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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의 정석-157화 (157/184)

환생의 정석 157화

빈첸이 피다넬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스승님. 제가 스스로 마무리하여 매듭짓겠습니다.”

멀린을 향한 말이었다.

전대 아덴카의 12검 중 한 명이자 8성 무인인 멀린에게 개입하지 말아달라 부탁하는 것이기도 했다.

당장에라도 달려들 것 같았던 피다넬은 잠시 주춤했다.

분노한 와중에도 멀린의 대답을 들으려는 듯했다.

멀린은 잠시 침묵했다.

‘빈첸. 너는……!’

안 그래도 위험한 상황이 연출되면 개입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빈첸이 부탁하고 있었다.

“부탁입니다.”

“…….”

멀린은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피다넬이 어이없다는 듯 크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이지, 간이 배 밖으로 튀어나오기라도 한 것이냐? 내가 아무리 일선에서 물러났다지만, 나를 모르는 것이냐?”

“안다. 세간에 8성이라 알려져 있었고 본인도 그렇게 주장했으나 사실상 7성의 수준이라는 것이 중론이었지. 그러나 타고난 외교적 수완과 훌륭한 행정능력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아 지금의 자리에 올랐고.”

겉으로는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으나 긴장을 아예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피다넬이 ‘8성’이라고 인정하는 무인은 많지 않았으나, 어쨌든 그러한 논란이 나올 정도의 실력은 갖추었다.

많이 늙었다고는 해도 그 격 자체가 어디 가는 것은 아니었다.

빈첸이 말을 이었다.

“처벌의 집행을 시작하겠다.”

빈첸의 홍련이 피다넬을 겨누었다.

피다넬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검을 겨누었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살의는 진짜였다.

‘저런 애송이와 검을 맞대게 될 줄이야.’

이 상황만으로는 피다넬에게는 충분히 모욕적이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율리안의 생각대로, 피다넬에게 중요한 것은 단지 빈첸의 죽음이었다.

“그래도 내가 한참 선배이니 세 번의 선공을 양보하지.”

“좋을 대로.”

지금은 명예로운 검투의 현장이 아니었다.

피다넬에게 중요한 것이 빈첸의 죽음인 것처럼.

빈첸에게 중요한 것은 가문의 법도를 일으켜, 무너진 명예를 바로 세우는 것이었다.

빈첸은 잠시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면 어떡해요?

‘선공을 양보한다 하지 않느냐?’

-그러다 기습하면요?

‘여전히 겁쟁이군. 잠자코 지켜보기나 해라.’

율리안은 끄응- 소리를 냈다.

사실 율리안도 알고 있었다.

이 자리에는 멀린이 떡하니 버티고 있었고, 뿐만 아니라 빈첸의 또 다른 스승인 용아인전사 칼백까지 기척을 숨기고 이쪽을 노려보고 있다.

정령술사 나이메르까지 한껏 긴장한 채 이쪽을 쳐다보고 있으니, 기습 같은 건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걸 머리로 아는 것과 실제로 행할 수 있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심장으로부터 마나를 뿜어냈다.

피다넬이 눈을 가늘게 떴다.

“아덴카의 검이 아니렷다?”

“…….”

빈첸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용아인들은 빈첸이 무엇을 하려는지 눈치챌 수 있었다.

‘저 마나흐름은!’

용아인 최강의 전사들 중 한 명인 칼백은 빈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 역시 빈첸의 검을 직접 받아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때의 빈첸과 지금의 빈첸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사람 자체가 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반지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그리고 칼백은 또 하나 새로운 사실을 깨달았다.

‘마나흐름이 명확하게 보인다.’

원래 빈첸의 마나는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그가 심상을 배제한 마나를 익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마나의 흐름이 보인다는 것은, 빈첸이 일부러 보여주고 있다는 뜻이었다.

칼백이 작게 말했다.

“용아인 형제들은 뿔나팔을 준비하라.”

정령들이 날아다니며 용아인들에게 그의 말을 전달했다.

빈첸의 집중을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그들은 조심스레 뿔나팔을 준비했다.

그사이,

빈첸은 품 안에서 고이 간직하고 있었던 마정석을 꺼내 들었다.

‘세 개를 모두 사용한다.’

나이메르의 정령력을 가득 담은 마정석.

그것을 사용했다.

세 개를 모두 사용하면 그만큼 출력이 강해지고, 또한 신체와 마력회로에 전해지는 부담도 커진다.

‘버틸 수 있어.’

하늘이 내려준 신체.

끊임없이 단련해 온 시간.

그리고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연단된 모든 경험이 한데 어우러졌다.

뿔나팔을 준비하던 용아인들 몇몇은 움직임을 멈추었다.

‘어마어마한 힘이다.’

그중 일부는 빈첸의 해군을 직접 느꼈던 자도 있었다.

‘이전과는 비교조차 안 돼.’

칼백과 검을 나눌 때와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했다.

그때의 해군은 진짜 해군이 아니었다.

지금의 해군이 진짜였다.

피다넬도 무언가 심상치 않은 기류를 느꼈다.

“무얼 하려는 것이냐?”

보통 때였다면 빈첸은 말했을 것이다.

새로이 얻게 된 힘의 유래를 육성으로 말하는 것은, 그 힘을 전수한 자에 대한 예의였고 영예였으니까.

그러나 빈첸은 대답하지 않았다.

말로 하지 않아도, 용아인들은 빈첸의 힘을 이미 본능적으로 읽어내고 있었다.

바람소리의 마리아 기자는 그들의 변화를 관측했다.

‘피부가 붉어지고 있고, 눈동자가 금색으로 변했어?’

그녀 또한 200년 전 기록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붉어진 용피와 금안. 타오르는 기도는 완전한 용인에 들어서는 초입 단계이다. 용왕 아벨탄이 어떠한 권능을 펼쳤을 때 벌어지는 변화였다.]

그녀는 그 기록의 실체를 직접 마주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200년 전 이야기가 허구가 아니었다.

피다넬은 피다넬 나름대로 방어검식을 준비하며 빈첸을 응시했다.

그는 용아인이 아니었으므로 용아인만큼의 세세한 흐름은 느끼지 못했다.

그렇지만 용아인의 힘과 관련되었다는 것은 충분히 인지할 수 있었다.

그는 차분한 눈으로 빈첸을 바라보며 말했다.

“용왕의 전인이라더니. 믿는 구석이 있었구나. 하나 그것은, 네 아덴카의 검식으로 나를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을 자인하는 꼴이다.”

“…….”

빈첸은 칼백의 가르침을 잊지 않았다.

-이 부근의 마력회로가 개통되어 있어야만 합니다. 용아인들은 이 회로의 이름을 아벨탄 회로라고 부르며, 아마도 인간들은 나면서부터 막혀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 마력회로를 개통하는 것이 첫째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절로 막힌다.

그러나 빈첸의 마력회로는, 처음 개통했을 때보다 더욱 커졌고 단단해졌다.

빈첸이 흩뿌렸던 해상군세의 기운이 다시금 홍련으로 모아졌다.

용왕의 대인 결전기 ‘검은 바다’의 정석적인 운용이었다.

용골을 머금은 홍련이 붉게 타올랐다.

용왕 아벨탄으로부터 시작되어, 칼백을 통하여 전승된 비기.

‘검은 바다.’

피다넬은 난생처음 보는 검격에 잠시 당황했다.

피다넬의 시야 전체가 어두워졌다.

어둠의 공간에 갇힌 것 같았다.

‘시공간을 어지럽히는 환상계 검식인가?’

용왕의 검을 처음 마주한 그는 당황했다.

실전에서 너무 멀어져 있던 그는, 실전감각이 현저히 떨어졌다.

‘무엇이 공격인가?’

이 어둠은 현혹하기 위한 술수이리라 확신했다.

검은 어둠이 해일이 되어 다가왔다.

‘해일?’

하늘 높이 솟은 검은 기세가 자신을 향해 덮쳐왔다.

그제야 그는 직감했다.

‘이 모든 기운이 허상이 아냐.’

모든 것이 진짜였다.

나이메르와 함께 이곳에 파견 온 셀비라는 200년 전 기록을 읊었다.

“드높이 치솟은 해일이 해를 덮는다. 그리하여 바다에는 밤이 찾아온다. 바다가 검게 물든다. 그것이 검은 바다이다.”

빈첸이 읊지 못한 것을, 셀비라가 읊었다.

“그 힘은 거대하고, 높고, 두렵다.”

피다넬은 해일이 쏟아지고 있다고 느꼈다.

몸이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방어검식을 펼쳐야 하는데, 마력이 동결된 느낌이었다.

‘이 느낌은…….’

이것은 실력의 영역이 아니었다.

격의 영역이었다.

상대의 격에 눌려, 마나가 얼어버린 것이었다.

그 시간은 무척이나 짧았다.

‘젠장!’

찰나에 불과한 시간이었으나, 검은 바다가 피다넬을 집어삼키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커다란 자연재해를 마주한 작은 인간이 되어버린 것 같은 초라함에 피다넬은 필사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베이지 않는다!’

검은 바다의 기운은 베이지 않고 피다넬을 집어삼켰다.

익사할 것 같았다.

‘허무하군.’

너무나 어이없게도 빈첸에게 패배한 느낌이었다.

‘이렇게 어처구니없는 대인결전기를 익히고 있을 줄이야.’

피다넬은 더 이상 검을 휘두르지 않았다.

온몸이 난도질당하는 느낌이 들었으나 저항하지 않았다.

칼백은 잠자코 빈첸이 펼친 검격과, 저항을 포기한 피다넬을 바라보았다.

그는 피다넬의 최후를 직감했다.

칼백은 이전에 빈첸에게 했던 말을 똑같이 반복했다.

“용왕이 창안하여, 나를 통해 빈첸 공자에게 전달된 검은 바다는 훗날 이뤄낼 모든 약속의 증거였다.”

어느덧,

주변을 집어삼켰던 어둠이 사라졌다.

“형제들은 뿔나팔을 불어라.”

뿌우우우-!

용왕의 힘이 재현되었다.

그 힘이 아덴카의 4대 장로 중 한 명을 베었다.

“용아후로 응답하라.”

크아아아아-!

용아인들은 용아후를 터뜨리며 용왕의 전인에게 환호를 터뜨렸다.

* * *

피다넬의 온몸에 수많은 혈흔이 새겨졌다.

피다넬이 최후의 마력을 뿜어내어 출혈을 막고 있으나, 그것도 이제 한계였다.

빈첸이 물었다.

“왜, 방어를 포기했지?”

“그런 어처구니없는 기술을 익힐 줄 알았다면 선공을 양보하지 않았을 것이다.”

“왜 방어를 포기했느냐 물었다.”

“처벌을 보류하기에 나는 너무 오래 살았으니.”

순간,

빈첸은 피다넬의 눈빛이 변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죽음을 준비하는 자의 눈빛이다.’

저자의 명예를 존중해 줄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마지막 말을 들어줄 용의 정도는 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저자는 한때 아덴카의 장로였으니까.

“너도 의심스러운 것 투성이겠지.”

“…….”

빈첸과 율리안이 무엇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피다넬은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가 마지막 힘을 짜내어 말했다.

“해답은 악몽에 있다.”

퍽!

소리가 났다.

빈첸조차 몸이 잠깐 굳었다.

율리안은 끼에엑! 비명을 질렀다.

-머, 머, 머리가……!

피다넬의 머리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머리가 폭발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거, 검은 바다에 이런 효과가 있었어요?

‘있었겠느냐?’

-그, 그럼 검은 바다의 힘을 몸에 받아들여, 제약 하나를 풀어낸 모양이네요.

기겁한 와중에도 분석은 정확했다.

-피다넬은 자신의 목숨을 내어, 무언가 진실을 말하려고 한 것 같아요. 그래봤자 한 마디였지만.

‘이번에도 [악몽]이군.’

해답은 악몽에 있다고 했다.

그 말을 하자마자, 피다넬의 머리가 폭발해 버렸다.

이내, 피다넬의 온몸에서 피가 솟구치기 시작했다.

검은 바다에 의해 새겨진 수천 가닥의 검로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피다넬이 죽고 나서야 빈첸은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 힘은 용왕이 창안하여, 칼백 경을 통해 내게 전달된 대인 결전기 ‘검은 바다’였다.”

빈첸은 머리를 잃은 피다넬의 시체를 씁쓸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그의 생각대로 피다넬이 끝이 아니었다.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직접 확인하니 마음이 불편했다.

악몽이 무엇이길래, 아덴카의 4대 장로마저 이 꼴이 되었단 말인가.

“아덴카의 칠공자는, 피다넬의 처벌 집행을 완료하였다. 이자는 가문의 법도를 무너뜨리고 미지의 세력과 결탁하여 큰 부정과 비리를 저질렀다. 그러므로 이자의 이름은 지극히 불명예스럽게 기록될 것이며, 시신은 불태워 없앨 것이다.”

겨우 열여섯에 불과한 빈첸이 한때 8성이라고 불리던 아덴카의 4대 장로 중 한 명을 무너뜨렸다는 것은 그야말로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그게 끝이 아니었다.

나이메르와 용아인 정령사들이 가장 먼저 느꼈다.

“곳곳에서 혈향이 느껴집니다.”

“끔찍한 기운입니다.”

“정령들이 비명을 지르고 있어요.”

4대 장로 피다넬은 물론이거니와, 나머지 3대 장로가 모두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사인은 피다넬과 같았다.

거대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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