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 도화선 [7] >
할타스의 시민들은 누군가와 마주치기만 하면 한 주제에 대해 떠들었다.
“타플강드 상단의 본단 저택이 하룻밤 만에 사라져버리고 말았다지요.”
“넓은 부지에 풀 한 포기조차 남지 않았다던데. 대신 희뿌연 먼지 같은 것들만 수북하다고.”
“나는 아침에 보고 왔소이다. 그건 먼지도 아니고 재도 아니었는데, 그런 건 처음 보았소. 밀가루나 석회가루처럼 곱고 하얀 것이…… 이게 무슨 일인지.”
다들 참으로 기이하다고 수군거렸다.
먼지가 쌓인 꼴이 화재 후에 잿더미가 쌓인 꼴과 비슷한 것도 같다.
그렇다고 불이 난 것도 아니었다.
애초에 불이 나면 낮에는 연기가 밤에는 화광이 피어오르니 온 도시가 곧장 알아차리는 법이었다.
거기에 간밤에는 별 소음이 없었다.
비명을 들었다는 이는 몇몇이 있으나 그뿐이었다.
아무 소리도 없이 대저택 하나가 부지 채로 날아가다니.
천벌이라는 말도 있고, 이참에 자유도시를 떠야겠다는 이도 많았다.
이거 원 불안해서 계속 살겠냐면서.
“상인 연합이랑 타플강드랑 크게 붙었으니까, 그 연장선 아니냐?”
“상인 연합에서 한 짓이라고? 그게?”
“그러면 누가 한 짓이겠어?”
“하지만, 그게 인간이 할 짓인가? 아예 곱게 갈아서 뿌려 버리는 게? 애초에, 인간이 할 수 있는지가.”
“그럼 뭐야? 악마라도 나타났다는 거야 뭐야.”
“왜, 타플강드 상단주가 악마와 계약했다는 소문도 있었지 않나. 대륙 제일의 상단이 되는 과정에 경쟁자들이 괴질에 걸려 뒈지거나 사고가 나거나.”
“쉿. 말 함부로 하다 진짜 뒈지는 수가 있어. 안 그래도 지금 타플강드 놈들이 독이 바짝 올라서.”
그간의 갈등 양상, 건달패가 무리 지어 습격하고 한밤중에 폭음이 뒤따르던 그런 싸움과는 달랐다.
그런 다툼이야 어차피 사람이 하는 일이라서.
위험하면 피하면 그만이고, 그나마도 어디서 전투가 났다 하면 간덩이 부은 구경꾼들이 모여드는 판이 아니던가.
한데 타플강드 상단 본단 저책의 소멸은 다르다.
말 그대로 소멸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꼴이었다.
간밤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상상조차 되지 않는 결과라서.
케이즈 상단주 애던 역시 사람이었다.
나름 양심적인 척이라고 사람을 가축처럼 쥐어짜 서서히 말려 죽이는 치다.
사람의 마음을 모르나 싶었는데 퍽 인간적인 반응이었다.
공손하기야 며칠 전에 소드 마스터를 잡았을 때부터 참으로 그러했지마는, 지금은 어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대화 중에도 슬그머니 초점이 새는 눈동자.
아닌 척해도 눈치를 살피는 것이다.
“저, 그, 보수입니다만.”
애던이 상자를 내밀었다.
다른 때보다 더 큰 상자였다. 보증서를 확인하니 약속한 금액보다 조금 더 가치가 나가는 것들이다.
시엔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성공 보수가 아니던가요? 의뢰는 실패했는데요.”
“하하, 타플강드의 본단 저택을 날려버리긴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게다가 준비된 함정이었다고 하시니 죄송한 마음도 있고.”
그러니까 알아서 기는 중이었다.
의뢰는 실패했다.
저택의 참사가 퍼져나가고, 점심 때쯤 타플강드 상단의 공식 입장 발표가 있었다. 상단주가 요행히 자리를 비운 때에 무도한 일이 일어났다나.
시엔도 당연히 그러리라 생각했다.
간밤의 저택을 간단히 지워버리기는 했지만.
그게 함정이었으니까.
덕분에 의뢰는 애매한 상태였다.
분명 성공이냐 실패냐를 따지면 실패한 의뢰다.
타플강드 상단주를 제거하는 데에 실패했기에.
그러나 정보가 미리 새어 나갔는지 혹은 타플강드에서 짐작을 하고 있었는지 함정을 파 놓았다.
용병이 이러한 때에 피해를 입고 배상을 요구하는 일이 있었으며, 그렇지 않으면 원한을 가졌다.
그래서 애던 케이즈도 고민을 많이 했다.
어쨌거나 실패한 의뢰고, 위험부담이 크다고 미리 말을 해 놓았으니 책임 사유는 없다.
선금을 준 것으로 끝이라고 주장해도 문제가 없었다.
오히려 선금을 뱉어내라 하지 않으면 다행이지.
그런데 그러다 원한을 사면?
소리소문없이 그 드넓은 땅 전체를 희게 갈아버린 마법사 집단이었다.
원한을 사서 그 수법이 제게 향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있을까.
만화원에게는 합법적인 복수 수단도 있었다.
그냥 타플강드 상단에 가서 이러이러한데 의뢰를 하시겠냐. 조금 싸게 받겠다 하면 단박에 적으로 돌아서는 것이다.
그걸 감당할 수 있나?
그 소드 마스터조차 대적하지 못하고 불탔다던데 적이 되면 어찌 막아야 하는지.
그래서 알아서 기고 들어가기로 했다.
내가 이렇게까지 해 드린다. 좀 봐 주세요, 하고.
“이야. 상단주님께서 참으로 좋은 분이시네.”
시엔이 기분 좋게 웃었다.
애초에 의뢰금은 덤 비슷한 것이었다.
감히 영지 재정에 수작을 부린 타플강드 상단에게 엄벌을 하고, 겸사겸사 상단주나 혹은 반지를 낀 고위층을 붙잡으면 더 좋고.
시엔이 티란디스의 이름으로 움직이기 싫어 남의 명분을 빌리려고 받은 의뢰였으니까.
하지만 준다는 데에 거절할 이유도 없다.
“하하. 그러면 이제 더는 일을 받지 않으신다고.”
애던이 웃는 시늉을 하며 슬그머니 물었다.
누가 들어도 억지로 웃는 소리라서 저 자신도 소리를 내놓고는 아차 싶었으리라 싶을 정도였다.
그가 얼마나 긴장을 하고 있는지 알 법했다.
“그렇죠. 이제는 여기까지 온 김에 도시나 좀 더 돌아볼까 싶네요.”
“혹시라도 활동은 하시려거든 저희에게 먼저……”
“에이. 우리 상단주님이 이리 잘해주셨는데, 설마 딴마음 먹겠어요?”
애던의 표정이 한층 밝아졌다.
시엔의 호의적인 대답에 용기를 얻은 모양.
과감하게 노골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 혹여 저희에 대한 의뢰를 받으시게 되면 그 전에 먼저 대화라도 나눌 수 있겠습니까?”
말인즉슨, 저네에 대한 의뢰를 받게 되면 반대로 이쪽에 붙어 도와줄 수 있겠냐는 말이었다.
용병의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물론 용병의 법도가 정해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키지 않으면 신뢰를 대폭 상실하고 망하는 것도 한순간이었다.
시엔이 히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에이. 우리 사이에 의리가 있지. 앞으로 만화원이 케이즈 상단을 적으로 돌릴 일은 없을 거예요. 만화원의 이름을 걸고 장담하지요.”
“하하. 그렇지요. 저희 사이에. 앞으로도 만화원 분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하시면 되죠, 뭐.”
애던은 충분히 만족한 표정이었다.
시엔이야 어차피 말만 해 주면 그만이었다.
만화원이 어찌 나오건 시엔이 신경 쓸 바인가.
혹여 케이즈를 대상으로 한 의뢰를 받고 또 수행하게 되면 신의를 잃고 신뢰를 상실하게 되겠지만.
그렇게 되면 만화원이 손해를 보지 시엔이 불이익을 당하는 일도 아니다.
애초에 시엔과 만화원이 악연이었으니 서로 생각하며 챙겨줄 사이도 아니었고.
* * *
-여러분. 할타스 상인 연합이라고 감히 지칭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저들에게 가담하지 않으면 할타스의 상인이 아니라고 말하는 듯한, 그러한 방자한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들이 마침내 선을 넘었습니다.
지난밤, 미상의 습격이 본단을 향했으며 그 결과는 여러분들 역시 잘 아실 것입니다.
여러분! 상인의 싸움이 어떠한 것입니까?
본래 상인이 서로 겨루면 보다 좋은 품질의 그런 양품을 개발하여 이기거나, 가격을 낮추어 상대방의 점유를 뺏고자 할 뿐입니다.
그리하여 그 대결이 결과적으로 뛰어난 기술으로 세상에 나오고, 또한 양품의 값이 내려가니 대륙이 한데 이득이 되는 그러한 싸움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을 보십시오!
저 비열한 연합 놈들이 한 짓을 보십시오!
깡패를 동원하고, 전쟁에나 나설 마법사들을 고용해 부수고 죽이고 태웠습니다.
이게 상인의 싸움입니까!
그리고 어젯밤에는 기어코 본단을 습격했습니다.
상단주께서 우연히 자리를 비우셨기에 무사할 수 있었으나, 그렇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까짓것 좀 격하게 싸울 수도 있지요.
더럽고 추잡하나, 세상에 종종 일어나는 싸움이기도 합니다.
아무리 그래도 상단의 주인을 직접 공격하는 법도가 있었습니까?
어쩌면 이리 악의적이고 비열한…….
“이야. 저거 말 잘하네.”
시엔이 연신 외치는 사내를 보며 감탄했다.
할타스의 중앙 광장, 타플강드의 대변인이 목청을 높여 열렬한 웅변을 토했다.
성량이 크나 미성이라 귀에 거슬리지 않는다.
또한 저음으로 중후하나 발음이 분명하여 아주 귀에 쏙쏙 들어오니 전달력이 탁월한 녀석이었다.
다만, 그 효과는 딱히 없어 보였다.
“저게 무슨 개소리야?”
“지네는 깡패 동원 안 했나? 소드 마스터까지 불러 습격한 게 누구인데.”
“애초에 도시를 팔아넘기려고 하곤 이제 와서.”
이러니 사람이 평시의 행실이 중요했다.
뛰어난 달변이나 듣는 이들이 공감하지 않았다.
타플강드의 평소 행보를 알 만한 일이었다.
물론 그뿐만 아니라.
“듣자 하니 타플강드의 경쟁 상대가 급사하는 일도 한두 번이 아니라던데.”
“나도 그 소문 들었다만, 근데 자넨 누군데 친한 척인가?”
“입이 근질근질하니 그렇지.”
청중들 사이사이 유난히 타플강드를 욕하는 이가 있었다. 연합에서 투입한 바람잡이들이 분명했다.
그 꼴을 지켜보던 파린이 물었다.
“거, 왜 듣는 이도 없는데 계속 떠들어?”
“들으라고 떠드는 소리가 아니니까.”
시엔의 대답에, 파린이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들으라고 하는 소리가 아니야? 그럼 뭐하러 목 아프게 소리를 질러?”
“누가 들어달라고 하는 소리가 아니고, 그저 저리 입장을 밝히는 게 중요하니까. 이제는 귀족의 싸움이 될 테니, 명분을 챙기려 드는 거야.”
“귀족? 명분? 그건 또 무슨 소리야?”
귀족이란 누구보다 법도를 지켜야 하는 이들이다.
귀족이 법도를 지키지 않으면 그 아래에서 덩달아 보고 법을 무시하게 될 테니까.
귀족이 세상에 있는 이유가 어리석은 이들을 이끌어 이롭게 하기 위해서다.
법이 세상에 있어 혼란을 잠재우고 질서를 세우니, 절대 흔들려서는 아니 된다.
그러니 귀족은 특히나 철저히 법도를 지켜 모범이 되어야 한다. 모든 귀족이 가진 의무였다.
그래서 귀족들은 법을 어기기보다는, 상황 자체를 바꾸는 편을 선택했다.
제가 강짜를 부려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 상황으로 만드는 방식이었다.
그게 바로 명분이었다.
할타스 상인 연합이 먼저 칼을 들었고, 거기에 더해 상단 본단을 직접 공격하는 만행을 저질렀어요.
그러니 귀족 나리께서 사정 봐 주실 필요도, 눈치 보실 필요도 없습니다요. 그냥 싹 쓸어 가시지요.
타플강드가 하는 소리가 이러한 것이니 할타스의 청중은 듣거나 말거나 전혀 관심이 없는 것이다.
시엔의 설명에, 파린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뭐야. 치졸하게.”
“제국 놈들은 원래 그래. 해충 같은 놈들이지. 아니다.”
시엔이 말을 바꿨다.
“아니, 해충은 연구하면 간혹 쓸데라도 있긴 해, 제국 놈들은 죽여서 퇴비로밖에 못 쓰지만.”
제국에는 별 관심이 없는 파린이 물었다.
“그런데, 집에는 언제 가?”
“나중에.”
“그냥 지금 가자. 뭐 이딴 도시가 다 있어?”
파린은 이미 도시에 흥미를 잃은 지 오래였다.
자유도시란 파도 파도 괴담만 나왔다.
짐승만도 못한 처지의 노동자들.
하루에도 쓰러져 죽는 이가 속출하니 공방 거리에 거적떼기를 씌워 내버린 것이 전부 시체였다.
그럼에도 상인 놈들이란 그 참상을 보고 오히려 뿌듯하고 기뻐하여 자신을 칭찬하기 바빴다.
그런가 하면 외각의 빈민가는 또 어떠한가.
가난과 궁핍은 사람을 날카롭게 만든다.
빵 한 조각에 다투며 사람을 치고 찔러 죽인다.
간혹 연기가 피어오르는 곳에는 고기 굽는 냄새가 진동했다. 시엔이 익히 아는 냄새였다.
사람 살이 익는 냄새였다.
그거 시큼하니 별로 맛도 없건마는.
거기에 범죄 조직의 건달들만 아주 살판이 나서 날뛰니 마약과 매춘은 기본으로 하고, 사람을 납치해 부려 먹으니 심지어는 투기장에 내몰아 맹수와 싸움을 붙이기도 했다.
그러면 돈 있는 놈들이 구경하며 환호하고 돈을 걸어 즐겼다.
시엔이 보기에는 이따위 도시, 거저 준다고 해도 거절이었다.
물론 내 왕께서 억지로 맡기신다면야 받겠다마는, 일단 절반은 사형에 처하고 절반은 노동 교화형에 처해야겠지.
그러니 이런 개판을 굳이 차지하겠다고 나선 두 왕국의 백작 놈들도 멍청하기 짝이 없고.
시엔에게도 그저 불쾌한 곳이었다.
마음 같아서야 진작에 돌아갔겠지만, 아직 할 일이 남았으니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대충 어떤 그림인지는 알겠는데 말야.”
처음에는 타플강드 상단이 도시를 팔아서 금화를 챙기려는 줄 알았다.
저번 상단들의 파산 사건의 배후로 지목되며 신용을 잃고 또 영향력 역시 대폭 줄어들었다.
덕분에 일시적으로 자금이 경색이 왔을 테고, 그 난관을 돌파하고자 장기적 손해를 감수하고도 당장 금화를 얻고자 도시의 지분을 팔 계획이라고.
그러나 상황을 보니 영 이상하지 않은가.
도시의 지분을 팔고 싶었다면 굳이 귀족을 부를 이유가 없다.
물론 귀족에게 팔아 이후에 혜택을 챙겨 다소 이득을 본다 하더라도, 할타스의 수많은 상인들을 적으로 돌리면 그게 무슨 소용이랴.
저들을 목표로 한 습격에 기다렸다는 듯이 반격을 가하고. 그에 가짜나마 소드 마스터까지 준비했으니 아예 처음부터 도발에 가까웠다고 봐야 했다.
애초부터 크게 싸울 생각이었겠지.
그러나, 왜?
타플강드 하나로는 아귀가 맞지 않는다.
그러나 거기에 의회를 더하고 나면 감이 잡혔다.
의회의 목적이 대륙에 혼란을 일으키는 것이니, 마수를 풀어 왕국을 공격한 일이 바로 그러했다.
그리고 굳이 마수가 아니더라도.
인간끼리 싸우더라도 혼란은 마찬가지가 아닌가.
자유도시를 둘러싸고 두 귀족이 연관되었다.
그저 말과 명분으로 싸운다면야 모르겠지만, 혹여 여기서 피를 보면 군대와 군대가 맞붙게 되겠지.
그리고 나면?
피를 보고 패배한 귀족이 왕국에 도움을 청하면, 그때는 그야말로 제대로 된 전쟁이 벌어진다.
대륙에 혼란이 목적이라면, 전쟁만 한 것도 없다.
그러니 떠날 수가 있으랴.
사실 뭐 생판 남인 타국과 타국이 전쟁을 벌이건 축제를 벌이건 무슨 상관이겠냐마는.
그게 의회의 목적이라면 또 이야기가 달랐다. 놈들 원하는 대로 되는 꼴은 절대 못 본다.
“그래서, 지금은 뭘 하는 건데?”
“기다리는 거지. 뭐. 기다리다가, 망쳐야지.”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 목적이라면, 대충 그 수단도 잡히는 것이 있었으니까.
“겸사겸사 죽일 놈들 하나라도 더 죽여야겠고.”
시엔이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 46. 도화선 [7]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