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 봄이 가다 [3] >
귀족은 다스리는 이다.
충성의 대가로 제 영민을 보살피니 삶이 윤책하여 이롭도록 이끌어야 했다.
귀한 피를 타고 난 이가 이행해야 할 의무였다. 그들의 주인으로서.
그러나 그 종들에게는 주인을 택할 권리가 있다.
주인을 택해 진정으로 충심을 바쳐야 하며, 그로 인해 윤택한 삶을 누린다.
그것이 사람이 쌓아온 삶의 법칙이었다.
누군가는 다스리고 누군가는 따른다.
모든 이가 동의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시엔은 그렇게 믿었으며 또 그렇게 살았다.
그렇다면 이 경우에는?
나림은 주인을 택했다.
스스로 신성을 틔울 정도가 아니던가.
충성보다는 숭배에 가까운 그러한 광신, 제 목숨마저 기꺼이 내놓겠다 하는 수준의 충성이었다.
그게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라 할지라도, 기꺼이 품어야 할 이였다.
제국의 후예만 아니었다면.
제국의 이름 아래 모든 것을 멸해야 했다.
죽어간 내 백성들의 복수. 망국의 왕자가 해야 할 유일한 의무였다. 제국이 그리했듯이, 왕자 역시 그와 같은 방법으로.
두 의무가 한 지점에서 만나 충돌했다.
전혀 생각지 않았고, 있을 수도 없는 충돌이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해?
시엔이 이마를 주물럭거렸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시엔에는 생소한 감정이었다.
항상 목표는 명확했으며, 그를 위해서는 망설임 없이 움직였다.
그 움직임이란 의외로 허술한 편이기는 했으나, 달리 고민은 없었다. 해야 할 일은 해야 하니까.
그러다 안 되면? 그때 달리 대처하여 움직이면 된다. 그저 그뿐이었다.
“너는…….”
“예, 주인님.”
나림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그러나 저 눈빛. 거리낌도 없이 한 점 흔들림도 없이 올곧은 시선. 그에 깃든 경애가 부담스럽다.
“누렁이 너는.”
“늙은이가 주책을 부렸군요. 죄송합니다.”
“그래, 시키지도 않은, 아니, 됐어. 누렁이는 나름 최선을 다했겠지.”
시엔의 말에, 누렁이가 푸근히 미소지었다.
누렁이의 수단이 얼마나 사악하고 기괴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별개로,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었음을 안다.
명령을 가장 충실한 방법으로 이행했을 뿐이니.
아는 바를 말하고 편안한 죽음을 택하게 만들라 하지 않았던가.
어차피 죽을 바에야 말도 안 되는 정보를 떠들고 가면 그 진위를 파악할 방도가 없었다. 혹은 아는 정보를 일부만 말해 숨긴다던가.
제 죽음을 받아들인 이가 마지막에 거짓 정도야 고하지 못할 리는 없는 판이 아닌가.
누렁이가 한 일은 죽을 이가 마지막으로 발버둥을 칠 기회마저 원천적으로 차단했을 뿐이었다.
“그러하시면, 죄인의 처우는 어찌하시겠습니까?”
“……일단은 보류하도록 하지. 일단 아는 바부터 들어보도록 하고.”
시엔이 결정을 미뤘다.
아직은 명확한 적들이 더 남아 있었으니까.
이번에야말로 제국의 뿌리를 뽑아 불태워야 한다. 나림이 제국 최후의 한 사람이 되고 나면, 그때 두 의무 중 하나의 완수를 결정해도 늦지는 않으리라.
* * *
봄의 끝물에서야 헬른포드의 소식이 전해졌다.
페벨룬은 내전으로 인해 비선이 거의 끊어진 상황이라, 나중에서야 헬른포드의 발표를 듣고 알았다.
일차 포위 섬멸 작전은 실패했다.
오만의 군세가 완전히 둘러싸 포위진을 완성하고 안쪽으로 조였다. 그러나 늑대인간의 일점 돌파에 뚫려 파훼 되고 말았다.
오러를 쓰는 늑대인간을 과소평가한 탓이었다.
오히려 약 천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고 발표했으니, 실제 숫자는 세배에서 다섯 배가량은 되리라.
혹은 일 만에 이를 수도 있고.
국가가 하는 공식 발표란 어느 정도 걸러서 들어야 하는 것이었으니까.
그에 대해서 나림은 당연하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명령 체계를 주입할 때, 가장 신경을 쓴 부분이 본능과의 조절이었어요. 물론, 그 명령 수준이란 가장 간단한 하나 정도였지만요.”
나림이 누렁이를 닮은 미소로 말을 이었다.
“해당 방향으로 향해, 보다 더 약한 인간을 찾아 죽여라. 목표를 위한 행동 방침은 괴물의 본능을 따르도록 만들었지요.”
의회의 목적은 각 왕국에 최대한의 혼란을 일으켜 그 세를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그에 대한 수단으로 기반을 이루는 가장 약한 백성들을 노렸다고.
그러니 늑대인간의 이상 행동도 당연했다.
군대를 피해 촌락과 마을을 습격하니 강자를 피해 약자를 찾아다닌 탓이었다.
오러를 쓰며 강화된 괴물이 작정하고 군대를 피해 민가를 습격했다.
오러가 아니더라도 늑대인간 한 무리면 어지간한 규모의 마을이라도 버틸 재간이 없는 판이었다.
거기에 오만의 군세가 포위망을 완성했다 해도, 군대의 수준이 제각각이며 또 구성 또한 그러했다.
괴물 특유의 본능이 개중 가장 약한 지점을 찾아 돌파를 시도했을 것이라고.
나림이 공손한 미소와 함께 그리 설명했다.
시엔이 혀를 찼다. 대체 뭘 만들어서 푼 거야?
“세상에, 어쩜, 어떻게 그런…….”
설명을 들은 트리예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말문이 막힌 듯 말을 잇지 못하고 더듬거린다.
그리고 마침내 겨우 뒤를 이어 문장을 끝맺었다.
“……천재적이야. 그리 단순하면서도 최대의 효율을 끌어내는 발상이라니.”
“과찬의 말씀이세요, 트리예 언니.”
“아니야, 본래 최초의 발상이 중요한 거 아니니. 제거해야 할 본능을 살린 조합, 적합한 명령까지. 어쩜 이리 훌륭하니.”
“그저 잡기에 불과한데, 칭찬해 주시니 몸둘 바를 모르겠어요.”
끼리끼리 뭉친다더니.
시엔이 인상을 찌푸렸다.
트리예는 나림과 쿵짝이 잘 맞았다.
둘의 전공 분야가 비슷하기 때문이었다.
괴물 개조와 키메라 제조는 어떻게 보면 같은 일이었다.
괴물을 다른 처리로 강화하는 기술이나, 여러 괴물을 합쳐 장점을 끌어내는 방법이나.
결국 더 강한 괴물, 말 잘 듣는 노예를 양산하기 위한 일이었으니까.
“아이참, 해봐야 고작 인명을 해하는 정도고,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는 수준에 이르려면 아직 지난하기만 하니까요. 이제는 의미가 없지만요.”
더욱 아이러니한 점은, 나림의 끔찍한 연구 성과가 궁극적인 목표로는 인류 전체를 이롭게 하려는 결과물이라는 점이었다.
괴물이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도록 한다.
그 노동력이 문화와 기술 그리고 연구에 종사하여 결과적으로 세상이 더욱 이로울 것이라며.
나림이 시엔에게 거짓을 고할 리는 없었다.
틀림없는 진심임은 틀림없으나, 목적이 선량하다 해서 그 결과마저 그러하지는 않은 법이었다.
무엇보다 본인이 이야기하는 데야 무어.
“기술의 발전은 항상 희생을 전제하잖아요? 만약 제 기술이 완성된다고 하면, 당장 모든 농부들부터 그 가치를 잃게 될 거예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진보를 멈출 수는 없어요.”
거기에 덧붙인 말도 있었다.
“……그렇게 생각했던 때가 있었어요. 정말이지 어리석게도. 진정 세상에 필요한 것은 기술 따위가 아니라 믿음과 주인님의 은총이었을 뿐인데.”
덕분에 시엔은 한결 혼란스러워졌다.
이전과 이후의 나림을 같은 인물이라 봐야 할까.
분명 기억을 가졌으나 그를 부정하고, 가치관과 신념이 모두 뒤바뀌어 이전과 완전히 다르다면.
오래된 배를 계속해서 고쳐 마침내 첫 건조 시의 부품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면, 과연 그것은 같은 배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러나 나림이 한 만행을 천신께서 보셨으니 역사가 되어 동토 세계에 얼어붙어 사라지지 않는다.
또한 그 혈통 또한 여전한 것을.
뷔아 역시 마찬가지인 반응이었다.
“성녀님, 일전엔 정말로 실례가 많았어요. 감히 이 죄인이 청하건대, 당신께 형제자매의 호칭을 허하여 주시겠어요?”
“아니, 천신이시여. 씨이. 이게 무슨.”
“세상에, 천신이시여.”
나림을 본 뷔아와 라이뱅의 반응이었다.
이미 계절이 바뀔 때이니 그간 두 왕국에서 입은 피해란 각각 일만의 단위를 가뿐히 뛰어넘었다.
시엔이야 남의 왕국 따위 어쨌거나 상관없는 일이다마는, 뷔아에게는 그렇지 않을 터다.
나림은 무도한 죄인이었고, 다시 나타나 신성을 뿜으며 죄인을 청하며 회개하는 상황 앞에서 어쩔 줄을 모를 수밖에는.
대체 이게 무슨 일이냐며 시엔을 바라볼 뿐이나, 그라고 달리 대답해 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그저 어깨만 으쓱거리고 말 뿐.
신성이 아니었다면 뷔아도 이리 당황하지는 않았을 터다.
그러나 천신께서 말씀하시기를 본디 마음이 맑아 신성한 이보다, 어둡고 더러우나 자신의 죄를 알고 마음을 닦아 깨우친 이가 더욱 귀하고 어렵다고.
기꺼이 용서하라 하셨다던가.
“솔직히 말해서, 당신을 용서하고 싶지는 않아요. 하지만 천신께서 뜻이 정녕 이러하시시다면 저는 그리 따르겠어요.”
“그야말로 기적이나 다름없군요.”
시엔이 고개를 삐딱이 틀었다.
교단은 참 마음이 편해서 좋겠다 싶다.
그저 신성만 트이면 일단 형제고 자매라니.
교단에 속하지는 않으나 인정받는 몇몇 종파들만 보아도 알 법한 일이었다.
매일같이 제 몸에 칼을 대고 채찍질을 하는 고행 사제회나, 재산의 사유를 인정하지 않고 모두 세상에 베풀어야 한다며 거지꼴로 다니는 마음 사제회 같은 녀석들.
누렁이가 종파를 칭할 세가 아니며 또한 뜻조차 없다며 비소속으로 남았으나, 어쨌거나 교단 측에 형제자매라 불리기도 했고.
그 이후로는 나림의 고백이 이어졌다.
제국 의회.
세상에 모든 거짓된 지배자들을 지우려는 이들.
그러니까 모든 왕과 귀족을 없애고, 보다 우월한 상위의 인간, 그러니까 우월한 혈통이 세상을 통치해야 한다는 미치광이들이라고.
한때 미치광이에 속한 이가 하는 말이었다.
“어쩜 그리 불경한…….”
라이뱅 경이 신음을 내뱉었다.
신분은 천신께서 내린 것이다.
그를 부정한다는 것은, 곧 천신의 뜻을 부정하는 일과 일맥상통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불신자들은 스스로 그 대의를 저버린 이들이기도 해요.”
“그건 또 무슨 뜻이야?”
“본래는 황제가 의회 위에 군림하고, 의회가 세상을 다스려야 하지만, 황손이 끊어지고 말았지요.”
개중에 가장 위대한 혈통, 황손이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세상에 있었다고.
그러나 위대한 대업을 위해 직접 용의 숨통을 끊고 말았다.
“용? 용의 숨통을 끊었다고?”
“역시, 주인님께선 알고 계시네요!”
용살자는 용의 저주를 받는다.
시엔이야 아예 법칙을 초월한 대죄인이 어찌어찌 막아주었지만, 그가 아니라면 절대 피할 수도 해제할 수도 없는 그러한 저주였다.
“저주 때문에 황손이란 자가 스스로 자취를 감추고 말았어요. 대업에 방해만 될 뿐이라면서. 하나 이 죄인은 그리 생각하지 않아요.”
“왜?”
“이 죄인의 미천한 애비가 말하기로는 그 멍청한 놈, 혹은 개자식이라 부르기도 했어요. 말하는 바를 들어보면, 순순히 물러날 인물도 아니겠고요. 의회에서 쫓아내지 않았을까 추측하고 있어요.”
“너희의 황제를 스스로 쫓아냈다고?”
“추악하고 불경한 것들이니까요. 알량한 권력이 욕심이 나 그러했겠지요. 애초에 용의 저주를 덮어씌워 쫓아낼 생각이었을 수도 있겠어요.”
의회의 속사정이야 알 바가 아니고.
문제는 용이었다.
시설을 털 때 대량의 용골을 발견하지 않았던가.
어디서 주웠거니 했더니만, 직접 사냥한 모양.
어찌 잡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 정도의 전력을 갖춘 단체라는 뜻이기도 했다.
“그래서, 네가 잔당들이 있나?”
“일부는요. 송구스럽게도 전부 알지는 못해요.”
이어 나림의 입에서 여러 이름들이 튀어나왔다.
옆에서 누렁이가 받아 적으니 곧 살생부의 기록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흘려들을 수 없는 이름도 있었다.
“타플강드 상단이라고?”
“예. 의회의 자금줄이에요.”
시엔과 뷔아가 서로 마주 보았다.
심각한 표정이었다.
타플강드 상단.
그 이름을 모르는 이는 대륙에 없다.
세상에 큰 상단 열 개를 꼽으라면, 사람마다 지역마다 조금씩 다른 목록을 만드리라.
그러나 개중 제일의 상단을 꼽으라면 그 누구라도 같은 이름을 말할 터다.
명실공히 대륙 제일의 상단이었으니까.
* * *
시엔은 현재 영지의 실질적 통치자였다.
티란디스 후작이 진작에 모든 업무를 내팽개치고 별장에 처박혀 버렸으니까.
그게 내전 전의 이야기였다.
내전 때에는 잠시 업무를 보나 싶더니만, 내전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또 다 내팽개쳤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이처럼 굴더니.
그게 후계자 하나 잘 키워 전부 제 업무 떠넘기고 놀기 위함이었다.
물론 시엔도 십분 이해하는 바였다.
그 자신도 나중에 후계자 하나 세워놓고 곧바로 떠나 연구나 하고 파티나 열며 놀 생각이었으니까.
그러니 대수림 방면으로 원정을 나와서도 굵직한 사항의 결재나, 그게 아니라도 근황 보고는 정기적으로 받았다.
그리고 지금, 말이 거품을 물 정도로 급히 달려온 전령이 대지급이라며 편지를 전했다.
[시엔, 나 로우드다.
거두절미하고 말하마.
혹시 용의 피 좀 더 구할 수 있나?
현재 상단이 큰 위기에 처했다.
젠장, 상단이 문제가 아니라 영지의 재정이 완전 파탄이 나게 생겼다.
사기를 당했다. 잘은 모르겠지만, 아마 그런 것 같다.
전부 내 잘못이다.
재무관을 내려놓을 때는 내려놓더라도, 일단 수습은 해야 할 것 같아 이리 급히 소식을 전한다.]
이건 또 뭐야?
시엔이 표정과 편지를 동시에 구겼다.
< 43. 봄이 가다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