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생의 정석 128화
빈첸이 물었다.
“이 반지에 대해 알고 계십니까?”
“난쟁이족 대장장이들 중 이걸 모르는 자는 없을 것이다.”
난쟁이족과 용아인은 대대로 선의의 경쟁자라고 했다.
당대 최고의 대장장이들은 난쟁이족 아니면 용아인족이었으니까.
최근에 이르러 최고라는 타이틀은 난쟁이들이 가져오기는 했으나, 어쨌든 난쟁이와 용아인들은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과거, 용아인 전사들을 육성하는 반지다.”
“저는 처음 듣습니다.”
“그럴 만도 하지. 제작의 비술이 사라져서 지금은 사라져 버렸어. 나도 스승님께 배우기만 했지 직접 보는 건 처음이다.”
한센은 신기하다는 듯 반지를 들여다보았다.
다른 사람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들이, 한센의 눈에는 보이는 듯했다.
“복구가 가능하겠습니까?”
“글쎄. 액세서리는 내 전문분야가 아니라서.”
“불가능합니까?”
“조금 봐야 알 것 같다. 도대체 이 귀한 건 어디서 얻은 거냐?”
“여차여차하다 보니 구하게 되었습니다.”
“여차여차하다 보니 구한 것 치고는 아주 정교하게 제작된 것인데. 제작양식으로 미루어 보아 족히 200년은 된 물건이겠어.”
한센의 눈에는 즐거움이 담겼다.
200년 전에 제작된 것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장난꾸러기 같기도 했다.
“너도 참, 아무튼 재주가 비상한 녀석이다.”
“예?”
“현재로서 완벽한 복원을 확신할 수는 없다. 그러나 네게는 희소식이 있어.”
“그게 무엇입니까?”
“두 동강 난 반지만 있어도 안 됐고, 이 온전한 반지만 있어도 안 됐다.”
두 동강 난 반지에는 반지에 보석을 이식할 수 있는 흔적이 남아 있다고 했다.
의자에서 꺼낸 온전한 반지는 두 동강 난 반지를 이어붙일 수 있는 단서가 남아 있다고 했다.
“결국 이 두 반지가 다 있어야 완벽한 복구를 할 수 있는 거야.”
“……그렇군요.”
“이렇게 까다로운 복원과정을 거치게 만든 것들은 사실 복원하기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 너는 지금 그 불가능한 걸 내게 갖고 왔고 말이야.”
하나의 조건을 만족해도 또 다른 조건을 만족하기가 쉽지 않아서다.
“그리고 이렇게 복잡하게 만들어 놓은 것은 보통 그만한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한센이 말했다.
“일주일 뒤 다시 오너라.”
그는 끼니도 거른 채 다시 공방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의 뒷모습은 왠지 신나 보였다.
대장장이라는 직업이 그의 천직이 맞는 것 같았다.
빈첸이 머쓱하게 웃으며 밀리에게 말했다.
“밀리. 야장께서 복원비용을 말씀해 주시지 않았습니다만…….”
밀리는 하마터면 ‘공자님은 공짜에요!’를 외칠 뻔했다.
그래도 프로의식을 발휘하여 이성의 끈을 붙잡았다.
“저렇게 들어가면 이틀은 안 나오세요. 이틀쯤 있다가 복원비용을 물어보고 아덴카가로 연락드릴게요.”
* * *
빈첸은 아덴카가로 돌아왔다.
이곳도 제 집이라고, 꽤 반가운 마음이 일었다.
방으로 돌아온 그는 약간의 휴식을 취한 뒤 종을 흔들었다.
“예, 공자님. 분부만 내려주십시오.”
빈첸의 후광을 등에 업은 윌슨은 행동이 빨라졌다.
본가 시종들의 부러움을 독차지하게 된 윌슨은 빈첸에게 쓸개라도 내어줄 것은 모양새였다.
“레일사 시종장을 불러라.”
“시, 시종장님을요? 이리로 오, 오라고 할까요?”
그는 충직한 시종이 되었으나 여전히 겁이 많았다.
그는 아직도 레일사가 많이 무서웠다.
“그래. 전에 하지 못했던 정산을 하기 위함이라 이르도록.”
“아, 알겠습니다.”
최근 1.5배쯤 넓어졌던 윌슨의 보폭은 2배가량 좁아졌다.
원래 보폭보다 더 좁아진 셈이었다.
어쨌든 그는 쭈뼛거리며 레일사에게 전달했다.
“앞장서거라.”
레일사가 빈첸의 방을 찾아왔다.
윌슨은 허리를 숙이고 밖으로 나갔다.
‘후우. 쫄지 말자. 나는 위대한 빈첸 공자님의 시종이시다!’
밖에서 여러차례 심호흡을 한 윌슨은 빈첸의 방에서 최대한 빨리 멀어졌다.
그리고 그때.
레일사가 말했다.
“못다 한 정산에 관하여 말씀하셨다 들었습니다.”
“나는 전에 시종장의 예산착복을 지적했었다.”
레일사가 일부러 잡혀준 약점.
빈첸이 그것을 언급했다.
“그렇습니다.”
“내가 아는 시종장이라면 그것을 모아두었겠지.”
“그렇습니다.”
“이제 그것을 내게 내어주면 좋겠군.”
레일사는 이유에 대해 묻지 않았다.
이것은 본래부터 빈첸을 위하여 모아둔 것이었다.
그러므로 이유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곧장 아공간에서 종이 하나를 꺼냈다.
대륙의 금융을 담당하고 있는 케르빌가(家)가 보증하는 수표였다.
수표에는 1,000,000,000루덴이 적혀 있었다.
“본래 9억 8천만 루덴이었습니다만.”
생각지도 못한 엄청난 금액에 빈첸마저도 잠시 입을 다물었다.
“…….”
“이것에 사죄의 의미로 제가 2천만 루덴을 얹어, 10억 루덴을 만들었습니다.”
착복한 예산이 이렇게 클 리는 없었다.
평범한 가문 출신의, 평범한 일을 하는 성인의 평균 연봉이 3천만 루덴가량이다.
혹자는 평생을 모아도 10억 루덴이라는 돈을 가질 수 없었다.
빈첸이 속으로 물었다.
‘9억 8천만 루덴을 횡령했던 건 아니겠지?’
-네. 여태까지 형님한테 배정된 예산을 전부 다 합쳐도 저 금액은 안 될 거예요.
‘그렇군.’
그러나 빈첸은 이상함을 짚지 않았다.
명분이 어찌 되었든 레일사는 죄를 저질렀고, 이것은 그녀 나름의 속죄였다.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것.
그게 레일사가 용서를 구하는 방식이었다.
아무것도 묻지 않는 것.
그게 빈첸이 그녀를 용서하는 방식이었다.
-제 계산에 따르면 대략 5천만 루덴 정도를 횡령했을 것 같거든요. 와……. 이걸 어떻게 저렇게 불렸지?
율리안은 투자에 실패했었다.
율리안이 딱히 잘못했던 건 아니었다.
사실 6부탑주 바르넬리는 전도유망한 천재 마법사였었으니까.
-역시 투자는 실전이랄까……. 크흠.
사실 빈첸도, 율리안도 알고 있었다.
레일사는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본인의 돈 2천만 루덴을 얹었다고 하였으나, 사실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보탰을 것이 틀림없었다.
이 정도면 아덴카에서 받는 봉급의 대부분을 쏟아 넣었을 확률이 높았다.
-크흠, 어쨌든 엄청 큰돈이 생겼네요. 유용하겠어요.
레일사가 말했다.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지난날의 과오는 평생 속죄하며 살겠습니다.”
속죄를 해야 하니 어쩔수 없이,
나는 그녀의 아들인 공자를 평생 모셔야겠군요.
그 말은 속으로 삼켰다.
그리고 이틀이 흘렀다.
한센 대장간의 밀리가 직접 아덴카 본가를 찾아왔다.
아덴카의 정문에서 기별이 도착했다.
손님을 들여보내도 되겠느냐는 연락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율리안은 많은 것이 변했음을 직감했다.
-밀리가 미리 정식 입가서를 제출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유력가문의 자제도 아닌데, 형님을 만나러 왔다는 것만으로도 출입허가가 되네요.
예전 빈첸의 입지였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예전의 빈첸은 버려진 못난이였고, 아덴카가의 모두가 그를 무시했었으니까.
이윽고,
입가 허가를 받은 밀리가 빈첸의 방으로 안내되었다.
밀리를 안내해 준 사람은 백색검대 소속, 5성 무인 제론이었다.
오랜만에 빈첸을 만나고 싶어 제론이 안내인을 자처했다.
“하하, 공자님,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이군, 제론.”
그사이 제론도 꽤 성장한 것 같았다.
정확한 성취를 읽어낼 수는 없었지만 확실히 전보다는 강해졌다.
“6성을 완성한 건가?”
“예리하시군요. 맞습니다.”
“축하한다.”
제논은 빈첸의 눈썰미에 딱히 감탄하지는 않았다.
그는 빈첸이 특별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가 어깨를 으쓱하고서 말을 이었다.
“감사합니다. 이게 다 공자님 덕분이죠.”
제론은 빈첸과의 만남을 통해 큰 자극을 받았다.
그 자극을 원동력 삼아 수련에 매진했고 단기간에 빠른 성취를 이룰 수 있었다.
“근데 공자님은 훨씬 더 강해지신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인데요.”
“그런가.”
“예. 이거, 아무래도 몇 년만 더 지나면 저보다 훨씬 강해지실 것 같은데요? 하하!”
뒤에 서 있던 밀리가 제론 뒤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손님을 언제까지 이렇게 세워두실 건가요, 공자님?”
“아, 미안합니다. 친구를 만나 반가운 마음에 그만 실례를 범했군요.”
빈첸이 깍듯하게 예의를 차리자 오히려 당황한 사람은 밀리였다.
귀공자들 중에 자신에게 이렇게 격식을 갖추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빈첸에게는 뭐랄까, 또래의 아이 같은 구석이 없었다.
마치 어른을 보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노, 농담이에요. 너무 그렇게 격식 차리지 말아주세요. 저는 그런 게 너무 어색하고 어려워서요.”
“저는 한센 야장님을 명장으로 인정하고 존중합니다. 따라서 그를 돕는 모든 이를 한센 야장님을 대하듯 인정하고 존중해야만 합니다. 그게 야장님에 대한 예의입니다.”
빈첸이 빙그레 웃었다.
“……마는 너무 불편해하시니 조금 편하게 하지요.”
“말씀도 편히 놓아주세요.”
“그러지.”
“아, 이제야 좀 편해졌네요.”
“밀리도 내게 말을 놓아도 될 것 같은데.”
“예?”
“그게 공평하잖아.”
밀리는 은근슬쩍 눈치를 살폈다.
보통은 펄쩍 뛰며 거부했겠지만 밀리도 보통은 아니었다.
“진짜 그래도 돼? 요?”
“진짜 그래도 돼.”
“진짜?”
“그래.”
“진짜지? 나중에 책잡으면 안 된다? 요?”
“약속하지.”
둘의 대화를 듣던 제논은 빙그레 웃고 말았다.
“공자님. 저는 추후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수고했다.”
제논은 허리를 숙인 뒤 멀어졌다.
빈첸은 밀리를 자신의 방으로 들였다.
세리가 따뜻한 차를 내왔고, 빈첸은 밀리와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게……. 있잖아. 공자님. 아니, 공자. 그,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해야할지 모르겠는데.”
밀리는 무언가 말하기 곤란한 듯 뜸을 들였다.
빈첸은 여러 번 괜찮다고 밀리를 다독였고, 밀리는 한참 후에야 본론을 꺼낼 수 있었다.
“그게……. 영감님 혼자서는 불가능한 일이고 다른 난쟁이 대장장이의 도움을 받아야 한대. 액세서리 복원분야에 있어서 최고라나 뭐라나.”
“그런데?”
“우리 영감님이 옛날에 돈만 밝히는 추잡한 늙은이라고 맹비난했었거든.”
액세서리 분야의 최고 권위자인 난쟁이.
율리안은 그 이름을 알고 있었다.
-디르미델 야장이겠네요. 한센 야장이랑 사이가 무척 안 좋은 걸로 아는데요.
빈첸이 말했다.
“디르미델 야장?”
“어? 알고 있어? 혹시 친분이 있다거나…….”
“그런 건 아니야. 그저 이름을 알고 있을 뿐.”
밀리는 조금 더 자세한 이야기를 터놓았다.
“……해서 디르미델, 그 속 좁은 영감탱이는 우리 영감님한테 삐쳐 있거든. 돈에 미친 늙은이 취급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협업이냐고 아주 기세가 등등하단 말이야.”
“…….”
“그래서 말 같지도 않은 조건을 내걸었어.”
빈첸은 흐음, 하고서 턱을 한 번 만진 뒤 밀리를 응시했다.
“그 말 같지도 않은 조건이 뭔데?”
“현금으로 100억 루덴을 가져오래.”
“…….”
빈첸에게도, 율리안에게도 현실감 없는 액수였다.
율리안이 가르쳐주었다.
-한센 영감님이 호락호락한 사람은 아닐 텐데요. 분명 100억 루덴을 주겠다고 뻥을 쳤을 거예요.
빈첸이 물었다.
“혹시 한센 야장께서 100억 루덴을 지불하겠다고 공수표를 던지셨나?”
“응? 어떻게 알았어?”
한센이 100억 루덴을 주겠다고 거짓말을 한 이유는, 그가 디르미델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부러 100억 루덴을 지급하겠다고 말했다.
어차피 한 번은 다른 조건을 내걸 것을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한센의 예상대로, 디르미델은 또 다른 조건을 내밀었다.
“조건을 한 번 바꾸었으니, 디르미델 야장도 다시 말을 바꾸기는 어렵겠지. 그에게도 체면이 있으니.”
밀리의 눈이 커졌다.
그녀는 짧게 감탄한 뒤 말을 이었다.
“하늘이 내린 기재라더니. 진짜인가 봐.”
그녀는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말도 안 되는 조건들이기는 한데, 일단 전달은 할게.”
그녀는 알지 못했다.
상식적으로 누군가에는 ‘말도 안 되는 조건’도, 또 누군가에는 ‘말이 될 수 있는 조건’이라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