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의 망령재림-230화 (226/268)

< 42. 밀림 속으로 [14] >

나림의 일과는 단순했다.

느긋하게 일어나 늑대인간의 배양 상태를 확인. 이후에는 실험과 연구.

밥때가 되면 밥을 먹고, 또 실험과 연구를 계속하다 졸리다 싶으면 누웠다.

대수림에서 달리 할 일이 없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나림이 본래 연구를 일이 아니라 취미처럼 즐기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성과도 있었다.

늑대인간을 개조하고, 또 대량으로 제조하는 데에도 성공했다. 아직은 기초적인 수준이라도 명령을 내려 조종하는 일도 가능했다.

대륙이 이를 알면 충격에 빠지리라.

곧, 오러를 쓰는 괴물의 군대를 완성한 것이니.

기반이 되는 이론은 스승에게 물려받은 것이나, 여기까지 개척한 공과는 순수한 나림의 몫이었다.

남은 연구는 보다 복잡한 명령 체계에 수립이다.

이로써 괴물이 군대를 대체하게 되리라.

군인이 사라지고 그 인력이 생산에 대체하게 되면 그 얼마나 이로운 일인지.

또 나아가 복잡한 명령 수행이 가능해져 농사와 생산에 투입이 될 수 있다면?

인간이 생산의 업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오로지 문화와 기술에 매진하며 인간의 삶은 그저 편안하고 안락한 가운데 융성할 것이다.

그때는 자신의 이름을 딴 대회를 열 생각이었다.

분야별로 가장 뛰어난 자를 선발해 표창하고 또 세상에 알리니 그 훈장의 이름을 나림장 정도로.

그러면 나림의 이름은 인류 역사에 길이길이 가장 위대한 이로 남게 될 것이다.

나림의 궁극적인 목표였다.

그를 위해 나림이 계속해서 연구에 몰두했다.

그러던 중에 그녀의 집중을 깨는 소식이 있었다.

“선임 연구원님, 환영회 준비가 끝났습니다.”

“아, 벌써?”

“벌써가 아니라 꽤 시간이 지났습니다만. 또 연구에 몰두하고 계셨습니까.”

한 번 집중하면 시간 가는 줄을 몰랐으니까.

“그래, 곧 내려갈 테니까…….”

나림은 엄격하고 권위 있는 상관이었다.

그중 하나가 부하들의 사기 관리였다.

환영회나 송별회 같은 행사는 집단의 단합을 도모하며, 개인사에 대한 배려, 예를 들어 생일을 챙겨준다거나 휴식 등의 여가 보장은 개인의 의욕을 불러일으켜 작업의 능률을 향상시킨다.

그런 이유로 부하들이 말하기에 나림은 참 좋은 상관이었다. 윗사람으로 모시기에 저만한 분도 또 없다면서.

“잠깐. 그런데, 신입은 왜 안 와? 내가 분명 의사를 보고 바로 오라고 했었는데.”

“불러올까요?”

“됐어. 선임이 후임 부르러 가야 하나? 조금 있으면 오겠지.”

“환영회로 모두 기다리는 중입니다. 그러다 더 늦으면…….”

“밉보이는 것도 다 자기 행실이지. 똑바로 처신하면 애초에.”

나림이 말을 끊고 인상을 찌푸렸다.

“됐다. 가서 불러와 줘. 다들 기다리고 있다니까 괜히 분란 일으켜서 좋을 것도 없겠지.”

“알겠습니다, 선임 연구원님.”

연구원이 그리 말하고 등을 돌리던 참이었다.

쿵.

땅에 붙인 두 발로부터 나직하게 올라오는 울림이 있었다.

울림이라기보다는 떨림, 그리고 그보다는 다리를 타고 오르는 소리에 가까운.

그리고 쿵. 다시 쿵. 또다시 쿵.

일정한 주기로 대지가 박동했다.

나림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갔다.

이미 이와 같은 경험이 있었다.

오래전도 아닌 바로 오늘 저녁나절의 일이었다.

거대한 질량을 가진 것이 땅과 부딪치는 소리.

베히모스의 땅울림이었다.

“젠장, 가서 비상종을, 아냐, 괜히 놈을 자극할 수도 있으니까 구두로 전파해. 당장 전원 연구동 앞으로. 등화관제 실시하며 조용하고 신속하게! 시설을 포기하고 철수할 테니까!”

“알겠습니다!”

* * *

베히모스의 머리 꼭대기, 두 명이 서고 누웠다.

누운 이는 뷔아였다.

베히모스의 푹신한 털가죽에 폭 파묻혀 있으니 참으로 팔자가 좋은 꼴이었다.

얼추 체력이 회복된 이후라 쉬시라 누워있는 것은 아니었다.

머리 위에 빛을 발하는 것이 오밤중에 너무 눈에 띄니 차라리 누워 몸을 숨겼을 뿐.

도대체 헤일로는 하는 일이 뭐야?

벌레를 포함해 산 자의 이목을 끌고. 감정 상태를 드러내는 것 같기도 하다.

그 외의 어떤 효능이 없는 것 같다.

시엔이 생각하기로는 그렇다면 불편하고 거추장스럽기만 하고 아무 짝에 쓸모가 없지 싶었다.

물론, 후광이 가지는 권위가 있기는 하다마는.

시엔이 뷔아에게서 시선을 떼고 저 아래에 지상을 내려다보았다.

쿵, 쿵, 쿵.

베히모스가 시설 가까운 곳에 가만히 서서 천천히 발을 구르는 중이나, 저들에겐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시엔이야 어둠을 꿰뚫는 눈이 있었다.

괴물을 자극할 우려가 있다 생각했는지 횃불조차 없이, 아니, 피워놓은 횃불마저 지워 꺼 버리고는 이 층 건물 앞으로 차례차례 모여들고 있었다.

숫자를 세는 모양인지 오 열 횡대로 서는 인원들.

시엔이 보기에도 세기가 참 좋았다.

가장 앞에 선 두 명. 그리고 마주 보며 오 열 횡대로 네 줄 하고 둘.

총합이 스물넷이었다.

의사에게 듣기로 총원이 스물넷이라던가.

그러나 의사는 목이 돌아갔으니 저기에 없다.

사자 수인이 외부인이나 들러붙어서 떠나질 않는다 했으니 그를 합하면 숫자가 맞으리라.

시엔이 어둠 화살 주문을 시전했다.

둥글게 휘며 유려하게 꺾인 어둠 화살이 베히모스의 뺨을 쿡 찔렀다.

물론, 워낙에 질기고 두꺼운 가죽이라 그저 따끔하고 말았다.

애초에 해하려 한 일이 아니라 그저 신호를 보낸 것뿐이었으니까.

베히모스의 양 입꼬리가 위로 치솟았다.

속에 든 세올의 마음이 기뻐서 그러했다.

아. 이거. 이걸 해야 보람이 있지. 암.

세올이 그리 생각하며 숨을 들이쉬었다.

베히모스의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

부패하기 시작한 허파에 있는 힘껏 바람이 든다.

거대한 용량만큼이나 막대한 공기가 들어차 다시 빠질 때를 기다리며.

“뷔아. 귀 막으십시오.”

시엔이 제 귀를 틀어막으며 말했다.

크아아아아-!

거친 포효가 세상을 뒤흔들었다.

소리라기보다는 충격에 가까운 굉음이 터졌다.

귀를 막아도 온몸으로 부딪치는 막대한 성량.

그 서슬에 나무가 흔들리고 부대낀다. 마치 소슬바람이 휘몰아치는 형상이었다.

시설의 인원들이 죄다 귀를 틀어막았다. 비틀거려 중심을 잃으니 일부는 바닥에 쓰러지고 만다.

몇은 아예 새대가리가 하는 마냥 머리를 땅에 처박고 두려움에 떨었다.

하하. 보라, 인간이 쓰레기 같구나.

세올이 흡족한 미소로 만족감을 표현했다.

그리고 뒤이어 광원이 밝았다.

성녀가 신성으로 틔워 세상을 밝히는 빛이었다.

가까운 곳에 달이 뜬 것처럼 새하얀 광채가 밤을 낮처럼 환히 밝혔다.

어둠이 두려워 도망쳐 한데 모이니, 세상은 밝고 그림자만 선명하게 검었다.

베히모스가 한 발 앞으로 성큼 나아간다.

밝은 밤 아래 거대한 괴물이 목책 앞에 섰다.

* * *

나림이 풀썩 주저앉았다.

내가 책임자인데. 약한 모습 보이면 안 되는데.

그러나 오금이 저리고 다리엔 힘이 없으니 그저 생각만 그러하고 몸이 땅에 달라붙었다.

드러난 베히모스의 모습은 처참했다.

털가죽은 검고 붉고 푸르다.

검은 것은 흙이요, 붉은 것은 피와 살점이었다. 그리고 짓이겨진 풀물이 들어 군데군데 푸르렀다.

그 와중에 뱃가죽은 찢어져 복압에 튀어나온 내장이 여러 곳에 보인다.

그러나 그 모습이 괴물의 위엄을 깎지는 못했다.

오히려 저 상태로 꼿꼿하게 선 자태가 더욱 공포를 불러일으킬 지경이었다.

“히, 히예브. 분명 죽었다고 했잖아요…….”

“분명 숨이 끊어진 것을 확인했는데.”

사람 키 두 배는 되는 목책이었다.

그러나 괴물이 앞에 서니 겨우 무릎 아래에도 닿지 않았다.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뒷목이 당기는 거체.

그보다 기이한 일은 세상을 비추는 빛이었다.

희게 밝은 광채이나 사람이 보아 눈부시지 않다. 밤이 낮처럼 밝아도 불길하지 않은 그런 광원.

오로지 신성한 불빛만이 가지는 특성이 아닌가.

괴물과 신성이 동시에 등장하다니. 대체?

의문을 곧 풀렸다.

괴물의 제 머리에 손을 가져가더니, 무릎을 굽혀 한쪽을 땅에 박고 자세를 낮췄다.

베히모스의 손바닥에 선 것이 사람의 형상이었다.

괴물의 손이 땅에 닿아 사람이 훌쩍 뛰어내린다.

이미 한 번 본 얼굴들이었다.

나림이 억지로 웃었다.

마음은 한껏 불길하고 위험하다 경고하니 쿵쿵쿵 심장이 뛰나, 머리가 애써 자신을 속였기에.

“너, 너희. 놀랐잖아. 뭐야, 어떻게 된 거야?”

“베히모스가 죽어있기에, 다시 일으켜 세웠지요.”

시엔이 씩 웃으며 대꾸했다.

돌아온 존대에 나림의 불길함이 한결 줄어들었다.

미소에 깃든 어색함은 여전했으나.

“어떻게? 어떻게 한 거야?”

“어떻게 했는지가 중요할까요? 이미 성공해 여기 얌전히 서 있고, 이게 바로 제가 한 일이니. 그것보단 저게 더 궁금하지 않으시고.”

시엔이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켰다.

가까이에 뜬 광원. 새하얀 달과 같았다.

“그, 그래. 저건 뭐야? 신성 주문 같은데…….”

“신성 주문 맞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계속 같은 말씀만 하시네요. 그야 성녀가 여기에 있으시니 가능한 일이죠.”

나림이 뷔아에게 시선을 돌렸다.

“성녀? 신교의? 신교에도 성녀가 있었구나!”

“신교라니.”

뷔아가 인상을 찌푸렸다.

들어본 적 없는 종파였기에.

교단의 이단 목록이 하나 늘어나는 순간이었다.

나림이 눈동자를 굴렸다.

신입인 줄 알았더니 둘의 능력이 어마어마하다.

그러면서도 적대적인 건 아닌 것 같고.

“그 혹시, 상위 의원분들이신가요?”

시엔이 대꾸했다.

“아니.”

“그럼……?”

“나는 흑마법사. 이분은 교단의 성녀님이시고.”

순간, 여러 군데에서 동시에 굉음이 울려 퍼졌다.

인원들이 놀라 고개를 돌리니, 목책 여기저기가 동시에 쓰러지며 기괴한 것이 내부로 들어왔다.

살점으로 뭉쳐진 비대한 거인이었다.

제멋대로 삐져나온 것이 내장이며 뼈 따위였다.

일곱 기가 새로운 길을 내며 들어오니, 목책이 더 버티지 못하고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플래시 골렘! 너, 흑마법사구나! 베히모스도 네가 일으켜 세운 거야! 흑마법사니까!”

“이미 말하지 않았나? 흑마법사라고.”

“원하는 게 뭐지? 여기는 어떻게 알았고?”

나림이 앙칼지게 소리를 질렀다.

그러나 공포를 잊기 위한 몸부림일 뿐이었다.

시엔이 킬킬 웃음을 터뜨리며 말을 이었다.

“대수림의 이변을 조사하는 도중, 새끼 베히모스를 만나 때려잡았지. 그러고 나니 어미가 광분해 날뛰며 쫓아오지 뭐야. 도망치며 때를 기다리는데, 어디서 늑대인간이 나타나 해치웠네?”

“그럼, 베히모스의 습격이 다른 이유가 아니라.”

“맞아. 재수가 없었던 거지. 너희한테는 미안하고 또 고맙기도 해. 어찌 해치울까 고민이 많았는데.”

“그런!”

“그러니 미안함과 고마움을 담아 자비를 베풀까 하는데.”

시엔이 인원들을 둘러보았다.

“대장만 남고 나머지는 떠나도 좋아.”

“잠깐, 나는?”

“죽게 될 거야. 네 죗값이 하찮은 네 목숨보다 더 무거우니까. 그 말고도, 흑마법사와 제국 의회라면 악연이 좀 있는 편이기도 하고.”

개중 충성심 있는 부하가 있었는지, 앞으로 나와 소리를 질렀다.

“웃기지 마라! 우리가 선임 연구원님을 두고 떠날 것 같으냐!”

“나림 님! 자리를 피하십시오! 저희가 시간을 끌겠습니다!”

시엔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시간을 끌어? 베히모스가 손바닥 한 번만 떨구면 떼로 몰살을 당하는 처지에. 좋아. 그리 죽고 싶다면.”

시엔이 손을 들어 올렸다.

세올이 눈치껏 그에 따라 팔을 번쩍 들었다.

“잠깐! 잠깐만!”

나림이 소리치며 끼어들었다.

“약속할 수 있어? 내가 여기에 남으면, 부하들은 보내주는 거지?”

“물론. 마법사의 약속은 가볍지 않아.”

“하지만 마법사를 믿는 것도 멍청한 짓이지. 너는 쫓지 않겠다고? 네 베히모스와 플래시 골렘은?”

“호오. 제법 머리가 돌아가네.”

“속일 생각은 마.”

“베히모스와 골렘들도 쫓지 않을 거야. 됐나?”

“좋아. 그렇다면.”

나림이 제 부하들에게 눈짓했다.

부하들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눈물겨운 장면이네. 부하를 살리겠다고 사지에 남겠다니.”

“그게 윗사람의 미덕이지.”

“솔직히, 이런 장면을 기대하진 않았는데.”

김이 새는 것도 사실이다.

시엔이 보고 싶었던 장면이 아니었다.

버리고 도망치는 부하들과 남은 대장의 악다구니, 뭐 그런 장면을 상상했었는데.

의사가 말하기를 좋은 상관이라더니. 정말이었나.

놔뒀다간 꼴 보기 싫은 장면이 펼쳐 지지라.

“신파는 사양하지. 다섯을 셀 테니 나머지는 모두 도망치도록 해. 자. 하나, 둘…….”

“젠장, 빨리 가! 의회에 알려!”

나림이 빽 소리를 지르자, 부하들이 그제야 몸을 돌려 달아나기 시작했다.

시엔이 느긋하게 그 꼴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나니 자리에 남은 이는 나림과, 그 옆에 사자 수인뿐이었다.

사자 수인은 외부인이라 하지 않았던가?

시엔이 시선을 돌렸다.

“히예브라 했나? 그쪽은 안 가?”

“반한 여인을 놔두고 도망치라? 사자왕의 이름이 울겠군.”

“히예브…….”

나림이 감동을 받은 표정으로 울먹거렸다.

시엔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건 또 뭐야? 분명 신파는 사절이라 했는데.

“그래서 같이 죽겠다고? 뭐. 그렇다면야.”

시엔이 다시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히예브가 급히 소리쳤다.

“잠깐!”

“응? 왜?”

“이렇게 하지. 정정당당히 일 대 일로 결투하지. 내가 이기면 나림을 보내주고, 진다면 곧장 자리를 떠나겠다.”

“뭐?”

듣던 중 가장 괴상한 제안이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시엔이 일단 말을 뗐다.

“일단 먼저, 내가 거기에 응할 이유가 있어?”

“네가 사나이라면 피하지 않겠지!”

“아. 그런 식이야? 그건 그렇다 치고. 또 하나. 지면 자리를 떠나겠다라. 그게 다야? 애초에 지든 이기든 너는 사는 결투가 아닌가?”

“사랑도 좋지만 일단 목숨이 우선 아닌가. 승부가 어찌 되든 나 역시 자네를 해하지는 않겠네. 공평하지 않은가?”

그게 공평한가?

시엔이 황당한 표정이 되어 다시 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정정당당? 결투란 제 능력껏 싸워 승부를 보는 거지. 저것들도 내 능력인데.”

“나는 한 명이고 자네는 여럿을 부리잖나.”

“듣던 중 가장 해괴한 논리인데.”

히예브가 송곳니를 드러내며 물었다.

“그럼, 결투를 받아들이겠나?”

“아니.”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바로 떠나겠네.”

“히예브!”

나림이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

“목숨을 걸어도 좋은 때는 내 여인을 지켜야 할 때지. 나림이 내 여인은 아니지 않나? 솔직히 그리 오랜 기간 구애했건만, 거절한 건 네가 아닌가.”

“야! 아니, 뭐 이딴 놈이 다 있어!”

“그쪽, 마법사. 내 눈치가 있으니 어디서 떠들고 다니진 않을 거야. 애초에 의회인지 뭔지 관심도 없고. 그럼, 이제 가도 되겠나?”

시엔이 도로 유쾌해졌다.

애초에 제국의 부역자가 아니라면야.

“잠시 기다리다 가시지요. 굶주린 마수들을 잔뜩 풀어놓았으니, 아마 지금 나가면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 겁니다.”

“내 싱거워 보여도 한 몸 지킬 정도는 되지. 베히모스 같은 규격 외 괴물만 아니라면야, 사자왕의 발길을 붙잡을 수는 없으니.”

“그 숫자가 대략 일만 정도 될 겁니다만.”

“그러면 안 되겠군. 언제까지 기다리면 되나?”

“내일 점심 때쯤 거둘 예정입니다.”

“그럼 한숨 자야겠어. 내 저쪽 건물에 쉬고 있을 테니 조심 좀 해주게.”

뻔뻔함도 이 정도면 오히려 호감이 간다.

시엔이 그러라 하니 사자 수인이 알겠다며 발걸음을 뗀다.

이제 자리에 남은 이는 나림 혼자였다.

그녀는 충격을 받은 듯 멍하니 있다, 한참이 지나 겨우 말문을 뗐다.

“흑마법사, 너, 숲에 마수를 풀었다고…….”

“아주 득실득실하지.”

“날 속였구나! 분명 쫓지 않겠다고 했으면서!”

“쫓지는 않았잖아. 분명 마수가 우글거리긴 해도, 재수가 좋으면 살아남는 놈도 있겠지, 뭐.”

“재수가 좋으면…….”

“다만, 그건 기적이나 다름없지. 맨몸으로 밀림에 들었으니 마수가 없어도 살아남지 못할 터, 하물며 주변을 가득 메운 참에야.”

“왜, 어째서 이런 짓을.”

나림의 눈동자가 멍하니 풀렸다.

그 표정은 명확했다. 절망.

시엔이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 42. 밀림 속으로 [14]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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