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 망령 재림 [6] >
세올은 드물게, 정말로 하기 싫은 태도였다.
“그 선배님, 용 때도 후유증이 있었고, 새로 빙의하는 일도 계속 후유증이 있었는데, 하물며 인간이라 함은.”
“용은 본래 사념을 남기는 생물이고, 조류는 워낙 단순한 구조라 본능이 조금 침식해 온 거지. 인간은 괜찮아. 본래 익숙한 것이기도 하고.”
“하지만, 배 나온 아저씨…….”
시엔이 피식 웃으며 되물었다.
“근육 잡힌 미청년이면 괜찮고?”
“으음. 그건 그래도 한 번쯤 빙의해 봐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잡설이 길다.”
그러나 어쩌랴.
세올이 이미 시엔의 심상 세계에 영혼이 묶인 상태였다. 암만 꺼림칙해도 까라면 까야 했으니.
사악한 진언이 장서고를 휩쓸더니, 이내 축 늘어진 페이발란트의 시체가 고개를 들었다.
뒤이어 눈을 끔벅거리고 제 손을 쥐었다 폈다가 일어섰다 앉아 보곤, 뒤이어 트리예가 얌전히 품에 안은 여인을 바라보았다.
“야. 내 몸 잘 간수하고 있어야 해.”
“물론이에요, 선배. 그런데 조금, 소름이 끼치네요. 그 몸으로 그리 말씀하시니.”
“뭐야?”
페이발란트의 시체가 도끼눈을 떴다.
시체는 조금씩 굳어가기 마련이니, 와중의 표정이라 더 어색하고 섬뜩한 곳이 있었다.
“윽. 선배님. 이거 기분이 되게 더럽습니다.”
“왜?”
“몸도 무겁고, 전신이 아주 무거운데, 그 생소한 감각이, 덜렁거리는…….”
“거기까지. 더 듣고 싶지 않은 내용인데.”
“그래서, 이 세올이 어찌하면 되겠습니까?”
“그냥 용병들 이끌고 돌아가서, 혼자 있을 때에 목매달고 연결 끊고 돌아오면 돼.”
“하지만 누군가 이상함을 눈치채면 어떻게 하지요? 입을 막을까요?”
“그냥 어설픈 연기 말고 입 꼭 다물고 있으면 돼. 곧 자살할 놈이 이상해 보이는 거야 당연하겠지.”
세올이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이어 장서고를 나서며 중얼거렸다.
“으, 이거, 걸을 때마다 스치는데…….”
그리하여 세올의 기분은 최악이었다.
적어도 탑을 빠져나올 때까지는 그랬다.
“됐다. 가자.”
“상단주님? 괜찮으십니까?”
용병대장이 페이발란트의 겁을 뒤집어쓴 세올을 보곤 걱정스레 물었다.
좋은 상관은 아니었더라도, 용병단장에게 은인이 맞기는 했으니까.
본래 칼밥 먹는 이가 어느 순간 사라지고 그 후에야 누가 죽었다더라 소문이 도는 업계가 아니던가.
삼류 시절부터 상단에 붙어 여기까지 온 용병대장이었다.
다른 용병단들이야 상인 휘하라면 실력을 쳐 주지도 않는다지만, 안전하게 수입이 나오기로는 그네들도 부러워하는 직장이었으니.
페이발란트가 용병대장의 위아래를 훑었다.
용병대장이야 지금은 무리의 대장노릇 하더라도, 더 실력 좋은 칼잡이가 나오면 언제든지 바뀔 수 있는 자리다.
덕분에 밥 먹고 칼만 휘둘렀으니 그 몸이 탄탄하니 근육이 불끈 잘 솟았다.
용병대장은 어쩐지 소름이 돋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이어진 페이발란트의 잔뜩 쉰 목소리에 그 꺼림칙함을 털어냈다.
“음. 좀 어지럽군. 부축을 좀 안 해줄까나…….”
“몸살이라도 나셨습니까.”
용병대장이 페이발란트의 팔을 붙들어 기대도록 했다. 페이발란트의 눈이 음흉한 곡선을 그렸다.
용병대장은 어쩐지 닭살이 돋는 기분이었지만.
“네 말대로 몸살인가? 어쩐지 많이 피곤한데. 좀 누웠으면 좋겠어.”
“그럼 누우시지요, 상단주님.”
“내가 머리에 뭘 좀 베야겠다 싶은데, 무릎 좀 안 빌려줄까나…….”
용병대장의 머리칼이 삐죽 솟았다.
뭔가 근원적인 거부감, 혹은 공포 같은 것이 치민 탓이었다.
그러나 어쩌랴, 월급 받는 이가 살아남으려면 알아서 기는 수밖에.
용병대장의 나무통 같은 허벅지를 베는 일이 사실 편안하지는 않았다.
너무 굵고 단단하니 나무토막을 뒤에 받친 기분으로.
그러나 어쨌거나 그 순간, 세올은 만족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야 하는 법이니, 이 정도 즐거움은 선배님께서도 용서해 주시리라 여기며.
그리고 그날 저녁.
집무실에서 목을 맨 페이발란트가 발견되었다.
* * *
“심연탑의 기록 접근에 실패했다고? 어떻게?”
“자세한 사항은 알 수 없습니다만, 페이발란트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스스로? 확실한가?”
“예. 부검 결과도 그렇고. 사체에서 전혀 특이한 점이 나오지 않았으니, 틀림없습니다.”
대의원이 황당하다는 표정을 했다.
“아니, 왜 자살을 해? 자살할 일이 뭐가 있다고?”
“그것이…….”
보고자가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죽여주십시오.”
“무슨 일이지? 자네가 관련되었나?”
“페이발란트가 공연히 의회를 능멸하는 말을 입에 담았습니다. 그래서 겁을 준다는 것이 그만.”
“겁을 주었다고? 뭐라 했기에.”
“일을 제대로 성사시켜야만 그 잘못을 만회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일을 제대로 성사시키지 못했다. 그래서 자네의 협박이 두려워 목숨을 끊었다?”
“제 생각에는 그렇습니다.”
대의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마음에 두지 말게. 어차피 사람됨이 크게 써먹을 놈은 못 되었으니. 실상 잡것의 피가 더 많이 섞인 놈이라 자네와는 혈통 자체가 달라.”
“허나, 제 잘못으로 대계가…….”
“페이발란트가 공연히 의회를 능멸했다면서?”
“예. 맞습니다. 의회를 속이고 거래를 청했으니 능멸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럼 자네가 할 말을 했을 뿐이겠지.”
“……감사합니다.”
“어차피 심연탑의 정수는 그 자리에 있지. 신물이 우리 손에 있으니 어쨌거나 결국 들어올 것이야. 천 년을 기다리지 않았나. 몇 년 정도 더 걸린다고 해서 늦는 대계도 아니니.”
대의원이 인자하게 말했다.
대의원을 아는 이가 보았다면, 눈을 비비고 의심했을 광경이었다.
대의원은 성격이 급하고 또한 잔인하며 용서를 모르는 자다.
작은 실수라도 응분 대가를 치러야 한다며 처벌을 미루지 않으니 따르는 이 모두 두려워 떨었다.
그러나 대의원이 이리 인자하게 용서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나저나 이제 슬슬 가정을 이뤄야지. 대체 왜 밖으로 나돌며 피하느냐? 나림 그 아이가 그렇게 마음에 안 드느냐?”
“그, 아버지, 나림은 좀.”
대의원은 벌칙에는 철저한 이나 자신과 가족에겐 그렇지 않은 이였으니까.
“대체 왜? 어릴 때는 그리 귀히 여기며 죽고 못 살더니. 어릴 때부터 결혼을 하느니 어쩌니.”
보고자가 얼굴을 붉혔다.
“그, 너무 어릴 적부터 보아서 그런지, 여인으로 보이질 않습니다. 그냥 좋은 친구 같은 녀석인데.”
“쯧. 그게 좋은 거야. 부부가 언제까지 죽고 못 살아 그리 좋아하며 살겠느냐? 그저 평생을 함께할 그런 좋은 친구면 족한 것을. 그러면, 다른 아이는 어떠냐? 네가 마음에 든다 하면 곧장 성사될 혼인이건만.”
“시간을 주십시오. 저도 제 마음을 모르겠으니.”
대의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 * *
광명 수도회의 인원이 적지 않았다.
그만한 인구가 일시에 왕국을 떠나는 것은 문제가 되는 일이었다.
남의 나라 백성을 빼앗는다는 행위가 되면 곤란한 것은 시엔이었다.
“그러니 알아서들 찾아와.”
“선배님, 알아서라 하시면…….”
“알아서. 알아서 몰라? 그럼 단체로 움직이리?”
“하나, 여행을 하기엔 재정이 조금……”
“수레에 금화를 좀 실어 왔으니 알아서. 서두를 필요는 없으니 눈치 안 보이게 조금씩 찾아와.”
“예. 알아서 조금씩 찾아가겠습니다.”
금화 앞에 공손해진 재스타가 복명했다.
결국, 다 같이 한동안 떠돌이 생활이 결정되었다.
떠돌이, 좋은 말로는 자유인이라고도 한다.
사실 백성이 나라에 매였으나, 사람이 하나 훌쩍 떠나면 그걸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그렇게 고향을 등져 어느 왕국의 백성도 아닌 이들을 말했다.
어차피 서넛 정도씩 묶어 여행을 간다 하면 그걸 굳이 막지는 않으리라.
수도회라 이름을 붙였으니 순례를 떠난다 하는 변명을 붙여도 되겠고.
그러나 시엔이 그마저 일일이 신경을 써 줄 일은 아니었다. 새집도 지어주는데 찾아오는 정도야 뭐.
물론 개중 낙오하는 이 역시 생기리라.
그러나 나중에 마탑의 이름을 알리고 흑마법사가 세상을 돌아다녀야 할 터다.
이때의 경험이 나중에 더 큰 도움이 되기도 할 테고.
* * *
“지난주에 발드라에 낚시하러 갔는데 말이야.”
“오, 발드라 호수 말입니까? 저도 한 번 가봤습니다만, 이야, 좋더군요. 배도 띄우셨습니까?”
“그럼 안 띄웠겠나?”
징세관이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다.
그럴 수밖에. 징세관은 부유한 직업이고, 여가에 돈을 아끼지 않는 처지였으니.
징세관보가 헤헤 비굴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래서, 뭣 좀 잡으셨습니까?”
“그날따라 조황이 영 엉망이라, 이거 선장 놈이 애먼 장소만 돌아다니는 거 아닌가 싶더라고. 지 말로는 배만 이십 년이라 물길에 빠삭하다더니.”
“선주놈들 하는 소리가 매양 그렇지요. 물 아래 지형을 훤히 뀄다느니 어째느니.”
“그렇게 한나절 내내 잡어 두어 마리 잡고, 오늘을 접나 이 선장을 잡나 고민하는 중이었단 말이지? 그런데 입질이 온 거야. 크게.”
“오우. 큰 놈이었습니까?”
“말도 마. 내가 이 풍채에 끌려들어 갈 뻔했다니까? 심지어 배가 끌려. 얼마나 센 놈인지.”
“거물이었군요!”
“그래. 거물이었지. 자네 가숨치라고 아나? 어디 사투리라는데, 그게 초어야, 초어. 겨우 끌어올리고 나니 맥이 탁 빠지는데, 들어보니 꼬리가 바닥에 닿고 주둥이가 내 가슴팍에 닿더군.”
그래 봐야 낚시꾼이 하는 소리였다.
게다가 겨울 끝물에 물고기가 실해 봐야 얼마나 실하겠는가. 먹어둔 살이 흐물흐물하니 녹아 비실비실한 놈이나 잡고 하는 허풍이겠지.
징세관보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예이, 예 후렴을 붙였다.
진실이야 어쨌건, 상관의 기분을 맞춰주는 것이 그 하급자의 업무였으니까.
그저 빨리 마을에나 도착해 저 끝도 없는 제 자랑이 끝났으면. 속으로는 그리 생각하면서.
문득 징세관이 분통을 터뜨렸다.
“아니, 저, 저, 저놈 좀 보게?”
“어찌 그러십니까?”
징세관이 삿대질하는 끝을 따라가니, 마을의 목책에 걸쳐 누운 이가 한 명 보였다.
징세관은 귀족의 대리인이고, 귀족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다.
그 아니라도 기분에 따라 세금이 무거워지거나 가벼워지는 관리에게 불손한 이가 없다.
“저런 예의도 없는 것을 보았습니까! 기를 보았으면 당장 일어나 마을에 알려 환대하려 하진 않고!”
“보나 마나 젊은 것이겠지. 요즘 젊은것들이란.”
징세관이 마뜩잖은 듯 혀를 찼다.
마을의 세는 이번 분기에 유난히 무거우리라.
그렇게 다짐하는 순간이었다.
무언가 이상하다.
목책 위에 비스듬히 누운 줄 알았는데, 가만히 보면 볼수록 자세가 불편하고 또 미동이 없었다.
그리고 애초에 계절이 계절이여야지. 따뜻한 봄이면 모를까, 이 추운 날씨에 높은 곳에 누웠다간 칼 같은 바람에 얼어 죽기 십상이 아닌가.
“징세관님? 저거, 아무래도.”
“젠장할, 백부장! 큰일이 난 것 같소이다!”
가까이 가니 목책에 스민 핏자국이 눈에 보였다.
마차에 박혀 잠을 청하던 부대의 백부장이 부하의 채근을 받고 비척비척 기어 나왔다.
짜증 어린 표정도 잠시, 이내 얼굴이 확 바뀌어 진중한 군인으로 탈바꿈했다.
“에뮬, 큰볼 각각 십 인을 끌고 선두에 서라. 따사라기랑 케케이 너희가 뒤를 지키고, 짝손, 활의 시위를 걸고 대기해. 피리 둘에 들어오고.”
삼엄한 분위기에 징세관이 눈을 끔벅거리는 사이, 군인들이 일사불란 대형을 맞춰 마을로 진입했다.
“천신이시여…….”
“이런, 어찌.”
마을의 꼴은 참혹했다.
시체 하나가 성한 것이 없었다.
하나같이 배가 열려 속에 든 것이 나와 사방으로 흩어진 상태였다.
어떤 이는 사지 중 하나가 없고 분리된 신체가 여기저기 나뒹굴었다.
우웨엑.
신참 병사들이 여기저기 구토를 참지 못하는 가운데, 백부장이 눈을 질끈 감았다.
마을의 수색은 조심스러웠으나, 다른 인기척이 없어 빠르게 진행되었다. 시체를 한군데 모으니 그 숫자가 백여 구에 달했다.
“백부장, 대체 이게 무슨 변고랍니까?”
“괴물의 소행이오. 그러나 산중의 촌락이 야수를 상대하지 못할 리는 없으니.”
“괴, 괴물 말이오?”
“사람을 뜯어먹을 놈이 그 말고 또 있겠소?”
“그러면…….”
“영주님께 보고를 올리고 괴물을 추적해 처리해야지. 젠장, 땅이 얼어 추적하기도 쉽지 않겠어.”
그때였다.
“백부장님! 생존자가, 생존자가 있습니다!”
“어떻지? 상태는? 아니, 내가 당장 가겠다!”
유일한 생존자는 열다섯쯤 되는 소년이었다.
피 묻은 팔뚝을 단단히 그러쥐고, 흔들리는 눈빛으로 낯선 방문객들을 올려다보았다.
“아이야,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느냐?”
“저, 저는, 모르겠, 모르겠어요. 갑자기 괴성이, 무서운 소리가 들리더니, 어머니께서 난로에 저를 밀어 넣으시고. 뜨거웠, 뜨거워요. 그런데 괴물이. 흐아악!”
소년이 비명을 지르며 경기를 일으켰다.
병사들이 달려들어 제압했으나, 몸을 뒤틀며 생난리를 피우다 이내 까무룩 눈을 뒤집고 기절해 버리고 말았다.
백부장이 쓰게 웃었다.
“마음도 다친 모양이오. 일단 이 아이도 데려가도록 하겠소이다. 급한 일이니 곧장 출발해야겠소.”
이 겨울밤, 깜깜한 숲을 어찌 지나가려고.
그러나 징세관이 걱정했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못했다.
그가 보아도 사태가 중해 보이기는 했으니까.
세금은커녕, 불길한 소식만 거둔 징세관의 징세 행렬이 가던 길을 되돌아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 가장 뒤의 짐 마차. 온몸이 묶여 짐 위에 놓인 소년이 문득 눈을 떠 하늘을 바라보았다.
숲이 가린 사이로 보름달의 파편이 슬쩍슬쩍 그 눈동자에 비쳤다.
문득, 소년의 동공이 세로로 열려 누런 흉광을 뿌렸다.
주둥이가 기이하게 늘어나고, 억센 수염이 뺨에 네댓 개씩 솟았다.
그러나 그도 잠시였다.
지친 몸에 결국 다시 정신을 잃자, 소년이 다시 평범한 사람의 꼴로 화했다.
< 41. 망령 재림 [6]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