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의 정석 127화
균열에서 새어 나오는 오색찬란한 빛.
빈첸은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빛이 흐려진다?’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았다.
빈첸은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옛 무인 특유의 단련된 육감으로, ‘위험’은 없다 판단했다.
반사적으로 빛을 향해 손을 뻗었다.
빈첸의 육감을 어느 정도 신뢰하게 된 율리안은 빈첸을 딱히 말리지 않았다.
‘뭔가 잡힌다.’
손가락에 무언가가 잡혔다.
오색찬란한 빛이 거의 사라졌고, 빈첸은 균열에서 손을 빼내었다.
그의 손에는 동그란 반지 하나가 들려 있었다.
“반지구나.”
-와, 이게 진짜 숨겨져 있네.
두 동강 나지 않은, 완전한 형태의 반지.
율리안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얼른 한센 영감님한테 가보는 게 좋겠어요. 심상치 않아요.
빈첸이 따로 말하지 않았는데 세리는 알아서 빈첸의 짐을 정리했다.
빈첸이 명령하면 곧바로 길을 떠날 수 있도록 말이다.
다음 날 새벽 5시.
빈첸 일행은 데르소나를 떠나 아덴카의 본가로 향하기 시작했다.
윌슨이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응?”
빈첸의 숙소 앞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도로 양쪽에 질서정연하게 일렬로 쭉 서 있었다.
전 헬라임 도시의 시민들이었던 그들은 붉은 요새의 방식으로 빈첸에게 경의를 표했다.
“온전한 명예에 겸손한 경의를!”
“온전한 명예에 겸손한 경의를!”
새벽 5시.
아침 해조차 제대로 뜨지 않은 시각에, 수많은 시민들이 몰려나와 빈첸을 환송했다.
노란 기를 들고서 빈첸 일행을 환호했다.
덕분에 윌슨은 더욱 자신감 넘쳐서, 보폭이 무척 넓은 시종이 되었다.
며칠이 지났다.
“공자님. 이번 이동관문만 타고 이동하면 칸사르에 도착합니다.”
칸사르.
아덴카의 본가가 위치한 거대 도시를 일컫는 말이었다.
사람들은 편의상 ‘아덴카 본가’라고 부르기는 했지만, 정식 명칭은 ‘칸사르’가 맞았다.
칸사르로 향하는 이동관문 관리소에 서신이 도착해 있었다.
세리가 말했다.
“공자님. 셀비라 생도도 용림에 거의 도착했다는 소식이에요. 공자님께서 전해주신 고서적도 잘 받았다고 해요.”
“그래.”
“헤르카 경으로부터 온 서신이 하나 더 있답니다.”
“헤르카 경에게?”
“도대체 7급 승급식은 언제 치를 거냐고…….”
“맞아. 승급식을 치러야 했었지. 본의 아니게 많이 늦어지게 되었구나.”
어서 마무리 짓고 붉은 요새로 복귀해야겠다고 생각하던 찰나.
세리가 크흠 헛기침을 하고서 서신 내용을 전달해 주었다.
“최, 최대한 천천히 와주면 좋겠대요. 공자님의 승급이 너무 이례적이어서 전례가 없는 바람에 이래저래 절차가 귀찮으니 서두르지 말라고…….”
빈첸은 피식 웃었다.
“요새장님답구나.”
서신에는 분명 그렇게 적혀 있었지만 사실 빈첸은 알고 있었다.
‘한센 야장과의 일을 천천히 잘 마무리 짓고 돌아오라는 뜻이겠군요.’
용림에 들어간 지 벌써 7개월이 지났다.
아무리 전례가 없어 절차가 복잡하다고는 해도, 준비시간은 충분했다.
헤르카는 게을러도 바르곤은 성실하니까.
이미 바르곤이 모든 준비는 끝내놓았을 것이다.
‘고맙습니다, 헤르카 경.’
이전 생과는 확실히 달라졌다.
이제는, 그의 곁에 선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것이 빈첸을 무척 기쁘게 했다.
윌슨이 나섰다.
“공자님. 어디로 안내할까요?”
“한센 야장의 공방으로 간다.”
이동관문을 타고 이동했다.
시간을 오래 지체하지 않았다.
곧바로 한센의 대장간을 찾았다.
* * *
대장간에서 잡부로 일하고 있는 17세 소녀 밀리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아아~ 사람이 싫다.”
예전,
기자들이 마구잡이로 찾아와 나름의 교통정리를 열심히 하던 밀리는 이제 많이 지쳐 버렸다.
그녀는 약간의 인간혐오증에 걸린 상태였다.
“그중에서도 기자들은 진짜 싫고.”
그들은 대장장이들에 대한 존중이라든가, 작업장의 규칙, 대장장이들이 지키는 규율이나 약속 같은 것들을 모조리 무시했다.
그저 한센과 인터뷰를 따기 위해 공방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어 놓았고 그 뒤처리는 잡부인 밀리의 역할이었다.
“그래도 제일 싫은 건 역시 지들이 귀공자, 귀공녀라 주장하는 진상들이지.”
기자라는 가랑비가 지나가자, 이제는 진상이라는 폭풍우가 몰려왔다.
바로 어제도 일들이 있었다.
-뭐? 예약이 마감돼? 무슨 개똥같은 소리야? 돈 준다고 돈! 두 배! 두 배 줄 테니까 내 검을 당장 만들어와!
-돈 벌기 싫어? 배가 불렀구만.
라든가,
-그 뛰어난 재능을 기부하여 사회에 좋은 일에 쓸 수 있도록 하는 건 어떠신지요? 예? 그럴 여력이 없다고요? 하아, 어째서 그 훌륭한 능력을 밝은 일에 쓰지 않는 것입니까? 실망입니다. 아주 통탄할 일입니다.
라든가,
-명인이라며? 내게도 검 한 자루 정도는 줘야지!
라면서 다짜고짜 검을 내놓으라며 빌붙기도 했다.
-주문조차 받지 않다니. 내가 그렇게 우습소? 우리 가문을 무시하는 것으로 알겠소.
라는 협박은 그저께 들었다.
그래서 넌덜머리가 난 상태였는데 오늘도 웬 귀공자 하나가 찾아왔다.
나이는 조금 어려 보였다.
키가 상당히 큰 미남이었다.
“무슨 일이세요? 혹시 무기 제작을 의뢰하러 오신 건가요? 대장장이분들은 모두 예약이 마감되어 있어서요.”
그녀는 미리 선수 쳤다.
차라리 이렇게 선수를 치는 것이 진상을 걸러내는 빠른 방법이었다.
‘또 우리 영감님 들볶기만 해봐라, 가만 안 둔다.’
한센은 예약을 아예 받지 않는다.
오로지 검 하나를 만들기 위해 매진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력가의 자제들이라는 것들은 한센에게 검을 내어오라며 호통치기 일쑤였다.
하루에도 몇 번씩 있는 일이어서 그녀의 목소리는 친절하지 않았다.
빈첸은 기분 좋게 웃었다.
“야장께서 명예를 일부나마 되찾으신 모양이군요.”
아무래도 카곤을 꺾은 뒤, 한센을 언급한 것이 효과가 조금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게 무척 기분이 좋았다.
그 모습을 보며 밀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응? 뭔가 다른 녀석들이랑은 좀 다른데?’
조금 더 자세히 보았다.
그러고 보니 조금 이상했다.
‘글로 묘사된 빈첸 공자와 비슷한 것 같은데…….’
그녀는 한센의 배려 덕분에, 평범한 집안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글을 배울 수 있었다.
마나를 다루지 못하기에, 그녀가 볼 수 있는 소식지의 내용은 한정적이기는 했다.
최소한의 마나를 다룰 수 있어야 소식지 내에 기록된 인물의 모습이나 영상 기록 등을 불러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그녀는 소식지의 실린 글을 통해 빈첸을 여러 번 접했었다.
“혹시…….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빈첸 아덴카. 아덴카의 7공자입니다. 영애의 이름은?”
“저, 저, 저는 밀리라고 해요. 딱히 성을 내세울 만한 가문은 없구요. 그냥 밀리라고 불러주세요.”
밀리는 아주 잠시 동안 빈첸을 넋 놓고 바라보았다.
‘내 이름을 물어봐주는 건 또 처음이네.’
이름을 밝혔으면 상대의 이름도 묻는 것이 예의다.
본래는 그렇지만, 이곳에서 그런 사소한 예의를 지키는 자는 많지 않았다.
눈빛만 보아도 느껴졌다.
‘나를 무시하는 눈빛이 아냐.’
사람 대 사람으로 봐주는 눈빛이었다.
잡부 밀리가 아닌 사람 밀리를 봐주는 눈빛.
그녀는 소식지의 묘사들을 떠올려보았다.
‘검붉은 눈동자. 예리한 콧날과 턱선.’
그리고,
‘제복!’
그녀는 저 제복이 붉은 요새의 제복이라는 것까지는 몰랐으나, 어쨌든 제복을 입은 소년에게서는 명문가의 자제다운 기품이 느껴졌다.
밀리는 빈첸에 대한 소식들을 떠올려봤다.
‘최연소 각명. 부랑자 수용소의 수용자 구출. 사미온의 천재를 꺾은 기재이면서 헬라임의 아성을 무너뜨린 아덴카의 귀공자!’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게 하나 있었다.
‘우리 영감님을 명장으로 인정해 준 개념 있는 무인!’
빈첸이 이룩한 그 모든 것들이 빈첸의 아우라가 되어주었다.
적어도 밀리에게는 그랬다.
‘우와. 진짜 잘생겼다.’
그녀는 단언할 수 있었다.
여태까지 수많은 사람들을 경험했지만, 그들은 모두 해산물이었다.
빈첸을 보니 세상이 밝아졌다.
“아직 세상은 아름답군요. 희망이 있어요.”
인류애를 느낀 그녀는 희망을 보았다.
덕분에 인간혐오증을 앓던 밀리의 인간혐오증이 치유되었다.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으나, 한센 야장님을 만나고 싶습니다. 안에 기별을 넣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이죠.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빈첸 아덴카 공자님!”
그녀의 말투는 무척 친절했다.
* * *
공방 안으로 들어갔던 밀리가 다시 나와 사과했다.
“죄송해요. 지금 엄청 집중하여 작업 중이어서 전달을 하지 못했어요.”
“괜찮아요. 기다리겠습니다.”
빈첸은 한참을 기다렸다.
대략 7시간 정도가 흘렀다.
그사이 대여섯 명의 손님들이 다녀갔다.
그중 세 명가량이 밀리에게 험한 말을 쏟아냈다.
“어디서 눈을 똑바로 뜨고 말대꾸냐?”
“손님을 이따위로 대해? 이렇게 장사하고도 살아남을 줄 알아? 사교계에 소문이 나고도 멀쩡할 수 있는지 두고 보겠어.”
빈첸은 그러한 실랑이를 눈으로 직접 보았다.
“고생이 많군요.”
여러 소식지들을 통해 예약마감을 알렸고, 골목 초입에도 ‘예약 불가’를 알리는 안내판을 명시했지만 소용없었다.
“매일 있는 일인걸요, 뭐.”
밀리는 차를 내어왔다.
세리에 비하면 무척 서툰 솜씨여서 찻물이 꽤 썼다.
“공자님은 차를 마시는 모습도 우아하고 멋있으세요.”
“…….”
“혹시 교제하는 영애가 있으신가요?”
그녀는 혼자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역시 있겠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영애일 거예요. 헤헤.”
“…….”
밀리는 동경 가득한 눈으로 빈첸을 바라보았다.
자신과는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을 만난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영락없이 우상을 만난 팬의 모습인지라, 빈첸은 그녀의 눈빛이 약간 부담스러웠다.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갈 무렵.
땀에 흠뻑 젖은 한센이 모습을 드러냈다.
“빈첸? 여긴 어쩐 일이냐?”
“꼭 보여드려야 할 것이 있어서요.”
한센이 손을 내밀었고 빈첸은 그 손을 맞잡았다.
밀리는 테이블에 앉아 턱을 괴고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흐응. 빈첸 공자님, 멋있으셔.’
지금 한센의 꼴은 말이 아니었다.
땀에 찌들어 있는 데다가 손에는 온갖 그을음과 더러운 것들이 묻어 있었다.
‘저 뭐시기 광물 가루들이 피부에 닿으면 따갑다던데.’
그러나 빈첸은 그러한 것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손을 맞잡았다.
한센을 바라보는 빈첸의 눈에는 경의가 깃들어 있었다.
스스로 명장이라 인정한 대장장이에 대한 존경을 숨기지 않았다.
“근육 크기가 작아진 것 같습니다.”
“네 검 만든다고 집중하다 보니 제대로 먹을 수가 있나.”
한센이 인상을 찡그렸다.
“나의 막대한 근손실을, 훗날의 네가 책임져야 할 거다.”
“그 큰 손해를 무엇으로 보상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거야 네 녀석이 알아서 할 일이지.”
“하하하, 알겠습니다. 제가 한 번 명장께 드릴 보상을 고심해 보겠습니다.”
“네 녀석. 그새 키가 훌쩍 컸구나.”
한센의 표정이 그리 밝지만은 않았으나, 그의 눈동자에 담긴 것은 분명 호감이었다.
빈첸이 쑥쑥 자라나는 것이 약간은 흐뭇한 것 같았다.
한센과 인사를 나눈 뒤, 빈첸은 반지들과 푸른 보석을 꺼냈다.
그것들을 보자마자 한센은 눈을 크게 떴다.
“이 귀한 건 또 어떻게 구해왔어?”
그는 이 반지에 대해 무엇인가 아는 눈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