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 선배 강림 [2] >
안튼의 표정이 활짝 폈다.
뒤이어 무언가 말하려 입을 여는 순간, 쪽방의 문이 발칵 열렸다.
실내의 시선이 쏠리자, 세올이 흠칫 놀라 말했다.
“어머머. 손님이 계셨네요. 실례했습니다아.”
세올이 눈웃음치며 문을 닫았다.
몇 번이나 한 실수였으니 새삼스럽지도 않다.
개인 시녀 주제에 맥락 없이 문을 열고 드나들다 보니 으레, 그러면서도 고쳐지지 않는 것이 참으로 한결같은 녀석이 아닌가.
“어. 저 시녀는…….”
“신경 쓰지 마.”
“아, 예. 도련님께서 흑마법사라 하시니.”
안튼이 다시 무어라 말하는 때였다.
다시 문이 열리며 세올이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이상하다. 어째 낯이 익은 분이신데.”
“안튼 장로님이세요, 선배.”
트리예의 대답에, 세올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안튼? 그 안튼이라고?”
그리곤 뛰쳐나와 안튼의 얼굴을 붙잡고 여기저기 꼼꼼히 들여다보았다.
세올의 몸통이 본래 제 것이 아니라 헤인트라는 방화광의 것이다.
그리고 헤인트가 상당히 미인었으니, 안튼의 얼굴이 금세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어머머, 세상에. 확실히 얼굴이 조금 남아 있기는 한데. 아니, 어쩜 이렇게 얼굴이 상했니? 예전엔 곱상하니 예뻤는데, 아주 아저씨가 되어서는.”
“그, 아가씨…… 손을 좀…….”
“너, 나 모르겠니? 어릴 때 예뻐해 줬잖니.”
“누구신지…….”
보다 못한 트리예가 세올의 옆구리를 찔렀다.
“선배님, 누구라도 못 알아보는 게 당연하지 않겠어요? 예전 모습을 생각하셔야지.”
“아. 맞네. 안튼아. 나 세오르그 오스텐이야. 누나 모르겠어?”
“세오르그…… 누님?”
안튼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곧, 반가운 듯 흑마법사의 눈가가 휘었다.
“그, 연구에 성공하신 겁니까? 항상 강신체 연구로 예쁜 몸을 만드시겠다더니.”
“그건 대충 성공하긴 했는데. 그런데 이 몸하고는 별개야. 그냥 편한 껍데기랄까.”
“껍데기라니요…….”
“그래서, 여기는 왜. 아, 선배님 뵈러 왔구나. 암. 그래야지.”
“아니요, 누님이 여기 계신지도 몰랐습니다만.”
“응? 나는 왜?”
대화가 안 맞는데? 둘이 서로 마주 보았다.
그때 시엔이 끼어들었다.
“세올. 아무리 아는 손님이라도 그러면 안 되지.”
“예? 하지만. 아.”
본래 눈치야 찾아도 없는 세올이었다.
그러나 시엔의 얼굴에 서린 장난기를 보고선, 저 역시 무언가 떠오르는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본래 눈치가 없어도 남 놀리는 데엔 또 별개이기에.
“예, 도련님.”
세올이 한 발짝 물러나 예의를 갖췄다.
시엔이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래서, 장로님이시라고?”
“예. 심연탑이라고, 흑마법사의 마탑이지요.”
안튼 나이에는 심연탑의 일곱 장로 중 하나였다.
페벨룬 왕국 내전에서 결정적 역할을 한 전쟁영웅의 소문이 알음알음 퍼졌다.
개중에 흘려들을 수 없는 내용이 있어 찾아왔다고.
까마득한 대선배와, 금지된 연구를 진행하다 욕먹고 탈주한 흑마법사가 하녀라며 도사리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그러나 한편으로는 납득이 되기도 했다.
흑마법사가 갑자기 세상에 솟지는 않을 터이니, 분명 가르쳐 만든 이가 있지 않았겠나 하고.
“그, 도련님께서는 그럼 세오르그 선배님께 마법을 배우신 겁니까?”
“아니. 흑마법사가 되고 나서 만났는데?”
납득이 빠르게 깨졌다. 안튼이 다시 물었다.
“그러면 어떻게 흑마법에 입문하시게 된 겁니까?”
“배웠지. 실력이 붙고 나선 스스로 깨쳐 익혔고.”
스스로 깨쳐 익혔다.
한 분야의 대가이자 개척자에게 하는 찬사였다.
지식의 지평을 넓혀 없던 법칙을 알았다고 하니, 그 업적이 기록되어 학문 전체의 진보가 되었다.
그러나 보통 스스로 그리 칭하는 일은 드물었다.
그만큼이나 대단히 오만한 말이 아닌가.
“그, 혹시 도련님이 모신 스승께서 존함이 어찌 되시는지…….”
“말해주면 아나? 디엘로스 위드티란 분이신데.”
그렇게 말하면서도 드는 생각이란.
알 리가 없지. 시엔이 쓰게 웃었다.
애초에 별 볼 일 없는 양반이었으니까.
과거 왕자는 당대의 어둠을 타고난 이였다.
토대가 되는 기초만으로도 어둠의 이치를 깨쳤다.
물론 그러한 토대가 스승에게서 나온 것이나, 잘 쳐줘도 이류라고 하기 뭐한 늙은이였으니 역사에 남을 이는 아니었을 터다.
게다가 지금 꼴을 보면 남았더라도, 뭐.
“디엘로스 위드티……. 그,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괜찮아. 모를 것 같았어.”
“아니, 그게 아니라. 스승분께서는 아마 가명을 쓰셨을 겁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시엔이 묻자, 안튼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니까 말이죠, 그 이름은 저희 흑마법사에게 일종의 금기 같은 것입니다. 어떤 흑마법사도 그런 이름을 쓰진 않을 터인데.”
“왜지?”
“어. 내부 사정이라 말씀드리기가……. 대충 과거 아주 끔찍한 인물의 이름이었던지라 그렇습니다.”
“아주 끔찍한 인물이라고?”
“어, 너무 기분 나쁘게 듣지는 마시고, 역사상 최악의 스승으로 꼽히는 이의 이름입니다만.”
“아. 그래?”
시엔이 키득키득 웃음을 터뜨렸다.
늙은이 이름이 남긴 남았던 모양.
강대한 흑마법사 하나 키워낸 것이 아마 업적으로 남았나 보다.
늙은이 실력에 기록될 성취는 어림없었을 테고.
그래도 대충 소원은 이뤘네, 늙은이. 사서에 이름 한 줄 올리는 게 평생의 원이라더니.
좋은 스승은 아니었기에 딱히 감정은 없지마는.
“최악의 스승이라? 왜?”
“스승이 본래 하는 일이 지식과 기술을 전수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지 않습니까? 제자의 인성을 살펴 맑게 하고 또한 그 행동을 올바르게 인도해야 하는 이지요.”
“그런데?”
“디엘로스라는 작자, 아, 도련님의 스승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 그러한 이름을 가진 이를 말하는데, 제자의 성취만을 보고 끔찍한 괴물을 키워내고 말았지요.”
시엔의 미소가 짙어졌다.
“끔찍한 괴물이라. 대체 뭔데?”
“어,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비사이나, 도련님께서도 흑마법의 길을 걷고 계시니 알 자격이 있으시겠지요. 과거, 미친 흑마법사가 대륙을 발칵 뒤집어놓은 것이 있습니다.”
“미친?”
“예. 아주 제대로 돌은 놈이지요.”
“돌았다?”
“흑마법이 본래 어둠과 닿은 학문이라, 도덕 없이 힘을 추구하니 그림자에 잡아먹힌 겁니다.”
“도덕이 없이. 흐음.”
시엔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올과 트리예의 입가가 꿈틀거렸다.
“대륙을 발칵 뒤집었다는 건 뭔데?”
“대륙의 절반을 홀로 불태웠다고 합니다.”
“에이, 사람 혼자 어떻게 대륙의 절반을 태워?”
“극에 이른 흑마법사였기에 가능한 일이었지요.”
“애초에 그런 일이 있었으면 비사가 아니라 사서에 대문짝만하게 박혀 있어야지.”
“너무 두려운 나머지 대륙의 모두가 역사를 지우기로 한 겁니다.”
“그게 말이 돼? 대륙에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그 사람들 모두 입을 막았다고?”
“그 정도로 모두가 공포에 질렸던 것으로도 해석이 될 수 있겠지요.”
“그런가.”
시엔이 턱을 만지작거리며 다시 물었다.
“그래서, 그 흑마법사는 왜 그랬대?”
“모릅니다. 그 본인만이 알고 있겠지요.”
“뭐?”
“그렇잖습니까. 미친 자의 행동을 어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어둠에 심취한 나머지 대륙 모든 산 자를 악령으로 삼고 싶었을 수도 있고…….”
이건 좀 충격적인데.
시엔이 두 시녀를 바라보았다.
“너희도 알고 있었어?”
“필시 대륙을 상대해야 할 타당한 이유가 있었겠지요. 제 개인적으로는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분이랍니다.”
“맞습니다, 선, 아니 도련님. 이 세올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어요. 한 번도 다른 마음을 먹은 적이 없었는데요.”
“그렇단 말이지.”
결국, 둘 역시 그렇게 알고 있었다는 뜻이었다.
재림했다 알자마자 선배님이라 깍듯이 대하기에 과거의 사정을 알고 있다 생각했는데.
이유 없이 대륙의 절반을 불태운 광인을 대선배라 모셨다고? 그게 정상인가?
그러다 드는 생각이 원래 그런 녀석들이었다.
둘 다 생명 알기를 돌멩이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여기는 사악한 이다.
하나는 리치고, 남은 하나는 인체 실험이 특기였다.
시엔이 본래 품으로 들어오는 이를 막지 않으니 그렇다 치고, 얘네 둘은 도대체.
아니지. 누렁이나 나비도 뭐. 사교도. 암살자.
시엔이 머리를 짚었다. 새삼 하인이라는 것들이 하나 정상이 없음을 깨달은 탓이었다.
그러고 나니 불쑥 의문이 들었다.
이만하면 역사를 지운 이상이 아니던가?
흑마법사가 두려워 역사를 지웠다고 하는 것이야 이미 그러한 결과가 지금에 있으니 이해했다.
그러나 몰래 전해져 아는 이들도 있다.
그런데 왜 과거 흑마법사의 동기를 모르지?
시엔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던 스승을 아는 판에.
상당히 악의적으로 편집이 된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왜? 누가?
* * *
사자 수인, 히예브가 거처로 복귀했다.
“히예브, 뭘 우물거리고 있어요?”
“이거? 육포. 인간들이 가지고 있더군.”
“인간? 인간을 만났다고요? 제가 분명 접촉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요.”
“백번 관찰보다 한마디 직접 듣는 게 더 나아.”
“허튼짓하지 말라는 소리잖아요! 그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죠?”
“글쎄. 나림. 어떻게 되었을까?”
사자 수인, 히예브가 미소를 머금었다.
피냄새가 물씬 풍기는 그런 흉흉한 미소였다.
나림이 움찔 놀라 몸을 사렸다.
“……뒤처리는 잘했나요? 괜히 들키면 저들에게 경계심만 키울 거예요.”
히예브의 미소가 더욱더 짙어졌다.
“왜 내가 인간들을 해쳤을 거라 생각하지? 그저 웃기만 했을 뿐인데 말야.”
“아니라는 건가요?”
“이봐, 인간 아가씨. 나는 식인종이 아냐.”
“그럼 그렇다고 처음부터 이야기하면 될걸…….”
히예브가 손에 든 쥐고기 육포를 흔들었다.
사실, 쥐고기 육포는 심지어 군의 보급에도 안 쓰는 싸구려다.
들쥐의 청결함은 둘째 치고, 비린내가 워낙에 심하고 게다가 별 조미도 없이 재워 훈연해 말린 것이라 딱딱하기가 벽돌과 같았다.
그러나 날고기를 뼈 채로 씹는 사자 수인이다.
비린내와 딱딱함이 별거 아니니 오히려 대수림에서 맛볼 수 없는 별미 중 별미, 특별 간식이었다.
“그래서, 그 한마디 직접 들은 결과는요?”
“그쪽, 페베…… 어쩌구 무슨 공사를 한다는데, 불만이 가득해 보이는 것이 보통 노동이 아니라고. 제대로 방비를 하는 모양이야.”
“하필이면 이런 때에 말인가요?”
“아. 대주기가 온다는 걸 알고 있더군.”
“그럼 그 말부터 해줬어야죠!”
나림이 바락 소리를 질렀다.
거참 앙칼지긴.
히예브가 킬킬거리며 생각했다.
“아이, 씨. 어떻게 알았지?”
“내가 알기로 검은 갈기들이 그쪽에 전략적 후퇴를 했지. 수상한 냄새라도 맡은 게 아니겠어? 늑대들이라 그런지 아주 개코거든.”
“전략적 후퇴라구요? 그냥 도망친 거잖아요.”
“인간들이란. 둘은 달라. 도망은 저 자신의 생존만을 위하지만, 전략적 후퇴는 전체의 생존을 위한 거니까.”
“그거나 그거나…….”
“므잉, 좋은 여인이었는데. 아쉽게 되었어.”
“하여간, 머릿속에 그 생각밖엔 없죠?”
“그럼. 내가 왜 이런 질척한 동네까지 왔겠어?”
히예브가 천연덕스레 대답했다. 사자는 밀림에 살지 않는다. 사자 수인 역시 마찬가지였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나림도 꽤 괜찮은 여인 중 하나란 말이지. 그래서 말인데.”
“하! 꿈도 꾸지 말아요.”
“꿈은 꿀 수도 있지, 그게 내 맘대로 되나?”
“아씨, 지금 심란하니까 껄덕대지 말라고요!”
나림이 소리를 빽 질렀다.
히예브가 낄낄거리며 물었다.
“그리 심각한 문제인가? 어차피 그 피비, 어쩌구 하는 나라엔 조금만 풀 거라면서?”
“페벨룬이에요. 애초에 그쪽은 지들끼리 치고받다 이미 개판이 났으니까. 그러니까 조금만 풀어 놔도 되겠다 싶었는데.”
“그냥 그쪽에 안 풀면 되는 거 아닌가?”
“누가 그걸 몰라서 그래요?”
나림이 눈을 흘겼다.
어차피 내전으로 피해가 막심한 곳이다. 방비를 단단히 하고 있다면 굳이 괴물을 보낼 필요까지는 없었다.
문제는 그게 아니라, 페벨룬이 대주기의 정보를 혼자만 알고 있겠냐는 것이었다.
그리고 곧 그 우려가 현실로 다가왔다.
“어여, 인간 여자. 정찰 다녀왔다. 서쪽 인간들이 목책 세운다.”
“그 아래쪽도 마찬가지.”
다른 수인들이 정찰 결과를 알렸다.
서쪽의 두 국가, 왕국과 휘하 공국이 대주기 대비를 하고 있다는 보고였다.
페벨룬처럼 큰 규모로 대공사를 진행하지는 않지만, 일단 방비는 하겠다는 태도였다.
“헬폴두? 그쪽은 그대로야.”
“에이븐에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다.”
그나마 대수림을 둘러싼 네 개 왕국과 한 공국 중 두 왕국이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괴물은 아무리 강력하다 한들 결국 괴물이었다.
미리 알아 방비하고 있으면 피해를 막대한 수준으로 예방할 수 있었다.
피해 인명이건 재산이건 자릿수 하나, 심하면 자릿수 두 개까지 줄어들 정도가 아니던가.
그러니 본래 뿌리려던 괴물을 방비하지 않은 두 왕국에 몰아주던가, 아니면 덜 방비된 서쪽 왕국에 좀 더 힘을 주어 방어를 깰 것인가.
나림이 결정할 수준의 문제는 아니었다.
“의회에 보고해야겠네요. 젠장, 된통 깨지겠네.”
나림이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벅벅 긁었다.
“오. 방금 아주 야성적이었어. 좋아, 가끔 보이는 그런 모습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아가씨는 아나?”
“그딴 매력 필요 없으니까 좀 가라구요! 쫌!”
< 41. 선배 강림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