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 밀림 속으로 [1] >
대주기를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지만,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나올 줄은 몰랐지.
굳건히 선 방벽을 보고 시엔이 휘파람을 불었다.
급조한 방벽이라 나무로 축대를 세우고 돌을 채워 넣은 것에 불과하지만, 방벽을 세우고 나무를 치워 불모지로 숲을 갈라놓았으니 그 대비는 보통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좌우로 숲을 분단한 방벽 위에 병사들이며 성기사, 사제들이 서성거리며 경계를 섰다.
“윽, 선배님, 이 끔찍한…….”
세올이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무엇보다, 방벽 전체에 축성을 때려 박았다.
사제단이 출동했다고 하고 성녀에 성자까지 포함이 된 교단의 지원군이었다.
넘치는 것이 신성이라 아예 쏟아부어 성스러운 방벽을 만들어 놓았다.
시엔은 속에 신성이 트고 나서부터 별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세올과 트리예에게는 끔찍한 광경이리라.
그리고 괴물에게도.
애초에 축성한 성벽이 단단해진다거나 하는 효능은 없었다.
그래도 은은히 신성을 뿜는 성벽 위에 서면 아무래도 덜 지치고 사기 유지도 잘 되었다.
다만, 이렇게 대주기를 막으려 하면 이야기가 좀 달랐다.
괴물에겐 본능적으로 꺼려지는 것이라 함부로 들이받아 넘고자 하지도 않을 테고.
“너희 둘은 막사에서 좀 쉬고. 괜히 돌아 다녀봐야 좋은 꼴 못 보겠네.”
“예, 시엔 님.”
파리한 얼굴의 트리예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시녀가 자리를 뜨고 나니, 시엔보다 머리 둘은 큰 여인이 대신 자리를 잡았다.
“호오, 어머니. 이것이 인간의 건축입니까? 이런 기술이 일족에게 있었더라면 터전을 버리진 않았을 텐데요.”
“기술이라고 해도 생각보다 단순한 구조야. 축대를 박고 자갈을 채우는 건데.”
“지금 상황이 만족스러우니 굳이 이제 와서 궁금하진 않습니다, 어머니.”
므잉이 대답을 붙였다.
늑대 수인으로 이루어진 시엔 직할 특수 유격대, 숲의 자녀단의 단장이기도 했다.
늑대 수인들은 생각보다 제 상황에 더 만족하고 있었다.
그저 훈련해 실력을 기르기만 하는데도 금덩이, 인간을 만능으로 부리는 누런 것이 다달이 들어오지 않던가.
살기 위해 단련하고 또 사냥과 생존으로 줄타기를 하던 대수림의 생활보다 훨씬 나았으니까.
티란디스의 지휘 막사에 짐을 내려놓고 있자니, 카레네와 마주쳤다.
초봄이라 해도 아직은 쌀쌀한 날씨였다. 그럼에도 땀으로 범벅이 되었으니 막 훈련을 마친 모양.
“왔어?”
“귀찮게 왜 오라 가라 하는지 원.”
“뭐. 어쩔 수 없지.”
카레네가 쓰게 웃었다.
실질적으로 영지의 일을 처리하고 있는 시엔이다.
시엔이 직접 국경까지 나왔으니, 아무래도 다른 이가 대신 바쁠 터였다. 로우드라던가. 아니면 뭐, 재무관이라던가.
사실 시엔이 영지의 병무관과 군대를 보냈으면 할 일은 다 한 셈이었다.
그럼에도 굳이 직접 온 까닭은, 왕실의 편지가 직접 권유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제안자가 가 있는 것이 예의 아니냐.
교단에서 큰 병력을 보냈는데, 명예 성자가 함께 있는 것이 더 좋은 그림이 될 테고.
거기에 델피르 왕자가 지금 국경에 있으니 곁에서 좀 도와주라며.
“특이사항은?”
“없어. 대수림에 별다른 움직임도 없고. 대주기, 확실한 것 맞지?”
“글쎄.”
한별과 므잉에게 들은 이야기 말곤 딱히 근거도 없는 상황이었다. 가능성이 있으면 방비하는 것이 맞기에 적극적으로 움직였을 뿐.
대주기가 일어나지 않더라도 뭐.
이참에 국경 정비를 이뤘으니 그걸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글쎄라니? 교단의 지원군까지 청한 상황인데.”
“못 맞추면 많이 민망하긴 하겠지. 그래도 현명한 자는 항상 최악을 대비해야 하는 법인데, 뭐.”
“나야 어느 쪽이건 불만은 없지만. 검위공께서 계시기도 하고.”
아주 푹 절어있다 싶더니, 검위공에게 굴려지고 난 이후였나 보다. 시엔이 화제를 돌렸다.
“전하께선?”
“중앙 지휘부에 계셔. 빨리 찾아뵙고. 시엔은 언제 오느냐 몇 번을 물어보시는지. 무슨 천하의 충신이라도 기다리시는 줄.”
“나 정도면 뭐. 천하의 충신 정도는 되지.”
시엔과 카레네가 키득거리며 주먹을 부딪쳤다.
* * *
중앙 지휘부는 왕실이 쓰는 거대 천막이었다.
겨우 천막이라고 무시할 것이 못 되는 물건으로, 공병대가 달라붙어 올려야 하는 복잡한 구조물이기도 했다.
입구를 지키는 이의 낯이 익다.
아마 검위공의 제자들 중 하나였다. 왕가수호대가 지키고 있으니 전하께서 안에 계시다는 뜻이기도 했다.
서로 아는 얼굴이니 간단히 눈인사로 다른 절차를 생략하고 나니, 안에 들어 어린 왕자가 함박웃음을 지어 시엔을 반겼다.
한달음에 달려와 시엔의 허리를 감싸니 나뭇가지에 매미 달라붙은 모양이나 다름없는 꼴이었다.
왕자의 우아한 예법 선생이 씁쓰레한 미소로 눈을 마주쳐왔다. 이젠 잔소리도 포기를 한 모양이지.
그리고 그 옆으로 낯선 사내들이 어리둥절한, 혹은 경악한 표정으로 이편을 바라보았다.
“오오, 시엔이 아닌가!”
“격조하셨습니까, 전하.”
“그야, 물론. 아니, 아니야. 괴롭히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내 하루가 편하지를 않아.”
“누가 감히 전하를 괴롭힌다는 말씀이십니까?”
“바로 저들이야.”
알고 보니 왕자의 개인 스승들이었다.
제왕학에 수사학, 미학, 전술학, 사학자까지.
이제 델피르도 왕위 계승권자로 지위를 확고히 한 상태가 아니던가.
사실 시기로 보면 단단히 늦은 편이기도 하고.
델피르가 양손을 내밀며 말했다.
“이것 좀 봐. 얼마나 펜을 잡았으면 손이 부르터 양쪽이 크기가 다르다구. 밥 먹고 공부하고 또 밥 먹고 공부하고 자고…….”
시엔이 보기에 오른손이나 왼손이나 차이도 없다.
시엔이 인자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이런. 너무 과중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제가 마마님께 한번 말씀드려 보지요.”
“정말? 정말 그렇게 해줄 거지? 하지만, 지금은.”
델피르의 표정이 밝아졌다 다시 어두워졌다.
시엔이 왕자의 스승들을 보며 고개를 숙였다.
“왕사분들께서 어찌 생각하십니까. 때가 이르지 않음은 아나, 과함으로 오히려 학문에 흥미를 잃으면 더욱 큰 상실이 되지 않겠습니까?”
“흠흠. 젊은이. 우리도 아네만은, 마마께서 필히 진도를 나가라 명령하셨기에…….”
“그렇다면 제가 책임을 질 터이니, 교육의 시간을 지금의 절반으로 줄이시는 것이 어떠하십니까?”
“절반이나 말인가?”
이야기를 듣는 델피르의 눈동자가 초롱초롱하다.
“대신 전하께서도 그 시간에 집중을 하기로 약조를 하셔야 합니다만…….”
“응, 할게! 제대로 집중할 테니까!”
“전하께서 이리 말씀하시니 어떠세요?”
“흠, 자네가 책임을 지겠다면야…… 나야 그렇게 합세. 전하께서 영 집중을 못 하셔서.”
“그렇지요. 과중한 것도 사실이었으니.”
스승들이 금방 결론을 냈다.
이야기를 듣자 하니, 스승들이 보기에 왕자의 교육이 과중했던 탓이었다.
여섯 과목이 하루에 두 시간씩이라니.
하루의 절반을 공부에 쓰면, 씻고 밥 먹고 자는 시간을 빼면 남는 것이 무엇인가.
안 그래도 왕자가 하루하루 학문에 뜻을 잃는 것이 눈에 보이니 속앓이를 하던 참이라며.
델피르의 얼굴이 활짝 피고, 그러면 오늘의 수업을 해야 한다는 말에 다시 울상이 되었다.
사학자라던 노인에게 강제로 이끌려 왕자가 떠나고 나니, 예법 선생이 걱정스레 물어왔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마마께서 공자님을 총애하심이 보통은 아니나, 왕의 교육까지 손을 대는 것은 위험할 수 있으십니다만.”
“마마께서도 흔쾌히 받아들이실 겁니다. 오히려.”
“오히려라 하심은.”
“아마 선생께서 말씀해주시길 기다리셨을 것입니다만. 제 생각에는요. 그도 아니면 정혼자이신 카라렐 양이라던가.”
왕비가 시엔을 알듯이, 시엔도 왕비를 알았다.
델피르가 왕위를 계승하더라도 왕비가 왕국을 통치하리라. 제 손에 들어온 권력을 절대 놓지 않을 여자였으니까.
그러나 왕비가 시엔을 총애하고, 또 능력이 있어 왕국을 이끌기에 훌륭한 인재였다.
그리고 결국 또 언젠가 제 아들에게 왕좌를 넘길 어미기도 했다.
그러니 교육 일정을 늦춘들 바뀌는 것이 없다.
왕자가 빠른 때에 왕위에 올라 허수아비가 되거나, 교육을 핑계로 그 시기를 대폭 늦추거나.
둘 사이의 차이가 없었으므로.
시엔이 생각하기엔 왕비라면 누군가 교육 일정이 과중하다 말해주길 기다리지 않았을까 하고.
아직 준비를 갖추지 못했다.
왕위 계승을 미룰 좋은 핑계이기도 하고.
“위험한 말씀이십니다.”
“뭐, 마마께서는 욕심이 참 많으셔서. 제 사람을 결코 놓으려 하진 않으실 테니까요.”
“하나, 너무 경솔하신 것이 아닙니까? 물론 공자께서 차기 대공이시라, 마마의 첫 번째 신하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만.”
“다 떠나서, 어차피 같은 결과라면 왕자께서 더 편하고 즐거우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 이런. 부끄럽습니다. 공자님의 말이 옳군요. 전하를 모심에도 안위에 눈이 멀어 외면하고 있었습니다. 전하께서 공자를 기꺼이 따르는 것이 바로 이러한 것임에.”
예법 선생이 우아하게 고개를 숙였다.
예법이 정해져 있으니 사람이 하는 양이 다 같은 것이다. 그런데도 어찌 이리 우아할까.
뭐, 볼 때마다 같은 감탄이라 왕사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테지만은.
* * *
왕가의 천막을 나오고 나니 시간이 영 애매했다.
어차피 시엔이 직접 와서 할 일이 또 무엇이랴.
대주기가 일어나고, 또 대주기의 괴물들이 우르르 몰려오기라도 하지 않는 한에야.
한별의 부탁도 있고, 개인적으로도 궁금하여 대주기 이후 빈 대수림에 들어갈 계획은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대주기가 먼저이지, 지금 시엔이 굳이 찾아와 시간을 죽일 이유는 전혀 없었으니.
그런 이유로 시엔이 가까이에 선 건물로 향했다.
보아하니 급조한 티가 역력한 건물이다.
금빛 수실로 장식된 교단의 기를 빙 둘러놓으니 제법 어엿한 신전으로 보였다.
아마 왕국 측에서 성의를 표시한답시고 곧장 지었을 터.
안으로 드니 누군가 반갑게 말을 걸어왔다.
“오, 시엔 형제님이 아니십니까?”
“오랜만입니다, 라이뱅 경. 겨울 초에 헤어져 지금이 봄이니 한 계절만인가요?”
“그렇지요. 타국에 여행을 가셨다 들었습니다만, 심신은 잘 쉬고 오셨습니까?”
“쉬기는요. 일하러 간 거라.”
“과연. 뜻하던 바는 이루셨습니까?”
“예. 천신께서 보우하신 덕분에. 아. 성녀님께선 안에 계시나요?”
“어제 야간 순찰을 도셔서 취침 중이십니다만.”
“그래요? 피곤하겠네.”
굳이 자는 이를 깨워 볼 이유까진 없었다.
그럼 검위공이나 찾아볼까. 아니면 남쪽부터 쭉 돌아다니며 귀족들과 인사를 나눠도 되겠고.
“그럼 다음에 다시…….”
“허허, 서운하게 이러시깁니까? 안에 들러 잠시 기다리고 계시지요. 금방 채비해 나오실 겁니다.”
자는 이 자게 놔두는 게 서운할 일이던가?
시엔의 생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소리였지만, 팔뚝을 붙잡은 라이뱅 경의 손길이 굳건했다.
그 태도를 보아하니 다른 문제, 상의할 거리라도 있을지도 모르고.
결과적으로, 시엔이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예배실 가장 앞 의자에 앉자마자, 한 편의 문이 열리며 부스스한 꼴의 성녀가 튀어나왔으니까.
라이뱅 경이 성녀를 깨운다며 발을 뗀 것이 딱 세 걸음 만의 일이었다.
이리저리 엉킨 머리를 하고, 양팔을 쭉 펴 천장을 향하며 기지개를 펴니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동시에 입에서 제법 걸걸한, 비명 비슷한 소리가 찰지게 터져 나왔다.
“어으으아아악! 피곤하드아악! 피곤해애액!”
“그리 피곤하십니까?”
“그야 밤새 돌아다녔으니…… 으, 속도 안 좋고. 먹고 자는 게 아니었는데. 얼굴이 땡땡하네.”
아닌 게 아니라 얼굴이 꽤 부었다.
본판이 있으니 여전히 어여쁘다 할 미모여도, 여느 때보다 휘영청 밝은 뺨다구가 보름달처럼 넓었다.
뷔아의 성격이야 진즉에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리 보면 이만큼 재미있는 일도 없다.
“그, 성녀님?”
“라이뱅 경?”
뷔아와 라이뱅의 시선이 마주쳤다.
라이뱅이 곁눈질로 제 뒤편을 가리키니, 곧 뷔아도 거기 앉은 이를 곧장 알아보았다.
“시엔?”
“피곤하면 더 주무시지 그러셨습니까?”
“엄맛!”
아, 도망치네. 뷔아가 몸을 돌려 제가 나왔던 방 안으로 쏙 사라졌다.
시엔이 키득키득 웃음을 터뜨렸다.
라이뱅의 복잡한 표정이야 둘째 치고.
< 42. 밀림 속으로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