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의 망령재림-235화 (231/268)

< 44. 빚쟁이는 밤에 잠도 못 잔다 [1] >

황금은 무한하지 않다.

금맥은 드물었으니까.

혹여 발견된다 해도 그 매장량도 장담할 수 없다.

금맥의 순도가 낮으면 사람을 써 정제해 사람값이 나오지 않는 경우도 허다한 판이었으니.

그러나 대륙에 돌아다니는 금화는 지금껏 캔 황금보다 배는 많았다.

실재하지 않는 금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람이 신용으로 만들어낸 허상의 금화였다.

이를 어음이라고 했다.

황금은 무겁고 또 워낙 무엇보다 귀한 것이라서 노리는 손이 많았다.

도시에도 소매치기가 득실한 판인데 보는 이 없는 외지는 어떠하겠는가.

반면 어음은 가볍고 또 안전했다.

대금과 일시가 있고, 또 어음으로 거래하여 내역이 아래에 쓰이니 부정하게 손에 넣어 환금이 되는 것도 아니다.

특히 상단들의 어음 사랑은 유별났다.

내 재산은 보전이 되는 데에다, 이런저런 이유로 사라지는 어음도 있었다. 재수 좋으면 없던 일이 된다는 뜻이었다.

그게 문제가 되기도 했다.

없던 일이 되어버리니까.

“흐흐, 일곱 개 상단이 일제히 망했습니다.”

“뭐, 간판갈이만 한 것이지만 말입니다.”

“그 간판에 물린 금액이 무려 이백만 닢입니다. 금화 이백만 개의 어음이 그저 낙서장이 되어버렸으니 속이 좀 쓰릴 겁니다.”

“조금 쓰리겠습니까? 아주 상처를 불태워 소금을 뿌린 꼴이겠지요.”

의원들이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정확히는 반만 웃음을 터뜨렸다.

웃지 못한 의원이 질문을 던졌다.

“그, 잘 되어간다는 것은 알겠습니다만. 티란디스 상단에게 이백만 닢의 손해를 지웠다는 뜻입니까?”

“단순히 보면 그렇지만, 사실 그 이상이외다.”

상계에 종사하는 의원들이야 전부 알아들었지만, 그렇지 않은 자들은 그저 눈만 끔벅거렸다.

아니, 저들끼리만 아는 이야기 하네. 상인 놈들.

그렇다고 설명해달라 하기에는 지는 기분이 들 것 같으니 그저 입만 꾹 다물고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어차피 놔두면 입을 열게 되어 있었다.

제 자랑은 놓치지 않는 족속들이라서.

“티란디스의 결제 대금을 특정한 상단의 어음으로 대체한 후에, 일시에 지급처를 망하게 했다. 이는 모두 아시겠지요?”

의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티란디스는 작년에 내전을 치르지 않았습니까. 그것도 1왕자파의 수장이었지요.”

“그래서요?”

“대개 단기로 쓰여지는 어음이란, 상대의 신용이 흔들릴 때 발행됩니다. 내전의 한 축이란 패배 후에 싹 망한다는 뜻이니, 당시 티란디스의 신용이 떨어진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대략 오십만 닢쯤 되는데, 그 만기가 곧 찾아오지요.”

“아아. 그렇다면.”

그제야 나머지 의원들도 아는 체를 했다.

“이백만 닢의 손해에, 당장 가진 금화 오십만 닢을 또 내놓아야 한다는 뜻이로군요.”

“과연. 금력이란 다시 봐도 대단하외다.”

그러나 설명하는 의원의 미소는 끊이지 않았다.

“그뿐이 아닙니다. 상회들을 통해 그 사실을 널리 소문내 알렸으니, 티란디스의 신용이 바닥을 쳤습니다. 다른 이들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지요.”

가만히 두고 보다 티란디스 상단이 망하면, 그의 어음을 가진 상인들 역시 낙서장을 가지게 된다.

당연히 중도 변제를 요구할 수밖에.

“당장 모든 거래처에서 금화를 내놓으라 난리를 칠 테니, 결국 가산을 팔아야 할 겁니다.”

“상단 운영은커녕, 앞으로 헐값에 그 질 좋기로 유명한 목재를 넘기며 빚을 갚느라 허덕이겠지요.”

그제야 모든 의원들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의회에 훈풍이 불며 저마다 치하의 말을 던졌다.

“감히 의회의 일을 방해한 댓가는 치뤄야지요.”

“아쉬운 점이라면, 지금쯤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이 눈으로 보지 못해 정말 궁금합니다.”

* * *

시엔이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차라리 잘됐네. 중도 변제라면 줄 돈도 덜하지?”

어음에 대금을 지급할 일시를 정해놓았으니, 그 전에 정산하려 하면 일정량의 위약금을 물었다.

그렇다면 돈 덜 주고 청산할 수 있으니 이득이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마탑에 연락해서 또 모이라고 해. 대금은 대충 어음 여럿으로 쪼개 받아서 상환 건에 지급하면 될 테고.”

시엔이 유리병 여섯 개를 내밀었다.

마탑은 넷인데 유리병은 여섯이었다.

이래야 싸움이 붙어 값이 더 오르니까.

“대체 어디서 이런 귀물을 구해오냐? 꿍쳐놓은 게 있으면 이참에 더 넘겨주면…….”

“안 돼. 세상에 풀려 좋을 게 없는 물건이니까.”

용의 피라 해도 시엔이 제 것을 뽑은 물건이다.

혈액이란 조금 모자라도 잘 먹고 자고 일어나면 다시 채워지기 마련이었다.

그러니 비싼 값으로 팔려면야 금광이라도 따위로 취급할 수 있는 막대한 수익을 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시엔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

마법사가 용의 피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모르니.

애초에 용의 피로 완성된 기술이란 결국 편법이나 매한가지였다.

그러한 편법은 극히 어렵고 제한적이니 세상에 이롭기는 어렵다.

그러나 그 반대로, 세상에 해롭기는 아주 쉬웠다.

나림이 용골로 늑대인간에게 오러를 쥐여줬듯이.

그러나 뭐, 세상 일이 내 일보다 더 중요하지는 않았다. 집안에 돈이 없다는데 피 좀 뽑는 정도야.

드디어 로우드의 얼굴에도 어둠이 가셨다.

안 그래도 눈두덩이가 움푹 패 험악한 인상이다. 그에 기미까지 짙게 끼어 어둡기 그지없던 얼굴이었는데.

“다만, 이번 일을 그냥 넘기기는 좀 그렇네. 일곱 개 상단이 동시에 망했다고? 그게 말이 돼?”

“그러니 사기를 당한 것 같다고 한 거다.”

“그 어음이 어디서 들어왔는데?”

“육할 정도 파란 머리. 다만, 그쪽이 수작을 부리진 않았을 거다.”

“왜?”

“오래 거래했고, 작년에 이십만 닢의 어음을 발행해준 상단이니까. 거기다 북측 유통을 도맡아 우리 물건이 주 품목이니까. 사실상 새끼 상단인데.”

물건을 보내는 데에도 돈이 들고 인력이 든다.

그러니 적당한 지점에서 다른 상인에게 적당히 싼 가격에 넘기는 것이 보다 이득이었다.

푸른 머리 상단의 주 품목이 티란디스산 목재라, 이쪽이 망하면 치명적인 피해를 입을 것이 뻔했다.

아니면 덩달아 망할 수도 있고.

이런 관계를 보통 새끼 상단이라 했다.

거기에 작년에 발행한 어음을 구매했다면, 사실상 도움을 받은 것이나 매한가지였다.

혹은 투자라고 할 수도 있었다.

특히 푸른 머리 상단은 이십만 닢의 어음을 샀다. 그 덕분에 올해 요정목의 수량도 넉넉하게 들어갈 예정이었다고.

“내 생각에는, 푸른 머리를 노린 수작에 우리가 재수 없이 걸린 게 아닌가 싶다.”

“이백만에 육할이면 백이십만이야. 푸른 머리가 얼마나 큰 상단인지 모르겠는데, 백이십만을 들여 망하게 할 정도야?”

“그 반절으로도 충분히 망하겠지. 취급 금액하고 달리 순익이 그리 큰 상단도 아니니까.”

“그럼 애초에 우리가 목표였다고 봐야지. 우연의 일치로 상단 일곱 개가 동시에 망했다고 하기엔.”

“푸른 머리를 조사하겠다면야, 상단주를 부를까?”

새끼 상단의 설움이였다.

오라면 와야지. 제까짓 게.

시엔이 고개를 저었다.

“네 말대로 새끼 상단이 사기를 칠 이유는 없지. 그 말고, 망한 놈들 어음 중, 제일 금액이 큰 데가 어디야?”

“네이어드. 오십칠만 닢이다. 다만, 조사하기에는 너무 멀어. 멀다 보니 정보도 없고.”

“어디 붙어있길래?”

“말레브 왕국. 남해에 있다.”

“남해는 아니지.”

시엔이 고개를 저었다.

가는 데 두 달, 오는 데 두 달이면 돌아오면 벌써 추수 때다.

그리 오래도록 자리를 비울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적당히 가 볼 만한 데는?”

“직접 가려고?”

“어설프게 보내 봐야 조사는커녕 말도 안 통해. 해봐야 타국에서 온 외국인이 뭘 어쩌겠다고.”

“흠. 행정관이 너무 자리를 비우지 않나?”

시엔이 웃으며 로우드를 바라보았다.

시엔이 자리를 비울 때 그 업무를 대행하는 이가 누구랴. 로우드가 나직이 욕설을 내뱉었다.

“제길.”

“그래서 가볼 만한 데는?”

“타스테스테. 마마께서의 친정이기도 한 곳이니 네 이름도 어느 정도 통할 테고. 어쩌면 소개장 한 장 정도는 써 주실지도 모르지. 타스테스테의 왕실에서 직접 조사를 보증해 준다면…….”

“그거 다 빚이야. 일단 보류하고 다른 데는?”

사적이라면 사적인 일이니 후광을 끌어다 쓸 필요까지는 없었다.

무엇보다 그러한 힘이 공짜가 아니었다.

타스테스테 왕국으로 향하면 조사는 물론이거니와 어쩌면 손해에 대한 보상까지도 받을 수도 있었다.

왕비가 실권을 잡은 지금, 타스테스테야 어떻게든 선을 이어보고자 안달일 테니.

그러나 그 편의가 결국 왕비에게 지는 빚이었다.

크게 보면 왕비가 친정에 지는 빚이기도 하고.

“벨라스트룸, 텔테인, 안느셰.”

“동쪽, 남쪽, 북쪽인가. 개중에 제일 채무가 많은 상단은 어디에 있는데?”

“벨라스트룸의 세 마리 곰 상회랑 안느셰의 제인 상단이 같은 금액이야. 각자 이십오만 닢.”

“그럼 안느셰가 낫겠네. 가까운 데로 가야지.”

로우드가 고개를 저었다.

“안느셰가 가까운 것 같아도, 제인 상단이 자리 잡은 핸즈필드는 안느셰 최서단이라 멀어. 거기다 소왕국을 두 개나 거쳐야 하고.”

“그럼 벨라스트룸으로 가면 되지.”

“시엔 님, 말씀 도중에 죄송합니다만.”

그때 가만히 듣고 있던 트리예가 끼어들었다.

“응? 왜?”

“핸즈필드라고 하면, 소녀가 아는 얼굴들이 조금 있답니다. 미약하나마 도움을 드릴 수 있을거예요. 만약 그리로 향하신다 하신다면요.”

“아. 그래? 마침 잘됐네. 뭐.”

그렇게 목적지가 결정되었다.

* * *

트리예는 아는 얼굴들이 조금 있다고 말했다.

사실, 상당히 겸양한 표현이었다.

핸즈필드는 안느셰 왕국 최서단에 위치한 도시다.

그리고 도시는 영주인 변경백 아르트레스 가문의 소유였다.

그리고 트리예, 트리예 아르트레스.

딱히 놀랄 만한 일은 아니었다.

애초에 평민의 성씨가 아니다 싶었다.

게다가 본래 행동거지가 우아하고 격식을 잘 알아 어려서부터 교육받은 태가 나지 않았던가.

본성이 쌀쌀맞으며 성격이 남을 깔보기를 즐기는 성정도 그렇고.

시엔 자신에게야 사근하니 순한 양이 따로 없다.

요즘은 세올에게도 져 주는 편이지만.

그러나 타인에겐 얄짤없었다.

시녀장이 일주일에 한두번 꼴로 찾아와서 트리예가 자꾸 하녀들을 울린다며 하소연할 정도였으니.

다만, 소식을 들은 세올만 크게 놀랐다.

“뭐야, 너도 귀족이었어?”

“너도? 아. 맞다. 선배도 귀족이었죠.”

“그러고 보니 그랬네.”

시엔이 옆에서 한마디 거들었다.

사실, 의외라고 한다면 세올이 더 의외였다.

세올이 하는 꼴을 보면 귀족다운 구석은 한 군데도 없었다.

세올의 시대야 벌써 몇 세대 전이고, 본래가 가난한 소귀족이라 지금은 가문이 남았는지 아닌지도 모르는 상태였지만.

물론 그 무지에는 좋은 추억이 하나도 없었다면서 본인이 관심을 두지 않는 이유가 컸지만.

“그러면 심연탑엔 어찌 들어갔어? 나 때도 아무나 붙잡고 가르치진 않았는데.”

“선배는요?”

“나야 책 읽고 혼자 배우고 나서야 심연탑에 들어갔으니까, 뭐.”

“저는 돈 냈어요.”

“돈 주고 배웠다고?”

“어렸을 때 크게 앓았는데 알고 보니 악령이 깃든 물건을 잘못 만진 거였고. 광명 수도회가 용하다 해서 치료차 요양차 갔다가.”

“너, 또 은근슬쩍 반말이다?”

“요. 사람 말을 끝까지 들어야지.”

“야! 너, 또!”

“요.”

둘이 또 투닥거렸다.

투닥거렸다기에는 사실 한 쪽이 일방적으로 얻어맞는 꼴이라 표현에 조금 어폐가 있었지만.

그러나 듣고 나니 시엔도 느끼는 바가 있었다.

그간 가문과 연을 끊고 살았다면, 돕겠다며 나선 상황이긴 해도 꽤 미안한 일이 아니던가.

“그럼, 가문에는 연을 끊고 산 게 아닌가? 굳이 이리로 올 필요는 없었는데.”

“아니에요, 시엔 님. 사실, 그놈이 감히 수작질을 벌이는 바람에 죽은 사람처럼 되어버려서.”

트리예가 이를 부득 갈았다.

그놈. 만화원의 주인을 말하는 것이리라.

남의 시신으로 장난질을 치는 놈이었지.

언젠가 손을 봐야 할 테지마는.

< 44. 빚쟁이는 밤에 잠도 못 잔다 [1]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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