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 선배 강림 [4] >
[친애하는 성황 예하.
천신께서 기뻐하심이 당신의 삶으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또한 그리하여 세상이 아름답기를.
……
그러한 연유로, 본 왕국에 큰 화가 임박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왕국에 큰 슬픔이 있어 방비할 힘이 모자라니 염치 불고하고 이리 도움을 청합니다.]
성황이 특사의 편지를 읽고 눈을 꿈벅거렸다.
내가 뭘 읽은 거지?
성황이 다시 편지를 읽어내렸다.
귀족답게 치장된 장황한 인사말이 한 장.
그리고 대주기를 앞두고 왕국의 병력이 모자라 좀 도와달라는 내용이 조금이었다. 그리고 그 대가로 대신전을 건립해 천신께 올리겠다는 말과 함께.
“예하, 잘 안 보이십니까? 읽어 드릴까요?”
추기경 하나가 걱정스러운 낯을 하고 나섰다.
벌써 글귀를 읽기 어려울 때가 되셨나? 아무리 성력이 충만한들 노안을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인데.
“아니,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내용이 조금 당황스러워서 그렇습니다. 허어.”
“어떤 내용이기에 그렇습니까?”
“추기경께서도 읽어보십시오.”
편지를 받아든 추기경이 단숨에 내용을 훑었다.
추기경의 표정이 훤히 밝았다.
“페벨룬에서 공식적으로 지원을 요청했군요.”
매우 드문 일이었다.
교단 역사에서도 몇 번 되지 않을 정도로.
그 이유는 간단했다.
굳이 요청할 필요가 없었기에.
역병이건 큰 재난이건 일단 사건이 터지고 나면, 자연스럽게 교단이 나섰다.
도와달라 해서 도우러 오는 일과, 스스로 나서서 도움을 자처하는 상황은 완전히 다르다.
여느 때처럼 교단의 오지랖이라면야 감사의 말과 함께 신전에 기부금이나 내면 그만이었다.
사실, 마땅한 예의일 뿐 안 해도 무방한 일이기도 했고.
물론 세상을 이롭게 하는 일이라 교단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는 했다.
그래도 교단 입장에선 내 식구의 위험을 무릅쓰고 하는 일이 아니던가.
알아서 도와주겠지 하는 반응이 당연히 서운하다.
그런 때에 공식적으로 도움 요청이 날아들었다.
그리고 페벨룬 왕실은 지원에 대한 감사로 대신전을 건립하겠다 뜻을 밝혔다.
자그마치 대신전이었다.
대신전은 그저 규모가 큰 신전이 아니다.
신전과 그 주변의 땅을 통째로 넘겨주겠다는 뜻과 같았다. 대신전은 성국의 영토에 속하기에.
그러나 대신전이야 지어주면 좋고. 아니면 말고.
고위 사제들의 기대는 따로였다.
“이렇게 미리 도움을 달라 하니 얼마나 좋습니까. 무고한 슬픔을 막을 수도 있겠지요.”
“참으로 좋은 기회가 아닙니까. 이참에 천신께서 내리신 위엄을 보여준다면, 다른 왕국들도 적극적으로 도움을 청하지 않겠습니까?”
교단의 도움은 항상 일이 터지고 난 이후였다.
세속과 신전이 별개. 교단이 먼저 나서서 무언가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항상 안타깝게 생각하던 사항이었다.
그러나 이때 전폭적인 지원으로 미리 예방해 해결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다른 왕국에서도 생각을 바꾸리라.
그런 순진한 생각이 큰 군대를 모았다.
성기사단이 넷. 사제단이 셋. 거기에 이천 성전사.
삼천에 달하는 군대였다.
거기에 시성을 앞둔 예비 성인이 성전을 이끈다면 참으로 좋은 그림이 나오리라.
그렇게 교단의 예비 성인, 뷔아 샤인 세러하드가 성전의 총사령관을 맡아 당당히 선두에 나섰다.
교단의 군대는 누구보다 독실한 신도를 겸했다.
총사령관의 머리 위에 후광이 비쳤다. 그런 기분이 들었다는 것이 아니라, 진짜 후광이었다.
“세상에, 천신이시여…….”
“당신의 뜻을 받듭니다.”
감수성 짙은 일부는 흐느끼며 기적을 노래하기도 했다.
그리고 몇몇 신도는 기적을 목도한 황홀함을 참지 못해 까무러쳐 정신을 잃기도 했다.
사소한 해프닝이었다.
어쨌든, 성전군은 연신 그러한 분위기였다.
그야말로 사기가 솟구쳐 하늘을 뚫을 정도.
성기사장 라이뱅은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저 찬양과 기대가 한 사람에게 몰려 있다는 것이.
그리고 그게 아직 어린 여인에 불과했으니.
당장 뷔아의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
라이뱅 경이 뷔아와 말머리를 맞췄다.
“결연한 표정이십니다만, 그렇게 긴장하실 일도 아닐 겁니다. 괴물을 상대하는 데에 있어서, 특히 늑대인간이 주를 이룬다 하지 않았습니까.”
늑대인간 자체는 그리 강한 괴물도 아니었다.
물려 늑대인간 하수인이 되는 그 물량이 성가신 것이나, 신성으로 치료가 가능한 질병이기도 했다.
그리고 교단의 사제단이 나선 이상, 전혀 문제가 될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은제 무구가 약점인 괴물이었다.
은이 통하는 괴물은, 축성으로 축복한 무기 앞엔 더욱 취약한 법이었다. 그리고 성전군의 모든 무기는 이미 축성을 마쳤다.
라이뱅이 하는 조언이었다.
그리 딱딱하게 긴장할 필요 없다. 교단의 특기라 다 잘 될 것이다.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라.
“네? 아. 흠, 흠흠. 그렇겠죠.”
뷔아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떳떳한 반응이 아니었다.
‘벗, 혹은 친구. 그게 최악이란다. 일단 네가 여인임을 그 머릿속에 때려 박아야 해. 그렇게 의식을 하고 나면, 그다음부터는 달리 보이는 거야.’
메이의 조언을 되새기며 전의를 불태우던 뷔아가 움찔 놀라 고개를 돌렸다.
사실, 성전은 별로 걱정하지도 않았다.
요즘 들어 신성이 철철 흘러넘치는 판이었다.
대규모 정화를 펼치기만 해도 괴물 따위야 맥을 못 추고 도망치겠구나, 그렇게 알았다.
근거 없는 자신감이 아니라, 그런 확신이 있었다.
라이뱅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뷔아의 상태가 평상시와 달랐다.
항상 걸치고 다니던, 그야말로 걸치고 다닌다는 표현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던 펑퍼짐한 낡은 성복 차림이 아니다. 거기에 은은하게 퍼지는 것이 생전 안 뿌리던 향수고.
그리고 오늘따라 얼굴이 유난히 뿌연 것이…….
아. 화장을 했구나!
라이뱅이 그제야 눈치챘다.
한 달이 넘게 동행하다 이제야 알아챈 사실이다.
그리고 그 이유야. 라이뱅이 그저 한마디 했다.
“음. 뭐. 힘내십시오.”
“네…….”
뷔아가 얼굴을 푹 숙였다.
어쨌거나, 곧 페벨룬 왕성에 도착이었다.
뷔아로선 꽤 단단히 벼르던 때였다. 예비 성인이 왔으니 명예 성자가 당연히 마중을 나오겠거니.
그리고 마주한 이가 카레네 티란디스.
대공자의 대리인이었다.
“시엔이 볼일이 있어 외국에 나가는 바람에 대신 인사드리게 되었습니다. 이런 때에 국외여행이라니. 제 동생이지만 무슨 생각인지.”
“아…….”
뷔아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 * *
마차 안, 시엔이 편히 누워 물었다.
“그러니까, 광명 수도회라고?”
“예, 선배님.”
“그간 귀신 잡으러 돌아다녔고?”
“맞습니다.”
“뭐. 사기 치고 다닌 건 아니네.”
심연탑과 흑마법사가 스스로 숨어들었다.
어쨌거나 사람이 사는 데에 필요한 것이 재화가 아니던가. 특히나 집단이라면 더욱더.
그래서 한 위장이 수도회란다.
교단은 보기에 해괴한 이단만 아니라면야 천신을 섬기는 무리를 굳이 건드리지 않았다.
흑마법사라고 천신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고, 과거 선후배 중 신실한 신자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귀신 잡아주는, 그러니까 퇴마 의식을 전문으로 하는 이상한 수도회 집단으로 위장했다 하니 제법 머리를 잘 썼구나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꽤 영험하다 소문이 자자하다고.
뭐, 실제로 귀신 잡는 녀석들이니 당연하겠지만.
“그런 식으로 그 긴 시간을 견뎠다고?”
“갈 곳 없는 아이들을 데려왔습니다. 보통은 간단한 퇴마 의식, 그러니까 망령술 입문 정도만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개중 소속감이 뛰어난 녀석들에게만 진짜 정체를 밝히고 흑마법을 가르쳤다. 이런 녀석들이 모여 본탑 파벌을 이루었다.
안튼 역시 그러한 쪽에 속했고.
다만, 자질보단 사람을 보고 전수하다 보니 고위 마법사에 이르는 이가 극히 드물었다.
“그리고 어디선가 흑마법을 배워 찾아오는 이들이 있습니다. 흑마법 서적이기도 하고, 마탑과는 다른 비맥으로 전해져 흘러들어오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흘러들어온 이의 숫자는 적으나, 실력이 워낙에 뛰어나야지. 그런 이들이 또 제자를 들여 무리를 이루니 바로 외탑 파벌이었다.
외탑 파벌은 사람보단 자질을 보았다.
마탑에서 나오는 사고들의 대부분이 외탑 파벌에 속한 녀석들에게서 나온다고. 안튼의 주장이었다.
마탑의 일 년 재정을 몽땅 들고 날랐던 트리예가 그 외탑 출신이었다고.
“일 년 재정을 들고 날랐다고?”
“동문이라는 작자들이 소녀의 연구를 몽땅 불태웠답니다. 그러니 그 정도로 끝낸 것을 감사히 여겨야지요.”
트리예가 당당하게 말했다.
시엔이 트리예의 특기 분야를 알았다.
키메라 제조. 특히나 인체 실험을 동반한.
“그건 트리예가 잘못한 게 맞아. 나 때 같았으면 연구가 아니라 다른 게 불타도 할 말 없었는데.”
죽음을 다루는 특성상, 흑마법사의 연구 윤리는 다른 마탑보다 훨씬 엄격한 편이었다.
그런데도, 사악한 흑마법사가 끊이지 않았다.
한 마탑 전체의 위신이 달린 문제라, 아예 마탑에 전문적으로 주살하는 추적팀을 둘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인체의 가능성은 너무나 커다란 것이라, 탐구하여 밝히는 일 역시 소임이 아니겠어요?”
“그런 연구일수록 바른 방법으로 행해야지. 인체 실험은 원래 용서 불가능한 극악한 범죄자를 양도받아 다 같이 공동과제로 하는 일이었는데.”
심연탑이 서 있던 시절에는, 각국의 흉악범들이 교단의 인가를 받아 실험 재료로 도착하곤 했다.
어차피 죽어 사라지는 것이 세상에 이로운 놈들, 그 몸뚱이로 세상의 신비를 밝히는 데 써 주는 일이었다.
오히려 감사를 받아야 할 일이 아닌가.
대충 열에 하나 정도는 억울한 이라 풀어주기도 했고. 흑마법사 앞에 가짜 죄인은 없는 법이라.
억울한 이의 마지막 심판대. 무고한 이가 자원해 심연탑으로 보내 달라 하는 탓이었다.
안튼이 감탄했다. 꿈같은 이야기였다.
“과거 심연탑의 위상이 그 정도였습니까.”
“다른 마법사들이 전부 사라져도 세상은 문제가 없겠지만, 그림자가 사라져버리면 분명히 그렇지 않을 테니까. 그런데 뭐. 그렇지도 않았네, 뭐.”
시엔이 쓰게 웃었다.
시엔으로 살고 보니 흑마법사 없이도 세상은 잘 돌아간 모양이었다. 내심 품고 있던 자부심 하나를 내려놓아야 했으니 표현은 안 했지마는 속이 쓰린 것이야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않나.
지금에 와서 사서를 보면 마경으로 추정되는 난리가 제법 눈에 띄기는 했지만, 결국 수습되기는 한 모양이니까.
“잡담은 됐고. 그래서 전대 탑주라는 놈이 빚을 남겨뒀다고? 그것도 금화 오십만 개를?”
외탑 출신이던 전대 탑주가 오 년 전 홀연히 자취를 감췄다. 그리고 올해 가을, 전대 탑주가 마탑을 담보로 돈을 빌렸다면서 독촉이 들이닥쳤다고.
“탑주의 인장이 찍힌 계약서였습니다. 사라졌던 밤빛 천체 역시 그들이 가지고 있더군요. 전 탑주가 마탑과 함께 담보로 맡긴 물건이라면서.”
밤빛 천체.
새까만 밤에 별가루를 뿌린 듯 아름다운 모양을 한 흑요석이었다.
심연탑의 탑주가 가지는 징표이기도 했다.
“순 사기꾼 아냐? 오십만 개? 고작 밤빛 천체에 마탑을 맡아두고 오십만 개를 빌려주었다고?”
애초에 흑요석이 보석 중 값이 싸다.
게다가 좋은 흑요석은 그윽한 검은 광채를 뽐내야 하는 법이다. 흰 점박이가 박힌 것은 개중에서도 등급을 더 낮게 치는 판이었다.
심연탑 탑주의 상징이라 귀히 여기는 보석이었고, 자체로 큰 가치는 없는 물건이었다.
마탑도 무어. 과거라면 모를까.
상인이 보기에 광명 수도회, 그런 이름의 해괴한 집단이 가진 조금 특이한 건축물이 얼마나 비싼 것이겠는가.
분명 땅값 이상의 가치가 있지는 않을 터였다.
상인이라면 분명 이문에 밝은 치들이다.
건물 하나, 싸구려 보석 하나에 금화 오십만 개를 빌려주는 놈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결론은 간단했다. 애초에 금화가 목적이 아니라, 담보로 잡힌 물건들을 취하고자 할 뿐이었다.
“고작이라니요……”
“나 같으면 오만 개 이상은 안 빌려줘.”
“마탑과 탑주의 상징이 겨우 일만 개라니요.”
“그나마 마탑이 사만 구천 개야. 밤빛 천체는 잘 쳐 줘도 금화 천 장은 못 돼.”
안튼이 울상을 지었다.
시엔이 고개를 저었다.
“어쨌든 딱 듣기에도 사기꾼 냄새가 진동하잖아. 페이발란트 상회라. 들어본 적도 없고.”
금화 오십만 개를 동원할 수 있는 상단인데 어째 들어본 적이 없을까. 애초에 빌려주긴 했나?
모종의 수단으로 인장과 보석을 얻었다면, 계약서 만들기야 하루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일 텐데.
“그 전대 탑주란 놈의 망령은 못 봤고?”
“그랬으면 진작 알았겠지요.”
“전대 탑주가 죽진 않은 모양이고. 그럼 훔쳤나? 그것도 말이 안 되는데. 그거 주인이 추적 가능한 물건이기도 하고. 전 탑주라는 놈이 제 물건 도둑맞고도 그냥 포기하는 놈이 아니라면야.”
“어, 선배님. 이 세올이 보기에 카라딧이 도둑질을 당했다면, 당장 쫓아 뒤집어놓았을 텐데요.”
카라딧 데스파. 전대 탑주의 이름이라고.
“그럼 둘 중 하나네. 전 탑주 놈이 진짜로 돈을 빌렸거나, 아니면 어떤 수법으로 제압 혹은 약점을 잡혀 나서질 못하거나. 뭐. 상관은 없겠지만.”
“상관이 없다 하시면…….”
“결국, 돈만 있으면 된다는 거 아닌가?”
시엔의 결론에, 안튼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선배님! 감사합니다! 금화 오십만 장이면, 저희는 죽었다 깨어나도 꿈도 못 꿀 금액이었습니다…….”
오죽 감격했는지, 그 가느다란 눈가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힐 지경이었다.
시엔이 코웃음을 쳤다.
“금화 오십만 개? 누구네 영지 거덜 낼 일 있나.”
“예? 하지만 돈만 있으면 된다고 하셨는데요.”
“그야 돈 있으면 다 되지. 오십만? 새로 마탑을 올려도 스무 채는 세우겠다. 건물이고 뭐고 그냥 줘 버려. 이참에 새로 짓지, 뭐.”
간단한 문제였다.
처음부터 마탑을 옮겨올 계획이었으니, 뭐.
애당초 심연탑의 진정한 가치가 신물이나 건물이 아니었으니까.
< 41. 선배 강림 [4]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