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의 정석 160화
“알아.”
셀비라는 당황했다.
“어, 어떻게?”
“전에 읽었어.”
“이, 이걸 읽었다고?”
셀비라는 자신이 책을 잘못 가져온 건가 싶어 다시 확인해 보았다.
다시 확인해 봐도, 여전히 [물레방앗간과 첫사랑]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이, 이걸 왜 읽었는데?”
“그냥. 끌려서?”
“이 제목이 끌렸다고?”
셀비라는 크흠, 하고 헛기침을 했다.
“너도 남자는 남자구나.”
“…….”
그럼 내게도 가능성이 있으려나.
셀비라는 아주 잠깐 빈첸을 쳐다보았다.
오늘따라 빈첸이 무척 잘나 보였다.
‘평소에도 잘났지만.’
그녀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런 류의 소설을 좋아하나 보다.’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고자이거나 게이인 줄 알았더니.
이런 책도 찾아 읽을 줄 아는, 혈기왕성한 소년이었던 모양이었다.
괜히 즐거워졌다.
“내가 이 소설을 왜 가지고 왔는지도 알고 있는 거지?”
“소설의 탈을 빌려 후대에 무언가 남기려 했던 것 같더군.”
“맞아. 그게 뭔지는 여전히 모르지만.”
“심상이론 이상의 것. 본질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었어.”
셀비라는 고개를 끄덕였다.
언어는 이해했으나 본질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하나는 이해했다.
“너는 이해한 거지? 그래서 그렇게 강해진 거고.”
“대충은.”
괜스레,
심장이 콩콩 뛰었다.
셀비라는 뛰는 심장을 들키지 않기 위해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하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누군가는 ‘미지의 것’에 저항해 왔어.”
때로는 소설로.
때로는 시로.
때로는 음악으로.
“그리고 그 저항이 절정에 달했던 것이 200년 전이었고.”
“200년 전이라면…….”
200년 전은 빈첸과도 꽤 관련이 있는 시기였다.
“맞아. 용왕 아벨탄이 활약했던 시기. 용왕의 죽음 이후, 헬라임이 탄생했던 그 시기.”
그와 동시에 율리안이 소리쳤다.
-아넬린과 아벨탄이 동료였다는 게 이제야 설명이 돼요!
500년 전 영웅이었던 아넬린.
그녀는 후대에 태어난, 200년 전 영웅인 아벨탄을 친구로 삼았었다.
-아벨탄이 아넬린과 같은 목표를 가지고 있었던 거예요. ‘미지의 것’과 대적한다는 목표요.
“용왕이 어마어마한 영웅이고 용아인의 전성기를 이끌었다는 기록은 있는데, 그 용왕이 누구랑 왜 싸웠는지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어. 그나마 남아 있는 것이 당시 아덴카 가주와의 일대일 결투에서 승리했다는 것 정도이려나?”
빈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내가 용왕의 진전을 이은 것도 필연인 것 같군.’
200년 전의 용왕 또한 빈첸과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던 모양이었다.
빈첸이 말했다.
“거대한 힘이 있고 그 실체에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단서 중 하나가 6마탑과 헬리오스라는 뜻이겠군.”
“하지만…… 6마탑은 너랑 전쟁도 불사할 것 같던데.”
셀비라의 눈에 근심이 가득 담겼다.
빈첸이 강한 건 알고 있다.
그렇지만 혼자서 6마탑의 마법전력을 상대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빈첸이 빙그레 웃었다.
“괜찮아.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거든.”
* * *
바람소리의 최고 수석기자 마리아는 ‘종군기자 표식’을 요구했다.
바람소리 소식장 세르난도는 펄쩍 뛰었다.
“전쟁도 안 일어났는데 무슨 종군 표식을 달래?”
종군기자는 말 그대로 전쟁에 파견되는 기자.
기자들은 전쟁으로부터 자신의 몸을 보호하기 위하여 오른쪽 팔뚝에 기자를 상징하는 하얀색 완장을 차게 된다.
“아무리 봐도 이건 전쟁인데요?”
“빈첸 공자 개인과 6마탑의 문제이지, 아덴카와 6마탑의 전쟁은 아니지 않나?”
“거의 준하는 상황이에요.”
“네가 종군 표식을 달고 취재를 가면? 그럼 사람들이 다들 전쟁 난 줄 알고 난리도 아닐 거다. 그런 혼란을 일으킬 필요는 없지 않느냐?”
“빈첸 공자와 헬리오스가 부딪치면 어차피 예견된 혼란이에요.”
세르난도는 한동안 침묵했다.
마리아는 바람소리가 자랑하는 독보적인 기자였고, 세르난도가 무척 아끼는 부하이기도 했다.
“마리아. 종군 표식이야 그렇다 쳐. 너무 위험한 현장에 파견 나갈 필요는 없다고 본다.”
“하지만 제가 꼭 가고 싶어요. 소식장님도 아시잖아요, 제가 어떻게 성장했는지. 제가 성장할 수 있었던 건 모두 빈첸 공자의 덕이었어요.”
“그건 빈첸 공자와 네 둘의 성공적인 거래였을 뿐이다. 네가 그를 은인으로 생각할 필요는 없어.”
“저는 그렇게 생각 안 해요.”
마리아는 안경을 고쳐 썼다.
“저를 대신할 기자는 많지만, 빈첸 공자를 대신할 빈첸 공자는 없어요. 잘 아시잖아요.”
세르난도는 버럭 소리 질렀다.
“그래서! 꼭 가겠다고?”
“제가 가야, 빈첸 공자를 제대로 담을 수 있어요.”
“무슨 말이냐?”
“어쩌면 저는 인생에서 가장 큰 특종을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거든요.”
빈첸이 자세한 것은 말해주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녀는 기자 특유의 직감으로, 무언가 심상치 않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음을 피부로 느끼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저는 빈첸 공자를 기록해야 해요.’
그 말은 하지 않았다.
오로지 ‘특종을 위한 것처럼’ 말했다.
안 그래도 종군에 부정적인 세르난도를 설득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
그런데, 세르난도 또한 사람을 대하는 것에 이골이 난 사람이었다.
“솔직히 말해. 뭘 꾸미고 있는 거냐?”
“말씀드렸잖아요. 저는 특종을 위해서…….”
“파견은 없던 걸로 해야겠군.”
“아이, 알았어요, 알았어!”
마리아는 후우- 하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가 특종에 목말라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기자라면 누구나 그럴 것이었다.
그러나 그게 끝은 아니었다.
“빈첸 공자를 제대로 기록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왜?”
“그가 곧 우리 다음 세대일 테니까요.”
마리아는 안경을 고쳐 썼다.
마음속에 품고 있던 말을 솔직히 꺼냈다.
“진실을 알리고 싶어요.”
“진실이 뭔데?”
“모르니까 취재 가죠.”
“…….”
“저는 기자잖아요. 세상에 진실을 알려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이잖아요.”
그러니까 그녀는 가야 했다.
“종군 파견. 허락해 주세요.”
“허락 못 하겠다면?”
“소식장님이 바람 피웠다고 소문내고 다닐 거예요.”
“이, 이 자식이 못하는 말이 없어!”
마리아가 키득키득 웃었다.
“증거조작 엄청 쉬운 거 아시죠? 합성 조금 하면 돼요.”
“헛소리 좀 그만둬라 제발.”
“선동은 문장 하나로도 가능하지만, 그걸 반박하려면 오랜 시간과 자료가 필요하다. 반박 준비를 끝내면 이미 사람들은 선동되어 있다. 소식장님이 가르쳐줬죠?”
* * *
마리아는 종군기자의 표식을 단 채 빈첸의 뒤에 따라붙었다.
“일행이…… 단출하네요?”
최소한 백색검대라도 이끌고 갈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빈첸은 윌슨과 세리만 데리고 6마탑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종군 표식을 다셨군요.”
“예. 저는 전쟁으로 해석했거든요.”
“혼란을 야기할 겁니다.”
“그래서 대비할 수 있겠죠.”
마리아가 빈첸의 옆에 바짝 붙어 섰다.
“공자님. 저한테만 얘기해 줘요. 일이 어떻게 흘러갈 것 같아요?”
“저도 모릅니다. 다만 서신에 의하면 6마탑은 전력을 다해 저를 공격할 겁니다.”
“그러니까, 그게 진짜로 일어날 일이라고 보는 거예요?”
“진짜로 일어날 일이라고 생각했으니 종군 표식을 달고 동행하는 거 아닌가요?”
마리아는 바람소리의 최고 수석기자다.
그쯤 되는 위치의 기자가 종군 표식을 달고 있다는 건 의미하는 바가 컸다.
“빈첸 공자. 솔직히 말해요. 나이 속였죠?”
“…….”
“아무리 생각해도 열여섯 살일 수는 없는데. 서른여섯 살이면 몰라도.”
“…….”
“솔직히 말해봐요. 나한테만 가르쳐줘요. 진짜 몇 살이에요?”
“…….”
“오빠라고 불러도 돼요?”
듣고 있던 세리가 크흠, 헛기침을 했다.
“공자님은 열여섯 살이 맞아요. 제가 아기 때부터 옆에서 보필했는걸요.”
“그래요? 지금 둘이서 짜고 나 속이는 거 아니죠?”
“속여서 무슨 이득이 있겠어요?”
마리아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러니까요. 속이는 사람은 없는데 속는 사람만 있는 기분이네요.”
어떻게 저게 열여섯이람.
빈첸을 볼 때마다 늘 느끼는 감정이어서 새롭지는 않았지만, 볼 때마다 신기하기는 했다.
며칠이 흘렀다.
커다란 배낭을 짊어진 윌슨이 씩씩하게 소리쳤다.
“길로안 입구가 보입니다, 공자님!”
테르 산맥 중턱.
직전에 빈첸이 임무를 수행했던 길리안에 도착했다.
대니얼과 만났었던 바로 그곳이었다.
저번에 만났을 때에 비하여 분위기가 상당히 을씨년스러웠다.
빈첸이 거리를 지나자 여기저기서 나무로 만든 창문을 닫았다.
꽤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기 때문이었다.
윌슨이 말했다.
“바람소리의 최고 수석기자가 종군 표식을 달고 6마탑으로 향하고 있다는 소식 때문에 분위기가 험악한가 봅니다, 공자님.”
이미 예상했던 바였다.
소식을 접한 길로안 주민들 중 일부는 혹시 모를 피해를 두려워하며 마을을 잠시 떠나기도 했다.
빈첸은 한술 더 떴다.
“윌슨. 세리. 이왕이면 당분간 대피하라는 이야기를 전달하도록 해.”
그 말을 들은 마리아는 확신할 수 있었다.
빈첸은 정말로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인원으로 뭘 어쩌려고?’
그렇다고 아덴카의 정규 무인들이 출정을 준비하는 움직임도 전혀 포착되지 않았다.
빈첸이 아무리 뛰어나도, 홀로 전쟁을 감당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그리고 다시 며칠이 흘렀다.
“저기 아래, 6마탑이 보입니다, 공자님!”
빈첸 일행은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거대한 광야가 펼쳐진 분지 지형.
그 가운데 높이 솟은 탑이 보였다.
탑 주변을 감싸고 도는 커다란 강이 보였다.
커다란 강 위로는, 침입자를 막아내는 마법결계가 둘러쳐져 있었다.
육안으로 보일 정도로 강대한 마나흐름을 지닌 결계였다.
마리아가 허- 하고 웃었다.
“저 같은 일반인한테도 결계가 보일 정도네요. 아니, 군대를 상대하는 것도 아니고 저 정도 결계를 펼칠 이유가 있어요?”
“저를 무척이나 죽이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
빈첸은 잠자코 6마탑 쪽을 바라보았다.
빈첸의 눈에는 보다 정확하게 보였다.
뚜렷한 살의가 느껴졌다.
“세 사람은 여기서 대기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세리가 빈첸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눈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공자님…….”
“걱정 마.”
빈첸은 세리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덮어주었다.
빈첸은 세리의 걱정이 좋았다.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그저 걱정해 주는 저 마음.
전생에서는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저 눈빛이 빈첸의 마음을 포근하게 만들었다.
-포근하다뇨. 지금 마탄에 벌집이 되게 생겼는데.
빈첸은 세리의 손을 떨어뜨렸다.
“다녀올게.”
“제가 필요하면 폭폭이를 부르세요. 당장에라도 달려가서 도울게요.”
“그래.”
윌슨은 침을 꿀꺽 삼켰다.
“제, 제가 가서 돕겠습니다!”
“바들바들 떨리는 다리 간수나 잘 하도록.”
빈첸은 미련 없이 절벽을 향해 걸었다.
“고, 공자님! 거기 절벽, 저, 절벽인데요!”
빈첸의 몸이 뚝 떨어져 내렸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엄두조차 내지 못할 만큼 높은 높이의 절벽이었으나 빈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마나를 응집하여 발밑에 발판을 만들었다.
설인걸음의 묘리를 운용하여 몸을 가볍게 만든 그는, 마탑을 향해 일직선으로 걸어갔다.
마나에 음성을 실어 마탑 쪽으로 전달했다.
“빈첸 아덴카. 아덴카의 7공자다. 마탑의 결계를 해방하라.”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빈첸은 허공을 걸어 마탑 쪽으로 걸어갔다.
이내,
마탑 쪽에서 사이렌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마탑은 빈첸 공자를 초대한 적이 없다. 돌아가라. 첫 번째는 경고다.”
쾅!
거대한 폭발음이 터져 나왔다.
하늘을 향해 거대한 빛줄기가 생성되었다.
그것은 살상력을 응집한 마나의 빛줄기였다.
바로,
마탑이 자랑하는 전쟁병기 ‘공성 마탄포’였다.
“다음은 위협이며.”
또다시 쾅! 소리가 들려왔다.
빛줄기가 빈첸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다음은 공격이다. 열의 시간을 줄 테니 돌아가라. 열. 아홉. 여덟.”
빈첸은 멈추지 않았다.
그저 홍련을 뽑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셋. 둘. 하나. 마지막으로 경고한다. 돌아가라.”
3초가 흘렀다.
“발포한다.”
마리아는 취재조차 잊고 눈을 질끈 감았다.
마탑이 자랑하는 ‘공성 마탄포’.
거대한 성벽조차 단숨에 부숴버린다는 공성 마탄포가 빈첸을 향해 쏘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