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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의 정석-158화 (158/184)

환생의 정석 158화

아덴카의 중추라 할 수 있던 4명의 장로가 한 날, 한 시에 사망했다.

이는 아덴카 500년 역사 속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중차대한 사건이었다.

칸과 베르사를 비롯한 아덴카의 수뇌부들 또한 큰 충격을 받았다.

최근 몇 년간 장로원 출입을 하지 않았던 칸이 직접 장로원을 찾았다.

그의 날카로운 표정과 기세에, 그 누구도 칸에게 말을 걸지 못했다.

뚜벅뚜벅.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스산한 바람이 일었다.

주변의 마나가 그의 기분에 감응하여 스스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었다.

그랬던 그가 표정을 아주 조금이나마 풀었던 순간이 있었는데, 그것은 그가 빈첸을 마주 볼 때였다.

“빈첸. 네가 얻은 것들을 얘기해 보아라.”

“어디까지 들으셨습니까?”

“아무것도 듣지 않았다.”

율리안은 그 말을 듣고 소심하게 좋아했다.

-우리 보고를 듣기 전에 아무 보고도 받지 않으신 거네요. 우리 보고를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신다는 뜻이에요.

그래도 아덴카의 4대 장로가 모두 죽은 가운데, 대놓고 기뻐할 수는 없었던 율리안은 눈치를 보며 좋아했다.

-아, 아니. 내가 눈치 볼 게 뭐 있어? 어차피 다 악몽이랑 결탁한 쓰레기들인데!

빈첸은 그가 보고 들었던 모든 것들을 소상히 밝혔다.

칸은 잠자코 빈첸의 보고를 들었다.

“……하여, 악몽과 연결이 되어 있던 자들 같습니다. 악몽은 이들에게 특별한 금제를 가해놓았던 상태입니다.”

“아덴카의 4대 장로에게 말이지.”

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한동안 굳어 있던 칸이 크하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리 썩었다고는 해도, 아덴카의 장로들이었다. 그들에게 이러한 금제를 걸어 굴종시켰다. 빈첸. 네게 묻겠다. 악몽이 그토록 위세가 뛰어난 놈들인가?”

“어쩌면, 오늘은 아주 오래전부터 예비되어 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아주 오래전?”

빈첸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곳에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빈첸과 칸은 자리를 옮겨 독대했다.

빈첸은 율리안과 함께 생각한 내용들을 말하기 시작했다.

“악몽의 시작이 언제부터였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4대 장로에게 각각 접근하여 같은 금제를 걸어 동시에 발동하도록 연결 짓기는 어렵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4대 장로들은 모두 유력한 가문 출신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들의 피에 새겨져 있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를테면 ‘피에 새겨진 사명’ 같은 것.

이 경우는, ‘피에 새겨진 저주’ 같은 것으로 보았다.

빈첸은 이미 ‘피에 새겨진 사명’을 가진 사람을 알고 있었다.

“붉은 요새의 요새장도 이와 비슷한 것이 피에 새겨져 있습니다.”

“…….”

“저주는 아닌 사명이었고…….”

그녀가 ‘진실을 추구하는 자’를 기다려왔다는 사실을 말해주었다.

“그렇다면 헤르카가 말하는 ‘진실을 추구하는 자’가 너란 말이냐?”

“모든 아덴카의 혈육들에게 주어진 사명이나, 헤르카 경이 말하는 진실을 추구하는 자는 제가 맞는 듯합니다.”

“그렇군.”

칸은 불현듯, 은퇴장로 라센느의 말을 떠올렸다.

-네가 가지지 못한 것들까지도 가지고 있는 모양이야.

빈첸이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상황이 이쯤 되었으니 ‘악몽’ 또한 자신들의 실체가 드러났음을 인지했을 것이다.

그들 또한 보다 적극적으로 움직일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초대가주께서 오늘을 안배하신 것이 아닐까, 저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여태까지 그렇게 느껴왔다.

우연으로 이루어질 수 없는 많은 것들이 여지껏 이루어졌다.

칸은 많은 것을 묻지 않았다.

“너는 내가 무엇을 해주길 바라느냐?”

이것은 명령도 아니었고 시험도 아니었다.

확실히 빈첸의 뜻을 묻는 질문이었다.

율리안은 크게 감동받았으나, 상황이 상황인지라 크게 내색하지는 못했다.

빈첸은 담담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제가 가장 먼저 원하는 것은…….”

* * *

백색검대의 검대장 시론이 황급히 움직였다.

가주의 명을 전달하기 위해서였다.

“그만, 그만!”

빈첸의 명령에 따라 ‘악몽과 결탁한 자들’의 시신을 불태워 없애려고 했다.

그들의 시체에는 기름이 끼얹어졌고, 육신조차 남지 않는 형벌에 처해지기 직전이었다.

백색검대 검대원 제론은 고개를 갸웃했다.

“검대장님?”

검대장 시론은 어지간해서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늘 비밀스러운 임무를 수행 중이라는 소문만 무성할 뿐이었다.

“불을 붙이지 말라는 가주의 명령이다.”

“예?”

“빈첸 공자가 부탁했다더군.”

“빈첸 공자님이요?”

제론은 또다시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네. 왜 말을 번복하셨지?’

그 이유를 찾는 데에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호법당의 무인들이 나타나 시체들을 수거해 갔다.

호법당의 실체를 믿지 않는 많은 자들이 이번에 호법당을 직접 목격했다.

“와, 진짜 호법당이잖아?”

“호법당이 모습을 드러낼 만큼 사안이 무겁다는 뜻이겠지.”

몇시간 뒤.

백색검대의 검대장 시론이 빈첸의 방을 찾았다.

“공자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들어와.”

시론이 뚜벅뚜벅 걸어 들어갔다.

빈첸은 시론이 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의자에 앉아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론이 빈첸 앞에 섰다.

“제가 직책이 더 높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그랬다면 나를 선임 검대원으로 불렀겠지.”

시론은 빈첸을 검대원으로 대하지 않고, 공자로 대했다.

지금은 백색검대장으로서 찾아온 게 아니라는 뜻이었다.

“가까이서 이렇게 직접 뵙는 것은 처음이군요.”

시론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빈첸이 말했다.

“일어나라, 호법당주.”

“…….”

극도로 훈련받은 자답게, 시론은 평정심을 유지한 것처럼 보였으나 속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놀람을 드러내지 않고 물었다.

“어찌 아셨습니까?”

“백색검대의 검대장으로서 모습을 비치지 않는 자. 부검대장이었던 멀린과 최소 동격 혹은 그 이상의 경지를 지닌 자. 그리고 아버지의 명령을 가장 먼저 수행하고 알렸던 자. 이후, 아버지의 명령을 수행한 뒤 나를 가장 먼저 찾아온 자.”

빈첸이 어깨를 으쓱했다.

“모든 것들이 호법당주임을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일리 있는 말씀입니다.”

호법당주 시론은 놀람을 티 내지 않고 말을 이었다.

“왜 시체를 불태우지 말아달라 부탁하신 겁니까?”

“악몽은 아주 오래전부터 아덴카를 잠식해 왔던 것 같다. 그러므로 이러한 일이 벌어졌을 때에, 아덴카가 어떻게 일을 처리할지도 알고 있었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불명예스러운 자는 시체조차 남기지 못한다.

그것이 아덴카의 율법이었다.

이번에도 당연히 불태워 없애려고 했었다.

“만약, 장로들에게도 필수불가결이었던 어떤 상황이 존재했다면.”

“…….”

“그들이 어쩔 수 없이 정도(正道)를 선택하지 못했던 것이라면. 최후의 발악 정도는 하려고 했을 것이다. 아무리 썩었다 할지라도, 그들 또한 아덴카의 장로였기 때문이다.”

빈첸과 율리안은 피다넬의 유언을 흘려듣지 않았다.

피다넬은 자신의 오랜 친구들이 사망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악몽에 대해 입을 열었다.

피다넬이 그렇게 되었다면, 다른 자들 또한 마지막 한 마디 정도는 남기고 싶었을 확률이 높았다.

“그들의 시체에서 무엇이 발견되었는가?”

“겉으로는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호법당주 시론은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들의 마력회로 깊은 곳에, 인위적인 상처가 존재했습니다.”

마나를 터뜨려 마력회로에 글자를 새겼다.

그마저도 아주 짧았다.

“피다넬의 시신 깊숙한 곳에서 발견된 글자는 이와 같습니다.”

[H]

한 글자뿐이었다.

그리고 남은 세 명에게서 다음과 같은 글자들이 발견되었다고 했다.

[LI]

[OS]

[EL]

율리안은 글자들을 보자마자 곧바로 순서를 재구성했다.

[H]

[EL]

[LI]

[OS]

-헬리오스. 형님. 헬리오스요.

빈첸이 담담히 입을 열었다.

“헬리오스.”

“예. 맞습니다. 그들이 남긴 글자는 헬리오스였습니다.”

4대 장로들이 최후를 맞이할 때에 마지막 힘을 짜내어 남긴 단서는 ‘6마탑주 헬리오스’였다.

“호법당주는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지? 헬리오스가 악몽의 실체라고 보는가?”

“호법당주는 명령을 받드는 자이지, 생각하는 자가 아닙니다.”

빈첸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에게는 호법당주보다 더 믿음직한 책사가 옆에 있었으니까.

상의는 율리안과 함께하기로 했다.

“바르곤 경의 조사결과를 기다려보아야겠군.”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바르곤이 빈첸을 찾아왔다.

바르곤은 탑 외 마법사들의 도움을 받아 대니얼의 딸에게 남겨져 있던 마법과 그 흔적을 심도 있게 조사했다.

그의 손에는 수십 장의 서류뭉치가 들려 있었다.

바르곤의 눈두덩이가 시커멓게 물들어 있었다.

“다크써클이 턱 밑까지 내려올 것 같다.”

“많이 고생하신 모양이군요.”

빈첸은 파성무인이 되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르곤에게 존대했다.

그게 빈첸이 바르곤을 대하는 예의였고, 그 마음을 잘 알고 있는 바르곤도 빈첸에게 하대했다.

“진즉에 이골이 나 있어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과로사할 뻔했다.”

“헤르카 경에게 고맙다고 인사라도 해야겠군요.”

“아니.”

바르곤은 무척 화가 난 듯 주먹을 불끈 쥐었다.

“탑 외 마법사들이 마탑 소속 마법사들보다 좀 거칠다는 걸 알고 있겠지?”

“예. 성정이 끈질기고 악착같아 야생화에 비유하는 자들도 있다 알고 있습니다.”

“말이 좋아 야생화지, 사실은 잡초라고 부른다. 아무튼 마탑 마법사들에 비해 험한 꼴도 많이 보고 고생도 많이 하지.”

똑똑한 율리안은 바르곤의 말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지금의 상황과 맥락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자들이 내가 일하는 걸 보고 기겁하더군. 무슨 일을 이렇게 오랫동안 한자리에 앉아서 한단 말이냐? 집중력을 유지할 수 있느냐? 뇌가 터질 것 같지 않느냐? 허리가 빠개지지 않느냐? 그렇게 물었다. 한 명도 아니고 세 명이나.”

“…….”

바르곤이 이를 꽈득 깨물고 말을 이었다.

“내게는 이게 일상이었단 말이다.”

일상인 줄 알았던 야근과 야근과 야근의 연속.

사실 이건 탑 외 마법사들에게도 고행이었다.

붉은 요새에 서서히 익숙해져 갔던 바르곤은 다시금 상식을 깨달았어.

“내가 돌아가면, 헤르카 그 여자를 반드시 죽일 것이다.”

한참이나 이를 갈던 바르곤은 빈첸에게 서류를 넘겼다.

“네 예상이 맞더군. 소녀의 몸에 새겨져 있던 마법수식은 6마탑의 것이었다.”

“이 안에 그를 증명하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까?”

“그렇다. 도합 17개의 항목으로 정리했는데, 대표적으로 하나만 설명해 보겠다.”

빈첸은 바르곤이 시키는 대로 세 번째 페이지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수식을 살펴보면 복소수의 개념이 등장한다. 이는 제곱하여 음의 수가 나오는 수로서, 실수의 개념에서는 정의할 수 없는 평면의 숫자를 의미…….”

바르곤은 힐끗 눈치를 살폈다.

무인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일 테니까.

“아무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런데 빈첸이 말했다.

“복소평면에서 서로 실수축에 대하여 대칭인 숫자에 오류가 존재하는 듯 보입니다.”

“……뭐?”

사실 말을 하는 빈첸도 이게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율리안의 말을 그대로 따라할 뿐이었다.

“하여 켤레복소수의 계산결과 값에 오류가 존재하므로, 해당 수식에 오류가 존재합니다.”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 이해하고 있는 거냐?”

“또한 7페이지에 존재하는 두 복소수 z1과 z2의 계산 값에서, 코사인 세타투 값과 사인 세타원 값에 미세한 오차가 존재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바르곤은 저도 모르게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너 뭐냐?”

아무리 마법사들에게는 기본개념이라 할지라도, 무인인 빈첸이 알고 있을 내용은 아니었다.

그런데 놀라운 말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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