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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생의 정석-126화 (126/184)

환생의 정석 126화

시민혁명대는 혁명에 성공했다.

이제 시민혁명대는 시민혁명대라는 이름 대신 ‘자유 연합’이라는 이름으로 전 헬라임 도시들을 다스리기 시작했다.

헬라임가(家)는 자유 연합의 본부로 쓰이는 중.

빈첸이 자유 연합의 대문에 들어서자 한 소녀가 손을 흔들며 빈첸을 맞이했다.

“빈첸 공자!”

처음 빈첸은 속여 ‘파란 보석’을 빼앗으려 했던 하모나는 이제 로랑의 측근 중 한 명이 되어 로랑을 안내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한층 밝아져 있었다.

그녀는 한달음에 달려 나와 빈첸의 손을 맞잡았다.

빈첸이 말했다.

“상태가 괜찮아 보이는군요.”

아버지처럼 믿고 따랐던 바롬 노인의 정체는 이미 알려진 상황.

하모나 역시 적잖은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시간이 약이더라구요.”

하모나는 말을 아꼈다.

빈첸도 더 이상 캐묻지는 않았다.

“로랑 대장님. 여기서부터는 제가 빈첸 공자를 안내할게요.”

“부탁합니다, 하모나.”

로랑은 자리를 비켜주었다.

하모나는 빈첸을 데리고 헬라임가의 지하실로 향했다.

“이곳을 아는 사람은 아직 많지 않아요.”

헬라임가 지하실.

그곳을 안내해 주는 사람은 전 아룡검대원 유리나였다.

“빈첸 공자가 오기를 기다렸어요. 고지점령전에서의 일은 무척 감사했습니다. 이제야 정식으로 감사인사를 건넬 수 있게 되었네요.”

빈첸을 바라보는 유리나의 눈에는 은은한 호감이 서려 있었다.

“응당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하모나와 유리나는 빈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둘 다 비슷한 눈으로 빈첸을 바라보았다.

-형님, 근데 옛날에 연애 해봤어요?

‘내게는 무학이 전부였다.’

-그럼 그렇지.

‘뭐가 말이냐?’

-아무것도 아닙니다요.

유리나는 호감 가득한 눈으로 빈첸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헬라임 가문 내에도 ‘지하’가 존재하고 있어요. 이는 데르소나의 ‘지하’와 같은 방식으로 연결되는 특별한 곳이고, 헬라임의 보물을 보관하는 곳인 것 같아요. 저희도 발견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답니다.”

그녀의 말투는 사근사근했다.

고지점령전에서 보여주었던 아룡검대원의 모습과는 천지 차이였다.

하모나는 허리를 숙였다.

“아쉽지만 제 안내는 여기까지예요. 이후로는 유리나의 영역이라서요.”

전 시민혁명대.

현 자유 연합은 부패하지 않기 위하여 영역과 권한을 확실히 나누었다고 했다.

이후로는 유리나가 안내하기로 했다.

“빈첸 공자. 보물창고에 들어갔다 오면 시간 좀 내줄 수 있어요?”

“용건이 무엇입니까?”

“데이트 신청해도 돼요?”

무심한 척 얘기했으나 하모나의 볼이 약간 붉게 물들어 있었다.

빈첸은 그가 아는 최고의 지략가에게 조언을 구했다.

‘뭐라고 대답해야 옳겠느냐?’

-옳고 그름이 어디 있어요? 그냥 형님 하고 싶은 대로 해요.

‘하모나는 아직 어린아이이지 않으냐?’

-형님보다 연상인데요.

‘아, 그렇지.’

여기서 육체와 정신의 괴리가 발생했다.

데이븐의 눈으로 본 하모나는 어린 소녀에 불과했다.

도무지 여성으로는 보이지 않았기에 이런 상황에 염두에 둔 적이 없었다.

“별 뜻 없는 농담이었어요.”

“그렇군요.”

표정을 보면 아무리 봐도 농담처럼 보이지는 않았으나 빈첸은 굳이 그 사실을 짚지는 않았다.

어설픈 호의를 보일 생각도 없었다.

“나는 당분간 무학에만 몰두할 생각입니다.”

“알아요, 그럴 것 같았어요.”

둘의 대화에, 유리나의 낯빛도 약간 어두워졌다.

유리나도 빈첸에게 은근한 기대와 호감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고백을 한 적도 없는데 차인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빈첸은 무인다운 감각으로 그 묘한 기류를 눈치챘다.

‘생각지도 못했던 문제로군.’

현재 빈첸을 눈독 들이는(?) 여성들은 대부분 10대 중반가량의 소녀들.

빈첸 눈에는 어린아이들이었다.

아무리 현재의 몸이 열네 살의 몸이라고는 해도, 빈첸의 눈에는 도무지 여성으로 보이지가 않았다.

시간이 조금 필요한 문제인 듯했다.

유리나가 말했다.

“여기, 이동관문 위로 올라서세요. 보물 창고로 이동할게요.”

유리나와 빈첸이 이동관문 위에 올라섰다.

하모나는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나 차였네.’

그래도 기분은 좋았다.

‘빈첸 공자는 진짜 괜찮은 사람 같아.’

왠지 모르게 어른 같은 구석이 있었다.

나중에 누군가 연이 닿는다면, 빈첸 같은 사람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사이, 이동관문이 구동되었고 빈첸과 유리나의 모습이 사라졌다.

* * *

헬라임의 보물창고.

“이곳이 첫 번째 방이에요. 아마도 두 번째 방을 숨기기 위한 용도로 쓰인 것 같아요.”

그곳에 번쩍이는 금은보화는 없었다.

관리가 전혀 안 되어 널브러져 있는 각종 물건들.

낡은 서적들.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는 의자 두 개.

그 위에 수북이 쌓인 잡동사니들.

서류 뭉텅이들이 보였다.

“두 번째 방으로 이동하게 되면, 값비싼 보석들이 많이 숨겨져 있었어요. 로랑 경은 보석의 처리를 놓고 고심하고 있다고 해요. 어쨌든…… 두 번째 방으로 이동하시겠어요?”

“잠시만 둘러보아도 되겠습니까?”

녹슨 갑옷과 검 등을 살펴보았다.

옛 방식으로 제련한 것들이었다.

지금 기준에서 보면 투박하고 못난 것일지도 모르나 빈첸의 향수를 자극하는 물건들이기도 했다.

‘저 고서적들은 셀비라에게 전해주면 좋아하겠군.’

문득, 벽면에 아무렇게나 걸려 있는 그림 하나가 보였다.

의자에 두 사람이 나란히 앉아 있는 그림이었다.

한 쌍의 남녀였다.

율리안이 날카로운 눈썰미로 그들을 알아보았다.

-한 명은 헬라임 초대가주 에테니아의 모습이고, 또 다른 한 명은 용왕 아벨탄의 모습이네요.

아벨탄과 관련된 책에서 이와 관련된 내용을 읽은 적이 있었다.

헬라임 초대가주와 아벨탄은 친구였다고 했었다.

-잠깐만요, 형님.

율리안이 짧은 사이 그림에서 단서 하나를 발견했다.

-아벨탄의 반지. 보이죠? 형님이 획득한 거랑 똑같은 모양이잖아요.

‘보인다.’

지금은 반으로 갈라진 반지.

그 완성 형태가 그림에 그려져 있었다.

그런데 그림 속 용왕이 지닌 반지의 한가운데에는 파란색 보석이 박혀 있었다.

유심히 관찰하지 않으면 발견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작은 크기였다.

빈첸은 가까이 다가가서 그림을 오랫동안 살펴보았다.

-자세히 보면 물결 문양의 특별한 형태가 보여요. 저 보석. 어디서 많이 봤잖아요.

빈첸이 이미 지니고 있는 ‘푸른 보석’이 바로 그것이었다.

빈첸이 가지고 있는 것은 크기가 훨씬 크기는 했지만 어쨌든 종류는 같았다.

-헬라임의 가주도 똑같은 모양의 반지를 끼고 있어요. 어쩌면 쌍을 이루는 반지일지도 몰라요. 형님, 반지 한 번 꺼내보세요.

반지는 특별한 조건을 맞추면 발광하는 성질을 지니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용왕의 반지’는 오색영롱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여태까지와는 다른 빛이었다.

-여기에, 또 다른 한 쌍의 반지가 숨겨져 있는 것이 틀림없어요.

율리안이 한 가지 사실을 짚어냈다.

-저 의자. 그림 속 의자랑 똑같잖아요.

‘아니. 완전히 같지는 않다.’

이곳에 방치된 의자는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나무 의자였다.

그림 속 에테니아가 앉은 의자 한가운데에는 물결 문양의 균열이 존재했다.

-헬라임을 설립한 가주의 의자에 저런 식으로 금이 가 있는 건 이상한 일이죠. 물결 모양의 크랙이라니. 더욱 이상하네요.

빈첸은 아까 보았던 의자 앞으로 걸어갔다.

‘이 두 의자 중, 어떤 것이 에테니아의 의자이겠느냐?’

-왼쪽이요.

아벨탄보다 에테니아의 체구가 더 작았다.

그에 맞추어 의자가 제작되었을 테니, 더 작은 쪽이 에테니아의 의자였다.

“나는 이 의자를 선택하겠습니다.”

“……네?”

유리나는 빈첸의 선택을 이해하지 못했다.

“두 번째 방에는 값비싼 보석들이 있다니까요?”

“그보다 더욱 값비싼 것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빈첸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것이 영 성에 차지 않는다면, 내가 이곳에서 두 가지 물건을 취해도 되겠습니까?”

“잠시만요.”

유리나는 로랑에게 연락을 취했고 결국 그렇게 해도 좋다는 답을 받았다.

빈첸은 낡은 고서적들을 선택했다.

“이것들과 저 의자를 선택하겠습니다.”

“이해는 못하겠지만…… 알겠어요.”

빈첸은 의자와 고서적들을 아공간에 담았다.

그때, 로랑이 직접 찾아왔다.

“어차피 이럴 거면 처음부터 내가 안내를 할 걸 그랬구나.”

로랑은 빈첸에게 두 번째 방에서도 원하는 걸 하나 가져가라 일렀다.

빈첸의 로랑의 간곡한 부탁(?)을 이기지 못하고 두 번째 방으로 들어갔다.

과연 헬라임의 보물창고답게, 번쩍번쩍 빛이 나는 보석들이 많이 있었다.

‘헬라임이 이토록 부를 축적할 수 있었던 건, 역시 부랑자 수용소의 뒷배였기 때문이었겠지.’

로랑이 말했다.

“제발 부탁이다. 값비싼 걸로 하나만 가져가 다오.”

“……그게 부탁입니까, 숙부?”

“그래. 그래야 내 면이 서지 않겠느냐?”

“그렇다면…….”

빈첸은 주위를 둘러 보았다.

보석에 대해 어차피 잘 모르니 그냥 붉은 빛이 나는 예쁜 보석 하나를 골랐다.

특이하게도 보석 안쪽에 기포가 잔뜩 서려 있는 것 같은 형상이었다.

“이걸로 하겠습니다.”

“골라줘서 무척 고맙구나.”

“……별말씀을요.”

보석을 건네준 사람이 고맙다고 인사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둘은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우리 자유 연합은 네 공로를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칭찬도 너무 과하면 독이 되는 법입니다, 숙부.”

“우리는 혁명대의 정신을 기리고, 너를 비롯하여 혁명대에 큰 도움을 준 분들에게 경의를 담아 공적비를 건립할 것이니 훗날 시간이 되면 한 번 찾아 보아주거라. 훗날의 자유 연합 도시인들에게 큰 격려가 될 것이다.”

“알겠습니다.”

빈첸은 별다른 생각이 없었으나 그 뒤에 선 윌슨의 콧구멍이 벌렁거렸다.

콧김이 뿜어져 나오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공적비에 이름이 새겨진다니.

“혹시 빈첸 공자님을 시중든 시종 이름도 새겨지나요? 아니 뭐, 제가 뭐 아무것도 한 것은 없지만서도, 공자님 옆에서 열심히 제복도 다리고 물도 챙겨 드리고, 그리고…….”

“물론이다. 너와 세리의 이름도 함께 새겨 기억할 것이다.”

“흐흐흐, 저는 아무것도 한 게 없는 무지렁이일 뿐인걸요.”

애써 겸양을 떨었으나 주체할 수 없는 행복함이 새어 나왔다.

그 꼴을 본 세리는 괜스레 얼굴이 붉어지고 말았다.

윌슨은 지금, 세상에서 가장 자신감 넘치는 시종이었다.

“공자님. 제가 앞장서서 안내하겠습니다. 으하핫! 목욕물도 미리 받아놓았습니다요!”

그의 보폭이 평소보다 1.5배가량 넓었다.

빈첸은 신난 윌슨의 안내를 받아 숙소로 돌아왔다.

저녁 식사를 끝마친 뒤 말했다.

“윌슨, 너는 이 서적들을 셀비라에게 송부하고 오너라. 중요한 것들이니 각별히 신경 쓰고.”

“물론입죠. 공자님의 시종 윌슨! 명 받들겠습니다!”

여전히 신이 난 상태인 윌슨은 고서적들을 받아들었다.

빈첸은 자신의 방으로 올라와 아공간에 보관해두었던 의자를 꺼냈다.

먼지가 가득 쌓여 있었다.

‘율리안 위치가 여기가 맞느냐?’

율리안은 그림 속 의자의 모습을 완벽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정확한 기억력을 바탕으로 위치를 조정해 주었다.

-거기서 왼쪽으로 1㎝만요. 네네. 거기요. 거기서부터 시작돼요.

세리에게 말했다.

“세리. 저번처럼 나를 좀 도와줘. 용왕의 힘을 끌어낼 거야.”

“알겠어요.”

빈첸이 성장한 것처럼 세리도 성장했다.

나이메르의 가르침을 쏙쏙 흡수한 덕분이었다.

그녀의 부름에 따라 물방울로 이루어진 작은 요정이 모습을 드러냈다.

물의 정령이었고, 이름은 방울이였다.

“방울아, 부탁해. 공자님을 도와줘!”

세리의 도움을 받아 빈첸은 기세를 일으켰다.

빈첸이 사용한 것은 ‘소해일’ 특성이었다.

‘용왕의 힘으로 의자를 벤다.’

소해일 특성을 일으킨 그는 의자를 베었다.

그림과 똑같은 균열이 생겨났다.

균열로부터 오색찬란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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