린 그녀는 다짜고짜 말했다.
“빈첸. 역사적으로 마탑의 경고를 받고 무사했던 자들은 거의 없었어.”
“나도 알아.”
“6마탑이 대놓고 네게 경고를 한 시점에서 이대로 가는 건 너무 위험해. 그들은 진짜로 널 공격할 거라고. 차라리 심판의 탑으로 사건을 넘기는 게 어때?”
“심판의 탑도 믿기 좀 어려운 상황이라.”
빈첸이 어깨를 으쓱했다.
누구를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
누가 ‘악몽’과 연결되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태양검제 아슬란이 정말 많은 것을 준비하고 안배했듯, 악몽 또한 그랬다.
셀비라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어차피 말려도 가겠네.”
이번에는 셀비라가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아는 빈첸이라면 늘 최악의 최악까지 대비하고 움직이니까. 내가 더 말릴 수는 없어. 난 늘 빈첸을 믿어. 넌 내가 여지껏 본 모든 남자들 중에 제일 멋있거든.”
“칭찬에 맥락이 좀 없는 것 같은데.”
“아무튼 널 신뢰한다는 얘기야.”
셀비라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결심한 듯 말을 꺼냈다.
“나이메르 경과 함께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중간중간 끊긴 부분들이 존재해. 이를테면 용왕이 활약했던 200년 전. 그때까지만 해도 인간 세계에서 함께 어울려 살았던 용아인들은 어쩐 일인지 용림으로 들어갔어. 그런데 그 누구도 그 이유를 몰라. 심지어 나이메르 경조차도.”
“…….”
“아니. 그 이전부터 얘기해야겠다.”
셀비라는 500년 전 이야기를 먼저 꺼냈다.
“네가 이미 알고 있듯, 세상에는 잊혀진 영웅들이 존재했는데 말이야. 그들은 공통적으로 무언가를 찾고 있었대.”
용 아넬린.
히슬리가의 베사툴.
그들은 역사에서 완전히 지워졌다.
“근데 뭘 찾았는지는 기록이 안 되어 있었어.”
“뭘 찾고 있었다는 사실은 어떻게 알았어?”
“네가 가르쳐줬었잖아. 아덴카의 방계에 단서들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찰스 아덴카.
그 먼 혈족의 비밀 창고에 ‘히슬 리가’와 관련된 내용이 숨어 있었다.
“그래서 아덴카 방계의 사람들을 여럿 만나서 조사해 봤거든. 정보들이 마구 조각나 있더라고. 이를테면 이런 식인데 말이야.”
셀비라는 잠시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히슬리가가 만들어낸 마력체가 무엇으로부터 기인한 건지 알아?”
“알고 있어.”
“진짜 알아?”
“용.”
“헐. 진짜 아네.”
셀비라는 어이없다는 듯 허허 웃었다.
하지만 빈첸이라면 그럴 수 있지, 라면서 비교적 쉽게 납득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힘을 전해준 존재가 백룡이었대.”
한 아덴카 방계에 그러한 기록이 있었고.
또 다른 방계에 이러한 내용이 있었다.
[500년 전 인간을 아주 사랑한 백룡이 있었다.]
정보들이 조각난 채 흩뿌려져 있었다.
[인간을 사랑했던 백룡은 인간에게 선물을 주었다.]
[인간에게 과한 힘을 선물한 대가로 백룡은 멸종했다.]
백룡이 멸종한 시기는 빈첸도 알고 있었다.
대장장이 한센이 가르쳐줬었으니까.
그게 바로 500년 전이었다.
“500년 전부터, 뭔가가 뒤틀리고 이상한 느낌이었어. 나는 나이메르 경과 함께 열심히 공부했고 내 나름대로 결론을 얻을 수 있었어.”
“그게 뭔데?”
“의도적으로 기억을 지우거나 역사를 조작할 수 있는 어떤 미지의 힘이 있다.”
“…….”
“말이 안 되는 거 알아. 그런 허무맹랑한 힘이 어디 있겠어? 하지만 그렇지 않고서야 조각들이 연결되지 않아.”
“…….”
“놀랍게도, 그 미지의 힘을 막기 위한 시도는 수백 년간 계속되어 왔어. 예를 들면 이런 거.”
셀비라가 아공간을 열어 책 한 권을 꺼냈다.
그런데 문득, 셀비라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왠지, 빈첸이 이 책에 대해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은 모양이었다.
“……뭐야? 너 설마 이 책을 알아?”
빈첸이 알고 있는 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