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 도화선 [8] >
귀족가의 군대가 자유도시로 접근했다.
기사들의 갑옷은 잘 닦여 눈이 부시고, 뒤따르는 병사들은 통일된 무장으로 정연히 그 뒤를 따랐다.
그 수가 많지는 않다고 해도, 확실히 정련된 군대의 모습이었다.
타플강드의 지부장이 마중을 나왔다.
백작가의 귀한 손님을 맞아 지부장의 허리가 펴질 줄을 몰랐다.
그러나 손님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할타스를 빙 둘러 펼쳐진 빈민가는 누가 보기에도 눈살을 찌푸릴 만한 광경이었으니까.
“황금이 흐르는 도시라더니. 거지 소굴이군.”
거나 디엔바. 디엔바의 셋째 아들이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소년은 올해로 열넷. 그러나 열넷의 어린 나이에 후계자 경쟁에 뛰어들었으니 그저 도련님이라고 얕볼 상대는 아니었다.
덕분에 지부장의 허리가 더욱 굽었다.
“이런 도시를 팔 생각이던가?”
“아이고, 나리. 저것들은 할타스에 기생하는 벌레들이나 다름 없습니다요. 내부로 들어가시면 도시의 진가를 아실 것입니다.”
“벌레들이라고? 벌레가 길을 침범해도 가만히 놔두는 것이 시장의 일이던가?”
“아이고, 나리.”
“아니면 디엔바가 우스워 보이던가?”
귀족의 공식 행차였다. 그리고 더러운 것은 미리 치워 손님께 보이지 않는 것이 예의였다.
빈민가가 본래 도시 깊고 낮은 곳에 숨은 이유였다.
“절대 아닙니다, 나리. 하나, 일개 상인 된 몸으로 어찌 함부로 인명을 치우겠습니까. 그러할 권한도 없을뿐더러, 그러할 힘도 없습니다요.”
“왜. 타플강드의 병력이 제법 되지 않더냐?”
“사병이라니요. 당치도 않은 말씀이십니다.”
부상단주가 진땀을 흘렸다.
“그럼 네가 데려온 것들은 뭐야?”
“그저 계약한 용병단일 뿐입니다요.”
“그래. 계약. 그렇겠지.”
거나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대륙의 어느 왕국도 상인의 사병을 허락하지 않았다. 상인이 용병단과 전속 계약을 맺은 다음 용병단을 부리는 것이 그 편법이었다.
애초에 제 사람을 모아 키워서 만든 용병단은 겉으로야 동등한 계약 주체라지만 실상 사병들이었으니까.
“저 역겨운 것들이 앞을 막지 않도록 단단히 주의하도록. 군홧발에 짓밟히지 않도록. 내가 다스릴 도시에 악명이 퍼지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예예, 그리하지요.”
“대답만 하지 말고. 잘하라고. 잘.”
거나가 지부장의 뺨을 툭툭 건드리며 말했다.
빌어먹을 애새끼 같으니라고.
지부장이 분을 꼭 삼켰다.
손주뻘 되는 소년에게 당하는 치욕이었으니까.
기이한 분노였다.
애초에 귀족의 행차에 앞서 빈민을 정리하지 않았으니 타플강드의 잘못이 맞았다.
사병이 없다는 구실 따위가 태만의 변명이 되지 못했다. 너도 알고 나도 아는 거짓말이었으니까.
그러니 본래는 잘못했다 빌고 납죽 엎드려야 할 일이다. 속으로 수모라 여기며 분루를 삼켜서는 안 될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부상단주에게 예정된 미래가 있었다.
그저 재수 좋게 귀족가에 태어난 애새끼가 이리 나온다 이거지.
곧 새로운 시대가 열린다. 태생이 그 운명을 결정짓지 않을 그런 시대였다.
그 시대를 알고 약속받고 나니 지금이 치욕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그러나 소년은 지부장의 예상보다 더 예민했다.
“뭐야. 너. 기분이라도 나쁜 모양인데.”
“아, 아닙니다.”
“아니기는 뭘 아냐? 얼굴이 붉잖아.”
툭툭 뺨을 건드리던 소년이 점차 힘을 더했다.
짝. 짝. 짝.
연신 살가죽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마침내 머리 희끗한 지부장이 바닥에 쓰러지고 나서야 거나가 쯧쯧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어디서 건방지게. 지부장 따위가 나와서는.”
거나가 그렇게 말하고는 마차에 올랐다.
상단주가 직접 나오지도 않았으며, 게다가 빈민을 가는 길에 그대로 놔두다니. 도시의 지분 매입만 아니었다면 참지 않았을 터다.
그러나 디엔바의 후계 경쟁이 한창이었고, 영지의 확장은 큰 성과가 된다.
타플강드 상단의 건방짐은 차후에 손을 보아도 될 일이었다.
거나가 마차 안으로 사라지자, 쓰러진 지부장에게 직원이 급히 달려들었다.
“지부장님, 괜찮으십니까?”
“……나는 괜찮다.”
전혀 괜찮지 않았으나 겉으로 하는 말이었다.
기사와 병사들 사이에서 분통을 터뜨릴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게다가 어느 정도 예상한 일이기도 했다.
본래 타플강드 상단주가 직접 나서야 했을 일에 지부장이 나섰으니 귀족가 도련님이 곱게 보지는 않을 터라고.
그렇게 마음을 먹고 나섰다.
만화원의 개입으로 도시가 난리통이었다.
만화원이 귀족이라고 가리지 않는 이들이라 타플강드 의원이 몸을 숨겼다.
상단 본단이 통째로 날아간 상황이었으니 더더욱.
지부장이 애써 목소리를 다듬어 말했다.
“도련님께서 불편하시지 않도록 각별히 신경을 써 드려. 빈민 놈들이 감히 앞을 막지 못하게.”
영민은 때때로 귀족의 행렬을 몸으로 막아 세우곤 했다. 대륙에 전해지는 오래된 전통이었다.
귀족 각 개인에 따라 그 대응은 다르나, 이야기 정도는 들어주는 편이었다.
영민이 제 목숨을 걸고 하는 호소의 방법이라서.
영민이 감히 죄를 알면서도 간청한다면 마땅히 한마디는 들어줄 수 있다는 그러한 뜻이었다.
그 내용이야 억울함이 될 때도 있고, 혹은 괴물의 습격으로부터 지켜달라거나.
아니면, 아픈 아이를 살려달라 빌 때도 있었다.
그러나 여기는 자유도시였다.
아직 이 빈민들이 디엔바의 영민이 아니니 귀족에게 그런 무례에 대한 자비를 청할 수 없었다.
하지만 빈민이 본래 어떤 치들인가. 모두 아프고 굶고 절박하니 제 목숨 하나 버리고 가족이라도 살리고자 하는 이는 널리고 널렸다.
“그런 놈이 있으면 당장 베어버려. 기사님들께서 하찮은 것에 시간을 쓰시게 하지 말고.”
“예.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이제는 저 귀족가 도련님의 성질을 잘 알겠다.
누가 끼어들어 행렬이 멈췄다가는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었다. 잔인하고 냉혹한 이였다.
타플강드의 병력들이 앞장을 서며 눈을 부라렸다.
살기가 풀풀 날렸다.
그러니 빈민들이 감히 눈조차 마주치지 못했다.
그러나 그 노력도 곧 부질없는 일이 되었다.
저만치에 잔뜩 몰려든 것이 빈민들이었으니까.
지부장이 급히 물었다.
“뭐야? 저거 뭔데? 용병단은 뭘 하고?”
귀족을 모시는 데에 미리 준비를 해 놓았다.
도시로 향하는 대로를 이미 한 차례 닦아 놓았다.
아침부터 용병단을 부려 대로변의 노점을 싹 치워 정리하고 절대 가까이 오지 말라 으름장을 놓았다.
거기에 마중을 나오면서도 한 번 더 정리를 했다.
새벽녘에 나올 때만 해도 없던 무리가 이제 와서 도로에 튀어나와 있었다.
지부장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젠장, 당장 쓸어버려. 빨리!”
지부장의 말에, 용병들이 일제히 튀어 나갔다.
용병들이 다급히 달려나갔다. 급한 명령에 칼부터 뽑아 드니 그 기세가 흉흉하기 그지없었다.
빌어먹을 거지새끼들이.
지부장이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이미 행렬의 기사들이며 병사들이 보았으니 추후 곤욕을 치를 것은 뻔했다.
그러나 적어도 행렬이 멈추어 서는 일만은 막아야 했다.
그러나 일이 또 지부장의 속내와 달랐다.
용병들이 빈민 무리에 도착해 날뛰려나 싶더니, 갑자기 어쩔 줄을 몰라 우왕좌왕 허둥대는 것이다.
멀리서 보기에도 그러하니 빈민이 해산하는 낌새가 없다.
“젠장, 이게 무슨 일이야.”
마음이 급해진 지부장이 직접 다리를 놀렸다.
늙은 상인의 체력이 보잘것없어 금방 숨이 차고 속이 부서지는 것처럼 아팠으나, 상황이 중대하니 어찌어찌 기세를 잃지 않았다.
“허억, 무슨, 젠장, 허억, 뭣들 해, 당장 치워야.”
“지부장님, 그것이.”
“왜? 허억. 못하겠어? 그럼, 내가.”
지부장이 숨이 차는 와중에서도 용병의 칼자루를 빼앗았다.
“내가 직접 쫒아내고 말지. 빌어먹을. 후우.”
“상단주님.”
“당장 꺼지지들 못해!”
상단주가 고함을 질렀다. 빈민들의 시선이 상단주를 향하고, 손에 들린 칼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 두려움이 감돈다.
그러나, 기이하게도 자리를 떠나지는 않았다.
“이것들이 미쳤나……”
“지부장님, 안됩니다!”
“안 되긴! 누구 죽는 꼴 보려고 이래?”
“사제님! 사제님께서 계신단 말입니다!”
용병이 바락 소리를 질렀다.
지부장이 눈을 꿈벅거렸다.
“사제님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사제님께서 임시 진료소를 차리셨답니다.”
“아니, 그게 왜, 하필이면 왜 또 왜 지금? 아침만 해도 없었는데……. 이런, 젠장.”
문득 짚이는 것이 있었다.
빈민가에 신관이 하나 들어차 무료로 진료를 보고 심지어 곡식까지 나눠준다고 했던가.
할타스에는 신전이 없다. 그러나 신관들이 들러 지나는 길에 봉사하는 일이야 대륙 어디에서나 벌어지는 일이었다.
“젠장, 내가 이야기를, 아니지.”
지부장이 빈민 사이로 들어가려다 멈칫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디엔바의 행렬이 부쩍 다가와 있었다.
애초에 눈으로 보고 달려서 이리 왔으니 행렬이 금방 따라잡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사제를 보자 하고 물러달라 해도 이미 늦었다.
지부장이 반대 방향으로 달렸다.
이렇게 된 바에야 도련님께 먼저 말씀을 드리고 양해를 구하는 편이 나았다.
제아무리 귀족 도련님이라고 해도 사제를 함부로 대하지는 못할 테니까.
그러나 이미 늦었다.
도로변에 수상한 것들이 모여있는 상황에서, 행렬이 가까이에 와서야 멈추겠는가. 미리 보아 거리를 두고 멈추는 것이 당연했다.
정지한 마차에서 내리는 귀족 소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짜증이 가득한 표정으로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피더니, 지부장을 보고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지부장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이봐, 내 말이 그리 우숩게 들리던가?”
“아닙니다.”
“그럼, 디엔바가 우습게 보이던가?”
“절대, 절대 아닙니다.”
“그런데 저건 또 뭐야? 백작가의 행렬이 저 천한 것들을 피해 돌아가야 하나?”
“아니, 아닙니다.”
“그럼 부대끼기라도 하라는 거야 뭐야?”
대로는 충분히 넓었다. 한켠을 차지한 빈민들을 제치고서도 충분한 공간은 있었다.
“대륙 제일의 상단쯤 되니 내 가문쯤은 아무것도 아니라 이건가? 겨우 일개 백작가라 이거지?”
“아닙니다. 아닙니다요.”
“이것도 아니, 저것도 아니. 그러면 대체 뭐야? 내가 더러운 슬럼을 가로지르는 것도 모자라, 이젠 아예 저것들이 길을 차지하고 있는데?”
“오해, 오해이십니다. 지금은 사제님께서 빈민을 돌보고 계신지라.”
가너가 인상을 와락 구겼다.
“그러니까, 내가 지나갈 때, 맞춰서 사제님께서 계신다 이 말이지? 너희가 능멸하려 드는 방식이 이런 줄은 몰랐는데.”
“아이고, 저희는 정말 모르는 일입니다요.”
“내 상단주와 다시 이야기를 해봐야겠어.”
가너가 엄포를 놓았다.
되려 그 소리에 지부장이 한시름 놓았다. 상단주와 이야기해 봐야 제가 어쩌겠는가.
손에 낀 같은 반지만큼의 신뢰로 엮인 사이다.
귀족이라고 제가 일러바친다고 밥줄이라도 끊길 줄 아는 모양인데, 당분간 근신하며 좀 사리면 그만이었다.
유난히 예민한 가너가 그 기색을 눈치채고 지부장의 정강이를 세게 걷어찼다.
아직 열넷의 소년이라 하나 진심을 담은 발길질이었다. 심지어 강철로 덧댄 신발코에 얻어맞았다.
이미 노회한 정강이뼈가 어찌 성하겠는가.
똑 부러지니 으악 소리와 함께 지부장이 바닥을 굴렀다. 가너가 그 옆에 쪼그려 앉아 말했다.
“하아. 너는, 참 표정이 말야. 속도 못 숨기는 것이 큰 상단의 지부장이라고? 타플강드가 사람을 못 보는지, 아니면 날 기만하려 아무나 자리에 앉혀 데려왔는지 모르겠어.”
“크윽, 다리, 다리가.”
“죄송하다는 말이 안 나오네?”
“죄송, 죄송합니다…….”
가너가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제님께서 구제를 베푸시는 데에 누를 끼쳐드릴 수는 없지. 행렬을 정비해 폭을 줄여. 그리고 사제님께는, 흠. 경?”
가너가 제 호위 기사를 바라보았다.
가문의 기사단장 중 하나로 소년의 지지자이기도 했다. 기사단장이 가너의 눈빛을 받아 대답했다.
“수고스러우셔도 직접 인사를 드리시는 편이 낫겠습니다. 교단을 존중한다고 소문이 나서 나쁠 것이 없고, 여차하면 금화를 좀 푸셔도 좋을 겁니다.”
기사단장이 그리 조언했다.
그가 독실한 신자로 유명했으니 사심이 꽤 담겼으리라 내심 짐작할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경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가너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럼 데먼 경께서 함께 해 주세요.”
* * *
시엔의 시력은 이미 인간을 초월했다.
멀리 볼 뿐만 아니라 어둠을 꿰뚫어 본다.
어떤 맹수조차 비할 녀석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니 행렬에서 일어난 일 역시 똑똑히 보았다.
중년과 노인의 사이쯤, 어중간하게 늙은 상인이 바닥을 구르니 딱 봐도 다리가 부러진 꼴이었다.
보나 마나 타플강드의 인사가 분명한 놈이 그러고 있으니 아주 쌤통이었다.
시엔이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어린 게 성깔 좀 있네. 잔인할 줄도 알고.”
기사와 병사들이 그 모습을 바라봄에 공포나 질린 기색 따위가 없다.
제 작은 주인의 패악이 저들에게 화를 미치지 않음을 잘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손속이 거칠고 잔인하나 제 사람에게는 그러지 않는다라. 저쪽 가문의 미래도 당대에는 괜찮게 되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잔인한 것과 잔인할 줄 아는 것은 다르다.
그 만행이 향해야 할 이와 아닌 사람을 구분하는 정도의 차이다.
그러나 전자는 흠결이고 후자는 미덕이었다.
기대하지 않았던 유쾌한 장면이었다.
일부러 대로변에 진을 치고 빈민을 끌어모았다.
타플강드 상단이 귀족을 맞이하는 때에 좀 곤혹스러워하라고 일부러 한 일이었다.
생각 이상의 장면을 보았으니 어린 귀족에게 호감이 돌 수밖에는.
물론, 이런 사소한 장난이나 치자고 한 일은 아니었다. 귀족가의 도련님에게 자연스레 접근하려는 수작이었으니까.
도시로 들어가 숙소에 자리를 잡고 나면 함부로 찾아가기도 그러한 일이었다.
만나준다는 보장도 없거니와, 명백히 부자연스러운 접근이 될 테니까.
그러니 모른 척 행차를 방해하고 나섰다.
사제가 하는 선행을 막을 수는 없을 터.
그렇다고 인사를 오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았다.
귀족과 교단이 무어 서로 존중한다고는 하나 그뿐이다.
서로 방해는 하지 않을 터이니 지나쳐 갈 테니 그때 붙잡아 말을 붙이면 된다.
명분이야 빈민 구제하는 데 도움이나 좀 달라고 하면 누가 봐도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니까.
이제 곧 제 영지가 될 도시였으니 사제가 충분히 요청할 수 있는 사항이 아닌가.
물론 인사를 하러 오면 더 자연스럽고.
마차에서 내린 것이 아직 덜 여문 꼬맹이였을 때 어지간하면 이리 오지 않겠는가 예상은 했다.
백작 본인이라면야 몰라도, 소년이라면 그 후계자 혹은 후계자 후보쯤 될 테고.
그 자리는 아무래도 여러 사람에게 잘 보여야 하다 보니.
아니나 다를까, 멈춘 행렬을 뒤로 하고 소년이 이리 다가오기 시작했다.
기사 몇을 끼고 다가오니 시엔이 모르는 척 환자에게 시선을 돌렸다.
마침내 귀족 소년이 빈민을 헤치고 시엔의 옆에 닿았다. 따로 기별은 하지 않았다.
시엔이 환자를 돌보는 척을 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빈민 하나를 처방하고 돌려보내고 나서야 시엔이 비로소 고개를 돌렸다.
“귀한 분께서 오셨네요.”
“지나는 길에 수고를 하시는 것 같아 잠시 인사나 드리려 합니다. 천신께서 가호하시기를.”
으레 신관에게 하는 인사말이었다.
그리고 나면 신관이 받아 간단한 축사로 돌려주는 식으로.
그러나 시엔이 대답 대신 빙긋 웃어보였다.
사제 흉내를 내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대충 뭉개야지, 뭐.
교단이 식구라 하며 살갑게 대하니 시엔 나름대로 의 최소한의 예의였다.
교단을 도우면 도울지언정 신실한 흉내를 내서는 안 될 일이니까.
덕분에 소년의 표정이 살짝 흐트러졌다. 사제라서 인사를 했더니 그냥 웃는다.
생각과 다른 반응에 당황할 수밖에는.
“어, 저는 가너 디엔파입니다.”
“이런. 사정이 있어 이름을 밝힐 수 없음을 양해해 주시겠어요?”
“아, 예. 그렇군요.”
좋게 말했지만 당당한 무례였다.
소년이 한층 더 당황했다.
기사 몇몇은 조금 심기가 상한 것 같았다.
시엔이 그에 덧붙였다.
“제가 하는 일이 교단의 이름으로 이루어지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양해해 주시겠지요?”
“예, 무어. 그러시다면.”
소년이 어물거리다 대답했다.
방금 전까지는 똑 부러지는 것 같더니만, 당황스러운 상황에서는 나이대의 모습이 비쳤다.
가너가 흠흠 헛기침을 하다 말했다.
“지나가는 데에 들렀습니다만, 혹여 선행을 베푸시는 데에 작으나마 도움이라도 필요하시다면.”
“아. 고마우신 말씀이시네요. 하나, 오해가 있으신 모양입니다만.”
“오해라 하시면?”
“빈민 구제야 사실은 제 관심 밖에 있는 일이고, 실은 여기서 공자님을 기다리고 있었으니까요.”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구태여 접근해놓고 빙빙 돌릴 필요는 없겠지.
시엔이 웃는 표정 그대로 말했다.
“도련님께서 지금 목숨이 위험하세요.”
< 46. 도화선 [8]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