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 빚쟁이는 밤에 잠도 못 잔다 [2] >
건장한 덩치들이었다.
갈라졌다 붙은 칼자국 하나씩은 얼굴에 훈장처럼 새기고, 저마다 흉악한 무기를 손에 쥔 채였다.
도끼나 도끼창, 대검과 같이 큰 무기들이었다.
무장한 용병들.
심기가 불편한 듯 인상을 쓰고 앞을 노려보면서.
척 보기에도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들이다.
불쾌한 표정으로 성난 눈빛을 쏘아대니, 어지간히 담이 큰 이라도 오금이 저릴 지경이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용병들의 눈치만 보았다.
개중 하나가 용기를 내 말을 붙여본다.
“이보시오, 나는 그저 상단주를 만나러…….”
“약속이 되어 있으십니까?”
용병의 말은 정중했으나, 사람이 하는 말이 내용이 전부가 아니라 태도와 제스쳐가 함께 이루는 것이다.
눈을 부라리고 으르렁거리듯 내리깐 목소리.
용병은 약속이 있으냐 물었으나 실상 귀찮게 하지 볼 일 없으면 꺼지라고, 아니면 대가리를 쪼개버리겠다, 그렇게 전해졌다.
“그건 아니고……”
“그럼 출입하실 수 없습니다.”
“아니, 좀 어떻게.”
“그렇다면 약속을 잡으셨어야지.”
“약속을 잡으려도, 연통조차 닿지 않으니까 이리 직접 오지 않았나.”
상인은 답답했다.
약속을 잡으려면 일단 서로 만나던가, 하다못해 소식이라도 전해야 할 것이 아니던가.
본단에 콕 틀어박혀 두문불출하니 결국 여기까지 직접 오고야 말았다.
빚쟁이는 밤에 잠도 못 잔다고 했다.
원래 빌려준 이는 속이 타고 마음이 상해 잠조차 이루지 못하지만, 빌린 이는 태평하니 세상이 평화로운 법이라고.
상인의 애원하며 매달렸다.
용병이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그게 내 알바요? 귀찮게 하지 말고 꺼져.”
사람들은 사람이 인상이 저기서 더 험악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까지 인상을 쓰던 게 아니라, 그냥 얼굴이 워낙에 험악했던 것뿐이라고.
용병의 으름장에, 상인이 결국 물러나고 말았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은 덤이었다.
그렇게 몰려든 빚쟁이들이 벌써 여럿이었다.
용병이 무서워 들이치기는커녕 목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그렇다고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라 그저 발만 동동 굴렀다.
결국 그들이 택한 방법은 기다리는 것이었다.
언제까지고 본단에 틀어박혀 먹고 자고 할 수는 없을 터이니, 결국 외출하고 말 터다.
그때 따지는 수밖에는 없지 않겠는가.
그런 이유로 구 제인 상단 본단 앞에 벌써 사람 여럿이 모였다.
구 제인 상단. 지금은 간판이 바뀌었다.
메어리 상단. 제인 상단이 망하고 새로이 본단을 꿰찬 상단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대로에 진을 친 사람들 사이, 여인 여럿이 걸음을 옮겼다.
당당하게 본단의 정문을 향해서.
문을 지키던 용병들이 그녀들의 앞을 막아섰다.
“어떤 용무이십니까?”
“상단주 좀 보러 왔지.”
“약속이 되어 있으십니까?”
그 선두, 붉은 머리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약속? 지랄. 안에 귀족 나으리께서라도 계시나? 무슨 상인 나부랭이 주제에 약속이고 뭐고. 비켜.”
“그럼 출입하실 수 없습니다.”
“하. 출입하실 수 없다?”
여인이 사나운 표정으로 긴 머리를 쓸어 넘긴다.
암고양이 같은 미인의 희고 늘씬한 목덜미가 그 서슬에 드러난다. 용병이 침을 꼴깍 삼켰다.
“약속이고 나발이고, 내가 할 말이 있으니 들어가야겠어. 비켜.”
용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빚쟁이들이 물러서던 그 얼굴이었다.
그러나 여인이 지지 않고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어쭈, 인상 써? 왜, 한 대 치려고? 그래. 쳐라, 쳐. 내가 만만해 보이지, 아주?”
“그게…….”
그러자 오히려 용병이 주춤거렸다.
여인의 태도를 보니 예사 인물이 아니리라 생각이 든 터였다.
“혹여 어디서 나오셨는지.”
“그걸 네가 알아서 뭐 하게? 비켜, 길 막지 말고. 두 번 말했다. 내가 성질이 좀 더러워서, 세 번째는 말로 안 해.”
“성함을 말씀해주시면 곧장 안에 알리겠…….”
용병의 말이 도중에 끊어졌다.
뱀이 쉭쉭거리는 듯한, 아니면 타오르는 큰불이 내는 듯한 그러한 기분 나쁜 울림과 함께, 여인의 손아귀 위로 머리통만 한 불덩이가 떠올랐으니까.
“분명 말했다. 세 번째는 말로 안 한다고.”
“마법사…….”
용병들의 표정이 바짝 굳었다.
사람들은 마법사를 두려워한다. 그리고 용병들은 보통 사람보다 훨씬 더 마법사를 두려워했다.
평범한 이들에게 마법이란 모르는 것, 미지였다.
그러나 용병에게는 경험으로 아는 위험이었으니.
칼밥 먹으며 돌아다니다 보면, 마법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보고 알게 된다.
직접 겪어 아는 이도 있으나, 그러고도 살아남은 이는 적었다. 그러나 그 동료들은 확실하게 보고 아는 식이었다.
네 명의 여인이 일제히 막대기를 꺼내 들었다.
보석 따위로 장식된 앙증맞은 것이나, 마법사가 든 완드를 보고 그리 생각하는 용병은 거의 없다.
그렇게 생각한 용병이 대개는 금방 죽어 사라졌기 때문에.
“여기서 한 판 해보던가, 아니면 비키든가.”
용병들이 저마다 제 무기를 꼬나쥐었다.
그러자 여인이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이 말했다.
“어머. 세 번째네? 말로 안 한다 했었는데.”
여인의 눈이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용병의 특기는 허세고, 닮고 구르다 보면 상대의 허세쯤은 꿰뚫어 보기 마련이었다.
진심으로 싸울 요량인지, 아니면 그저 으름장에 불과한지 정도는.
문을 지키던 용병이 한 번에 알았다.
진짜로 마법에 얻어맞게 생겼다.
게다가 방화광이었다.
방화광이 사람 태우는 일을 마다할까.
“비켜드리겠습니다.”
“쯧. 진작에 그럴 것이지.”
“죄송합니다.”
“가자. 꼭 여러 번 말해야 들어 처먹지.”
명령은 아무도 들지 못하게 막으라는 것이었지만, 목숨을 바칠 정도의 충성은 없었다. 그만한 황금을 받는 것도 아니었으니.
여인들이 정원을 지나 건물의 현관으로 향했다.
그러자 현관을 지키던 용병들이 앞을 막아선다.
붉은 머리 여인이 사납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이미 세 번 말했거든.”
쾅. 쾅. 폭음이 터지고 그 서슬에 건물이 부스스 떨렸다.
벨가트 메어리, 메어리 상단주가 인상을 찌푸렸다.
“무슨 일이야?”
“그, 바로 알아보고 오겠습니다.”
하인을 겸한 도제가 재빨리 자리를 떴다.
달칵. 도제가 나가며 문을 닫았다.
그리고 잠시 후, 쾅!
훅 밀려드는 열기. 박살이 난 문이 벽면을 치받고 아무렇게나 널브러졌다.
“후아. 이제 좀 살겠네.”
“무슨……?”
“네가 상단주야?”
“누, 누구신지?”
“그건 네가 알 것 없고. 우리는 받을 돈 받으러 왔거든? 그러니까 돈 내놔.”
맡겨놓은 돈이라도 있는 줄 알겠다.
벨가트가 이마를 훔쳤다. 순식간에 배어 나온 땀이 축축했다. 돈을 내놓으라니. 강도인가?
이런 대낮에, 도시 한복판에서?
그러나 경비대는 멀고 마법사는 가까웠다.
“그 돈이라고 하시면.”
“이거 말야. 다해서 금화 사만 개.”
여인이 품에서 종이 뭉치를 꺼내 내밀었다.
벨가트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받아 읽어내렸다.
제인 상단이 발행한 어음이었다.
“죄송합니다만, 여기는 메어리 상단입니다. 제인 상단이 아니라.”
“그래서, 못 주겠다고?”
“제인 상단은 망해서 이미 없습니다만, 힉!”
퍽. 여인이 책상을 걷어찼다. 벨가트가 말을 하다 크게 놀라 몸을 떨었다.
“망했든 어쨌든 내 알 바 아니고. 나는 우리 돈만 받으면 돼. 여기가 제인 상단 본단이잖아.”
“제인 상단은 망해서 이제 없다니까요…….”
벨가트의 목소리가 모기처럼 작았다.
붉은 머리가 인상을 팍 썼다.
“이게 누굴 바보로 알아? 제인 상단이 망했는데, 너네가 이 자리를 꿰차고 있잖아. 너네가 남은 거 다 챙겨 먹은 거 아냐? 왜 너네 혼자 처먹는데?”
“그게, 그게 아닙니다. 그러려고 했습니다만, 외려 손해만 잔뜩 봤단 말입니다.”
“웃기지 마. 이게 누굴 호구로 알고.”
“진짜입니다! 본래는 뇌물, 아니 성의를 바치고 제인이 남긴 자산을 챙기려 했습니다만, 영주님이 그렇다면 일터를 잃은 영민 모두를 챙기라 하시는 바람에.”
“그게 뭐?”
“남긴 것이라고 해봐야 텅 빈 건물과 쓸모도 없는 장부, 창고에 남은 상품 조금이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외압에 본단을 이리로 옮기고, 이전 제인 상단에 속한 모든 이들을 한번에 고용했습니다!
“그래서 뭐? 그럼 상단 인원이 많아진 거 아냐? 그럼 더 커진 거니까 이득만 봤구만. 이게 누굴.”
“아닙니다! 사람만 많아서 무얼 한단 말입니까! 나가는 금화는 크게 늘고 사람은 놀고 있는데!”
상인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그 기세가 제법이라 붉은 머리가 한발 물러섰다.
붉은 머리가 귀 위를 꾹꾹 눌렀다.
“머리 아프게시리. 복잡한 이야기는 됐고. 돈이나 내놔.”
“말씀드렸다시피 저희도 손해만 잔뜩 본 상황.”
“야! 내가 너네 손해까지 챙겨줘야 해? 그딴 거야 내 알 바 아니고, 나야 돈만 받으면 그만인데.”
“이 어음은 제 소관이 아니라…….”
“아아. 그래서 못 주겠다?”
여인이 다시 언어 아닌 언어를 읊조렸다.
손바닥 위로 피어오르는 새빨간 화구.
그러나 역효과였다.
상인이 겁 대신 악을 질렀다.
“여기는 도시 안입니다! 국법이 있는 바에 이러는 법은 없습니다!”
“야, 이거 봐라?”
“치안대를 불렀으니 어디 한 번 해보시지요!”
“죽고 싶어 안달이 났구나? 오냐. 그렇게 하자.”
붉은 머리가 상쾌한 미소를 지었다.
상인의 대응은 틀렸다.
방화광을 도발하는 만큼 멍청한 일이 또 있을까.
뒷일이야 뒤에 맡기고 일단 태우고 보는 족속들.
상인의 목숨이 경각에 달했다.
그러나 지켜보던 일행 중 다른 여인이 어깨를 붙잡아 만류했다.
“이거 죽이는 게 목표가 아니잖아. 금화.”
“그래, 젠장. 금화.”
붉은 머리가 손을 털어 불을 지웠다.
“그래서, 안 준다 이거지?”
“안 드리는 게 아니라 못 드리는……”
“그만. 거기까지.”
붉은 머리가 상인의 말을 막았다.
“이번엔 텃네. 가자, 얘들아.”
붉은 머리가 일행을 이끌고 문짝을 잃어 뻥 뚫린 출구로 향했다.
벨가트가 후우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찌 큰 고비를 넘긴 모양이라면서.
그때였다.
얌전히 나갈 듯하던 붉은 머리가 고개를 돌려 한마디를 더했다.
“말로 할 때 뱉으면 얼마나 좋아.”
“아직 할 말이 남으셨습니까?”
벨가트도 이젠 기가 많이 살았다.
그 모습에 붉은 머리가 사나운 눈으로 노려본다.
“너, 말야. 후회하게 될 거야.”
“내 살면서 후회할 거라는 사람치고 정말로 후회하게 만드는 이를 한 명도 못, 젠장, 사람이 말을 하는데.”
여인들이 대답도 듣지 않고 휙 하니 나가버리는 통에, 졸지에 혼자 중얼거리게 된 벨가트가 욕설을 내뱉었다.
벨가트가 씩씩 분에 겨운 거친 숨을 내쉬었다.
후회하게 될 거라. 그리 말하는 이 치고 정말로 후회하게 만드는 이가 없는 법이었다.
적어도 벨가트는 그렇게 믿었다.
그러나 그 믿음이 사라지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의 앞으로 발송이 된 화물.
작달막한 상자 속에 든 사람의 주인 잃은 손.
그 손가락에 끼워진 상회의 인장 반지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아들의 잘린 손이었다.
그리고 피로 쓰인 편지.
‘내가 후회하게 해 준다고 했지?’
* * *
시엔의 방문은 미리 알려 공식적이었다.
물론 사적인 방문이라 예식 따위는 없었다.
그러나 아르트레스 가문에서 기사 몇을 보내 호위 겸 안내로 붙여주었으니, 도시에 도착해 영주성을 먼저 찾아 인사를 붙이는 것이 예의였다.
“가문에 얼굴을 비치고 싶지 않다면, 굳이 나서지 않아도 상관없어.”
“하지만 그래서야, 소녀가 도움을 드릴 수 없게 되지 않겠어요?”
“나중에 일이 복잡하면 부탁할지도 모르겠지만, 쉬이 풀릴지 모르는 일이니 굳이 개인사까지야.”
트리예가 그간 가문에 연락도 하지 않았다.
나름의 사연이 있을 것이니, 돕는다고 해서 다시 그 연을 이을 필요는 없으리라고.
“시엔 님께서는 참으로 다정하시기도 하셔요.”
“그래서?”
“어차피 평생 연을 끊기도 뭐하니, 이참에 살아 있다 소식이라도 알려야겠지요.”
트리예가 대답했다.
그러면서도 표정이 떫은 것이 그리 기꺼운 표정은 아니다.
무리하지 않아도 상관없지마는.
본인이 그렇다는데 군말을 붙일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영주성으로 향해 마차를 대고, 씻고 쉬며 잠시 여로를 풀었다.
그러고 나니 손님을 맞이하겠다며 기별이 왔다.
시종이 여는 문으로 들어서자, 잘 차린 다과상과 그 앞에 앉은 사내가 보였다.
테린 아르트레스, 재작년에 가문을 이어받은 젊은 영주님이라던가.
참으로 선량한 인상이었는데, 덕분에 트리예와는 전혀 닮은 구석이 없었다.
테린이 들어서는 시엔 일행을 보고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벌렸다.
“아, 오셨습니까, 먼 길 고생이……”
손님을 맞이하려면 테린이 그대로 굳었다.
못 볼 것을 보았다는 듯 놀란 표정.
시엔의 뒤편, 새침한 표정을 한 트리예에게 시선을 붙인 채 떼질 못했다.
“너, 너. 트리예, 트리예냐?”
“그래도 용케 얼굴은 알아보네?”
트리예의 말투가 곱지 않았다.
“너, 너, 너. 너. 너.”
테린이 어디 고장 난 사람처럼 버벅거렸다.
둘의 사이가 별로인가?
하긴, 죽은 사람처럼 되었다 했으니.
그러게 굳이 얼굴 안 비춰도 된다니까.
시엔의 표정에 쓴웃음이 어리려던 순간이었다.
“트리, 우리 트리가 왔구나!”
“자, 잠깐!”
“와하하하, 트리, 그래, 트리야!”
보통 체면이란 것이 있으니 귀족이 손님 앞에서 점잖은 척이라도 해야 하는 법이었다.
그러나 테린이 곧장 달려들어 트리예를 번쩍 들어 안고는 빙글빙글 돌며 야단법석을 떨었다.
그 속도가 보통이 아니었다. 무예를 단련한 무인으로 수준을 엿볼 수 있었다.
베른닐보다는 훨씬 윗줄, 요즘에 한참 물이 오른 카레네와 비슷하거나 강하거나.
“아, 하지 마! 좀! 시엔 님 앞에서…….”
“너, 그간 연락도 없고! 이 오빠가 얼마나 걱정이 많았는지 알기는 하냐!”
“지금 내 나이가 몇 개인데, 당장 안 내려?”
“나이를 아무리 먹어도 우리 막내는 막내지!”
“아, 이래서 오기 싫었다고!”
트리예가 소리를 빽 질렀다.
시엔이 주름을 잡고 남매의 상봉을 바라보았다.
이건 또 뭐야?
* * *
트리예는 아르트레스 가의 유일한 영애였다.
그리고 형제들 중 가장 막내이기도 했다.
첫째인 테린부터 해서 여덟째 시시드까지.
위로 오빠만 여덟을 둔 막냇동생이었으니.
그날 트리예는 다섯 번을 더 들렸다.
트리예가 돌아왔다는 소식에 형제 넷이 하던 일을 내팽개치고 곧장 달려왔기 때문이었다.
형제는 넷인데 다섯 번을 들렸다.
그 이유는 은퇴한 선대 영주까지 기꺼이 막내딸을 품에 안았기 때문이었다.
아들 여덟 있는 집안에 막내딸이라니.
얼마나 귀염을 받고 자랐는지 알만한 일이었다.
그런데 대체 성격은 왜 그래?
보통 사랑받고 자란 이는 사랑을 베푸는 데에도 인색한 법이 없지 않나?
시엔에게야 나긋하고 공손해도, 트리예가 보통은 입만 열면 사람의 심기를 뒤집으려 드니 그 속이 꼬여도 단단히 꼬인 녀석인데.
시엔이 이해가 안 되면서도 한편으로 이해했다.
오냐오냐 커서 그런가 보지.
아닌 게 아니라, 일국의 공주도 저리 대접을 받진 않으리라.
“트리야, 이거 먹어 볼래?”
“오늘 애저가 참 좋더라. 이것도 좀 먹고.”
“외지서 얼마나 고생이 많았니. 야윈 것 좀 봐. 아주 뼈밖에 안 남았네.”
분명 먹고 연구하고 자는 반복이라 계속해서 살이 찐다면서 투덜대던 트리예였다.
빈말이 아니라 그 날카롭던 인상이 조금은 뭉근히 풀어진 듯한, 아무래도 살이 붙어서 그러한데도.
“아, 그만 좀 해! 나도 손 있거든?”
트리예가 정색하며 소리 질렀다.
본인이 질색해서 그렇지, 마음만 먹으면 손가락 하나 까딱 않고서도 천년만년 잘 살겠다 싶으니.
그리고 그리 어여쁜 막내가 웬 놈의 시녀랍시고 들어가 있다 하니, 시엔을 향한 눈빛이 곱지 못한 것도 사실이었다.
곱지 못하다 뿐이 아니었다.
진짜 살기를 품은 눈이 벌써 몇 개나.
특히 선대 아르트레스 백작, 전 변경백이 그랬다.
“그래서, 우리 트리와는 무슨 관계이신가.”
“그저 사용인과 고용인의 관계인데요.”
“그래? 혹여 엉큼한 속을 가진 건 아니겠지?”
“절대 아닙니다.”
“뭣이? 지금 내 딸이 매력이 없다 하는 겐가!”
“그건 아닌데요. 객관적으로야 미인이지만…….”
“역시! 시커먼 속내가 있었구만!”
같은 언어을 쓴다고 해서 무조건 말이 통하지는 않는 법이라던가.
예전에 들은 농담이 알고 보니 농담이 아니었다.
“그만 좀 해! 시엔 님, 죄송합니다. 가족이 워낙에 유난이라. 이제는 나이를 먹었으니 모두 점잖을 줄 알았으나……”
“뭐, 화목하고 좋네.”
트리예의 사죄에 날아드는 살기가 진해졌다.
원수를 두고서도 이렇지는 않을 텐데.
적의가 줄어든 것은 만찬이 끝나고서도 한참 후의 일이었다. 트리예의 필사적인 해명 덕분이었다.
가장 존경하는 선배이자 마법의 스승이기도 하다면서.
그러자 막내가 이제는 마법사가 되었다면서 늦게나마 축하 연회를 열어야겠다며 야단이었다.
그걸 말리는 이가 한 명도 없으니 놔뒀다간 정말 얼토당토않은 기이한 축하연이 펼쳐질 뻔했다.
덕분에, 찾아온 목적을 밝히고 안부 치레나 하는 그 간단한 절차가, 밤이 늦고 나서야 이루어졌다.
< 44. 빚쟁이는 밤에 잠도 못 잔다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