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 선배 강림 [3] >
“내가 아는 역사와는 좀 다른데.”
“역사…… 말입니까?”
“과거에, 제국이 있었다. 대륙의 절반을 차지한 거대한 제국이. 세상에 제국이 오직 하나. 그래서 이름도 필요 없이, 그저 제국이었다.”
시엔이 덧붙였다.
“이건 알고?”
“당시 정세에 관해서는…….”
“모르면 모른다고 해.”
안튼의 눈이 가늘어졌다. 슬그머니 주둥이도 튀어나오는 것이 퍽 불퉁한 태도였다.
시엔이 코웃음치며 물었다.
“대륙에 그러한 제국이 있었다고 치고. 그렇다면 황제들의 소원이 무엇이겠느냐?”
“어, 모르겠습니다.”
“대륙의 절반을 가졌으니, 나머지 절반 역시 가지고 싶어 안달이었지. 사람의 욕심이라는 것이 바로 그러한 것이고. 욕심 아니더라도 이미 정해진 운명처럼 전쟁을 벌이지.”
시엔이 한숨을 쉬었다.
황제가 해야 할 일이 그 외에 달리 없었겠지.
황제의 업적은 항상 선대보다 위대해야 했다.
대륙의 절반을 차지하는 괴물 같은 영토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위엄이 필요했으니까.
그리고 가장 간단한 방법이 정복이 아닌가.
선대보다 더 넓은 땅. 더 위대한 황제.
“왕국 하나가 있었다. 작았으나 부유했지. 그리고 제국과 국경을 접했고. 그리고 어느 날, 제국군이 국경을 넘었다. 선전 포고도 없이. 몰염치한 침략이었지.”
그리고 왕국이 불탔다. 항복은 없었다.
“왕국의 국왕은 소심한 이라서, 제국이 사절 하나만 보냈더라도 당장 항복하겠다며 머리를 조아릴 인물이었어.”
사실 제국과 맞닿은 소왕국들이 전부 그러했다.
왕국 연합의 눈치를 보지만, 제국이 침략하여 들면 버티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건 대륙의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왕국 연합의 구성원들도, 해당 왕국의 신하들도.
그리고 제국 역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제국은 침략을 선택했지. 그 침략군의 숫자가 무려 오십만이었어. 오십만. 그게 얼마나 많은 군대인지 아나? 왕국의 모든 백성들에 더해, 기르던 말과 소를 다 합해도 오십만이 안 될걸.”
제국군은 왕국의 국경을 따라 위아래로 진격했고, 마침내 한 지점에서 만났다.
오십만의 군대가 왕국을 완전히 봉쇄했고, 그리고 나자 창칼을 그 안쪽으로 찔러넣었다.
그러고선 역사에 없던 대학살이 시작되었다.
사람도 집도 짐승도, 그리고 모든 역사를 불태워 지웠다. 항복이 없는 완전한 파괴.
그저 왕국의 것으로 난 이유만으로 이루어진 학살극이었다.
제국의 목적은 작은 왕국 따위가 아니었기에.
본보기였다.
황제의 자기소개.
내가 이렇게 잔인한 인물이라 너희가 감히 대항하지 말라.
대륙이 알아서 숙여 속국으로 들어오라는 그러한 전언이었다.
“말도 안 됩니다. 만약 그런 식의 본보기를 보였다면, 오히려 대륙 절반이 힘을 합쳐 막고자 하지 않았겠습니까?”
“실제로 그렇게 됐지. 미치광이를 따르려는 이가 있겠어?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불타버린 왕국의 왕자가 홀로 살아남았다는 거야.”
“그이가 설마.”
“아직 더 듣고. 신비주의자를 아나? 모른다고? 그쪽은 아예 사라져버렸나……. 어쨌든 반쯤 흑마법 반쯤은 교단에 걸친 심심한 이들이 있었는데, 왕자의 자질이 비상해 그들의 사원에서 신비를 배우고 있었거든.”
시엔이 아련한 듯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도 신비주의자 사원에 있을 때가 좋았지.
“왕자는 당대의 어둠을 타고났고, 그건 누구보다 강력한 흑마법사의 씨앗이지. 그리고 왕국이 불타 사라졌는데, 그냥 불타 사라졌느냐? 아니지.”
제국의 잔인함이 극에 달했다.
사람을 가축처럼 사냥하는 것은 예사였다.
도시를 둘러싸 잔치를 벌이며 나오는 이를 전부 죽였다. 그리고 나오지 못한 이는 적의 연회를 보며 굶어 죽었다.
그 비통함에 죽은 백성이 망령이 되었다.
그렇게 한 명의 신비주의자가 수만의 망자를 거느리게 되었다. 본래 인간에게 불가능한 영역이었다.
그러나 왕자가 망령의 주인 된 자격이 있었다.
“그리고 해가 여러 번 바뀐 후, 흑마법사 하나가 제국에 전쟁을 선포했다. 이게 내가 아는 역사야. 선전 포고로 이루어진 제대로 된 전쟁이었고, 또한 정당한 복수의 권리로 모든 제국의 백성에게 항복 없는 죽음을 선사했다. 과연 그가 불의했던가?”
시엔이 물었다.
안튼은 다른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도련님께서는, 어찌 그러한 비사를 알고 계시는지요. 혹여 그 스승이란 분께서 전해 들으셨습니까? 그렇다면 그분께서 혹여…….”
“생각을 물었더니 허튼소리를 하는구나. 날 찾아와서는 이젠 내 스승을 찾는군?”
“죄송합니다. 그러나, 제게는 정말로 중요한 문제이기에, 그분께서 실전된 주문들을 가지고 계실지 모릅니다. 지금 심연탑에는…….”
“지금 심연탑의 사정을 내가 봐줄 이유가 있나? 그리고 내 스승이 누구인지 이미 말했고, 이 역사를 그에게 전해 들은 것도 아닌데.”
“그렇다면 어찌 알고 계시는지.”
시엔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내가 직접 겪었으니까.”
“예?”
순간 어둠이 휘몰아쳤다.
안튼은 어느새 그저 새까만 어둠 속에 서 있음을 깨달았다. 검은 것 중에서도 가장 검은 어둠.
그리고 흑마법사에게 익숙한 어둠이었다.
그리고 온전히 서서 저를 내려다보는 청년.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늘 끝에 닿을 거대함이, 감히 두려움에 올려다볼 수 없어 머리를 조아린 채로 알았다.
그 강대한 어둠. 세상을 집어삼킬 정도의 마력.
안튼은 심연탑의 장로였고, 곧 제가 처한 상황을 깨달았다.
동조. 혹은 먹혔다고 표현하는 상태.
한순간에 타인의 정신세계에 휘말리고 말았다.
서로 마음을 열고 저항을 거둔다면야 타인의 심상에 들어가는 일이 어려운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렇게 갑자기, 일방적으로 먹히기 위해서는 대체 어느 정도의 역량 차이가 있어야 할까.
동시에 세상이 뒤바뀌었다.
온통 잿더미로 가득한 세상. 바닥에 눈처럼 깔린 것이 하늘에서 재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 위로 청년 한 명이 디디고 섰다.
그리고 망령. 또 망령. 셀 수 없이 많은 망령들.
지상과 하늘을 메워 피눈물을 흘리며 아우성쳤다.
원수에게 죽음을. 피에는 피로, 죽음에는 죽음을!
청년의 표정은 한없이 음울하고, 이윽고 걷는다.
한 군데 못 박힌 시점에서 청년의 뒷모습이 점차 멀어져갔다.
또다시 세상이 뒤바뀐다.
전쟁이 한창이었다. 산 자와 죽은 자의 전쟁.
도시에는 연기가 차오르고, 그 사이로 송장들이 날뛴다.
아직 산 자가 비명을 지르고, 죽은 이가 듣고 알아 몰려들어 신선한 살점을 탐했다.
하늘에 검게 날아다니는 것은 고삐 풀린 악령들.
그리고 기적처럼 눈앞에 한 여인이 나타났다.
죽은 자와 죽을 자만이 남은 도시, 모성으로 아이를 안은 어미다. 청년을 발견해 무릎을 꿇고 제 피붙이를 들이밀며 눈물을 흘린다.
귀청을 찢는 사위에 어미의 말이 들리지 않으나, 그 입모양은 아이만이라도 살려달라 비는 모양새.
청년은 아무런 표정이 없다.
뒤이어 검이 아이의 목을 날렸다.
또다시 세상이 뒤바뀐다.
뒤바뀌고, 또 뒤바뀌고.
마침내 남은 것이 온통 잿더미만 남은 대지.
보이는 모든 곳이 불타 색을 잃었다.
지평선 저 끝, 소금 더미를 쌓아놓은 양 회색으로 남아버린 산등성이가 보인다…….
“허억.”
안튼이 숨을 들이쉬었다.
“다, 당신께서는…….”
“내가 바로 그다.”
“당신께서 재림하셨군요! 진실로 당신께서…….”
심상 세계. 마법사가 보여준 기억들이었다.
안튼이 그 안에서 수백만의 죽음을 보았다.
혹은 그 이상의.
안튼이 몸을 떨었다.
“인제 와서 호들갑은.”
시엔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한 시대의 괴물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그저 장난기 가득한 귀족가 청년 하나가 남았다.
그 극적인 변화에 안튼이 눈만 끔벅거렸다.
“내가 바로 네 미친 선배님이지. 입이 방정이라고, 유언 한 번 잘못 남겼다가 두 번 살게 된 꼴이라니.”
“예?”
“그런데 입이 방정인 녀석이 하나 더 있네?”
시엔이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이미 뱉은 말은 결코 주워 담을 수 없으니, 매사에 허튼소리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걸 아주 비싼 값을 주고 배웠다.
그러니 후배님에게도 가르침을 베풀어야겠지.
시엔이 자상히 웃으며 말했다.
“대가리 박아.”
* * *
꽤 불편한 광경이었다.
중년과 노년의 사이쯤, 나이를 상당히 먹은 이가 두 발로 땅을 딛고 이마를 땅에 박았다.
두 손이 허리 뒤에 있으니 곧 체중을 다리와 이마로 견디는 꼴이었다.
새파란 젊은이가 다리를 꼬고 앉아 그 꼴을 내려다보는 중이었으니, 누가 보아 눈살을 찌푸릴 광경이었다.
“힘드냐?”
“아닙니다!”
“안 힘들다고? 힘들라고 시킨 건데, 안 힘들면 흠……. 이것도 반항인가?”
“잘 못 말했습니다! 힘듭니다!”
“힘들어? 와. 겨우 이게? 나 때는 말이야. 이렇게 편하게 머리 박는 건 꿈도 못 꿨거든? 일단 기본이 수정구였는데. 수정구 알지? 그걸 땅에 놓고.”
수정구는 이름 그대로 구체다.
땅에 놓아두고 머리를 박으면, 이마가 아픈 것은 둘째치고 중심 잡기부터 난관이었다.
그러니 어쩔 수 있나. 쓰러지고, 또 쓰러지고. 또 쓰러져야지.
그 말에 트리예가 흥미를 보였다.
“어머, 시엔 님도 그런 시절이 있으셨나요?”
“누구나 다 있기 마련이지. 참 고약한 늙은이라. 실력도 별로 없으면서 제자 굴리는 맛에 살았어.”
“소녀는 전혀 상상이 안 되는걸요. 시엔 님이.”
“뭐. 누구나 덜 여문 시절이 있는 거지. 뭐, 사실 늙은이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었는데.”
아직 새파랗게 어린 제자가 수만의 망령을 품고 그 원한을 자나 깨나 들었다. 사람 미치기 딱 좋은 판이라, 나름 강수를 두어 한 짓이었다.
일단 몸이 힘들고 아프면 다른 생각을 할 여력이 있으랴.
수만의 망령이 울부짖어도 일단 내 한 몸 아픈게 우선이겠지, 하고.
실제로도 효과가 있었다.
수정구에 이마를 붙이고 대가리를 박고 있으면, 제국이고 나발이고 이 빌어먹을 늙은이 두고 보자 이를 갈게 되었으니까.
“그런 뜻이 있으셨군요.”
“짜증 나는 건, 그게 늙은이 오지랖일 뿐이어서.”
늙은이는 재능 넘치는 제자가 과거를 잊고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를 바랬다.
성장세로 보면 차기 탑주는 이미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고, 그렇게 존경받는 대마법사가 되어 제자나 기르며 살아가라 했다.
그러나 왕국을 잃어버린 왕자가 사는 이유는 오직 하나뿐이었다. 남은 삶을 바쳐야 할 일이었다.
왕국도 백성도 잃어버린 왕자가 마땅히 가야 할 길이었기에. 그 말고 다른 어떤 선택도 존재하지 않았음을.
감정이 아닌, 권리와 의무, 삶의 방식의 문제.
왕자에게 다른 삶을 살 권리가 없었고, 또한 불의한 침략의 생존자로서 죽어간 이의 원한을 풀어야 하는 의무만이 남았다.
늙은이는 그걸 끝까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꽉 막힌 놈이라고 욕하기만 했을 뿐.
트리예의 표정이 숙연해졌다.
시엔이 씩 웃으며 화제를 바꿨다.
“어쨌든 내가 당해보니 상당히 불합리한 처사다 이거지. 그래서 나는 후배들에게 그러지 말아야지 하고 마음먹기도 했고.”
안튼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마음먹었다며!
“그런데 생각해 보니 어째야겠어. 까마득한 후배님한테 욕을 먹었는데, 그렇다고 연 끊고 살아야 하나? 듣자 하니 심연탑이 단체로 욕하는 모양인데, 그렇다고 그럼 아예 모르는 사이로 지내자고 취급할 수는 없고.”
심연탑에도 빚이 남았다.
결국, 배워 익힌 것이 탑에서 나온 것이기에.
“그러니 뭐 어째. 그냥 심술이나 부리는 거지.”
심술을 당하는 안튼의 입장에서는 속이 터졌다.
심술 두 번 당하면 아주 관짝에 묻힐 기세였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아니, 이 나이에 대가리 박고 있어야 하나 자괴감도 들고.
시엔도 시엔이었지만, 그 옆에 달라붙은 트리예와 세올이 더 얄미웠다. 옆에서 하는 소리라곤.
“장로님? 많이 힘드세요? 땀이라도 닦아드릴까.”
“그래도 안튼 네가 운 좋은 줄 알렴. 실수를 몸으로 때울 수 있다는 게 후배의 특권 아니니?”
트리예야 예전부터 단단히 꼬인 녀석이니 그렇다 치고, 세올에게는 일말의 배신감마저 느꼈다.
누님, 제게 대체 왜 이러세요.
심지어 그게 맞는 말이라서 더 얄미웠다.
실수를 몸으로 때울 수 있다는 건, 그야말로 특권이라 하기에 모자람이 없으니.
그 후로도 안튼의 괴로운 시간이 계속되었다.
한참 후에야, 땀에 전 몸을 씻어내고서 손님용 옷가지로 갈아입은 안튼이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모아 앉았다.
“그래서, 왜 왔어?”
“티란디스의 대공자가 흑마법사일 가능성이 있다 하여 탑에 적을 올리고 후원을 청할 생각이었습니다만……”
“돈 뜯으러 왔다는 소리네. 뭐, 그렇겠지.”
시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었다.
마법사의 연구에는 황금이 필요하다.
마법사의 몸값이 높으니 알아서 벌어다 충당하는 판이지만, 스스로 몸을 숨긴 심연탑이 그럴 수도 없었을 테고.
돈 나올 구석이 있다 싶으니 신나서 달려왔으리라 애초부터 예상한 바였으니까.
“선배님, 이제 와 면목 없는 소리입니다만, 도움이 필요합니다.”
“면목 없는 소리인 걸 알면 하질 말아야지?”
“압니다. 압니다만, 마탑이 통째로 넘어가게 생겼단 말입니다!”
시엔의 표정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 41. 선배 강림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