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후작가의 망령재림-206화 (202/268)

< 41. 선배 강림 [1] >

세상 곳곳에는 법칙이 어긋난 장소가 있었다.

예를 들면 편도정원이라던가.

크고 작은 강산 호수가 넓게 깔린 아름다운 땅.

그러나 아침부터 해가 뜬 시간 동안 산성 안개가 낀다. 숨을 쉬면 폐가 녹는다.

어떤 강자라도 장기에 직접 강산을 끼얹으면 버틸 수가 없는 노릇이 아닌가.

이렇게 아예 탐사가 불가능한 지점이 있는 반면에, 그에 비하면 좀 더 온건한 장소도 있었다.

대수림이 그랬다.

사시사철 뜨겁고 축축한 땅.

대륙의 가뭄을 비웃듯이 연신 비가 내리고 그치기를 반복하는 기이한 밀림지대. 괴물을 품어 주기적으로 뿜기도 했다.

그래도 여러 차례 탐사를 통해 많이 알려지기도 했으며, 심지어 그 안에 여러 지성체 소수 종족이 살아가기도 하는 땅이었다.

페벨룬 왕국과 대수림의 경계선.

주기적으로 괴물이 몰려들다 보니 성벽이 있기는 했다.

그러나 그 상태가 영 엉망이었다.

백 년이라는 주기는 인간에게 너무나 길다. 약 사십 년 전의 난리는 벌써 오래전 일이었다.

대주기 당시의 방어자들은 이미 늙었고, 서른 넘어 자리를 잡은 이들은 대주기를 몰랐다.

거기에 육십 년 정도 남았다고까지 했으니.

안 그래도 타 왕국과 접하지 않은 국경이었다.

땅의 영주조차 그리 신경 쓰지 않는 판이었으니.

대주기가 온다고 하여 병력이 집결하니 성벽에는 군데군데 이가 나가고, 사람이 빼낸 벽돌의 흔적이 역력했다.

다들 그러한 사정을 알아 모른 척을 했지만, 땅의 주인에겐 민망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알리세 백작은 한껏 바쁜 척을 했다.

다른 말로는, 공사 현장에서 괜히 이래저래 참견하며 기웃거린다는 뜻이었다.

“아이고, 나리께서 눈을 부릅뜨고 계시는구먼.”

“숨도 못 돌리겠어.”

동원된 인부며 군대만 울상이었다.

대수림의 가장자리, 방치되어 반쯤 숲이 된 경계지대를 밀어버리는 작업이 한창이다.

키만큼 자란 갈대며 덤불을 치워 불모지로 만드는 공사. 대주기에 적 식별과 요격을 위해서였다.

일명 불모지 공사.

거기에 성벽의 보강이 동시에 이루어졌다.

이후 장애물까지 설치할 계획으로.

백작이 직접 나와 지휘하고, 필요한 자재와 재화를 왕실에서 대는 공사였다.

왕국의 정예 공병들 역시 대충 한자리에 모였고.

그러한 와중이니 공사의 진척은 빠른 편이었다.

그리고 그 공사를 지켜보는 이가 한 명.

“페벨룬 왕국인가…….”

대수림의 안쪽은 사시사철 어둡다.

모든 나무가 탐욕스럽게 태양을 탐하니, 높은 위 나뭇잎이 천장을 이뤄 가려놓기 때문이었다.

그 안에서 파란 눈만 요사하게 빛났다.

그리고 인부 둘이 정글의 초입에 발을 들였다.

“무슨 공사가 이리 힘든가 몰라.”

“겨울 벌이나 하려고 왔더니 몸이 상하게 생겼어.”

“그러게. 밥이고 뭐고 원, 힘들어서.”

그리고는 바닥에 곧장 드러누웠다.

땡땡이였다.

일이 힘들어 눈을 피해 들어온 모양.

부스럭.

푸른 눈의 주인이 그늘진 곳에서 스륵 솟아 나왔다.

“이봐. 인간들.”

“워매, 깜짝이야!”

“누, 누구냐!”

인부들이 기겁하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세로로 찢어진 동공과, 유난히 빳빳하고 빽빽하게 자라난 모질. 거기에 구레나룻부터 코 밑의 모든 얼굴에 기른 풍성한 수염.

세모난 짐승 귀는 커다랗고 끝이 살짝 접혔다.

“놀라지는 말고.”

“사자 수인인가?”

“그래. 인간들아.”

인부들이 한숨 돌렸다.

국경 부근 마을에선, 밀림에 들어가 약초 따위를 캐는 일도 흔했다.

위험하다곤 해도 대수림 경계 부근은 그 정도도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대수림에서만 나는 약초며 열매가 제법 값이 나가다 보니 목숨을 걸고 몰래 드나들었다.

그러다 보면, 말이 통하는 수인이야 그리 위험하지 않다는 사실 정도야 으레 알고 있었다.

“사람 놀라게 갑자기 나타나고 그러나.”

“내가 할 소리지. 바깥이 너무 시끄러워서. 무슨 일이지? 인간들이 잔뜩 몰려온 것 같은데.”

“아, 불모지 공사 중이라네.”

“불모지 공사?”

“곧 대주기가 온다 하니, 대수림 경계에 불모지를 만드는 거지. 그래야 괴물이 쳐들어올 때 바로 알 것 아닌가?”

“흠. 거, 이름만 들어도 힘들어 보이는구만.”

“어으, 말도 말게. 아주 난리야, 난리.”

인부가 몸서리를 쳤다.

사자 수인이 다시 물었다.

“그나저나, 대주기라고? 지난 대주기가 겨우 내 성인식 직후였는데. 그게 참말인가, 인간?”

“대주기에 성인식……? 생각보다 나이를 잡수셨군그래. 우리야 모르지만, 나라님들이 그렇다고 하시니 그런갑다 하지. 그쪽은 여기 사시잖아? 그럼 그쪽이 더 잘 아는 거 아누?”

“나는.”

사자 수인이 인상을 찌푸렸다.

속으로 복잡한 생각이 오갔다.

대주기가 들켰다고? 어떻게? 인간이 어떻게 그걸 미리 알았지? 인간들의 입을 막아야 하나?

그러나 밖으로 나온 대답은 여상했다.

“잘 모르겠군.”

인부들이 툴툴거렸다.

“우리도 그래. 뭐 우리가 알고 움직이나?”

“그냥 나리님들 시키니 하는 거지.”

그러다 문득, 사자 수인의 눈매가 사나워졌다.

“그런데 인간들. 너희에게서 아주 맛있는 냄새가 난달 말이지. 나는 아주 배가 고프고.”

사자 수인이 이를 드러냈다.

삐뚤빼뚤 날카롭기 그지없는 이빨들이었다.

그야말로 맹수의 모습이었다.

* * *

“이보게, 수석 마법사.”

“예, 전하.”

왕실의 수석 마법사가 고개를 숙였다.

헬른포드의 왕태자, 앙흠이 수석 마법사의 깨끗한 정수리를 보며 생각했다.

나도 요즘 머리가 많이 빠지던데. 아버님께서도 그러하셨는데, 설마.

새삼 치미는 위기감을 삼키며, 앙흠이 물었다.

“대주기가 온다고 하니 창공탑에 자문을 구할까 하네만은. 거, 왜. 천기를 읽는다고 하잖는가? 수석 마법사도 천문관인데, 혹시 못 하는가?”

“일신의 능력의 문제가 아닙니다. 창공탑의 천문 시설이 필요한 일이라, 소신으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이옵니다만.”

수석 마법사가 말을 이었다.

“소신의 의견으로는 그리 추천드리지 않사옵니다. 별로 정확하지도 않은 것이라.”

“안 정확하다고?”

“애초에 한낱 인간이 어찌 미래를 점치겠습니까? 천기를 읽는다 함은 하늘과 운명을 이어 아주 오랜 시간을 쌓은 자료로 판단을 내려보는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네.”

수석 마법사가 빙긋 웃었다.

“쉽게 말씀드려서, 대강 모호한 정보 따위나 팔며 바가지를 씌우는 놈들입니다.”

“대강 모호한 정보라고?”

수석 마법사가 설명했다.

천문관이 천기를 읽는다는 것은 미래를 내다보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미래의 사실을 알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한 대상의 길흉화복을 점치는 정도가 고작.

“그러니까, 그냥 운이 좋다 나쁘다 이것만 알 수 있다고?”

“물론, 그것도 미래의 일이니 그만큼만 미리 아는 것이 참으로 대단한 일입니다. 하나, 그 비용이.”

아무리 그렇더라도 미래를 들여다보는 일이었다.

고위 천문관 열이 모여 천문 시설을 통해 하루는 꼬박 마력을 부어 하늘을 살펴야 겨우 알았다.

“대주기가 오느냐 문의하더라도 창공탑에선 점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럼, 대수림에 탐사대라도 보내야 하나?”

“창공탑에 문의하시는 방법도 있습니다만.”

“추천하진 않는다며?”

“탐사대가 간들 명확한 증거를 채집한다는 보장이 없지 않사옵니까. 대수림에 괴물이 얼마나 많은지, 탐사대가 가서 본다 하여 그것이 평소보다 많은지 적은지 모르지 않사옵니까?”

“아. 역시 수석 마법사다. 훌륭해.”

대수림의 원래 상태를 모르니, 간다 해서 그것이 이상 징조인지 아닌지 해석이 안 된다고.

“천기를 읽는 데에는 법칙이 있사옵니다.”

하나. 대상이 개인이 아닐 것.

천기는 읽는 데에는 개인보다 집단이 쉽고 정확했다.

게다가 개인의 길흉화복을 읽는다 해서 그걸 피할 수는 없었기에.

수석 마법사가 불행하다 하면 아무리 피하려고 해도 그뿐이었다.

그러나 왕실 마법사단이 불행하다 점괘가 나오면, 수석 마법사는 혼자 마법사단을 나와 슬쩍 피할 수 있는 식이었다.

둘. 대상이 명확한 시간이 아닐 것.

애초에 인간의 능력으로 일자를 딱 잡아 점괘를 낼 수가 없다.

보통은 앞으로 일 년 안에, 혹은 그 이상의 기간을 잡아야 결과가 나왔다.

“그러니 왕국 남부의 군인을 대상으로, 앞으로 일 년 안에 큰 화를 입겠느냐 물으시지요. 만약 그렇다 대답이 나온다면, 대주기가 올 가능성이 상당히 큰 것이옵니다만.”

“흠. 우리는 가을에 전쟁을 치를 텐데? 그게 점괘에 나오는 거 아냐?”

“영민하십니다. 전하. 그렇다면 점괘는 무조건 흉을 점치겠지요.”

“칭찬 말고. 그럼 방법이 없나?”

어차피 가을에 전쟁을 치르겠다 결심을 했다.

그러니 대주기가 일어나건 말건 어쨌거나 흉흉한 결과가 나올 수밖에는.

“대수림 주변에 왕국이 다섯이옵니다, 전하. 개중 전쟁과 연이 없는 왕국을 대상으로 점을 치시지요.”

“하지만, 그것도 수상하잖아. 천문관이 생각해 봐. 점을 쳐 달래놓고는 남의 왕국이 잘 되냐고 물어본다고?”

“역시 영민하십니다!”

“아니, 칭찬을 달라는 게 아니라.”

앙흠이 인상을 찌푸렸다.

전쟁과 연이 없으면서도, 창공탑에 문의했을 때에 별로 수상하지 않은 한 개의 집단을 찾아야 했다.

그런 게 있나?

앙흠이 제법 오랫동안 머리를 굴렸다.

그리고 찾았다.

“아. 성기사단. 교단의 지원군이 있었군.”

“오오! 영민하시기가 밤하늘의 달과 별과 같습니다. 전하께서 이러하시니 왕국의 큰 홍복이옵니다.”

“이번 건 찬사를 받을 만하지.”

페벨룬이 교단의 지원군을 청했다.

봄의 전후로 주둔하다 가을에는 돌아갈 이들이다.

대주기가 온다면 맞서 싸울 것이고, 안 오면 그냥 주둔만 하다 돌아갈 이들이었다.

그렇게 돌아가고 나면, 곧장 페벨룬과 전쟁이고.

“일 년 안에, 대주기를 막으러 온 교단의 지원군을 대상으로 큰일이 있을지 없을지 문의하게나.”

거기에 교단의 안위를 위한 것이라 말하면 수상할 것도 없었다.

창공탑이 왜 당신네가 교단을 걱정하느냐 말하면야 대답도 편하지 않은가.

신도가 교단을 걱정하는 게 무어 이상하냐고.

아마 천문관들도 그 대답을 듣고 나면 헬른포드 왕국이 교단을 견제하는구나 대충 바꿔 알아들을 것이 뻔했다.

그러니 본래 의도를 감추기에도 좋았다.

그렇게 대지급으로 창공탑에 수석 마법사를 직접 보낸 것이 한 달 전이었다.

그리고 지금, 돌아온 수석 마법사가 전했다.

“별일 없다고 하옵니다! 앞으로 일 년. 대수림에 파견된 교단의 지원군의 점괘가 그러합니다.”

“대주기가 온다는 게 거짓이라는 뜻이지?”

“그렇지 않겠사옵니까? 그렇지 않다면, 대주기가 일어나도 교단의 지원군이 별일 치르지 않는다는 뜻이 될 것이온데.”

“크큭, 딱 걸렸어.”

앙흠이 사악한 웃음소리를 냈다.

대주기는 없다.

페벨룬이 시간을 벌기 위한 수작을 벌였다.

“에이븐에 비밀 특사를 보내. 대주기는 페벨룬의 수작이니 따로 준비할 필요 없고, 가을의 총공세에 집중하면 된다고.”

에이븐. 페벨룬의 남쪽, 대수림의 동쪽에 위치한 왕국이었다.

페벨룬 주변 국가가 동시에 침략하는 형태로 비밀 동맹을 맺은 상태였기에.

* * *

“도련님, 손님이 찾아오셨습니다.”

“손님?”

시엔이 되물었다.

손님이란 표현은, 딱히 약속도 없었고 아는 이도 아니라는 뜻이었다.

미리 약속을 잡았거나 아는 이라면, 누구누구가 찾아오셨다고 말할 테니까.

대개 이렇게 무턱대고 찾아오는 이는 소득 없이 되돌아가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시엔은 아무 손님이나 잘 받는 편이었다.

애초에 누군가에게 속지 않을 자신도 있거니와, 본인의 무력이 있으니 해를 입지 않는다는 확신도 있었으니까.

“뭐, 들어오라 해.”

“알겠습니다.”

누렁이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잠시 후, 집무실에 손님이 들었다.

실눈을 한 사내였다.

일단 상당히 남루한 차림새였다.

본래는 검었을 로브는 색이 바래 쥐색에 가깝고, 그나마도 여기저기 기운 자국이 역력했다.

그런가 하면 호화로운 집무실에 입을 벌리고 주변을 둘러보지 않는가.

첫인상으로는 딱 사기꾼인데.

그러나 시엔이 싱글생글 웃으며 손님을 보았다.

나름 숨긴다고 숨긴 모양이었으나, 부정한 기운을 완전히 차단하지는 못했다.

시엔쯤 되는 경지에서 가장 익숙한 기운을 못 알아볼 리도 없다.

실눈 사내는 흑마법사였다.

그리고 그 순간, 사내의 가는 눈이 번쩍 뜨였다.

동시에 손가락을 뻗어 삿대질까지 하며.

“너, 너, 트리예! 너, 여기서 뭐 하고 있어?”

“아아. 이런. 안튼 장로님 아니신가요? 오랜만에 뵈어요. 정말 하나도 안 변하셨어요.”

차를 내오던 트리예가 웃으며 대꾸했다.

실눈 흑마법사, 안튼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지금 인사가 나오나!”

“그럼, 인사를 드리지 다른 걸 드리나요? 참으로 오랜만에 뵙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상하셔라. 그런 점 역시 변하지 않으셨어요.”

“너, 너……!”

트리예는 기본적으로, 예의 바른 척 사람의 복장을 뒤집는 특기가 있었다. 타고 난 본성이다.

안튼이 입을 뻐끔거렸다.

듣기로 트리예가 금지된 연구를 하다 심연탑에서 쫓겨났다고 했던가, 스스로 탈주했다고 했던가?

사실 둘이 거의 같은 뜻이기는 했지만.

시엔이 웃으며 끼어들었다.

“내 시녀와 구면인가?”

“아,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괜찮아. 의외의 장소에서 아는 이를 만나면 그럴 수도 있지.”

시엔이 편하게 말했다.

대개 나이가 많은 이에게는 말을 높이는 편이다.

그러나 상대는 흑마법사.

까마득히 아래에 위치한 후배가 아니던가.

“시녀…… 말입니까? 저, 트리예 녀석이……?”

“보면 몰라. 복장부터가 그렇잖아.”

시녀복을 곱게 차려입은 상태가 아닌가.

안튼이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탑의 재정을 몽땅 털어 도망쳐놓곤, 하는 일이 고작 시녀라니…….”

시엔의 귀가 그 중얼거림을 놓치지 않았다.

트리예를 바라보자, 민망한 듯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무슨 일이지?”

“아. 도련님. 제가 소문을 들은 바가 있어서, 도련님께서 기존에 없던 마법을 쓰신다 들었기에…….”

“기존에 없던 마법? 그럴 리가. 내가 쓰는 마법은 아주 오랜 역사를 가진 중요한 학문의 갈래야.”

“제가 예절에 어두워서 이런 말씀 드려도 되는지 모르겠습니다만, 혹여 마법을 좀 보여주실 수 있으신지…….”

“안 될 것도 없지.”

시엔이 흔쾌히 마법을 사용했다.

시엔의 뒤편으로 사람의 해골이 모습을 드러냈다.

“강신체!”

흑마법사의 강신체. 흑마법사의 입문 마법이었다.

“역시, 도련님께서는.”

“맞아. 흑마법사야.”

시엔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 41. 선배 강림 [1] > 끝

0