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의 정석 131화
한센이 설명을 이었다.
“이 반지는 수컷과 암컷으로 나뉜다.”
“반지에 성별이 있단 말입니까?”
“뭐, 편의상 그렇게 분류하기는 했는데, 정확히는 남성의 파장과 여성의 파장을 구별하여 받아들이는 듯하다. 수컷은 용왕 아벨탄이 남긴 것이고 암컷은 헬라임 초대가주가 남긴 것 같구나.”
“그렇군요.”
“또한 이 반지를 제대로 구동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장소나 타이밍이 필요한 것 같다. 그것은 네가 훨씬 더 잘 느낄 수 있겠지. 그리고…….”
이런저런 설명이 더 이어졌다.
물론 빈첸은 그 긴 설명을 완벽히 숙지하지는 못했지만 괜찮았다.
‘설명. 다 외웠지?’
-당연하죠.
율리안이라는 책사가 모든 설명을 통째로 기억해 주었으니까.
“어쨌든 감사합니다.”
“내가 한 건 별로 없다. 디르미델 그 늙은이가 했지.”
한센은 인상을 찡그렸다.
디르미델이 마음에 안 드는 듯한 모양새였다.
그가 슬쩍 한 마디를 흘렸다.
“그래도 실력은 진짜다.”
“그런 것 같습니다.”
실력은 진짜이니 훗날 생각나면 언급을 해달라는 얘기였다.
친선교류회에서 한센 자신을 언급하며 야장으로서의 명예를 드높여주었듯이 말이다.
빈첸이 빙그레 웃었다.
“디르미델 야장을 좋아하시는 겁니까, 싫어하시는 겁니까?”
“몹시 싫어한다!”
한센은 화제를 돌렸다.
“홍련은 쓸 만하지?”
“네. 최근 익힌 용왕의 능력과 상성이 아주 좋습니다.”
“그래, 다행이구나. 아무래도 네 검을 만드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릴 것 같아서.”
디르미델과 협업하면서 깨달은 것들이 좀 있었다.
그러한 깨달음을 검에 접목하려면 시간이 더 필요했다.
“10년이 걸려도 괜찮습니다. 힐트(검 손잡이)에 새겨질 한센의 이름이 부끄럽지 않은 검을 만들어 주십시오.”
“이놈이? 10년 동안 그거 만들면 나는 뭐 먹고 살라고?”
빈첸이 손에 든 차용증을 흔들었다.
“그러면 10년 동안 빚 갚는 걸 유예해드리겠습니다.”
“으하하핫!”
한센은 빈첸의 어깨를 탁! 탁! 두드린 뒤 몸을 돌렸다.
한센과의 기분 좋은 만남이 끝났다.
“아무튼. 나는 가보마.”
그리고 이틀의 시간이 흘렀다.
그사이, 간만에 제론과 함께 대련도 했다.
제론은 진심으로 감탄했다.
“정말, 공자님의 성장 속도는 상상을 초월하는군요. 정말로 자극을 많이 받습니다. 며칠 더 머무시면서 저와 대련해 주시는 건 어떻습니까?”
“그건 안 돼. 할 일이 많아서.”
“그렇군요. 아쉽고 또 기대됩니다. 다음에 오실 때에는 얼마나 더 성장해 있을지 감히 가늠조차 되지 않는군요.”
빈첸도 빈첸 나름대로 수확이 있었다.
제론과 대련해 보면서 자신이 얼마나 성장했는지 보다 객관적으로 체감할 수 있었으니까.
“제가 도시 경계까지 배웅하겠습니다.”
“고맙군.”
빈첸은 제론, 세리, 윌슨과 함께 아덴카를 나섰다.
아덴카 정문에는 밀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밀리는 못내 아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붉은 요새로 돌아간다고?”
“그래.”
“가끔 편지할게. 꼭 답장해 줘.”
빈첸이 고개를 끄덕였다.
빈첸이 밀리를 스쳐 지나가기 직전, 밀리가 호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빈첸의 손에 쥐어주었다.
노란 빛깔이 나는 조약돌이었다.
“이게 뭐야?”
“그냥, 행운 빌어주는 그런 거야. 행운을 빌게.”
세리가 빙그레 웃었다.
그녀는 저 노란 돌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행운을 비는 조약돌이 맞기는 하지요.’
최근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것이었다.
‘보통은 연인 사이에서 선물하는 물건이기도 하구요.’
범용 마정석보다는 가격이 저렴하여 나이대가 어린 사람들이 많이 선물하기도 했다.
‘어쨌든 공자님의 행운을 빌어주는 사람이 또 생겼으니, 저는 무척 기쁘답니다.’
밀리는 손을 흔들고 멀어져 갔다.
도시경계까지 빈첸 일행을 안내한 제론은 허리를 숙였다.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뵙기를 고대하고 있겠습니다. 저 또한 수련에 정진하여, 훗날 공자님께 실망을 끼쳐드리지 않겠습니다. 겸손한 명예에 온전한 경의를.”
윌슨이 용감하게 나섰다.
“제론 경. 외람되오나, ‘온전한 명예에 겸손한 경의를’입니다.”
“그, 그러냐?”
마나를 익힌 자 앞에서도 입도 뻥긋 못하던 그였지만, 이제는 6성 무인 앞에서도 할 말을 하게 되었다.
* * *
며칠이 흘러 빈첸 일행은 붉은 요새에 복귀했다.
요새장실을 찾아 그간 있었던 일에 대해 보고를 올렸다.
“……하여 보고를 마칩니다. 그런데 요새장님께서 직접 보고를 받으시네요.”
“왜? 그러면 안 돼?”
“그러면 안 되는 건 아닙니다만…….”
보통은 바르곤 경이 담당하지 않습니까.
“에이~ 빈첸, 내가 뭐 맨날 농땡이 피우고, 일하기 싫어서 막 도망 다니고, 뭐 그런 누나로 보여?”
“약간은 그렇습니다.”
헤르카가 호호호 웃었다.
“사람 잘못 봤어. 나 아주 성실해졌다? 이렇게 보고서도 직접 읽고 결재한단 말이지.”
헤르카의 책상에 서류는 달랑 저거 하나였다.
바르곤의 책상에 서류 더미가 가득 올려져 있는 것과는 상당히 대조되었다.
헤르카는 책상 위에 있던 종이를 빈첸에게 내밀었다.
“자. 너도 봐봐.”
1급 대표생도 헤나가 보낸 보고서였다.
빈첸은 헤르카의 의도를 읽어냈다.
“헤나 누님에게 합류하라는 뜻입니까?”
“어머? 그렇게 보였어? 딱히 그런 건 아니었는데. 나는 그냥, 전에 1급 생도들은 모두 파성무인이 되었는데, 헤나만 혼자 아직 1급 생도로 남아 있다, 내가 그런 헤나를 크게 신경 쓰고 있다, 나는 농땡이를 피우지 않는다, 뭐 그런 거였는데?”
그게 아니라는 사실은 3살짜리 어린애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헤르카가 이걸 보여준 이유는 명확했다.
홀로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헤나를 도우라는 것이었다.
‘나일 폭포’에 가서.
“7개월 동안 헤나를 프란시스 미술관에 방치한 내 잘못도 좀 있고. 이래저래 신경이 좀 쓰이네.”
“그러니까, 아직은 8급 생도인 제가 1급 생도가 치르는 통과의례를 함께 가서 진행하라는 의미겠군요.”
서류상, 빈첸은 아직 8급이다.
승급조건을 달성했으나 아직 승급식을 치르지 않았다.
“바르곤 경이 알면 가만히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비밀로 갔다와.”
빈첸은 잠시 침묵했다.
헤르카가 자신을 ‘나일 폭포’로 보내는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역시, 천과 때문입니까?”
“얘가 또 영문 모를 소리하네. 너는 네 누나가 혼자 고군분투하고 있는데 신경 쓰이지도 않니?”
“알겠습니다. 그럼 공식 임무 하달서 주십시오.”
“그거 주면? 기록 남지? 그럼 나는? 바르곤 경에게 대차게 까이겠지? 1급이 하는 일에 8급 보냈다고 욕먹겠지?”
빈첸이 씨익 웃었다.
“그러라고 총책임자가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이건 헤르카 본인이 했던 말이기도 했다.
-문제 생기면 책임은 내가 질게. 그러라고 총책임자 있는 거잖아.
헤르카는 이마에 손을 얹으며 하아- 하고 탄식하고 말았다.
그녀는 귀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그래. 네가 이겼다. 아무튼 하나를 안 져요, 하나를. 임무 하달서, 준다 줘.”
빈첸은 기어이 공식 서류를 받아들었다.
“일 열심히 하시는군요. 귀감이 되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당연하지.”
빈첸에게 작게 귓속말했다.
“나중에 바르곤 경한테도 똑같이 말해줘야 한다? 내가 이렇게 열성적으로 일을 하고 있다고 말이야.”
“꼭 귀감이라고 전하겠습니다.”
빈첸이 밖으로 나간 뒤 헤르카는 의자에 털썩 주저 앉았다.
빙그르르-
의자를 돌려 창 밖을 내다보았다.
혼잣말로 퀘벨가의 기록을 중얼거렸다.
“성왕의 무덤을 찾는 이가 있을 것이고, 그자가 진실을 바로잡을 것이다.”
퀘벨의 피에 새겨진 사명.
빈첸을 만나기 전까지, 그 사명은 허무맹랑한 소리로만 생각했었다.
빈첸을 만나고 난 이후, 그 사명이 거짓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보고 싶었다.
피에 각인된 이 사명이 정말로 이루어질 것인지.
‘성왕의 무덤을 찾은 자’가 어떤 진실을 바로잡을 것인지.
“아무튼, 나는 할 일을 다 했다.”
바르곤이 있었다면 일이 이렇게 쉽지 않았을 것이다.
원칙주의자인 바르곤을 일부러 출장 보내버린 사람이 헤르카였다.
생도들의 인문학적 소양을 함양하기 위한 견학지들을 직접 섭외하고 알아봐 달라 부탁했다.
바르곤은 크게 기뻐하며 출장을 수락했었다.
-드디어 요새장다운 생각을 하시는군요!
바르곤을 출장 보내놓고, 빈첸에게 임무를 부여해 버렸다.
1급 생도들이 파성무인이 되기 전, 반드시 치르는 통과의례.
나일 폭포의 폭포 조개에게서 진주를 캐오라는 임무를 말이다.
“나. 잘하고 있는 거겠지?”
속으로만 생각했다.
‘빈첸이 천과를 얻을 수 있을까?’
* * *
헤나는 폭포를 올려다보았다.
나일 폭포에 도착한 지 벌써 일주일이 흘렀다.
빈첸을 기다렸던 7개월이란 기간 동안, 다른 생도들은 이미 파성무인이 되었다.
말하자면 헤나는 조금 뒤처졌다.
‘진주를 캐는 것은 그리 문제가 안 돼.’
진주는 이미 확보해놓은 상태.
이대로 복귀하여 보고만 올리면 이 임무는 끝이 나게 된다.
그러나 그녀는 폭포를 떠나지 못했다.
빈첸의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저는 천과를 반드시 얻고 싶거든요.
헤나는 폭포수 안쪽을 바라보았다.
빈첸이 말했던 ‘동굴’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폭포조개의 진주를 만지작거리며 회상에 잠겼다.
-왜 천과 같이 허황된 것에 집착하지?
-저는 반드시 사미온을 넘어서야하기 때문입니다.
헤나는 여전히 ‘천과’를 허황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자리를 뜨지 못하고 있는 것은 빈첸의 한 마디 때문이었다.
-그러나 제게 가장 값진 것은 이것이었습니다.
그 말 때문에 이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하루만 더.’
하루만 더 탐색을 해보려고 하던 찰나.
인기척이 느껴졌다.
익숙한 기척이었다.
“여기 계셨군요.”
“빈첸?”
빈첸과 세리였다.
빈첸이 빙그레 웃었다.
“누님 정도의 실력자가 일주일이나 이곳에 머무를 필요가 있었습니까?”
“아직 진주를 구하지 못했을 뿐이다.”
헤나는 만지작거리던 진주를 남몰래 품속에 감추었다.
빈첸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굳이 짚어내지는 않았다.
“저는 누님을 보조하라는 임무를 받았습니다.”
“네가 어찌 나를 보조한단 말이냐?”
폭포 조개는 3급 어패종이다.
현재의 빈첸이 상대하기에는 급이 너무 높았다.
“폭포 조개가 3급으로 분류된 이유는, 놈들 본연의 능력이 강하기 때문이 아니라, 놈들이 서식하는 환경이 인간에게 불리하기 때문이지 않습니까?”
“…….”
그러나 빈첸은 이보다 더 물살이 거세고 위험한 폭포인 ‘아벨탄 폭포’에서 수련했다.
폭포라는 환경은 빈첸에게 그다지 위험하지 않았다.
“누님. 일단 이것을 좀 받아주십시오.”
빈첸이 품 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반지였다.
“용왕의 반지를 복구한 것이냐?”
“예. 한센 야장과 디르미델 야장께서 힘써주셨습니다. 받아주십시오.”
“그것은 네 것이다.”
빈첸이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검지에 ‘용왕의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저는 이미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가진 것이 아벨탄의 것이고, 누님께 드리려는 것이 헬라임 초대가주의 것입니다. 옛 용아인 전사들 중에서도 특별한 전사들의 수련을 위해 사용했던 반지라고 합니다.”
누님의 수련에도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저 때문에 7개월의 시간을 허비하셨으니, 그에 대한 배상이라 생각해 주십시오.
빈첸은 그렇게 말하는 대신에 다른 말을 꺼냈다.
“뇌물입니다.”
“뇌물?”
“저는 반드시 천과를 얻고 싶습니다.”
어쩌면 이번 기회는 하늘이 내려준 기회일지도 모른다.
헤나의 도움 없이도 이곳을 완벽히 공략할 수 있을 때가 되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른다.
헤나처럼 완벽한 ‘내 편’을 찾기도 쉬운 일은 아닐 터.
“도와주십시오, 누님.”
헤나는 빈첸과 반지를 번갈아 가면서 쳐다보았다.
‘도와 달라’는 동생의 말이 비수가 되어 꽂히는 기분이었다.
전에는 느껴보지 못했던 감정들이 그녀의 가슴 속에서 휘몰아쳤다.
그녀는 조금 고민하다가 무언가를 결심한 듯 말했다.
“빈첸. 그전에 보고 싶은 것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