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의 정석 132화
빈첸이 대답했다.
“무엇을 보여드리면 되겠습니까?”
“네가 나를 정말로 도울 수 있는지 보고 싶다.”
“그 말은, 제가 3급 어패종을 상대로 무사할 수 있는지 보여드리면 되는 것입니까?”
헤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빈첸이 가볍게 웃자 헤나가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왜 웃느냐?”
“저는 여지껏 수많은 검증과 검사를 받아와야만 했습니다. 어릴 적부터 못난이라 불렸고, 그러한 색안경을 깨기 위하여 끝없는 시험을 받았습니다.”
“당연한 소리를 하는구나. 우리는 아덴카이지 않느냐?”
“그런데 왜 누님은 아덴카가 아닌 것처럼 구십니까?”
“뭐?”
빈첸의 웃음이 짙어졌다.
“저는 수많은 시험을 받아왔고 시험을 내리는 자 특유의 기운과 시선에 민감합니다. 그러나 누님은 다르군요.”
아주 오래전.
데이븐이었던 시절에는 느끼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지금은 느끼고 있다.
“누님의 눈빛이 꽤 따뜻하더군요.”
“…….”
헤나는 빈첸의 실력을 검증하려 한 것이 아니었다.
빈첸이 3급 어패종인 폭포 조개를 상대로 하여 다치지 않을지 염려한 것이었다.
“누님의 마음은 아덴카답지 못하나.”
“…….”
“제가 무척 기쁘다면, 저 또한 아덴카답지 못한 것입니까?”
헤나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보여주기나 하거라.”
“알겠습니다.”
빈첸은 하하, 웃음을 터뜨린 뒤 물 위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헤나의 눈이 조금 커졌다.
‘저건, 설상걸음인가?’
빈첸은 분명 설상걸음 특성을 운용하고 있었다.
몸을 가벼이 만들어 운신을 재빠르게 도와주는 특성.
‘특성을 사용하면서 동시에 마나를 발바닥 밑으로 흘려내어 수면을 단단하게 만든다.’
빈첸이 수면 위에 섰다.
물 위에 올라선 것이었다.
‘물과 관련된 특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물 위에 섰구나.’
현대무인인 헤나의 시선에서는 충분히 놀라운 일이었다.
헤나는 빈첸보다 훨씬 강한 힘을 가졌지만, 물 위에 저토록 자연스레 올라서는 재주는 없었다.
‘올라설 수는 있겠지.’
그러려면 엄청난 마나를 뿜어내야 했다.
강제로 몸을 지탱해야 하니까.
빈첸처럼 자유로이 할 수는 없었다.
그녀에게는 물과 관련된 특성이 없었다.
빈첸이 입을 열었다.
“이 정도로 놀라시면 곤란합니다.”
“특성을 운용하고 마나를 뿜어내면서 말까지 하는구나.”
“기본 원리만 이해하면 아주 쉬운 일입니다.”
“…….”
빈첸은 홍련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잠시 눈을 감았다.
그대로 선 채, 폭포수를 느껴보았다.
아벨탄 폭포에서 수련했던 그때와 마찬가지로.
쏴아아-
물의 흐름을 머릿속에 각인시켰다.
홍련에 새겨진 포르세딘의 가호를 깨웠다.
본능에 맡긴 채, 온몸의 마력회로에 마나를 흩뿌렸다.
‘아슬란이 안배한 검을 특성과 결합한다.’
아슬란이 안배한 아덴카 검식.
포르세딘의 가호로부터 파생된 ‘소해일’ 특성.
‘이미 여러 번 해냈으므로.’
그는 스스로를 굳게 믿었다.
검술가의 의지가 검식을 완성시킨다.
‘이번에도 보인다.’
검증이 아닌, 염려에 응답하기 위하여.
그의 심장에서 마낙 뿜어져 나와 홍련에 깃들었다.
아덴카 정검 3식.
소해일 특성 연환.
빈첸의 눈에만 보이는 포르세딘의 가호가 빛나고.
홍련에서 이루 말할 수 없이 강렬한 기운이 뻗어나왔다.
‘나의 상대는 고여 있는 물이므로.’
살기를 담을 필요는 없었다.
움직이는 인간 혹은 생명체를 베어낼 때와 지금은 많이 달랐다.
이미 폭포의 기운과 충분히 융화된 상태.
빈첸의 의식세계 속에서 폭포는 부동(不動)이었다.
움직이는 생명체를 베어낼 때는 많은 것을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멈춰 있는 것을 베어낼 때에는 그저 전력을 다하여 보이면 된다.
길게 배어내기.
폭포를 향해 검기를 뿜어냈다.
빈첸이 지닌 마나의 격은 일반적인 무인과는 궤를 달리했다.
용아인 전사 칼백조차 크게 놀랐었다.
쏴아아-
헤나는 또다른 폭포가 생성된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네 검은 하나의 해일이구나.’
그녀는 빈첸이 익힌 특성이 ‘소해일’이라는 것을 몰랐으나, 직접 체감했다.
빈첸이 일으킨 것은 분명 해일이었다.
거대하고 심오한 기운이 폭포를 덮쳤다.
높은 폭포가 반으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빈첸은 더욱 정신을 집중했다.
‘검증이었다면 여기서 멈추었을 것이나.’
검증의 장이 아니었다.
헤나를 안심시키기 위하여, 조금 더 힘을 내보이기로 했다.
빈첸에게는 소해일보다 더 상위 특성이 존재했다.
‘해상군세.’
해군의 세부특성.
해상군세를 펼쳤다.
나이메르가 도와주었을 때만큼은 아니지만, 성장한 세리의 정령술은 해상군세가 완성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헤나는 폭포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입을 다물고 말았다.
‘폭포가 역행했다.’
떨어지던 폭포수가 말라버렸다.
정확히 말하면 폭포수가 위로 솟구쳤다.
중력을 거슬러, 반대로 흘렀다.
폭포수로 가려져 있던 절벽이 모습을 드러냈다.
첨벙! 첨벙!
폭포에 들러붙어 있던 폭포 조개들이 황급히 물 아래로 뛰어내리기 시작했다.
“……어떻게 한 것이냐?”
“설상걸음을 이용하여 물 위에 선 것과 똑같은 이치입니다.”
해상군세는 ‘해군’의 세부특성.
본질적으로 수기(水氣)를 다루는 힘이었다.
‘해상군세는 수기를 널리 흩뿌려 광범위한 권능을 일으키는 힘이다. 그러니 폭포를 역행시키는 것도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지.’
-그죠. 쉬운 일이죠.
율리안은 큰 감흥이 없었다.
이미 아벨탄 폭포에서 한 번 봤기 때문이었다.
다만, 나일 폭포는 아벨탄 폭포보다 훨씬 더 크다는 것이 달랐을 뿐.
나일 폭포는 폭이 700미터, 높이 60미터에 이르는 거대 폭포였다.
-참 쉽다, 쉬워.
사실 감흥이 없다기보다는 놀라기를 포기한 쪽에 가까웠다.
-권능에 대한 본질적인 이해도가 있다면 이런 식으로 응용도 가능한 거죠. 그래서 기본이 중요한가 봐요. 그냥 뭐, 교과서만 냅다 공부하면 다들 대현자도 되고, 막 폭포도 거꾸로 돌려 버리고 하는 거지 뭐. 하. 하. 하. 근데 헤나 누님은 많이 놀라셨나 봐요.
헤나가 물었다.
“폭포를 역행시키는 특성도 존재했느냐?”
“용왕 아벨탄이 여러 번 보여준 이능입니다. 용림에 그에 대한 기록이 많이 남아 있었고, 덕분에 쉽게 익힐 수 있었습니다.”
-헤헤, 거짓말 실력이 많이 늘었네요!
율리안은 빈첸의 거짓말 실력 향상이 무척 흡족했다.
“이정도면 제가 누님을 도울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습니까?”
“……그래.”
“다행이군요. 혹시 실망시킬까 두려웠습니다.”
“농담하지 말거라. 이런 걸 보여주고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은 기만이다. 겸손도 과하면 독이 되는 법이다.”
“알겠습니다.”
빈첸의 실력 향상(?)에 뿌듯해하던 율리안이 무언가를 발견했다.
-형님?
‘나도 보인다.’
헤나도 발견했다.
폭포조개들이 떨어져 나간 절벽에 동굴이 하나 보였다.
“내가 일주일 동안 내내 찾아도 보이지 않던 것이 이제 보이는구나.”
“누님은 그저 임무 때문에 오신 것 아니었습니까?”
“무, 물론 그렇다.”
“말 더듬으신 것 같습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율리안조차 깜짝 놀랐다.
‘인형’ 헤나가 말을 더듬다니.
헤나는 금세 무표정으로 돌아왔다.
“잘못 들은 것이다.”
그녀의 귓불이 약간 붉게 물들어 있었다.
* * *
빈첸은 설상걸음을 펼쳐 동굴의 입구에 도착했다.
동굴 안은 굉장히 어두웠다.
외부의 빛이 차단되는 듯했다.
빈첸이 범용 마정석을 꺼내 빛을 밝혔다.
“세리. 혹시 모르니 내 뒤에 가까이 붙어.”
“네, 공자님.”
헤나는 세리를 데려온 것에 대해 딱히 불만을 표하지는 않았다.
그녀가 본 세리는 이미 어엿한 정령술사였으니까.
헤나가 앞장서서 걸으며 입을 열었다.
“특별한 조건을 갖추었을 때 비로소 천과수가 천과를 뱉는다고 했었지.”
“그렇게 들었습니다.”
정말로 이곳에서 천과수를 찾을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베르사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은 증명되었다.
“어머니께서는 이 안에 용이 잠들어 있다 하였습니다.”
“그래.”
그 용이 바로 천과수라고 했었다.
헤나는 검을 든 채 앞장서서 걸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빈첸의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한 기운이 느껴진다 싶었는데, 너희 뭐니?”
빈첸은 흠칫 놀랐다.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그건 헤나도 마찬가지였다.
헤나가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어딜 봐? 여기야.”
빈첸과 헤나는 동시에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동굴 천장에 한 여인이 거꾸로 서 있었다.
헤나가 물었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나?”
그녀가 씨익 웃었다.
그녀의 발이 닿은 천장 부근에 둥그런 마법진이 생성되었다.
헤나가 검을 휘두르려 하였으나 빈첸이 가로막았다.
마법진에서는 살의가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누구라고 말하면, 알아?”
그녀는 빈첸의 그림자에서 쑤욱- 튀어나왔다.
빈첸의 어깨에 손을 얹더니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Neria Tabre]
빈첸은 직감했다.
‘용언.’
용들은 그들만의 특수한 언어를 사용하여 마법의 권능을 부린다고 했다.
한 번도 들어본 적은 없으나 용언이 틀림없었다.
“당신은 용입니까?”
그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진짜로 아벨탄의 힘을 이었네. 용아인도 아닌 거 같은데, 너 뭐야?”
“아벨탄을 아십니까?”
“알지. 내 옛 친구. 그러고 보니 아벨탄의 반지까지 가지고 있잖아? 와, 그거 200년 만이다.”
그녀는 그제야 납득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서 어깨를 으쓱 한 뒤, 손을 펼쳐보였다.
“내 둥지에 찾아온 것을 환영해. 인간이 마지막으로 여길 들어온 건 15년 이상 된 것 같은데. 근데 여긴 왜 온 거야? 천과 찾으러 왔어?”
그녀의 시선은 빈첸에게로 향해 있었다.
그녀가 흥미를 가진 사람은 빈첸인 듯했다.
“그렇습니다.”
“근데 어쩌지? 천과는 50년에 하나 생성될까 말까 한 보물이거든. 15년쯤 전에 누구였더라……. 아주 예쁜 여자애가 그걸 가져갔는데.”
그녀가 허리를 숙였다.
빈첸의 목덜미에 코를 박고 킁킁 냄새를 맡았다.
“너 걔랑 비슷한 냄새가 난다? 왜지?”
“…….”
“냄새 좋네. 괜히 잡아먹고 싶게.”
그녀는 빈첸의 얼굴을 이모저모 뜯어보았다.
“너 혹시 이전에 천과를 가져간 애 이름을 알아?”
“사르비나.”
“아, 맞아. 사르비나라는 이름이었어. 근데 어떻게 알아?”
“제 어머니입니다.”
“응? 천과를 얻은 사람은 천과에 대해 발설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을 텐데. 너한테 방법을 가르쳐줄 수 있단 말이야? 설계가 틀려먹었나?”
“다른 분이 가르쳐주었습니다.”
“흠. 하긴. 거기 다른 애들도 몇 있었지. 원래 다 죽였어야 했는데.”
순간,
그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섬뜩한 살기가 밀려들었다.
그러나 빈첸은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우와, 기백이 제법이다 너.”
그녀는 빈첸에게 큰 흥미를 느끼는 듯했다.
빈첸이 물었다.
“이곳을 찾은 이들을 죽였습니까?”
“응. 몇 번 빼고.”
“왜 그랬습니까?”
“글쎄, 내가 대답해야 할 의무가 있을까?”
“그런 것 치고는 순순히 대답해 주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래 보였어?”
“예. 마치 그래야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녀는 붉은색 머리카락을 배배 꼬았다.
“눈치가 엄청 빠르네. 어디 가서 굶어 죽지는 않겠다, 얘.”
“…….”
“그냥. 나는 히슬리가 아닌 인간들이 내 둥지에 침입하는 것이 싫거든.”
세리의 몸이 움찔했다.
그녀가 바로 몰락가문.
히슬리가(家) 출신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